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16화 (116/420)

< <116화> 인생을 망치는 신의 음료 >

밤새도록 뒷수습을 마치고 깜빡 졸고 있는데, 회계사 게롤드가 선장실로 들어와 질문을 던졌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 많은 시체들은 뭐죠?”

“아, 회계사 왔나? 자네가 여기 토박이지? 항구관리관이나 경비대에 연락해야 할 것 같은데, 좀 아는 사람 있어?”

“무슨 일이길래···.”

나는 게론드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흠, 그러니까 최근에 알음알음 퍼지고 있는 그 아이렌 목재를 공급한 사람이 바로 선장님이군요?”

“도대체 뭘 들은 거야···. 공급이 아니고 그건 그냥 무인도 난파선에서 ‘우연히’ 구한 거라니까?”

“결론은 대충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목재가 그렇게 단단해서 포탄도 막을 수 있다던데 정말입니까? 상식적으로 그건 말이 안 되는···.”

“으아악! 그만! 나 지금 진짜 머리 아프거든? 여기, 선원들에게 지급할 포상금, 보상금, 긴급히 수리해야 할 부분 내역서, 보충이 필요한 물건 목록 이거나 좀 빨리 처리해. 신고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리고 오늘이라도 바로 뜰 수 있게 교역소에서 교역품도 좀 구매하고.”

“네에···. 그런데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이번에는 조금 멀리 본다고 할 때···.”

“가스벨! 가스벨로 갈 거야.”

“에에? 거기는 너무 가까운데요? 아, 혹시 전쟁특수를 노리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일레드 쪽을 먼저 들러서 피혁이나 모피를 좀 사서 오는 쪽이 더 좋을 겁니다. 이제 겨울인데 전쟁 때문에 월동준비를 한 사람이 적을 테니까요. 물론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그쪽 영지들이 흩어진 용병들 때문에 육상 무역이 마비된 모양이야. 그러니까 생필품 위주로 사도록 해. 무슨 말인지 알지? 이상! 끝! 이제 나가!”

“네에···.”

어차피 상황은 명백하니 특별히 문제가 될 부분은 없지만, 그래도 얼굴 아는 사람이 부탁하면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써주고 친절해지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진리 아니겠어?

혹시라도 게론드가 경비대나 뭐 이쪽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좀 써먹으려고 했는데, 그걸 써먹으려다가 내 고막부터 포기하게 생겼다.

왠지 의기소침해진 게론드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불쌍한 티를 팍팍 냈지만, 내가 지금 거기까지 신경 써 줄 정신이 없는 걸 어떡해?

게론드가 나가기 무섭게 마치 교대라도 하듯이 아인델프가 노크를 하고 선장실에 들어왔다.

“선장님 괜찮··· 어휴,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당연하지, 나 부상자라고. 다친 지 고작 이틀 지났어. 그런데 이런 중노동에 시달려야 하다니!”

아인델프가 내 푸념에 어색하게 웃었다.

자기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마땅하게 할 말이 없겠지.

“그래, 정리는 다 된 거야?”

“네, 이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일단 항구관리소로 가자. 포로들 끌어내고, 시체 담을 수레는 빌려 왔지?”

“아, 네. 시체를 담을 거라고는 안 했으니까 눈에 안 띄게 뭔가로 덮어서 갔다가 깨끗하게 씻어서 반납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응, 창고에 버릴만한 천 같은 거 좀 찾아보고, 갑판장에게 시체 실으라고 해.”

“이미 지시하고 왔습니다.”

“오, 일등항해사, 점점 눈치가 좋아지네? 잘했어.”

시체는 정말 빠르게 부패한다.

저 시체들은 고작 12시간 전만 해도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이었지만, 이미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었다.

더 지체했다가는 인간의 손으로 옮기기 매우 곤란한 상태로 바뀔 확률이 높았다.

아마 하루만 더 지체하면 험한 일에 이골이 난 선원들도 시체를 옮기는 일에 질색팔색을 할 거다.

시체를 실은 세 개의 수레는 낡은 천으로 덮었지만, 뒤를 따르는 처참한 몰골의 포로 네 명을 보면, 양식 있는 뱃사람(?)이라면 수레에 들어있는 것이 시체라는 것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리버티 호의 근처에 정박했던 배들 중에 당직자가 있었던 배(일부 선박은 정박 중에 당직자가 없는 경우도 있다.)들은 대충 사건의 전말을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물론 습격한 놈들이 왜 습격했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왜 아무도 돕지 않았는지 원망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나조차도 옆에 정박한 배에 불이 나지 않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 뻔한데, 그런 일로 실망하고 화내기에는 조금 민망하잖아?

아, 불은 옮겨붙을 수 있으니까 신경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들도 나름대로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아마 오늘 저녁쯤이면 항구의 술집에 갖가지 이유로 한밤중에 100여 명의 무리에게 습격당한 선박들의 이야기가 넘쳐날 것이다.

그리고 그 선박을 탈환하기 위해 영웅적인 전투를 벌인 선원들이 한 10배쯤 생겨나게 될 거다.

다음 달이면 전 대륙의 항구 곳곳에 비슷한 이야기가 넘쳐나게 될걸?

그렇게 리버티 호의 진실은 거짓과 허풍, 과장 속에 묻혀버리겠지.

음, 좋은 일이다.

* * *

나름대로 향이 괜찮은 럼주 한 잔을 내 앞에 내려놓은 항구관리관이 맞은편에 앉았다.

“시체 18구, 포로 4명 확인했소. 선장 말대로 습격한 놈들 대부분은 이 근방의 놈팽이들이오. 포로들이 최근 도는 소문 때문에 선장의 배를 습격했다고 하던데, 그 소문 사실이오?”

“그 아이렌 목재라면 저희가 제공한 것이 맞기는 합니다만, 저희도 무인도의 난파선에서 구한 것이라 아이렌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 항구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배를 뒤져봐야 나오는 게 아무것도 없을 수밖에요.”

항구관리관은 탐욕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재차 물었다.

“그래도 뭐, 그 무인도의 위치라던가, 그 난파선에 항해일지 같은 것도 있었을 것 아니오?”

이 새끼, 습격자들을 사주한 놈이 혹시 이 새끼가 아닌가 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이 들게 만드네?

“난파선은 목재 같은 것이나 경우 남아있을 정도였으니, 종이처럼 내구성 낮은 것이 남아있었겠습니까? 게다가 그 선장실과 선실 쪽이 완전히 박살 나서 남은 것이 거의 없었습죠.”

“어흠, 그 좀 아쉽, 아니, 아쉽겠구려. 큰돈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살아 나온 것만 해도 어딥니까? 그리고 항해사들이 다 죽어서 제가 이렇게 선장이 되었으니 더 이상의 욕심은 없습니다.”

그러고 한참이나 내게 무인도의 위치라거나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을 꼬치꼬치 캐묻던 항구관리관은 내 철벽방어에 막혀 결국 욕심을 포기했고, 처음보다 매우 기분이 나빠진 티를 팍팍 내며 불퉁거렸다.

“이런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먼저 알릴 것이지, 그렇게 마음대로 항구에서 칼부림을 해도 되겠소?”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해 괜히 눈앞에 있는 럼주가 담긴 잔을 노려보았다.

아침부터 손님에게 술을 내놓는 정신 나간 주정뱅이가 뭐라고 하는 거야.

직장에 왜 저런 도수 높은 술을 비치해 놓는 건데?!

하지만 마음대로 지껄이면 순간은 편할지 몰라도 앞으로가 피곤해진다.

리버티 호에 소속된 어린양 64마리, 아니, 이제 61마리를 책임지는 소년가장의 마음으로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제가 지시를 잘못 내리는 바람에 관리관님께 가야 할 전령이 누락된 모양입니다.”

“뭐, 그래도 피해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오.”

“물론입니다, 관리관님.”

“원칙대로 한다면 항구에서 소란을 일으켰으니 상업 허가를 박탈하거나 벌금을 물어야 하지만, 선장님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고, 상황이 급박했던 것을 감안해서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겠소.”

···으, 으,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른다.

나는 목구멍까지 치솟은 무언가를 밀어 넣기 위해 럼주를 원 샷 했다.

내 박력에 놀랐는지 놈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진짜 저 재수 없는 상판대기에 딱 한 대만 갈길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상업 허가 박탈? 고작 항구관리관이?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놈 모가지, 아니, 이놈의 일가친척까지 모조리 광장에 대롱대롱 매달린다는 것에 우르타의 왼쪽 손모가지를 걸 수 있다.

항구관리관 하니까 신분이 엄청 높은 것 같지만, 그냥 항구를 지배하는 영주 휘하에 항구 관리를 맡은 귀족의 졸개에 불과하다.

영주의 측근인 귀족이라고 해도 명목상이나마 영주가 재가한 상업 허가를 박탈하려면 보고를 해야 하는데, 귀족도 아닌 놈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늘 진실을 폭로하는 것은 많은 대가를 요구하고, 나는 그 대가를 치를 용의가 전혀 없었다.

“크! 좋은 술이군요. 좋은 술에 이런 배려 넘치는 판단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으흠, 내가 이런 말은 안 하···. 어험, 그럼 이만 나가보시오.”

또 개소리를 늘어놓으려던 관리관 놈은 내가 빈 잔 옆에 슬쩍 내려놓은 주머니를 보더니 재빨리 말을 바꿨다.

내 피 같은 돈이 또 뇌물로 뜯겨 나간다···.

내가 항구관리관의 사무실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오자, 근처에 있던 아인델프가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잘 해결되었습니까?”

“어, 그렇지 뭐. 진짜 내가 더러워서 못 살겠네. 진짜 발톱의 때만 한 권력도 권력이라고 저 지랄을 떨어대니 원.”

피식 웃은 아인델프가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후에나 출항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잔하시겠습니까?”

“아, 오후에 출항인데 선장이랑 일등항해사가 술에 취해 있으면 되겠냐?”

“제가 살 테니 한 잔만 하시죠. 이런 기분으로 출항하면 사고 나는 겁니다.”

“그, 그럴까? 그럼 한 잔만···.”

“선원들에게 수레를 반납하고 복귀하라고 전하고 오겠습니다.”

* * *

그러니까··· 원래 이게 아니었는데,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나는 내 옆에 누워있던 여자의 엉덩이를 두들겨서 깨우며 생각에 잠겼다.

결국 재촉에 못 이겨 신경질을 내며 일어난 여자는 걸쭉한 욕과 함께 방에서 나갔고, 나갔··· 어우, 쟤는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나가네? 무서워.

작고 얇은 속옷 사이로 방실대는 엉덩이가 방문 밖으로 사라지자, 나는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목이 조금 마르고 머리가 아프기는 한데 생각을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창틈으로 비치는 빛으로 보니 이미 대낮이다.

계획대로면 이맘때쯤 이미 바다 위에 있어야 한다.

아 그 빌어먹을 습격자들···.

웬수 같은 아인델프 녀석···.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인델프의 유혹이 한 타이밍 빨라서, 선원들의 조속한 복귀를 위해 사용하려던 ‘긴급 복귀 시 추가 수당 지급’이라는 카드를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인델프와 ‘딱 한 잔만’으로 시작된 술자리는 드웰과 에른스트가 빠르게 참전하고, 네이선에게 끌려온 우르타까지 참가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뒤로도 낯익은 선원 몇 명, 낯선 술집 손님 몇 명이 함께 부어라 마셔라 난장판을 친 것 같은데, 누가 말실수 안 했나 모르겠다.

술집 주인도 굉장히 좋아했는데, 매상을 올려줘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귀찮게 하던 양아치들을 깨끗하게 쓸어내서였을 것이다.

왠지 열이 나는 것 같은 상처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1층으로 내려오니, 오펜이 막 식사를 마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라? 오펜, 네가 왜 여기 있어?”

“네? 어제 선장님이 호출하셨는데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오펜이 반문하자, 주마등처럼 내가 오펜을 불렀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 아, 그랬지.”

“여기, 약과 열쇠요.”

“응?”

갑자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는 오펜을 보고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오펜의 손에는 하얀 알약 하나와 선장실 열쇠가 놓여 있었다.

“으, 설마 내가 시켰니?”

“네···. 잘못한 건가요?”

아니, 잘못은 내가 했지.

약을 공개적으로 가지고 오라고 한 것도 모자라서 선장실 열쇠를 타인에게 맡기다니, 진짜 선장 실격이다, 정말.

“그, 혹시 내가 이거 시킬 때 다른 사람이 들은 것은 아니지?”

오펜이 똘망똘망한 눈을 잠시 굴리더니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주변이 엄청 시끄럽기도 했고, 저한테만 말씀하시기는 했는데, 다른 사람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에휴,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어쩌겠냐. 하여튼 잘했어.”

“그리고 선원들도 오늘까지 다 복귀하라고 전달했습니다.”

“응? 그런 정상적인 명령도 내렸어?”

“네, 그리고 어제 감사했습니다!”

“뭘?!”

“그, 숙박비랑 식비를 내주셨잖아요.”

“어, 그, 그래.”

······술을 끊어야겠다.

오펜에게 어제의 상황을 간략하게 들은 나는 오펜만 데리고 마예도르 조선소로 향했다.

출항하기 전에 마이스터 보건과 이야기 좀 해야겠다.

도대체 소문이 어떻게 나면 내가 습격까지 받아야 해?!

아, 이것도 원래 어제 했어야 하는데··· 이런 건 원래 당일에 치워야지, 하루 지나면 임팩트가 확 떨어지는 법이다.

······.

진짜 술을 끊어야겠다.

< <116화> 인생을 망치는 신의 음료 > 끝

작가의말

세계관 설정 : 오늘 나온 항구관리관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항구관리관’으로 항구에 보통 1명만 있습니다. 보통 선박 검문이나 서류 발급 절차등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항구관리관’이라고 높여 불러주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진짜 항구관리관의 부하, 조수 정도가 되겠습니다. 항구관리관이 사적으로 고용한 사람들에 해당하므로 공식적으로는 끌고다니는 경비병보다 못한 일반인들입죠.

==================

불량작가 필부지용도 오늘 다시 다짐해봅니다.

술을 끊어야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