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불운의 아이콘 >
리버티 호가 북서쪽으로 침로를 바꾸고 가속을 시작하자, 갤리선 역시 눈치 보는 것을 때려치우고 열심히 노를 저으며 우리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방향이 방향이니만큼 갤리선은 빠르게 우리에게 가까워졌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경계 상태에 돌입한 선원 중에 긴장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노를 저어서 추진력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지속성이 짧은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갤리선의 전방을 지나는 순간 1km 안쪽까지 가까워졌던 두 배의 거리는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갤리선이 방향을 돌림으로써 위기 상황(?)은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무기고를 열어 선원들을 무장시켰던 갑판장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고, 그래도 바리케이트를 쌓지 않는 것이 어디냐며 네이선이 위로했다.
그리고 우르타는 선교로 올라와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선장님! 대포를 쐈어야 해! 진짜 딱 두 방만 ‘빵! 빵!’하고 쏴줬다면 이렇게 멀리 달려올 필요도 없었잖아요!”
두 번 쏜다고 도망갈지는 잘 모르겠다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데 벵가로쉬의 화약값이 보통 때의 2.5배였잖아. 포탄도 대충 1.5배는 넘었던 것 같고.
안 그래도 돈 문제 때문에 매일 머리카락이 무더기로 전사하는 판인데 너까지 꼭 이래야겠니?
“이번에 델라 항구에 도착하면 꼭 사줄 테니 그만 징징거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한마디만 하자. 이번처럼 굳이 포를 안 쏴도 되는 상황이면 그냥 안 쏘는 게 좋지 않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럴 거면 대포를 왜 달았어요?”
그 말투 좀 어떻게 하면 안 되겠어?
듣는 내가 다 혼란하다, 혼란해.
그리고 너도 당장 화약이랑 포탄을 사야 하는 입장이 돼 봐라.
그 포탄 한 발 쏠 때마다 순이익이 얼마씩 까지는 줄 아니?
그래도 원론적으로는 우르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서 대답할 말이 좀 궁하기는 하다.
“그러니까··· 대포는 진짜 전투 상황이 되었을 때 쏴도 되잖아?”
내가 적당히 대답하고 시선을 돌렸는데 뒤통수가 따끔따끔하다.
참다못한 내가 마지못해 다시 시선을 우르타에게 돌리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우르타가 보였다.
“선장님, 설마 그거 진심이에요? 고작 대포 세 문으로 전투에서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내가 아무리 대포를 잘 쏜다고 해도, 실제 전투 상황에서 고작 세 문으로는 별 도움이 못 되는 건 알거든요?”
뭘 그렇게 팩트로 때리고 그래, 사람 민망하게.
함포의 명중률은 바다의 상황이나 풍향과 풍속, 포수의 역량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처참할 정도로 낮다.
땅 위에서 고정된 목표를 향해 쏴도 제대로 안 맞는 것이 이 시대의 대포인데,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배 위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작은 선박(?)을 향해 쏘는데 잘 맞을 리가 있나?
10m 이내에서 근접사격을 한다면 그나마 잘 맞기는 하지만, 애초에 그 정도 거리가 되면 대포에 매달리기보다는 백병전을 준비하는 게 낫다.
그러니까 리버티 호의 대포 6문은 전투용이라기보다는 견제용, 위협용이라고 보는 게 맞다.
잘 맞지도 않는데 어떻게 견제나 위협이 되냐고?
잘 맞지 않는 거지, 안 맞는 것은 아니잖아?
“알았어, 알았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우리 포술장님이 판단해서 쏘시면 되는 거지. 곧 포탄이랑 화약 사줄 테니까 좀 참아.”
이후로도 한참을 쫑알거리던 우르타는 결국 갑판장님께 귀를 잡혀서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나갔다.
그리고 우르타의 자리를 차지한 아인델프가 상황을 보고했다.
“선장님, 무기 회수하고 평시 항해로 전환했습니다. 달리 지시하실 내용이 있으십니까?”
“아니, 그런데 이 근처는 원래 해적들 별로 없지 않았어?”
“그건 저도 잘···.”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당황하는 아인델프를 보던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다 항해 경력도 짧고, 그나마 항해 경력 대부분도 연안 경비나 하면서 보낸 아인델프가 해적에 대해서 잘 알 리가 없다.
결국 해적에 대한 이야기는 상황 수습이 끝나고 선장실에서 갑판장님과 이야기를 해야 했다.
“갑판장님, 이상하지 않아요? 이 근처는 해적이 없지 않았나?”
“흠, 나도 이상해서 고민하는 중이네.”
“혼자서 활동하는 녀석도 아니고 최소 두 척이 작전 짜고 덤빈다? 일레드 왕국 해군의 앞바다나 마찬가지잖아요, 여기. 진짜 이상한데?”
한참 동안 나와 이런저런 생각을 교환하던 갑판장님은 갑자기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
“일레드 왕국이 묵인한 것이라면?”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사략해적이라는 소린데요? 아무리 사략해적이라도 적성국도 아니고 동맹국인 벨로키나 왕국의 상선을 공격하지는 않아요. 그놈들 국적기도 바티아넨 왕국이었고.”
내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반대의견을 제시하자, 에른스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사략해적이라고 안 했어. 그냥 해적이라고 했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장, 잘 생각해봐. 일레드 왕국이 시논 섬과 케르빈 섬을 손에 넣은 지도 벌써 수십 년이 흘렀네. 그런데 일레드와 시논 섬 사이에 있는 군도를 거점으로 하는 해적들이 아직도 돌아다니는 게 이상하지 않나?”
“그거야 그쪽 군도를 제압하는 데 필요한 노력에 비해 실익이 없으니까 내버려 두는 것 아닙니까? 막말로 그놈들이 일레드 본토와 시논 섬 간의 항로를 방해하는 것도 아니구요.”
“굳이 점령할 필요도 없어. 그냥 그 강력한 함대가 주기적으로 청소만 해줘도 거기에 있는 해적들은 죄다 다른 데로 도망갔을 걸? 막말로 시논 섬 북서쪽에도 군도가 있지 않나?”
그럴듯하기는 한데, 여전히 나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갑판장님은 쉽게 말했지만, 주기적으로 함대를 파견해 위력정찰을 한다는 것은 전투가 없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행정력과 자금이 소모되는 일이다.
그런데 영토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는 그곳에 끝없이 행정력과 자금을 쏟아 붓는다고?
각국의 해군이 돌아다니는 내해에서도 해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어떤 나라도 모든 국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잖아.
“단순하게 땅만 놓고 보면 그렇지. 그런데 그 해적 놈들을 이용할 수 있다면?”
“하하하···. 에이, 설마요.”
나는 에른스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 채고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어색하게 웃었지만, 그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일레드 왕국이 세계의 패권을 쥐고 싶어 한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몰로스 제국이라는 강력한 벽을 치우기 전까지는 다른 국가들과 동맹이나 친선관계를 유지해야만 하지. 그래서 내해의 제해권을 꽉 쥐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렇기는 하죠.”
“그렇다고 다른 동맹국들이 교역을 해서 부강해지고 그 돈으로 해군력을 강화하는 것을 손가락만 빨면서 지켜보는 게 달갑지는 않을 거야. 명색이 동맹국인데 사략해적을 돌릴 수도 없고 말이지. 하지만 해적이라면?”
“갑판장님, 그거 다른 나라에 걸리면 그냥 국제 왕따라구요. 일레드 왕국이 그렇게 위험한 도박을 해야 할 정도로 코너에 몰린 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세계의 패권을 쥐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 그리고 시논 섬과 케르빈 섬 근처는 다른 국가의 배들이 다니지도 않아. 비밀유지가 딱히 어려울 것도 없을걸?”
시논 섬과 케르빈 섬은 내해에서 가장 커다란 섬이지만, 일레드 왕국이 점령한 뒤로는 완전히 군사기지화 되어 타국의 선박들은 근처에 접근도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 근처의 군도에서 일레드 왕국군이 무슨 짓을 해도 타국은 내부에 첩자를 심지 않는 이상 알아내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음모론은 너무 무섭잖아?
그리고 우리 갑판장님이 일레드 왕국에 유감이 상당히 많으셔서 사적인 감정이 듬뿍 들어간 예측인 것 같다.
* * *
다시 델라 항구에 돌아온 우리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게론드는 교역품 견본을 가지고 교역소로 향했고, 다른 나라의 항구를 처음 방문하는 슬레어는 아인델프를 따라나섰으며, 드웰과 갑판장님은 술집으로 달려가셨다.
며칠 전부터 위스키가 떨어졌다고 투덜거리시더니 교역품을 하역하기 전에 위스키부터 사 오실 모양이다.
그리고 갑판장님을 따라가려던 네이선은 내게 덜미를 잡혔다.
“어디 가?”
“네? 저는 할 일 다 했는데요, 선장님.”
“너는 나랑 후작 저택 가야지?”
“내가?”
“응, 니가.”
반항하려던 네이선은 나를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멈칫하더니 결국 백기를 들어 올렸다.
“알았어. 나갈 때 불러.”
“옷 좀 깔끔한 걸로 입어! 내가 전에 사 준 거 있지?”
“알았다구우···.”
터덜터덜 자기 방으로 향하는 네이선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뒤로 돌았는데, 바로 앞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보였다.
아이 씨, 깜짝이야.
“뭐, 뭐야? 왜 거기 서 있는데? 아니, 언제부터 서 있었어?”
“선장님, 나도 데리고 가요?”
“아니, 네이선만 있으면 돼.”
바다에는 해적이 있고 땅에는 노상강도와 산적이 들끓으니 네이선의 무력은 필요하지만, 우르타는 별 필요가 없다.
내가 무슨 대포를 끌고 갈 것도 아니고 말이야.
게다가 우르타 이 녀석은 거의 움직이는 폭탄 수준이잖아.
“나 마차 잘 모는데?”
“마부까지 빌려서 갈 거야.”
“네이선이랑 같이 가면 심심할걸?”
“심심한 편이 네가 사고 치는 것보다는 낫지.”
“나도 후작 저택 가보고 싶다고오오오오!”
“시끄럽고, 심심하면 오펜이랑 놀아.”
“진짜 나 사고 안 칠게, 응?”
······.
결국 내가 졌다.
이건 뭐 숫제 내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버리니 이길 수가 있나?
그리고 생각해보면 우르타는 내가 뭘 시키기 전에는 사고를 별로 안 친 것 같기도 하다.
아무것도 안 시키고 그냥 병풍처럼 있기만 하면 상관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교역품을 비우고 신나게 게론드가 오스팔트 가문의 공예품 상점으로 달려가는 것을 확인한 후, 우리 셋은 마차를 예약하러 나왔다.
“그런데 너 진짜 마차 몰 줄 알아?”
“그럼, 배 타기 전에는 마부도 했었거든.”
그건 진짜 몰랐다.
“왜 마부를 했는데?”
“마부! 엄청 넓은 땅을 돌아다닐 수 있잖아! 물론 배가 더 좋지만 말이야. 그때는 배를 탄다는 생각을 못 했거든.”
정말 일관적인 녀석이군.
우르타가 거짓말을 할 녀석은 아니니까 일단 전에 아인델프가 빌렸던 작은 마차를 빌렸다.
그리고 해의 위치를 확인한 후에 우르타를 독촉했다.
“조금 빨리 가야 할 것 같은데? 가는 길은 다 이해했어?”
“그럼, 그럼, 걱정하지 마!”
우르타가 자신 있게 말과 마차를 연결하는 사이, 나는 마구간으로 가서 짚 한 덩이를 가져왔다.
마구간 지기가 내 요청에 피식 웃더니 깔개 모양으로 예쁘게 묶인 짚 더미를 건네주며 당연하다는 듯이 돈을 요구하는 꼴이, 나 같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 모양이다.
내가 가지고 온 짚 더미 하나를 네이선에게 건네자 네이선이 의문부호가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너도 마차 안 타봤지?”
“응? 아니, 그건 왜?”
“잔말 말고 엉덩이에 피멍 들기 싫으면 마차 안에 이거 깔아.”
“아, 아. 그래, 알았어.”
뭐지? 이놈도 마차 좀 타봤나?
“리안, 뭐해? 시간 없다며? 빨리 가자!”
“그, 그래. 제발 신난다고 사고 치지 마.”
“걱정 말라니까?!”
그렇게 준비를 마친 우리는 우르타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후작 저택으로 향했다.
아, 물론 우르타를 완전히 믿을 수 없어서 하루분의 비상식량과 정말 대충 그린 지도도 챙기기는 했는데, 우르타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는 자기를 믿네, 못 믿네,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한동안 삐질 것 같거든.
짚 더미를 깔아도 여전히 마차 안은 그리 편안하지 않았고, 의외로 담담하게 앉아있는 네이선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커브 길도 아닌 것 같은데?
“야! 우르타, 무슨 일 있어? 왜 속도를 늦추는 거야?”
“아앗, 리안,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
“뭐? 길 잘 외웠다며?”
내가 짜증이 나서 마부 쪽으로 향하는 창을 열어젖히자 흙먼지가 마차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콜록, 콜록, 야! 길을 얼마나··· 응?”
우리가 있는 곳은 야트막한 구릉의 오솔길 같은 곳이었는데, 대략 100미터 정도 앞쪽이 나무와 돌로 인해 엉망진창으로 막혀있었다.
“산사태라도 난 거야? 길이 왜 저래?”
“리안, 아무래도 산적인 것 같은데?”
“으음, 이쪽이 지름길 같았는데··· 헤헷, 미안.”
네이선이 불길한 추측을 내놓았고, 우르타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어이구, 이 화상아. 이게 미안하다고 끝날 일이냐?
그리고 네이선의 추측을 확인해주듯 시끄러운 소음 사이에 걸걸한 외침이 들려왔다.
“마차에서 내려! 반항하지 않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창을 통해 앞쪽을 보니, 수풀 속에 매복했던 것으로 보이는 일단의 남자들이 거의 멈춰 선 마차의 앞을 막고 흉기를 흔들고 있었다.
“하필이면 탈영병, 아니, 용병인가?”
네이선이 혀를 차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놈들의 무장은 제법 훌륭했다.
스피어, 글레이브, 아밍 소드, 워 액스, 도리깨, 몽둥이, 중구난방이기는 한데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한 징집병 수준의 산적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 그리고 저 뒤쪽에 활 든 놈이 둘, 쇠뇌를 든 놈도 하나 보인다.
숫자는 대략 열댓 명, 그런데 장거리 무기까지 있다면 좀 힘든데?
< <111화> 불운의 아이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