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환골탈태(換骨奪胎) >
나는 미심쩍은 눈길로 남자들을 흘겨보다가 에른스트에게 물었다.
“갑판장님, 믿을만한 사람들 맞아요?”
“뱃놈들이 돈 떨어지는 게 모자란 놈이라서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보통 선원들은 능력의 유무에 상관없이 돈이 있으면 다 쓰고, 없으면 거지처럼 지내다가 다시 배를 타는 것을 반복한다.
그러니 거지처럼 지낸다고 무능하다는 말은 아니기는 한데···.
내가 애매한 눈으로 보고 있자니, 개중 한 녀석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건들건들 말을 걸었다.
“퉤엣! 이거야 원, 돈 좀 있는 집 자식 같은데 적당히 합시다. 우리가 잘 관리해 드릴, 커억!”
건들거리던 놈은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옆에 있던 에른스트가 녀석의 안면에 스트레이트로 주먹을 꽂아버린 것이다.
힘이 세다는 것 정도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고작 주먹질 한방으로 건장한 남자를 바닥에 자빠트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아니지, 애초에 싸움질 좀 해본 것 같은 성인 남자를 주먹질 한 방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심지어 쓰러진 놈에게 다가가서 머리채를 잡아 올린 에른스트는 다시 손을 놀렸다.
짜악! 짜악! 짜악!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귀싸대기 세 대까지 맞은 녀석의 입에서는 핏물이 게워져 나오고, 바로 볼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에른스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선장님께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넌 앞으로 또 내 눈에 띄면 반드시 멱을 따주마. 당장 꺼져.”
남자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른스트가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채를 놔주었다.
그러자 남자는 비틀거리면서도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여관 밖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 우리 일행뿐만 아니라 여관의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고 멍하니 에른스트만을 보았을 정도니, 말 그대로 압도적인 시선 강탈 이벤트였다.
“히끅!”
놀랐는지 오펜이 딸꾹질을 시작했고, 그제야 멈추었던 시간이 돌아가듯이 굳어있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손님을 자기들끼리 수군거렸고, 네이선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뭐가 ‘오···.’냐 이 멍청아···.
“또 선장님께 할 말이 있는 놈이 있나?”
에른스트가 남은 남자들을 돌아보며 물어봤지만, 다들 에른스트의 시선을 피하기 바쁠 뿐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원 후보인 남자들 앞에 섰다.
“다시 소개하지. 내가 리버티 호의 선장인 리안이야. 대충 무슨 생각들 하는지 알겠는데, 나도 배 탄 지 오래됐어. 그러니까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젊은 놈 말 듣기 싫으면 당장 일어나. 내가 필요한 건, 돈이 급해서 잠깐 배 타는 얼간이들이 아니고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할 진짜 동료들이니까.”
잠시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던 녀석들은 한 녀석을 필두로 앞다투어 머리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리안 선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선원들에게 처음부터 대단한 충성심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 아닌가?
원래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충성심은 돈 내고 사는 거다.
상황이 대충 수습되고, 고용된 선원들에게 가불이라는 형태로 묵을 방과 식사를 준비해준 나는 겨우 우리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나를 보던 에른스트가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솔직히 조금은 걱정했는데 정말 잘하셨습니다, 선장님. 최소한 이 항구에서 본 녀석들 중에는 제일 괜찮아 보이는 녀석들이니, 들어간 돈만큼 제 몫은 할 겁니다.”
“그런데 굳이 미리 돈을 내줘가면서까지 잡아야 해요?”
“돈이 떨어졌다고 바로 다른 배를 타려고 하던 녀석들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미리 돈을 받았다고 도망칠 정도로 개념 없는 놈들도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애매하기는 한데··· 갑판장님이 그렇다니까 일단 믿어볼게요. 다른 선원들은요? 인원수는 채우셨어요?”
“여유 있게 60명 정도는 확보해 놓았습니다. 모자라면 당일이라도 채워 넣죠, 뭐.”
“수습 선원들은요?”
“그게··· 그쪽은 영 쉽지가 않군요. 아무나 채용하라는 것도 아니고 ‘쓸만한’이라고 하시니 기준을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수습 선원은 모두 쓸모가 없으니까 말이죠.”
하긴 수습 선원은 배에서 약간 계륵(鷄肋) 같은 존재이기는 하지.
나는 제대로 된 선원을 키워내기 위해서 뽑는 것이지만, 보통은 잡일이나 시키는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그나저나 갔던 일은 어떻게 된 건가? 무사히 온 걸 보니 큰일은 아닌 듯한데.”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드웰이 손뼉을 한 번 치며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 않아도 일정에 대해 드웰의 허락을 구할 일이 있는데 잘됐다.
“선주님, 혹시 고향에 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으음, 가능하면 그리했으면 좋겠네만. 갑자기 그걸 왜 물어보나?”
“오늘 아가씨께 부탁을 하나 받아서 말입니다. 프레티아에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아시다시피 선주님의 고향과 반대쪽이니까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고향이야 조금 천천히 가도 되니, 그 일을 먼저 처리하도록 하게.”
약간 어두워지는 드웰의 표정을 본 나는 다른 제안을 건넸다.
아무리 모르는 척하라고 했지만, 아인델프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완전히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선주님이 굳이 리버티 호와 함께하실 필요는 없으니, 원하신다면 고향까지 육로나 다른 선박을 알아봐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닐세, 그래도 리버티 호를 타고 돌아가겠어. 이미 7년이나 늦었는데 며칠 더 늦어봐야 무슨 상관이겠나.”
* * *
마이스터 보건이 약속한 날이 되자 우리는 여관 생활을 청산하고 모두 모여 마예도르 조선소를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쁘게 단장된 리버티 호를 볼 수 있었다.
오펜이 깜짝 놀라며 우리를 대신해서 감탄사를 터뜨렸다.
“으아아··· 저게 리버티 호라니, 전혀 다른 배 같은데요?!”
오펜의 말 그대로였다.
우리가 리버티 호라고 소개받은 배는, 처음에 보았던 누더기에 가깝던 무엇이 아니라 번쩍번쩍 광이 날 것 같은 새 배 같은 중고 배였다.
비록 기본 설계와 뼈대는 고칠 수 없어서 전체적인 형태는 구형 누벤테급 상선이었지만, 이전과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썩 괜찮지?”
“앗, 마이스터 보건! 이렇게까지 해주실 줄은···.”
내가 살짝 민망해져서 감사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자, 코밑을 쓱 문지른 보건이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으하하하핫! 나도 뭐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오래간만에 참신한 방법들을 봤더니 다들 의욕이 넘쳐서 말이야. 나름 즐거운 작업이었네. 공짜라는 것이 좀 아쉽기는 했지만 말이야. 가능하면 이 배를 손댔던 조선공을 좀 만나보고 싶은데, 어렵겠지?”
“그건 좀···.”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드웰이 끼어들었다.
“마이스터 보건, 그 조선공은 왜 만나고 싶으신 거요?”
“어, 그야 궁금해서?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선주님?”
“그 조선공이 나요.”
“뭐라고··· 허, 진짜요?”
나는 갑자기 끼어들어 정체를 밝히는 드웰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딱히 숨겨야 하는 일도 아니라서 일단 수긍했다.
“네, 선주님이 전에 조선공으로 일하셨죠.”
“아니, 그럼 이럴 때가 아니지! 이쪽으로 좀 와보시죠, 여기 이 부분은 어떻게 수리를 한 건지 궁금하던데···.”
드웰이 보건에게 팔목을 잡힌 채 끌려가고, 우리는 멍하니 그 꼴을 보다가 서로를 보고 피식거리며 웃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선원이고, 좋은 배는 우리의 로망이다.
“자, 자! 다들 움직여! 임시 창고에서 물건 다 빼서 옮겨야지! 빨리빨리 끝내고 점심은 근사하게 먹자고!”
내가 쾌활하게 소리치자, 다들 큰 함성으로 대답했다.
* * *
근 20일 만에 건선거에서 탈출한 리버티 호는 산뜻해진 모습으로 부두에 우아하게 정박했다.
그리고 그날 늦은 오후부터 사람들이 삼삼오오 리버티 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갑판장 에른스트에게 고용된 선원들이었다.
아, 한 명은 바로 내가 고용을 결정한 회계사 게론드였다.
게론드는 리버티 호에 타자마자 일복이 터져서 정신이 없었다.
선원들의 고용 계약서를 확인하고, 급여를 가불한 인원과 금액을 확인하고, 리버티 호의 자산 상황과 필요한 보급품을 확인했다.
능력이야 이미 확인한 다음이지만, 그래도 아직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워서 최종 결재와 확인은 내가 직접 했다.
언젠가 자잘한 일은 회계사 선에서 처리하겠지만, 지금은 수입, 지출 같은 중요한 사항은 내가 관리하는 것이 맞았다.
업무량도 많았지만, 그 일을 회계사가 처리한 후에 내가 확인해야 했던 덕분에 별이 총총 떠오른 깊은 밤이 되고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델라 항구에서 머문 시간이 과하게 길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아 오펜을 시켜 회계사를 호출했다.
잠시 후, 내 방에 들어온 게론드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장님. 혹시 제가 올린 서류에 문제라도?”
“아니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보다 일단 좀 앉아 봐.”
“네, 무슨 일이신데요?”
으음··· 내가 채용한 것은 맞는데, 이 사람과 함께 일하려면 앞으로 적지 않게 피곤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벌써 피곤하다···.
“일단 회계사도 우리 일정을 알아야 교역품을 살 거 아니야?”
“아, 그렇죠. 어디로 가실 셈이십니까?”
“일단 프레티안 왕국 쪽으로 가야 할 일이 있는데, 어디가 괜찮을 것 같아?”
“그쪽이라면 내전 상태 아닌가요? 전쟁 물자 특수를 노리신 거라면 실수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미 그쪽은 군상이 다 붙어서 우리가 끼어들어 봐야 좋은 수익을 내기 어려울 겁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무역보다는 다른 일이 있어서 그래.”
“그렇다면 그 일을 중심으로 목적지를 정해야겠군요.”
나는 잠시 게론드의 눈을 보며 그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게론드는 빙글빙글 웃으며 선수를 쳤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겁니까? 저는 깊숙한 이야기는 별로 관심 없습니다. 제가 필요한 만큼만 말씀해 주시죠.”
“휴, 그렇게 할 말 못 할 말 다 하면 피곤하지 않아?”
“전 필요한 말만 합니다만···?”
“···말을 말자. 일단 전쟁 상황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전쟁 상황에 대한 빠른 정보라면, 롤레앙 항구는 어떻습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황보다는 반군 측 세력 구성 같은 정확한 정보가 필요한데 말이야.”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를 추천했던 게론드는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반군인 데이먼 왕자 측의 세력 구성에 대한 정보는 일반적인 경로로는 얻기 어려울 겁니다. 물론 간단한 정보야 떠도는 이야기를 취합해도 되겠지만, 자세한 정보라면 아마 전문적으로 정보를 취급하는 자들이 아니면 알기 어려울 겁니다.”
“아무래도 반군이니까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벵가로쉬 항구로 가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벵가로쉬? 왜 굳이?”
벵가로쉬는 프레티아 왕국 북부의 반도에 위치한 항구로, 반군 세력과 가장 관련이 없고 전쟁의 위험에서도 제일 안전한 곳이었다.
수도보다 북쪽에 위치하는 데다 반군이 봉기한 지역은 남쪽이니, 일단 납작 엎드려 있다가 만약 반군이 수도를 점령하면 재빨리 깃발만 바꿔 달면 되는 곳이라서 반군에 별 관심이 없을 것 같았다.
“벵가로쉬는 최소한 프레티아 왕국 내에서는 전쟁과 가장 상관이 없는 곳 중의 한 곳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의문이 드는 거야.”
“그러니까 반군에 대한 정보의 통제도 가장 느슨하지 않겠습니까?”
“···어? 어?!”
“어차피 전문적으로 정보를 취급하는 곳에 손을 뻗어야 한다면, 당연히 정보를 취급하기는 하겠지만 그 감시는 가장 느슨한 곳을 노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
어쩌면 나 진짜 괜찮은 회계사를 얻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벵가로쉬로 하자. 그럼 내일 나랑 은행에서 계좌 관리자로 등록하고 회계사는 벵가로쉬에서 팔만한 교역품을 찾아봐.”
“그런데 선장님, 저는 벵가로쉬까지 며칠이나 걸리는지를 모릅니다만?”
“흠, 델라에서 벵가로쉬면 바람이 좋다면 8일? 늦어도 10일 내에 도착할 거야.”
“그렇다면 그것에 맞춰서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해, 게론드 회계사.”
< <105화> 환골탈태(換骨奪胎)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