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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09화 (109/420)

< <109화> 잭과 잭 >

한참을 헤맨 끝에 우리는 간판도 없는 허름한 술집 앞에 설 수 있었다.

간판이 없는데 술집인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마라, 원래 이런 데는 술을 안 팔아도 그냥 술집인 거다.

“솔직하게 말해 리안. 너 길치 맞지?”

“그래, 30분이면 도착했을 것 같은 거리를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게 말이 돼?”

“시끄럽다 이놈들아. 빨리 일 끝내고 가자. 늙은이 힘들게 하지 말고.”

우르타와 네이선의 비난처럼 내가 길치라거나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다.

고드실카 호에서 내리면서 밀수니 밀항이니 하는 약간의 불법적인 일과 엮일 일이 없다 보니 나도 근 1년 만에 와보는 길이란 말이다.

게다가 뒷골목이라는 게, 원래 크레타 섬의 미궁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복잡하기도 한데다가 매일 철거, 건축, 개축이 반복되다 보니 1년이 지나면 그냥 새로운 미로란 말이지.

그래도 잘 찾아왔으면 된 거 아니야?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인 없는 바와 별로 앉고 싶지 않은 더러운 테이블과 의자 몇 개,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술을 마시며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세 남자가 보였다.

그런데 얼굴 아는 놈이 하나도 없네.

녀석들 중에 한 놈이 자리에서 일어서 우리를 훑어보더니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뭐야? 술 떨어졌으니까 술 마시려면 다른 데로 가쇼.”

그러면 늬들 앞에 있는 건 술이 아니고 음료수냐?

그리고 이제 저녁 장사 시작할 시간인데 술집에 술이 없다는 게 말이 돼?

내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바 뒤쪽으로 연결된 문으로 한 남자가 나오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뭐야? 누가 왔나?”

“아닙니다, 형님. 잘못 찾아온 모양입니다.”

정말 궁금한 것이, 이놈들은 하나같이 손님 대하는 태도가 엉망인데 어떻게 장사를 하는지 모르겠다.

“···응? 그쪽은 리안 씨?”

다행히 새로 등장한 남자는 아는 얼굴이었다.

혹시 주인이 바뀐 것은 아닌지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오래간만이네요, 잭.”

“아, 오래간만에 오셨군요. 한동안 안 오시기에 유령선에 타신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누가 날건달 아니랄까 봐 말하는 모양새하고는.

참고로 저놈 이름은 잭이 아니다.

그냥 뒷골목에서 얼굴을 아는 아저씨 정도의 호칭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래요? 나는 못 보던 놈들이 있길래 그사이에 망했나 했는데 말이죠.”

대충 대답해주니 잭이 눈을 가로지르는 칼자국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피식 웃었다.

“요즘 사업을 확장하면서 신입을 몇 명 뽑았습니다. 그나저나 그냥 오신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일로? 보스는 지금 자리를 비우셨으니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보스 불러요, 세먼 씨랑 할 이야기니까.”

그냥 정보상을 소개받는 일이라서 잭에게 물어봐도 상관없기는 한데, 이 녀석들은 하자는 대로 해주면 버릇이 고약해진다.

그런데 평소라면 군말 없이 보스를 부르러 갈 잭이 오늘은 좀 이상하다.

잭은 내 말에 어깨를 으쓱하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보스를 만나려면 사흘은 기다려야 할 겁니다. 사흘 후에 다시 오시던가요.”

어라? 진짜라고?

내가 살짝 당황해서 대답할 타미잉을 놓치자,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에른스트가 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잭, 정말 세먼이 자리를 비운 건가?”

“노인장은 누구··· 헉, 설마?”

여전히 심드렁하게 대꾸하려던 잭의 표정이 갑판장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살짝 굳었다.

하긴 여기를 처음 소개한 것도 갑판장님이니까 알 수도 있겠네.

“노인장이라, 흐흐흐, 심부름이나 하던 꼬마 잭이 많이 컸군.”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아직 현역에서 일하시는지는 몰랐습니다.”

갑자기 잭의 태도가 돌변한 것이 이상했지만 나는 그러려니 했다.

저 나이가 되어서도 성인 남자를 한방에 때려눕히는 분인데 젊었을 때는 어땠겠어?

잭이 쪼는 것도 이해해야지.

“그런데 저, 진짜로 보스는 지금 자리에 없습니다.”

잭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자 갑판장님이 나를 보며 물었다.

“진짜 없는 모양인데 그냥 물어보는 게 어떠냐?”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에른스트가 내게 허락을 구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이 이상했는지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잭이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내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리안 씨?”

“정보가 하나 필요한데, 여기서 취급해요?”

“글쎄요, 어떤 정보를 원하시는지에 따라서 달라지죠.”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내전에 대해 궁금한 게 있는데.”

굳은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던 잭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쪽은 저희가 취급하기에는 조금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그럼 뭐 아는 업체 없어요?”

“크흠, 조금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려던 잭이 에른스트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말을 바꿨다.

“어르신께서 직접 오셨으니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당장은 어렵고 내일 다시 한 번 방문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이왕이면 오늘 하루에 끝내고 싶은데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다.

우리는 깡패들의 폴더인사를 받으며 가게를 나와 다시 번화가를 향했다.

그런데 이 노인네는 젊었을 때 뒷골목에서 일을 하셨나?

저놈들이 저렇게 군기가 바짝 선 모습은 처음 본다.

아니지, 생각해보니까 처음 갑판장님과 여기를 왔을 때도 조금 그랬던가?

뒷골목을 한두 군데 다녀봤어야지, 이제 나도 헷갈린다.

* * *

다음 날, 저녁을 일찍 챙겨 먹고 어제의 술집으로 찾아가니 바에서 중년의 남자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잭이 보였다.

우리가 들어서자, 잭은 우리를 확인하고는 앞에 앉은 남자에게 슬쩍 고개를 숙이더니 우리를 반겨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안 그래도 소개시켜드릴 사람이 와 있던 참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중년의 남자는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우리를 살폈다.

그리고는 내게 손을 내밀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갑소, 리안 선장. 잭이오.”

“반가워요, 잭 씨. 그런데 선장인 것은 어떻게?”

“고객정보도 몰라서야 정보상이라고 할 수나 있겠소?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거래합시다. 나도 꽤 바쁜 몸이라.”

내가 리버티 호의 선장이라는 것 정도는 항구관리소에 슬쩍 물어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하루 만에 한 번도 안 본 사람의 정체를 특정했다는 것은 좀, 대단하긴 하다.

항구관리소에 물어보려고 해도 최소한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 질문을 할 것 아냐?

“그래요, 나도 쓸데없이 힘을 빼고 싶지 않으니까. 데이먼 왕자, 그러니까 반군 측 상황에 대해 좀 자세히 알고 싶어요.”

“전황이 아니고 반군 측 상황이라? 그쪽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요?”

“공짜로 줄 건가요?”

“뭘 말이요?”

“내가 원하는 정보, 공짜로 줄 거냐고요.”

남자가 슬쩍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초면에 무슨 개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

“이봐, 잭. 정보를 돈 받고 팔 생각이면 그냥 묻는 말에 대답하고 돈이나 받아. 괜히 내게서 다른 정보 얻어내려고 수작 부리지 말고.”

내 말투가 변하자 눈치껏 네이선이 칼을 반쯤 뽑았다.

지금 내 앞의 남자가 알렌 경처럼 인간을 초월한 고수가 아니라면 괜히 다른 짓을 하려다가는 바로 머리와 몸이 영원히 이별하게 될 거다.

잠시 나와 눈싸움을 하던 잭은 결국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혹시나 했더니 완전히 애송이는 아니었나 보군. 사과하겠소.”

“아, 이놈의 골목은 이게 정말 피곤하다니까. 그래서 잭, 어떻게 할 건가요?”

“뭐 선장이 생각하는 그런 의도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정보가 너무 방대해서 물어본 거요. 반군 측 상황에 해당하는 문서만 모아도 두 상자는 채울 수 있을 텐데, 그걸 다 달라는 것은 아닐 것 아니오?”

어우 씨, 두 상자라고?

뭐가 그렇게 많아···.

그렇다고 왕녀님이 그쪽에 가면 결혼 하게 될 것 같은 귀족 나으리들 리스트랑 특징 좀 뽑아달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어떻게 특정해야 범위를 줄이면서 딱 원하는 것만 구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갑판장님이 나섰다.

“프레티아 귀족 중에 반군에 합류한 주요 귀족, 합류할 가능성이 있는 굵직한 자들, 가능성은 없더라도 합류하면 전세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네.”

아니, 무슨 정보업체에 일하다가 오셨어요?

우리 갑판장님이 생각보다 대단하셔.

다른 녀석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일제히 놀란 토끼 눈으로 에른스트를 보자, 그는 애꿎은 우르타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중얼거렸다.

“이놈들이? 당장 그 눈깔 치우지 못해?”

“이익, 그런데 왜 나만 때려요!”

괜히 한 대 맞은 우르타가 볼멘소리로 따지자 에른스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네이선 저놈은 이제 피할 것 같거든.”

우리가 잠시 시트콤을 찍는 동안 고민하던 잭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범위가 너무 넓군. 귀족의 어떤 정보가 필요한 거요? 군사력? 정치 성향? 혈연과 인맥? 다 달라면 다 줄 수는 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을 거요.”

이런 젠장, 여기서 ‘남편감으로 어떤지 궁금해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

뭐라고 하지? 개인적 성향? 과거 행적?

아니지, 내가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잖아?

어차피 귀족의 구성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니고, 대충 어느 가문이라고 하면 왕녀님이 다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물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까지는 모를 수 있겠지만, 왕녀님도 애초에 내게 ‘자세한 정보’를 원하신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의뢰에 비해 너무 열성적으로 나선 경향이 있지··· 음.

“혈연관계와 평판 정도면 충분해요.”

“평판, 말이오?”

“네, 평판. 대충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알고 싶다는 거죠.”

“으음, 그건 굳이··· 후, 알겠소. 그 정도라면 굳이 내가 나올 필요도 없을 뻔했군.”

“얼마죠?”

“선금 1만 로스. 조사하려는 사람마다 가격이 달라서 총 액수는 이 자리에서 말하기 어렵군. 내일 배로 사람을 보내지.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선금만큼만 정보를 가져가셔도 좋소.”

내가 돈을 세어 건네자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 잭의 진로를 슬쩍 막아서며 물었다.

“잠깐, 잭.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무슨 말이오?”

“당신이 진짜 정보상인지, 그럴듯한 사기꾼인지 내가 알 도리가 없잖아요.”

내 말에 약간의 비웃음을 띄운 잭이 바텐더 자리에 있는 잭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장, 내가 사기꾼이면 저놈을 죽이면 되는 것 아니오?”

아, 이놈들이 같은 이름 쓴다고 지들이 무슨 자웅동체, 아니, 클론 같은 건 줄 아나?

사기는 네가 쳤는데 왜 엄한 잭을 죽여?

“저기 있는 잭은 세먼 씨 부하고, 내가 그쪽이랑 좀 잘 아는 사람이라서 말이지.”

“그렇다면 더 말할 것도 없군. 저놈을 믿으면 그냥 나도 믿으면 되는 거요.”

우리의 실랑이를 보고 있던 바텐더 잭이 중재했다.

“리안 씨, 진정하시고 잭의 말대로 하시죠. 내일 만약 배에 사람이 오지 않거나 정보에 문제가 있다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흐음, 잭이 그렇게 말하면 뭐···.”

아니다. 사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믿을만한 놈이 하나도 없다.

뒷골목에 사는 인간을 믿다니, 그런 세상 멍청한 호구 짓을 왜 하겠어?

그런데 어쩌나, 당장 내가 여기서 어깃장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냥 내가 대인배인 것처럼 넘어가는 수밖에.

만약 저 중년의 잭이 사기꾼이면 이놈의 뒷골목을 모조리 불 질러버릴 테다.

< <109화> 잭과 잭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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