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우르타가 마부를 포기한 진짜 이유 >
생각, 생각을 하자.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야.
어떻게든 이 난관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굳은 표정의 네이선이 외쳤다.
“리안, 일단 나가자.”
“이길 수 있냐? 저기 활 든 놈도 있는데.”
내 부정적인 말에 네이선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항복할 수는 없잖아?”
항복하면 적당히 뺏고 살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마차와 말이 조금 아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목숨값보다는 싸지.
우리 드웰 선주님께서는 목숨값으로 250만 로스를 포기하셨잖냐.
“항복하면···.”
“살려줄 리가 없잖아. 리안, 왜 그래? 숫자가 많기는 하지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그렇지? 살려줄 리가 없지···.”
지구의 깡패나 강도와는 다르다.
저런 놈들은 보통 사람 죽이는 것을 개미 눌러 죽이는 거랑 별로 차이를 못 느끼니까.
괜히 뒤통수 근질근질하게 목격자를 남기기보다는 살인멸구를 좋아하는 놈들이라는 거다.
아예 살인을 즐기는 놈들일 수도 있고.
“전쟁터에서 굴러먹던 능력자들이면··· 절반?”
“뭐가? 승률? 활이랑 쇠뇌는?”
“어··· 그건 어떻게 방법이 없는데.”
“에휴, 나가자, 일단 나가기는 해야지. 우르타 녀석이 걱정인데···.”
이미 마차는 멈춰 섰고 마차의 특성상 뒤로 돌아 나가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싸워야지 뭐.
우르타를 불러들여서 마차 안에서 싸운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깔끔하게 포기했다.
산적들은 우리가 마차 안에 숨으면 말만 떼서 튀어도 되고, 팔을 휘두를 공간도 안 나오는 좁은 마차 안에서 빈약한 마차의 벽을 믿고 버티는 것이 딱히 유리해 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놈들이 불이라도 지르면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하잖아.
밖으로 나온 나와 네이선은 마차를 등진 상태로 우르타를 가운데에 놓고 칼을 뽑았다.
말은 일단 방치하자.
저놈들도 비싼 말을 먼저 죽인다는 해괴한 발상을 하지는 않겠지.
말이라는 놈이 덩치가 있는 만큼 궁수와 쇠뇌수의 사선을 제한하는 효과도 있을 거다.
“어이 꼬맹이들, 고작 셋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당장 그 칼 치우고, 가진 것을 다 놓고 도망가면 쫓지는 않으마. 우리가 몇 명인지 안 보여?”
원래 악당들이 ‘무기를 버리면 살려는 드릴게.’라고 말하는 것은, ‘너희가 반항하면 우리가 다칠 것 같으니 곱게 죽어라.’라는 말과 같은 거다.
“개소리 말고 선택해. 첫째, 곱게 장애물을 치우고 도망간다. 둘째, 방금 입 턴 놈의 시체를 구경하며 장애물을 치우고 도망간다. 셋째, 우리를 귀찮게 하기 위해 장애물을 안 치우고 다 죽는다. 골라!”
그리고는 우르타와 네이선만 들리도록 조용하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저놈들 분명히 한 번은 쏜다, 긴장하고 한 번만 잘 피해. 놈들 사이에 파고들면 활이랑 쇠뇌는 못 쓸 거야. 우르타는 안 되겠으면 그냥 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내 말에 기가 막혔는지 잠시 말이 없던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뭐?! 이런 개잡종들이! 얘들아, 다 죽, 헉!”
역시 네이선이다.
놈이 입을 열기 한 박자 전에 튀어 나간 네이선은 다짜고짜 그놈에게 칼을 휘둘렀고, 딱지치기로 대장을 맡은 것은 아닌지 그 와중에 놈이 네이선의 칼을 막았다.
자세는 형편없이 무너졌지만 말이다.
“우르타! 가자!”
나와 우르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네이선의 좌, 우로 달려가며 칼을 휘둘렀다.
배경이 바다 위의 배가 아니라는 것뿐이지, 해적들과의 백병전과 똑··· 같지 않잖아!
개나 소나 짧은 커틀라스, 숏 소드, 단도를 들고 있는 선상 백병전과 달리, 이놈들의 무기는 더 길고, 심지어 길이가 제각각이었다.
기세 좋게 달려들어 공격한 것은 딱 두 번, 그 뒤로는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쇠붙이를 쳐내며 연신 뒤로 물러서기만을 반복해야 했다.
우르타는 벌써 저쪽에서 특유의 반사신경으로 피하기에만 급급하다.
다행인 것은 화살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것과, 지속적으로 비명이 들린다는 것이었다.
“커허허···.”
쿵.
또 한 놈이 자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까부터 소리를 지르던 놈도 조용해진 것을 보면 죽거나 기절한 모양이다.
놈들의 중앙으로 파고들었으니까 완전 포위된 상태일 텐데,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적의 수를 줄이고 있다니 네이선의 실력은 도대체 어디까지 성장한 걸까?
그사이에 또 한 놈의 팔을 베어버린 모양이다.
“으아아악! 내 팔, 내 팔!!”
인간의 소리가 아닌 것 같은 고음의 비명이 고막을 강타한다.
“흐읍!”
이크! 소리에 신경 쓰다가 내 어깨에도 글레이브가 스쳤다.
바로 화끈해지는 것이 슬쩍 베인 수준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상처를 확인할 시간조차 없었다.
하단으로 찔러 들오는 창날을 피해 또다시 물러서고, 그러면서 날아오는 칼날을 쳐내고, 다시 글레이브를 피하고··· 그러다가 등에 딱딱한 것이 닿는 순간 본능적으로 재빨리 자세를 낮췄다.
퍼억!
간발의 차이로 내 머리가 있던 자리에 워 액스가 꽂혔다.
그리고 내 코앞에서 당황한 얼굴을 한 놈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 주었다.
이제 한 놈 잡았는데 벌써 마차까지 밀린 거야?
“끄르륵···!”
내게 목을 베인 녀석이 핏물이 솟구치는 목을 붙잡고 뒤로 넘어가는 잠깐 사이에 주변을 둘러보니, 흉흉한 표정의 산적들 사이에 한 가닥 당황이 보인다.
우리 중에 네이선 정도의 실력자가 있을 줄 몰랐던 거지.
그런데 나랑 우르타는 이제 한계, 아니, 나는 일단 한계다.
과도한 긴장감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가는데, 나를 찌르려고 힘껏 창을 뒤로 뺐던 놈의 머리통에 곧은 나무가 자라났다.
그리고 튕기듯이 반대 방향으로 나자빠지고, 뒤이어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다 죽여!”
“돌격, 돌격!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의외의 상황에 나와 산적들 모두 당황했고, 우리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 사이 언제 나타났는지 산적들의 뒤를 잡은 일단의 병사들이 산적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난입한 병사들의 수는 대략 20여 명, 하지만 그 위압감은 대단했다.
롱 스피어를 든 여덟 명의 병사들은 일렬로 서서 산적들을 한 군데 뭉치치 못하게 압박했고, 아밍 소드와 배틀 액스를 든 다른 병사들이 혼란에 빠진 산적들을 하나씩 바닥에 눕혀주고 있었다.
그리고 단연 빛나는 사람 한 명,
하프 플레이트를 갖춰 입은 젊은 남자였다.
양손으로 롱 소드를 잡고 휘두르는데, 그 앞에 선 산적들이 아주 추풍낙엽이 따로 없다.
처음부터 숫자도 열세였고, 무장과 훈련도도 부족한 산적들이 기습까지 당했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병사들이 난입한 지 5분도 채 지나기 전에 살아남은 세 명의 산적은 바닥에 엎드려 울면서 항복했고, 항복한 산적들은 갑옷에 피 칠갑을 한 남자가 손수 목을 잘라 주었다.
“도적놈들이 항복이라니,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어차피 참수형일 놈들이.”
와 씨, 살벌하네.
그래도 일단 감사의 말을 전해야겠지?
대충 병사들을 대하는 걸 보면 기사님이신 모양이다.
“저기, 감사합니다, 기사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진짜다. 진짜 많이 죽인 것 같았는데, 네이선이 죽인 산적이 고작 네 명이었고, 산적은 모두 30명 정도였으니까.
미처 몰랐는데 마차 뒤쪽에도 몇 명이 숨어있었고, 풀숲에서 안 나온 놈들도 몇 명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사이좋게 다 죽어서 바닥에 누워있다.
병사들의 돌격이 딱 30초 정도만 더 늦었어도 나는 아마 저기 바닥에 나뒹구는 시체 중 하나가 되었을 거다.
“흠, 행상은 아니고, 여행자인가? 어디로 가는 길이지?”
“스코타 후작 저택을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뭐? 후작 저택? 무슨 일이지?”
후작 저택이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예상대로 후작 휘하의 기사인 모양이다.
음, 후작의 영지니까 당연한 말인가?
“죄송하지만 외부인에게 말하기는 조금 곤란한···.”
“나는 후작 각하를 모시는 이튼 제르넹이다. 무슨 일인지 밝혀라!”
슬쩍 롱 소드의 손잡이를 잡아가는 것이 이번에도 버티면 칼빵부터 먹일 기세다.
역시 귀족 놈들은 상대하기 힘들다···.
“아, 이튼 경이시군요. 저는 후작가의 아가씨께서 부탁하신 일을 마치고 보고를 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후작 저택의 아가씨라면 설마 엘리안 아가씨를 말하는 것이냐?”
“네, 맞습니다. 기사님.”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그보다, 후작 저택으로 간다는 녀석이 왜 이쪽에 있는 것이지?”
“···네?”
“후작 저택으로 가려면 전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야 했을 텐데?”
우르타 이 자식···.
“수상한 녀석이군. 어차피 우리도 복귀하는 길이니 너는 우리와 함께 간다. 만약 거짓이라면 목숨을 내놔야 할 것이다.”
마부 놈은 어차피 길도 모르고, 병사들이 공짜로 호위까지 해준다면 나로서는 딱히 아쉬울 것도 없다.
“감사합니다, 이튼 경.”
“감사할 일인지는 끝나봐야 알겠지. 현장이 정리되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상처를 치료하고 마차를 손보도록.”
* * *
베인 어깨에 지혈도 하고 우르타도 혼내려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으윽!”
“으아, 으아, 어, 어떡하지? 네이선, 괜찮아?”
이게 무슨 소리야?!
“뭐야? 우르타, 네이선 무슨 일 있어?!”
“리안! 리안! 어떡하지?! 네이선이···!”
우르타가 거의 울먹이다시피 내게 매달렸고, 차분한, 아니, 힘없는 네이선의 말이 뒤를 따랐다.
“우르타, 호들갑 떨지 마. 그냥 좀 다친 거잖아.”
“뭐?! 많이 다쳤어?!”
내가 급히 뛰어 들어가자, 마차 안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왼쪽 팔뚝에 단단한 나뭇대가 박혀 있는 네이선이 보였다.
“화살? 언제 그런 거야?”
“처음에, 네가 날아올 거라고 해서 경계는 했는데, 한 발은 도저히 피할 수 없었어.”
그러니까 첫 돌격을 하자마자 두 발의 화살과 한 발의 볼트가 날아왔고, 두 발은 피하고 한발은 팔로 막았다는 말이지?
그 상태로 해적 네 놈의 목을 따버렸고?
화살의 끝부분을 잘라내서 내가 미처 못 본 모양인데, 상처가 꽤 심해 보였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에는 무리가 없는 걸로 봐서 신경은 손상되지 않은 것 같기는 한데, 소독도, 봉합 기술도 엉망진창인 이 세상에서 이 정도면 목숨이 걸린 상처다.
항생제도 안 가지고 왔는데 어떡하지?
잠시 머리를 굴리던 나는 내 상처를 대충 묶은 후 이튼을 찾아갔다.
“저기, 이튼 경.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언제 데리고 왔는지, 병사들이 가져온 말을 타고 현장을 지휘하던 이튼은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말을 해보라는 듯이 턱짓을 했다.
“제 동료가 지금 상처가 심해서 의사에게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경을 따라갈 테니 다른 이들은 마차와 함께 보내주실 수 없습니까?”
“불가.”
“치료를 받지 못하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제발 자비를···.”
“애초에 후작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몰라도, 말을 꺼낸 이상 너희는 나와 함께 간다.”
갑갑한 소리만 하는 놈에게 욱하는 성질머리가 올라오는 것을 롱 소드를 보며 참고 있는데, 뒤에 한 병사가 내 허리를 쿡 찌르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좀 봐줄 테니 그만하시게.”
소리가 들렸는지 이튼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관심 없다는 듯 바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떠들어도 어차피 우리를 같은 인간으로 취급도 안 하는 것이 귀족이라는 놈들의 습성이니, 더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일단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는 나를 따라오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병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의사십니까?”
“의사는 무슨, 그냥 전쟁터에서 굴러먹다 보니 간단한 응급 치료를 어깨너머로 배운 것뿐이지. 아쉬운 대로 어떻게든 치료를 받는 것이 좋지 않겠나?”
정식 의사도 믿을 수 있을까 말까 하는 판에 야매 의사라니.
일단 하는 걸 봐서 내 상식으로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고 하면 막아야겠다.
항생제가 만능 치유 포션은 아닌 만큼, 일단 화살은 뽑고 봉합은 해야 할 테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병(老兵)의 응급처치는 훌륭했다.
뼈에 걸리지 않았으니 차라리 관통시키는 것이 낫다면서 화살을 밀어 반대쪽으로 화살촉이 튀어나오게 할 때는 기함을 할 정도로 놀랐지만(참고로 우르타가 비명을 질렀고, 네이선은 혀를 씹었다) 낚싯바늘처럼 굽은 바늘을 꺼내 상처를 봉합하는 것은 뭔가 숙련자의 포스가 느껴졌다.
“으으으,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아. 네이선이 무슨 찢어진 옷도 아니고 왜 저렇게 꿰매는 거야?”
수술 받는 네이선은 조용한데 옆에 있는 우르타가 더 난리다.
그런데 저거 소독 안 해도 괜찮으려나?
빨리 배로 돌아가서 항생제를 먹여야 할 텐데···.
하지만 우리의 걱정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병사가 우리 마차에서 나가기 무섭게 이튼은 출발을 명했고, 결국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네이선을 반쯤 눕힌 채로 우리 역시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이놈들이랑 같이 가면 보병이 걷는 속도로 가야 하잖아!
빨리 움직이면 저녁쯤에는 네이선에게 항생제를 먹일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최소 이틀이다.
배는 밤에도 움직일 수 있지만, 육상에서 야간 행군은 거의 미친 짓 취급을 받으니까.
< <112화> 우르타가 마부를 포기한 진짜 이유 > 끝
작가의말
짜잔! 네이선은 괴물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리안과 우르타의 증언에 의하면 네이선의 피는 빨간색이라고 합니다!
저 시대에 태어났으면 저도 우르타랑 비슷했을 것 같은데,
네비게이션이 있는 세상에 태어나서 참 다행입니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