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출항 >
에른스트가 고용한 선원들이 합류하면서 리버티 호는 겨우 운항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하지만 어제 배에 찾아온 53명 중 9명이 밤을 틈타 도망갔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선장과 항해사는 20대, 기존 선원이라고는 꼴랑 네이선, 우르타, 오펜 뿐이고, 심지어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둘은 간부급, 남은 하나는 수습 선원이라는 기막힌 상황이니, 목숨 귀한 줄 아는 놈들은 다 도망간 것이다.
사실 일부러 내가 방치한 것도 있기는 했다.
괜히 불만이 많은 놈들을 태워봐야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만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남은 인원이 40명이 넘어서 운항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닌데, 일이 굉장히 빡빡하게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기존 인원이 없는 만큼 선원 간의 알력 싸움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기거나, 좋지 않은 선원 문화가 정착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서로 합도 맞춰볼 겸 에른스트 갑판장에게 선원 훈련을 일임하고 나왔다.
이제 지휘 경험을 쌓아야 하는 우르타와 네이선이 훈련에서 빠질 수 없는 일이다 보니, 교역소를 향하는 게론드를 호위할 사람이 나와 아인델프 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이면에는 아직 게론드를 믿지 못하는 의심도 한 조각 들어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큰 실수를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아인델프의 얼굴은 푸르죽죽하게 죽어있고, 나는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다.
이 정도면 정신공격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해서 해운학 교수님도 대답이 궁해지셨었죠. 그러니까 그때의 토론을 기준으로 볼 때, 이번 프레티안 왕국 내전의 영향은 국소적일 수 없다는 겁니다. 당연히 후방에 해당하는 벵가로쉬도 여러 가지 면에서 물가변동이 생길 수밖에 없는 거죠. 물론 그 물가 변동은 전방에 가까운 보급도시나 배후지역과 다르고, 보급로와 진격로에 위치한 도시와도 다를 겁니다. 그래서···.”
정말 똑똑하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상황 분석이다.
그런데 내가 왜 프레티아 왕국 내전의 정치적, 지리적, 역사적 배경과 전쟁 지속 시간이 국가 경제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 따위까지 알아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하는 말의 절반 이상은 못 알아듣겠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나는 결국 게론드의 말을 끊었다.
“회계사! 다 좋은데 그래서 우리가 사야 할 품목이 뭐라는 거지? 그냥 그것만 알려주면 안 되겠나?”
“선장님, 교역 품목을 정할 때는 당연히 판매처의 상황이나 시세예측도 필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이동 중 손실에 대한 부분과 구매지의 물품 상황입니다. 무턱대고 이런 교역품을 사겠다고 결정하더라도 구매지의 가격이 비싸거나 품질이 좋지 않다면 유연하게 품목 전환을···.”
“그만, 그만! 알았으니까 그 후보나 좀 말해보라고, 아니! 그냥 말하지 마! 가서 당신이 마음대로 골라! 최종적으로 뭘 사야 하는지만 말하라고!”
결국 구매 품목에 대한 결정을 완전히 위임해 버리는 항복 선언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아인델프의 귀가 고문에서 벗어난 것은 교역소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게론드가 교역품의 실물을 보겠다고 교역소 직원과 대형 창고로 사라진 후에야 정신을 차린 아인델프가 질린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선장님, 정말 괜찮을까요? 말이 많은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심할 줄은···.”
“하아, 그래도 당장 쓸 만한 회계사가 없는 걸 어떡해? 게다가 저렇기는 해도 확실히 능력은 있는 친구거든.”
“그런 것 같기는 합니다만, 저는 아무래도 걱정이 됩니다. 선원들도 그렇고 그 갑판장도 조금 그렇습니다.”
“에른스트 갑판장? 갑판장은 왜?”
“선장님이 아시는 사람이라니 이렇게 말하기는 조금 부담스럽습니다만, 일전에 선원을 다루는 모습부터 모아 왔다는 선원들의 면면까지, 약간··· 으음, 거친 느낌이랄까요?”
“뱃놈들이 다 그렇지 뭐.”
“그렇기는 하지만, 아닙니다.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아인델프의 걱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나도 일전의 폭행 사건부터 선원들을 쥐 잡듯이 잡아대는 갑판장님을 보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갑판장님의 행동이 이해되기도 한다.
아무리 좋게 말하려고 해도 고드실카 호와 리버티 호의 상황은 너무 다른 상황이 아닌가?
고드실카 호에서 선장과 갑판장의 권위는 확고했다.
선원들도 입으로는 구시렁거릴지언정 최고의 직원 복지를 제공하는 선장님을 좋아했고, 능력 있는 갑판장의 명령에 복종했다.
갑판장이 굳이 폭력과 공포로 선원들을 통솔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반대로 리버티 호는 선원들이 죄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황인 것도 모자라서 선장부터 시작해 간부라는 사람들이 다 너무 젊거나 늙었으니, 좋지 않은 생각을 하는 녀석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표현을 안 할 뿐이지, 선원 대부분은 나나 네이선, 우르타를 무시하고 있지 않을까?
그나마 그들이 리버티 호에 남은 이유는 갑판장님 때문인데, 갑판장님까지 허허거리면 늙은이라고 무시당하게 될 것은 뻔하다.
예나 지금이나 권위를 세우고 명령에 복종하게 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간단한 방법은 바로 폭력과 공포였다.
물론 이 방법은 진실한 충성을 이끌어내는 방법으로는 최악이지만, 선원들이 나를 신뢰하고 충성심을 가지게 되기까지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버티기 위한 방법으로 갑판장님은 폭력과 공포를 선택한 것이겠지.
“일단 상황이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선원이라도 20대 초반의 선장은 믿을 수 없을 테니까. 앞으로 함께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인정하게 되지 않겠어? 그때는 갑판장님도 지금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거야.”
“그냥 노파심에 말씀드려봤습니다.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충분히 걱정할 수 있는 부분이지. 오히려 그렇게 신경 써 주다니 고맙네.”
그렇게 한참을 아인델프와 노닥거리고 있으니, 지친 표정의 교역소 직원과 게론드가 돌아왔다.
그리고 게론드는 우리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선장님, 구매 물품을 결정했습니다. 최근에 이쪽에 밀과 면화의 작황이 좋아서 밀가루와 면화를 주로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농기구와 철괴도 적당히 발주했고요. 평소라면 농기구나 철괴는 손해 보기 좋은 품목이지만 전쟁상황이니까요. 어차피 면화는 부피에 비해 무게가 덜 나가는 편이라 무거운 것들을 조금 담아도 괜찮을 겁니다. 아, 그리고 브랜디도 품질이 괜찮아서 조금 담아보았습니다. 철괴는···.”
“회계사, 그만. 알겠으니까 들고 있는 발주서나 좀 보여줘.”
“아, 여기 있습니다. 맨 위에서부터 설명을 드리자면···.”
“제발, 나도 글 정도는 읽을 줄 알아!”
“그래도 각 항목의 구매량과 부피와 무게에 대한 부분에 대해 설명을···.”
계속 열변을 토하는 게론드의 말을 최대한 무시하면서 나는 물목과 가격을 확인하고 그대로 직원에게 발주서를 내밀었다.
“그냥 이렇게 합시다. 언제까지 보내줄 수 있습니까?”
내가 지친 표정으로 직원에게 말하자, 나보다 더 지친 표정의 직원이 경악스러운 눈으로 게론드를 보다가 겨우 대답했다.
“지금 대금을 완납하시면 바로 물건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6번 부두 C구역의 리버티 호 맞습니까?”
* * *
다행스럽게도 돌아오는 길에는 게론드의 정신공격(?)을 무효화 할 수 있었다.
교역품뿐만 아니라 식료품 같은 보급품의 대금을 지급하니 묵직했던 돈주머니가 깃털처럼 가벼워진 탓에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포탄이나 화약은 도저히 구매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항해만큼은 리버티 호의 대포는 위협용으로밖에 쓰지 못할 것 같다.
남은 돈이라고 해봐야 1만 로스 남짓에 불과했으니, 이 정도 금액으로는 드웰의 정착 자금 지원은커녕 벵가로쉬에서 선원들 급여 지급도 불가능했다.
첫 급여부터 밀리는(?) 악덕 사장, 아니, 선장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게론드가 짜 놓은 구매 계획이 너무 완벽해서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욕심을 조금 버렸다면 손을 댈 수 있었겠지만, 원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그리고 선원들 급여야 뭐, 입항하자마자 교역소에 물건 팔아치우고 받은 대금으로 치르면 되겠지.
징징대고 불만을 가지는 녀석이 몇 놈 나오기야 하겠지만, 상선에서 아주 드문 일도 아니니까 그럭저럭 넘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선원들이 재정에 불안감을 느끼고 불만이 고조될 테니, 앞으로는 이렇게 하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고민과 생각을 하며 리버티 호로 돌아오자, 선원들이 기진맥진해서 갑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역시 녹초가 된 오펜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선장님, 다녀오셨어요?”
“어, 오펜. 다들 왜 이래?”
“그게 갑판장님이···.”
내가 어색하게 웃은 오펜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나를 알아본 선원들이 겨우 몸을 일으켜 고개를 슬쩍 숙였다.
아직 부족하기는 하지만 아침에 출발할 때에 비하면 확실히 나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갑판장님이 아주 어마어마하게 굴린 모양이다.
“갑판장은 어디 갔어?”
“갑판장실에요. 부를까요?”
“응, 선장실로 오라고 해.”
게론드에게 물목 정리와 남은 자금을 맡기고 선장실로 향하다가 네이선과 마주쳤다.
그런데 이놈 표정이 이상했다.
“야, 그냥 말해. 너 사고 쳤지?”
“아니, 내가 사고는 무슨! 아무 일도 아닙니다, 선장님.”
내 눈을 피하며 펄쩍 뛰는 녀석이 재빨리 빠져나가려는 것을 몸으로 틀어막았다.
“뭐야? 지금 말하면 정상참작은 해줄게.”
“별거 아닌데, 그냥 선원들이랑 충돌이 약간 있었어, 습니다.”
“충도올? 하루라도 사고 없이 지나가면 안 되는 거냐? 너까지 왜 그래?”
“······.”
왠지 불퉁하게 변한 표정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갑판장님 오기로 하셨으니까 너도 들어와. 이야기나 들어보자.”
잠시 후, 선장실에 모인 나와 에른스트, 아인델프, 네이선, 우르타(얘는 왜 온 거야?)는 에른스트의 보고를 시작으로 간단한 회의를 열었다.
“현재 리버티 호의 총 인원은 선주님과 선장님을 제외하고 모두 52명입니다. 그중에 항해사, 회계사, 갑판장, 돌격대장, 포술장을 제외하면 47명이고 이 중에 수습 선원은 4명입니다.”
“응? 사람이 조금 늘었네요?”
“네, 선장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세 사람이 더 합류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운항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조리실을 맡을만한 사람은 있어요?”
“시에론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선원 상황과 훈련 등 리버티 호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과 곧 도착할 교역품 적재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후,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네이선을 흘겨보며 물었다.
“이 정도면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고, 네이선이 선원들과 싸웠다는데 무슨 말입니까?”
질문을 들은 에른스트가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크크큭, 별일 아닙니다. 선원 중에 몇 놈이 네이선, 아니, 돌격대장의 전투 지휘에 반발을 했다가 아주 박살이 났습니다. 어디가 부러진 것은 아니라서 그냥 선내에서 쉬도록 했습니다. 내일이면 괜찮을 겁니다.”
“몇 명인데요?”
“일곱 명입니다. 선장님.”
“···일곱 명을 혼자서 때려눕혔다고요?”
“솔직히 처음에는 제가 개입할까 했는데, 돌격대장 실력이 아주 쓸만해 졌더군요. 몸놀림이 예전과 전혀 다릅니다.”
이번에 뽑은 선원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체격이나 분위기가 만만치 않은 편인데, 그중에도 먼저 나설 정도면 실력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네이선은 그런 사람 일곱 명을 상대로 상처 하나 없이 이겨버린 것이다.
아무리 무기를 들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면 평범한 인간 수준은 진작 벗어났다.
내가 복잡한 시선으로 네이선을 보고 있는데 에른스트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마무리를 지었다.
“크흠, 덕분에 선원들이 많이 고분고분해졌습니다. 저는 돌격대장이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그럼 물건들 도착하면 적재하고 가능하면 오늘 출항하도록 하죠. 첫 항해니까 적응 훈련을 겸해서 천천히 움직일 생각입니다. 일등항해사는 남아서 나랑 항해계획 좀 만들지.”
항해계획을 다 짜고 아인델프에게 출항허가를 받아오라고 시킨 뒤 잠시 쉬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선장님, 선적 완료되었습니다.”
“어, 지금 나갈게.”
내가 선교에 올라가자 깔끔하게 뒷정리를 마친 갑판 위로 이제 막 아인델프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른 걸음으로 선교에 올라 온 아인델프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출항 허가 나왔습니다.”
나는 이미 선교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는 갑판장을 보며 말했다.
“갑판장! 현문 올리고 계류색 걷어.”
“네, 선장님!”
곧 현문이 철거되고, 리버티 호를 부두에 고정시켜 놓았던 세 가닥의 계류색이 끌어올려졌다.
모든 준비가 완료된 것을 확인한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고양감을 느끼며 힘껏 소리쳤다.
“리버티 호, 출항!”
갑판장을 비롯해 선원들이 출항을 복창하고, 견시대에서 타종 소리가 울렸으며, 일사불란하게 메인마스트와 미즌마스트에 돛이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리버티 호가 천천히 부두에서 멀어지며 그녀가 원래 있어야 할 곳, 대양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106화> 출항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