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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10화 (110/420)

< <110화> 지구의 지식을 나만 가진 거 맞아? >

다행스럽게도 내가 벵가로쉬의 뒷골목에 불을 지르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선장실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데, 오펜이 손님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 손님, 그러니까 벵가로쉬의 세 번째 잭은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서류 뭉치 여덟 개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요청하신 귀족들의 자료입니다. 왼쪽부터 반군의 세 중추인 로흐만 공작, 스티아 백작, 헤몬 백작, 아직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유벤트 후작, 빈센 자작, 알마 남작, 마지막으로 현재 주요 전장인 로자렌스 지방군 사령관인 페이트 백작과 알라시아 영주인 체르먼 백작이죠.”

“지방군 사령관이 아직도 중립인가요?”

“중립이라기보다는 반군을 먼저 공격하지는 않는 정도입니다. 체르먼 백작은 알라시아 지역을 통과하는 일레드 왕국의 군대와 보급을 검문 없이 통과시키고 있는 상태이고요.”

“그러니까 뒤에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도 반군 진영에 들어가면 지금의 균형이 무너진다는 말이군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잭은 손가락 세 개를 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상품 설명은 충분히 드린 것 같고, 선장님은 세 사람을 골라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네 번째부터는 추가금을 지급하시면 됩니다.”

“네 번째부터는 얼마를 더 내야 하죠?”

“고르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가격이 달라집니다.”

못된 상술은 지구나 여기나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 있지?

이게 무슨 야바위나 가챠도 아니고 뽑기는 뭘 뽑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놈들의 생각은 뻔하다.

사람마다 가격이 다르네 마네 하지만, 어차피 내가 누구를 뽑는지는 상관없을 것이다.

네 번째나 다섯 번째까지는 적은 금액이고, 여섯 번째는 애매하고, 일곱 번째는 꽤 비싸고, 마지막 남은 것은 매우 비싸겠지.

그럼 여섯이나 일곱 번째까지만 사면되는 것 아니냐고?

인간의 심리가 그렇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여덟 개중 한 개나 두 개를 남겨두면 그게 정답이 아닐까 하는 후회로 신경쇠약에 걸릴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잔머리 굴리지 말아요, 잭. 다 사면 얼마죠?”

“잔금은 28,900로스입니다.”

숫자 애매한 거 보소, 진짜 이놈들 중에 나처럼 지구 지식이 박혀있는 놈이 있는 것 아닐까?

나는 대략 3만 로스로 거래되는 필로스 금화를 꺼내 잭에게 던져주었다.

“어차피 잔돈은 준비 안 했죠?”

내 비난 섞인 질문에도 가타부타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잭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거래에 감사드립니다. 리안 선장님. 그런데···.”

잭은 다시 품 안에서 얇은 서류를 하나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은근하게 물었다.

“반군 관련 정보를 정리하면서 선장님께서 솔깃하실 만한 상품이 있어서 이렇게 가지고 나왔습니다만.”

···뭐지? 진짜 전생에 지구에서 영업사원을 하다가 온 양반이신가?

내가 지금 상대하는 사람이 뒷골목 양아치인지 영업왕 아저씨인지 혼란스러운 마음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사이, 잭은 내 반응에 개의치 않고 영업을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프레티아 왕국의 선왕 슬하에는 4남 1녀가 있었고, 현 국왕 에논이 선왕을 살해하고 왕좌를 차지하려는 다른 형제들을 제압하여 죽이고 왕좌에 오른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4왕자 데이먼이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오는 바람에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밝혀졌죠.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살아남았을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리버티 호의 국적기를 보니 벨로키나 왕국 소속이군요. 저희가 극비리에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벨로키나 왕국도 연관이 있는 대형 정보인데, 관심이 있으십니까?”

야이 씨, 그거 왕녀님 이야기 아니야?

내가 당신보다 더 잘 알 것 같은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도 아니고··· 아니지?

혹시 고드실카 호에 관련된 정보도 있는 것 아닐까?

시큰둥했던 마음이 어느새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는 입을 열었다.

“그건 얼마죠?”

* * *

잭이 항구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까딱 잘못 했으면 영업왕 잭 아저씨에게 홀랑 넘어갈 뻔했다.

분명히 별 내용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유혹을 이기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잭 아저씨가 내 재력을 잘못 판단해서 비현실적인 금액을 부르지 않았다면, 진짜 돈지랄을 하고 통곡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왕녀님이 구해오라고 한 정보야 왕녀님께서 적당히 벌충해주시겠지만, 저 정보는 왕녀님께 공구하자고 할 수도 없는 거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종이 몇 장에 10만 로스라니, 듣는 순간 내 귀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차 떼고 포 떼고 하면 이번 교역에서 번 순수익이 7만 로스쯤 될 것 같은데, 미치지 않은 이상에야 생산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는 내 궁금증 해결을 위해 10만 로스를 쓸 리가 없지 않은가.

* * *

그날 저녁에는 아인델프가 풋내가 풀풀 풍기는 햇병아리를 데리고 내게 보고할 것이 있다며 찾아왔다.

“뭐야, 옆에 햇병아리는?”

내가 대뜸 질문을 던져서 당황했는지, 애매한 표정으로 내 눈길을 피하며 아인델프가 대답했다.

설마 저놈 ‘어디 중병아리가 햇병아리라는 말을 입에 올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 착한 아인델프 일등항해사가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없지.

그냥 내 기분 탓일 거야. 그럼, 그럼.

“이 친구는 슬레어 항해사입니다. 인사드리지, 리버티 호의 리안 선장님이시네.”

아, 그래. 내가 항해사 하나 알아보라고 했었지.

그런데 너무 풋내가 팍팍 나는데?

나가서 오펜이랑 같이 놀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아.

“안녕하십니까! 항해사 슬레어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

“아, 무슨 영광까지 찾아? 알았으니까 일단 앉아 봐요. 일등항해사도 앉지.”

긴장감이 역력한 모습으로 뻣뻣하게 의자에 앉는 풋내기를 보며 나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차피 각오한 일이 아니었나?

돈이 있다고 해도 문제인 게, 경력 있고 괜찮은 항해사가 뭐 한다고 굳이 우리 배를 타려고 하겠어?

일단 지금으로서는 싹수 있는 놈을 받아서 키우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요, 슬레어 항해사. 경력은 얼마나 돼요?”

“저, 그게···.”

예상했던 대답이라 특별히 충격을 받거나 놀랍지는 않았다.

그래서 바로 고개를 아인델프 쪽으로 돌려서 물었다.

“학교는?”

“작년에 프레티아 왕립 아카데미 항해학부를 졸업했다고 합니다.”

어라, 왕립 아카데미면 제법 학벌이 빵빵한 편이잖아?

그런데 작년에 졸업했으면 거의 1년 동안 경력이 없다는 말인데, 도대체 뭐한 거지?

“슬레어 항해사. 작년에 졸업했다면 배를 하나 골라 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혹시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지, 집안에 약간 문제가 있어서··· 그, 누님이 결혼하시기도 했고···.”

누나가 결혼하는 거랑 네가 1년 쉬는 게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집안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마.

사실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어? 어차피 지원자 1명에 뽑을 사람 1명, 지원만 하면 그냥 합격인데 뭐.

그냥 지금까지 만났던 수많은 미친놈들처럼 내 뒤통수를 칠 정도로 양아치만 아니면 오케이다.

“좋아요, 슬레어 항해사를 리버티 호의 삼등항해사로 채용하도록 하죠.”

내가 순순히 채용할 줄 몰랐는지, 불안해하던 눈이 동그랗게 변하더니 금세 희열에 젖는다.

내가 다른 사람의 표정 변화에 민감한 편이기는 하지만, 저렇게 표정으로 감정변화를 잘 드러내기도 쉽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선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등항해사에게 들었겠지만, 리버티 호에는 항해사가 없어서 삼등항해사라고 널널하게 일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하면 안 돼. 앞으로 기대하지, 슬레어 항해사.”

내가 괜히 엄포를 놓자마자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정말 기분을 알기 쉬운 녀석이다.

나는 슬레어가 서명한 고용확인서를 아인델프에게 주며 말했다.

“일등항해사가 개인실 알려주고, 배 구조 좀 소개해줘. 이건 회계사에게 전달하고.”

회계사라는 말에 아인델프의 얼굴이 급격하게 썩어들어갔다.

“이봐, 아인델프. 어차피 앞으로 한동안 봐야 할 텐데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어?”

“익숙해지지 않아서 문젭니다, 선장님··· 휴,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이왕이면 갑판장이랑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사시키고.”

누구인들 그 무시무시한 말의 지옥에 익숙해질 수 있겠냐 싶지만··· 어쩔 수 없잖아. 지금 우리 사정에 그보다 나은 회계사를 구할 수도 없는데.

* * *

벵가로쉬에서 나름 보람찬 결과를 얻은 우리는 다시 델라 항구를 향해 출발했다.

의뢰도 완수했고, 교역도 성공적이었으며, 항해사도 한 명 더 구했고, 선원도 9명 추가 고용해서 인원수도 적당해졌다.

그래서 리버티 호는 사랑과 행복을 싣고 즐거운 항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라는 결론이 나올 리가 없잖아?

출항 이후로 선주님의 보챔이 점점 심해지는 중이다.

슬슬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거지.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가족이다, 가족.

이건 이성이 이길 수 있는 분야가 아니잖아, 이겨서도 안 되는 거고.

일단 의뢰가 끝나고 별일 없으면 선주님의 고향인 멜라나인 항구로 간다고 달래 놓기는 했는데, 알다시피 정착 자금이 문제다.

돈이 없어서 선창을 채우지 못한다면 빈 공간만큼 손해가 늘 수밖에 없으니까.

* * *

“우웨에에엑!”

하아아아··· 지금은 파고가 고작 0.5미터 정도로 굉장히 평온한 상태다.

그리고 우리 신입 삼등항해사께서는 이 평온한 바다에 더러운 오물을 쏟아 부으며 5일째 주구장창 뱃멀미에 시달리는 중이시지.

저 새끼 집안일 때문에 경력이 없다는 거 순 뻥이야, 확실해.

살다 살다 저렇게 멀미 심하게 하는 놈은 처음 봤다.

그나마 멀미로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적응되게 마련이며, 기를 쓰고 당직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봐서 참아주는 거지.

좀비처럼 꾸역꾸역 선교로 기어 올라오는 슬레어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리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살집 좋은 팬더 한 마리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까딱하고 지나간다.

하얀, 아니, 노란색 치아가 있어야 할 자리에 휑하게 뚫린 구멍 하나가 보고 있는 내 마음을 시리게 한다.

저거 진짜 아픈데···.

저 팬더는 이번에 새로 고용한 선원 중의 한 명인데, 하루 만에 기존 선원들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갑판장이랑 네이선의 말은 잘 들었다.

하지만 우리 포술장 우르타 님이 포탄도 화약도 없는 대포를 관리하시느라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엊그제 우르타에게 대들다가 진짜 개처럼 맞았다.

아, 물론 우르타가 팼다는 것은 아니고 지나가던 네이선이 이 꼴을 보고 눈이 돌아가서 두들겨 패버린 것이다.

덕분에 저 선원은 귀여운 팬더로 분장하게 된 것은 물론 양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서 귀여움을 더하게 되었고, 그 대가로 치아 한 개를 상납했다.

이제 이 배에서 네이선에게 덤비는 녀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추가 효과로 나, 아인델프, 우르타, 심지어 오펜까지 무시하는 녀석이 싹 사라졌다.

역시 폭력은 정말 효과적인 통치 수단이다.

나는 리버티 호를 꿈과 희망이 가득한 꿈동산처럼 만들고 싶었는데, 어느새 대부분의 배들처럼 강제 수용소랑 비슷하게 되어가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우우웁, 선장님.”

“뭐야, 이쪽 보고 말하지 마!”

구역질을 겨우 참으며 슬레어가 나를 부르자, 발작적으로 반응하며 서너 발 물러선 후에 소리를 질렀다.

저놈, 벌써 선교에 다섯 번이나 토했다.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하는 걸 보면 또 신기하기는 한데···.

“우현 갤리선의 움직임이 조금··· 우웁!”

“우현이면 먼 바다 쪽인데 무슨 갤리선이··· 있네?”

그래, 이게 정상이다.

세상에 순조롭고 문제없는 항해라니, 그런 대박 사건이 일 년에 두 번이나 일어날 리가 없다.

우리는 지금 서쪽을 향하고 있고, 좌현 쪽이 대륙, 우현 쪽이 북쪽 바다다.

그런데 연안 항해에 유리한 갤리선이 굳이 우리 우현에 있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아?

보나 마나 저 앞에 어딘가에서 다른 한 척이 우리 진로를 가로막고 퇴로를 막은 상태로 공격하고 싶은 모양인데, 너무 뻔히 보이잖아.

나는 조타수를 밀어내고 타륜을 힘차게 돌리며 조범수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어차피 저 정도 갤리선이 우리랑 단독으로 붙자고 덤빌 리가 없다.

그러니까 포위망만 못 만들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그리고 원래 순간 가속 능력과 선회력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범선이 갤리선보다 유리하다.

< <110화> 지구의 지식을 나만 가진 거 맞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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