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서로를 위한다는 것 >
답답한 내 마음과 상관없이 우리와 동행하는 군대는 그들이 원하는 속도로 행군했다.
당연히 중간 중간에 쉬는 시간을 가졌고, 결국 나는 다시 이튼을 찾아 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인기척을 내자 나를 힐끗 본 이튼이 조용히 뇌까렸다.
“부르려던 참인데 잘 왔군.”
“이튼 경, 제 동료의 상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저희는 정말 아가씨의 부탁을···.”
“정말 아가씨가 맞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그자, 알렌 미우라프의 명령이 아니냐고 묻는 거다.”
“알렌 경 말씀이십니까?”
“경은 무슨, 기사의 명예도 팔아먹은 자 따위.”
이건 또 무슨 말이람?
설마 권력다툼이나 정치질, 뭐 이런 쪽인가?
그런데 정체를 숨기고 왕녀의 호위기사나 하는 알렌이, 후작의 기사로 보이는 이 남자와 권력다툼을 할 건덕지가 있기나 한가?
내가 대답할 말이 궁해 조용히 있자, 이튼이 인상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알렌 그자는 후작 각하를 새 주군으로 모시지도 않으면서 아가씨의 옆에 찰싹 붙어있지, 더러운 자식. 아가씨께서 후작 각하께 몸을 의탁했다면 응당 후작 각하께 충성을 맹세하거나 떠나는 것이 당연하거늘.”
그렇게 되는 건가?
왕녀님이 왕녀라는 것을 숨기고 후작의 손녀(확실하지는 않다)로 살고 있으니, 알렌의 위치가 굉장히 애매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왕녀님이 복권을 아직 포기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게 이 남자가 화를 낼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대답은 해야겠지?
“저는 분명히 아가씨의 명을 받았습니다. 물론 알렌 경이 함께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러니까 그게 무슨 명인가? 우리 제르넹 가문은 수대를 이어온 후작 가문의 봉신이니 내게는 말해도 된다.”
“그게 아가씨의 개인적인 부분인지라···.”
머릿속에서 빨간색 경고등이 깜빡거린다.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왠지 의뢰 내용을 떠벌리면 누군가 하나는 인생 조질 것 같다.
“쯧, 물러가라. 멍청한 놈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결국 우리를 따로 보내 주거나 속도를 좀 올려달라고 하려던 본래 목적은 말도 꺼내지 못하고 나는 하릴없이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더 말하면 칼부터 뽑을 것 같은데 어쩌라고···.
* * *
결국 그날 밤이 되어서야 우리는 후작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무사히’ 도착하지는 못했다.
관통상을 입은 네이선은 통증을 참느라 땀을 뻘뻘 흘렸고, 나는 열이 올라서 제대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칼도 내팽개치고 도망다닌 우르타만 자잘한 상처를 입어서 유일하게 멀쩡하다는 것이 넌센스였다.
마부를 해야 할 우르타라도 멀쩡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열이 좀 난다고 드러누워도 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마차 밖으로 나갔다.
“리안, 몸은 좀 괜찮아?”
“응, 아직 심하지는 않아. 네이선도 괜찮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와 마차를 번갈아 가며 보는 우르타를 다독이고 문 앞에서 경비병과 이야기 중인 이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일전에 보았던 시종이 종종거리며 나와서 이튼에게 인사를 하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팔과 얼굴을 살피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험한 일을 당하신 모양이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튼 경이 당신의 신원을 확인해 달라고 하셨거든요.”
시종이 다시 이튼에게 다가가 몇 마디를 건네자 이튼은 기분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병사들을 인솔해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내게 다시 돌아온 시종이 웃으며 나를 안내했다.
“아직 아가씨께서 침소에 들지 않으셨으니, 바로 만나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몸은 좀 괜찮으세요? 열이 심하신 것 같은데.”
“전 아직 괜찮습니다. 그런데 마차 안의 제 동료가 좀 크게 다쳤습니다.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걱정 말고 저를 따라오시죠. 함께 오신 분들은 다른 사람이 안내할 겁니다.”
“그럼 잠시 동료들에게 이야기하고 오겠습니다.”
마차로 돌아간 나는 우르타에게 네이선을 부탁하고, 마차 안에서 의뢰 결과물을 담은 가방을 들고 나왔다.
“리안, 정말 혼자서 괜찮아? 너도 많이 아파 보여.”
우르타가 걱정을 했지만 나는 일부러 힘차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일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것만 전달하면 되는 일이야. 열이 조금 나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
시종을 따라서 이전에 방문했던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 전과 같은 방식으로 왕녀님이 등장하셨다.
“평안하셨습니까, 아가씨. 부탁하신 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많이 다친 것 같은데 괜찮나?”
“오는 길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만, 다행히 후작 가문의 기사인 이튼 경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왕녀의 안색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이튼 경인가···. 혹시···.”
“아가씨의 명령을 받았다고는 했지만, 내용은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대는 원래 눈치가 비상했지. 잘했다.”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공손하게 테이블 위에 올리자, 알렌 경이 앞으로 나와 가방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군. 자네가 직접 알아봤나?”
“아닙니다. 정보를 취급하는 자에게서 얻었습니다.”
“정보상이라. 위험했을 텐데?”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일개 뱃놈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것은 술자리에 떠도는 헛소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음.”
잠시 서류를 확인한 알렌이 공손하게 왕녀에게 서류를 건넸다.
* * *
그리고 잠에서 깨니 낯선 천장이 나를 반겼··· 뭐야?!
기억의 연결이 워낙 뜬금없어서 당황해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하녀복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일어나셨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식사와 약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 저기··· 여기가 어디죠?”
살짝 웃은 여자가 대답했다.
“스코타 후작 저택입니다. 손님께서는 응접실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으셨어요. 의사가 상처를 치료했고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했으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쩐지 방이 호화롭더라.
좋은 등급의 게스트 룸을 줬을 것 같지는 않은데, 후작 저택이라 그런지 고급 여관도 마구간으로 만들어 버릴 수준이다.
내가 멍하니 방을 감상하는 사이에 하녀는 방을 나갔고,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상처에서는 여전히 통증과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지만, 다행히 머리에는 열이 없는 것 같다.
이물감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약 같은 것을 바르고 다시 붕대를 감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네이선은 괜찮으려나?
네이선을 걱정하며 굳은 몸을 풀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우르타와 네이선이 구르듯이 들어왔다.
“리안! 괜찮아?!”
“아니, 노크를 하라고 도대체 내가 몇 번을 말하냐?”
“갑자기 쓰러졌다며!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우르타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소리를 질렀다.
네이선도 그 기세에 밀려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리나 긁고 있을 정도로 박력이 대단했다.
덕분에 왠지 머쓱해진 나는 우르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 고열 때문에 잠깐 정신을 잃은 모양이야. 지금은 열도 없고 괜찮아.”
“그러니까 내가 몇 번이나 괜찮냐고 물어봤잖아! 왜 거짓말했어!”
“아니, 그때는 진짜 괜찮을 것 같았···.”
내가 변명을 하려는데 네이선이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내 말을 끊었다.
“이번에는 네가 잘못한 거 맞아. 봐, 너는 계속 나를 걱정했는데 실제로는 네가 더 아팠던 거잖아. 우리의 선장은 너야, 우리를 걱정하기 전에 네 몸을 먼저 챙겨야지.”
아픈 건 난데 왜 내가 욕을 먹는 분위기냐.
그래도 왠지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그래, 솔직히 이번에는 나도 이렇게 아플지 몰랐다. 미안해. 그리고 네이선 너는 좀 어때?”
“음, 의사 양반이 특별히 문제는 없을 거라던데. 봉합도 잘 되었다더라고. 그리고 왜 너는 봉합을 안 했냐고 물어보던데?”
너는 양쪽으로 서너 바늘만 꿰매면 되지만 난 최소한 스무 바늘 이상 꿰매야 할 정도로 상처 면적이 넓잖냐.
무슨 프랑켄슈타인도 아니고 팔에 박음질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물론 상처가 깊은 줄 알았다면 흉터를 감수하고라도 꿰맸겠지만 말이지.
“어···. 그럼 혹시 내 상처도 꿰맸냐?”
“그렇지 않을까? 우리도 치료과정은 못 봤어.”
아, 백옥 같은 내 피부에 스크레치라니! 아니, 봉재자국이라니! 성형수술도 없는 세상인데 정말 속상하구만.
* * *
우리가 쓸데없는 잡담을 하는 사이에 하녀들이 3인분의 식사와 약을 가지고 왔고, 식사를 마침과 동시에 우리는 다시 왕녀님의 호출을 받아 응접실에 들어왔다.
“몸은 좀 괜찮은가?”
“큰 신세를 졌습니다, 아가씨.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럴 것 없다. 내 부탁을 들어주다가 생긴 일이니. 그리고 이것은 내 보답이다. 기대 이상의 결과라 더 챙겨주고 싶지만 내 상황이 여의치 않구나.”
“감사합니다, 아가씨. 부디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주머니를 챙기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시종이 나가는 문을 열었다.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축객령을 받은 이상 나가야만 했기에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그때, 왕녀의 말이 뒷덜미를 잡았다.
“정말 내게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아가씨. 말씀을···.”
알렌 경이 다급히 왕녀님의 말을 막으려 했지만, 왕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대답해 보거라. 그대도 서류를 보았겠지. 내게 좋은 결과가 있겠느냐?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겠느냐? 아니, 그 전에 내가 선택이라는 것을 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녀의 말에서 느껴지는 울분과 회한, 체념과 갈망에 걸음을 멈춘 나는 천천히 뒤로 돌아서 말했다.
“아가씨,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선택하고 싶다면 선택 당하는 위치에 서 계시지 말고 선택할 수 있는 자리로 움직이십시오. 선택지가 마음에 안 든다면 판을 깨버리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무슨 말이냐고? 나도 모른다.
그냥 대충 그럴듯하게 떠든 거다.
하지만 원래 깨달음이라는 것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고 하니까, 그 안에서 왕녀님이 뭐라도 얻을 수도 있잖아.
내가 왕녀님의 상황을 속속들이 다 아는 것도 아니니 어차피 현실적인 조언은 해줄 수 없다.
내 말을 들은 왕녀가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자, 뒤에 있던 알렌 경이 빠르게 앞으로 나와 왕녀를 가리며 시종에게 말했다.
“손님들을 모시게.”
“네, 알렌 경. 손님들, 이쪽입니다.”
우리를 저택의 입구에 세워진 마차로 안내한 시종이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마차 안에 하루분의 식량과 델라 항구까지의 상세한 지도를 넣어 두었습니다. 안전한 길이니 오실 때처럼 산적이나 강도를 만나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마차도 수리해 두었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럼 안녕히 가시길.”
* * *
델라 항구로 돌아오는 길은 평온했다.
환자 둘을 마차에 실은 우르타는 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긴장을 끌어 올렸고, 거의 5분에 한 번씩 마차를 세우고 길을 확인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까 마차를 세운 지점이 아직 저쪽에 보이는데 또 세우는 건 조금 과한 것 같지만···.
그래도 괜히 또 길을 잘못 드는 것보다는 이게 낫겠지.
그러고 보니 우르타 저 자식, 나보고 길치라고 놀리지 않았어?!
덕분에 안전하게 돌아오기는 했지만 델라 항구에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해 질 무렵이었다.
대충 아인델프와 마부를 고용해서 다녀올 때보다 두 배쯤 시간이 더 걸린 꼴이다.
앞으로는 무조건 마부를 고용할 테다.
괜히 돈 몇 푼 아끼려다 요단강 건널 뻔했잖아.
마차와 말을 반납하고 추가 요금을 지불한 뒤 전에 장기 투숙을 했던 여관으로 향했다.
마차와 말에 문제가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본 주인이 싱글벙글하는 것이 못내 눈에 거슬렸지만, 참기로 했다.
“그런데 리안, 얼마나 받았어? 왕녀님이니까 꽤 많이 주셨겠지?”
“왜 안 물어보나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우르타와 네이선에게 금화를 하나씩 주었다.
“우아앗! 금ㅎ···!”
금화를 확인하고 환호성을 지르려는 우르타의 입을 급하게 틀어막은 뒤 작게 속삭였다.
“아주 소매치기 해달라고 광고를 하지 그러냐, 응?”
놀란 토끼 눈으로 우르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천천히 우르타를 놔 주었다.
“윽, 엄청 짜···. 그런데 이렇게 많이 줘도 돼?”
“목숨까지 걸었으니까 위험수당까지 포함한 거야.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닌데 나눠 먹어야지.”
소중하게 금화를 품에 넣은 네이선이 약간 주저하며 물었다.
“이거, 일등항해사님에게는 말하면 안 되겠지?”
“네이선 너 아주 나쁜 물이 들었구나? 내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거늘!”
“아아니! 뭐, 꼭 그렇다는 게 아니고, 일등항해사님은 위험수당 없으니까···.”
“아인델프도 너희랑 똑같이 비센트 금화 줄 거야.”
그러자 우르타가 욱하며 물었다.
“어째서?! 일등항해사님은 싸우지도 않았잖아!”
“아인델프는 너희 둘이 할 몫을 혼자 했잖아. 그리고 얼마를 주건 내 마음이야. 좀 닥쳐.”
어차피 왕녀님에게 이번에 받은 돈이 거의 10만 로스쯤 된다.
정보 구입비용을 제외하고 애들에게 1만 로스 정도의 비센트 금화를 하나씩 줘도, 어차피 남는 장사다.
괜히 이런 데서 차별하면 나중에 더 크게 돌아오는 법이니까 애초에 다 똑같이 주는 게 깔끔하지.
< <113화> 서로를 위한다는 것 > 끝
작가의말
원래 충성심은 돈 주고 사는겁니다.
현실에서도 충성심 높이려고 상여금을 주고,
게임에서도 부하들 충성심을 올리려면 포상을 줍니다.
그러니까 저는 독자님들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