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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04화 (104/420)

< <104화> 첫 번째 의뢰 >

자신을 시종이라고 소개한 남자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고급스러운 응접실이었다.

고급 가구나 장식품에 대해 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색상이나 배치, 세밀한 세공만 봐도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엄청난 돈이 들어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물론 아인델프도 약간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어 주눅이 들어있는데, 안내를 마친 남자가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가씨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우리가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남자는 문 밖으로 사라졌고, 잠시 후에는 시녀로 보이는 아가씨 두 명이 화려한 유리 찻잔에 담긴 차를 놓고 사라졌다.

“여기도 차가 나오네? 귀족들에게 차가 유행인가?”

“이것이 차입니까? 이야기만 들었습니다만, 향이 좋네요.”

“엥? 일등항해사도 못마셔봤어?”

아인델프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변명하듯이 빠르게 대답했다.

“아, 저는 평민 출신입니다. 물론 라흐베냐 자작님께 후원을 받아 사관학교를 나오기는 했지만, 이런 비싼 음료를 마셔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포기했다고? 쉽게 포기할 수 있는 돈이 아니었을 텐데?”

“으음, 그 돈을 가져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더군요. 아시다시피 배를 계속 탄다고 하면 큰돈은 그냥 관리하기 귀찮은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오···. 널 고용한 사람으로서 매우 올바른 사상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렇게 살면 호구가 되는 거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야.”

많은 돈은 불편하다, 불행을 가져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꼭 물어보기 바란다.

당신은 돈이 많아 본 적이 있냐고, 돈이 너무 많아서 인생에서 돈이 의미가 없는 살아본 적이 있느냐고 말이다.

그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은 감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그런 식으로 말해봐야, ‘여우와 신포도’에 나오는 여우밖에 안 되는 거다.

“선장님은 돈이 좋으십니까?”

“당연하지. 내가 뭐 한다고 여기까지 아득바득 기어 올라왔는데?”

“돈을 버시려고요?”

“어. 돈 많이 벌어서 으리으리한 별장을 짓고, 여우 같은 마누라랑 토끼 같은 자식들을 끼고 평생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내 소원이거든.”

“그럼 배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배? 배는 선주님이 결정할 일이지.”

“아니요, 선장님은 배를 안 타셔도 행복하실 것 같아요?”

“이봐, 일등항해사. 말은 똑바로 해야지. 배를 안 타도 행복한 게 아니고, 배를 안 타야 행복한 거야.”

우리가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우리가 들어온 반대편의 문이 활짝 열리며 예의 그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알렸다.

“엘리안 아가씨께서 오고 계십니다.”

말을 마친 시종이 한쪽으로 비켜서서 고개를 숙이자, 일전에 봤을 때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갖춰 입은 왕녀님이 입장하셨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뒤에는 갑옷 차림의 알렌 경이 따라붙었다.

나와 아인델프가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잠시 기다리고 있자, 우리 앞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게, 그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는 없으니.”

“감사합니다, 아가씨.”

“불편하게 서 있지 말고 일단 앉지. 알렌 경도 앉으세요.”

“제 자리는 여기입니다. 아가씨.”

“네···.”

우리가 앉으려다 말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자, 그녀는 살짝 손짓해서 앉으라고 재차 권했다.

그리고 우리가 자리에 앉아 어색하게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드디어 그녀의 말이 들려왔다.

“갑자기 오라고 해서 미안하네, 내가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아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아가씨. 일전에 신경 써주신 덕분에 상업 허가도 받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래, 잘 되었다니 다행이군. 오늘 그대를 부른 이유는···.”

잠시 말을 끊은 엘리안 왕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약간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그대라면 내 상황을 잘 알고 있겠지. 그리고 본국의 상황도 말이야.”

그녀의 상황이야 뭐, 그냥 외할아버지에게 얹혀사는 상태일 거다.

그리고 본국이라면 아마 프레티아 왕국을 말하는 모양인데, 나도 4왕자의 반란 소식은 들었다.

요즘 최고의 핫이슈라서 술집에 10분만 앉아있어도 의도치 않게 다 알게 된다.

대충 소문을 들어보면, 몰로스 제국이 4왕자를 후원해서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2왕자를 축출하려고 시도하는 모양인데,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무리 선왕의 시해 의혹으로 귀족들의 지지를 많이 잃었다고 하지만, 일단 2왕자가 온전히 왕좌를 차지하기도 했고 일레드 왕국이라는 든든한 뒷배도 있으니 말이다.

4왕자인 데이먼의 나이가 이제 고작 13살이라던가?

아무리 몰로스 제국이 적극 지원한다고 해도 한 세력의 수장을 맡기는 어려운 나이다.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술집에서 떠도는 소문이나 주워들은 정도지요.”

“그렇겠지···.”

“그런데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으음···. 알렌 경?”

그녀의 부름에 뒤쪽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알렌 경이 품에서 주머니 두 개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렸다.

알렌 경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엘리안 왕녀는 작은 주머니를 내 쪽으로 살짝 밀면서 말했다.

“이쪽은 목걸이를 돌려준 것에 대한 소소한 보답이다. 크지는 않지만 내 성의라고 생각해다오. 그리고 이쪽은···.”

더 큰 주머니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왕녀가 겨우 말을 이었다.

“의뢰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직접 움직이기가 쉽지 않아. 그래서 나를 대신해 본국의 상황을 정확히 알아봐 줬으면 한다. 어느 한쪽의 입장이 아닌, 객관적인 사실 말이다.”

나는 잠시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녀가 어떤 정보를 안다고 해도 그녀의 인생에 뭔가 변화를 주기는 어려울 거다.

어차피 그녀의 미래는 남자들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맞춰 누군가와 결혼하는 것이 확실하니까.

그런데도 굳이 돈을 써가면서 알고자 하는 정보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복동생인 4왕자의 상황? 아니면 프레티아 왕국 내전의 탈을 쓴 일레드 왕국과 몰로스 제국의 대리전 결과?

정보라는 것은 원하는 사람의 의도와 일치해야 의미가 있는 법인데, 주어진 단서가 너무 부족했다.

“아가씨, 저는 정보원도 아니고 첩보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닌 일개 뱃사람에 불과합니다. 얻을 수 있는 정보라고 해봐야 술집의 뜬소문이 전부라서 이 의뢰는 제 능력 밖의 이야기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알렌 경이 묵직한 저음으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4왕자님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보호할 테니 귀국하라는 요청이었지. 왕녀님께서는 4왕자가 귀국을 요청한 이유를 알고 싶으신 것이다. 후작 각하께서··· 아니다. 그대가 일개 선원답지 않게 머리가 비상하고 눈치가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여.”

“그만, 알렌 경. 그냥 제가 말할게요.”

“죄송합니다, 왕녀··· 아니, 아가씨.”

고개를 꾸벅 숙인 알렌이 어느새 한걸음 나왔던 자리에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자, 한숨을 내쉰 왕녀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어차피 내 운명은 크게 바뀌지 않겠지. 그래도 최소한 내가 결혼할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어차피 이곳에서는··· 후우,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부끄럽지만 내게는 이런 일을 부탁할 사람조차 없지. 그저 데이먼의 상황이 어떤지, 그에게 가장 강력한 힘이 되어주고 있거나, 되어줄 수 있는 귀족이 누구인지 알아봐다오. 해줄 수 있겠는가?”

벨로키나 왕국은 한때 쿠샤 왕국을 상대로 일레드와 연합전선을 펼쳤던 나라이다.

비록 지금은 데면데면한 것을 넘어 해상 패권을 두고 약간의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이지만, 일단 공식적으로는 우호 관계다.

그러니까 일레드 왕국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 프레티아 왕국의 항구에 입항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제국의 위치로 볼 때 아마 프레티아 내전의 주전장은 내륙인 남쪽일 테니, 항구를 봉쇄하는 일은 없을 거다.

게다가 제국 해군이야 뭐, 아주 박살 나는 것을 직접 본 당사자가 바로 나니까.

한참을 고민한 나는 작은 주머니만 집어 품에 넣었다.

“주시는 것이니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쪽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가···.”

알렌의 눈썹이 꿈틀하며 몸이 경직되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내 할 말을 이어갔다.

“배의 수리가 끝나는 대로 프레티아에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가지고 올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군요. 이 주머니는 제가 정보를 가지고 왔을 때, 아가씨의 마음에 드신다면 그때 주셨으면 합니다.”

“정말인가?”

“네, 다행히 프레티아 쪽 항구가 봉쇄되었다는 소식은 못 들었으니까요. 정보를 얻는 것과는 별개로 입항 자체는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엘리안 왕녀는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님께서 내가 외부인을 오래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겠군. 그럼 잘 부탁하네.”

그녀와 알렌이 방에서 나가고, 우리 역시 시종의 안내에 따라 저택 밖으로 나왔다.

제임스라는 경비에게 압류당했던 단도를 돌려받고 마차와 마부를 찾아 털레털레 걸어가고 있는데, 아인델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장님,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한 일을 안 하면 되는 거지.”

“하지만 매우 민감한 사안일지도 모릅니다.”

“이봐, 아인델프. 나는 노력한다고 했지, 꼭 해주겠다고 한 건 아니잖아? 적당히 하자고, 적당히. 우리가 도움받은 게 있는데 만약 거절이라도 했다면 관계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아···!”

“첩보활동을 할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럴듯한 소문이나 잘 들어서 전해주는 건데,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어?”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걷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혹시 말이야, 우리가 하는 일이 제국의 이익에 반대되는 일일까 봐 걱정이 되는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렇잖아. 아무래도 자네는 제국에서 사관학교까지 나온 인재니까. 비록 군은 떠났어도 아직 충성심이 남아있나 해서 말이지.”

“글쎄요, 이미 한 번 목숨을 걸었으니 나라에서 받은 것은 다 갚은 것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뭔가를 받은 기억도 없기는 합니다만··· 하여간 저는 리버티 호의 일등항해사입니다. 제국 해군이 아니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 * *

다시 엉덩이 고문(?)을 당하며 델라 항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저택에서 급하게 쫓겨나는 바람에 점심 식사로 차 한 잔만 마신 우리는 마부에게 잔금을 건네주고 여관으로 들어가 식사부터 시켰다.

그리고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맥주로 입가심을 할 때쯤에야 다른 일행들이 여관에 돌아왔다.

“어? 벌써 와 있었군?”

“선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드웰 씨가 문을 열자마자 손을 흔들었고, 오펜은 새 옷을 입고는 다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우르타와 네이선이 보이고, 에른스트가 대여섯 명의 건장한 남자들과 뭉쳐서 들어왔다.

아니, 뭔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서 들어와?

그런데 왜 저 사람들 우리 근처에 서성거리는 거지?

그때 에른스트의 충격적인 말이 들렸다.

“선장님, 이 친구들 돈이 떨어져서 빌빌대고 있길래 그냥 데리고 왔습니다. 급여에서 가불이라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에른스트가 나를 선장이라고 부르자 남자들의 표정이 대번에 바뀐다.

나는 왠지 골치가 아파질 것 같아서 머리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갑판장님, 굳이 이 사람들까지 써야 합니까?”

그러자 갑판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선장님이 실력 있고 믿을만한 녀석들로 모으라고 하셨잖습니까? 이 녀석들이라면 웬만한 해적 놈들은 상대도 안 될 겁니다.”

아아악! 이 노인네가 ‘믿을만한’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한 거야?!

< <104화> 첫 번째 의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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