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17화 (117/420)

< <117화> 두 번째 의뢰 >

내 앞에 선 젊은 조선공이 쩔쩔매며 바보도 안 속아 넘어갈 거짓말을 주워섬기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마이스터께서는 어제부터 몸이 안 좋으셔서···.”

“이봐, 내가 바보로 보여? 아까 마이스터 보건께서 빛보다 빠르게 사무실로 도망가는 것을 봤거든? 그냥 모시고 와. 진짜 나 여기서 칼춤 한 번 출까? 응?!”

사실은 못 봤는데 그까짓 거 알 게 뭐야.

마이스터께서 하필이면 어제부터 몸이 안 좋으실 확률보다는 방금 전에 나를 보고 튀었을 확률이 훨씬 높잖아?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조선공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눈을 여기저기 돌린다.

현재 기온은 대충 10도 미만, 아무리 열이 많은 사람이라도 가만히 서서 땀을 흘릴 날씨는 아니다.

“마이스터 보건이 뭐라고 했는지 대충 알 것 같은데, 그냥 가서 전해. 다 알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뒷일은 내가 책임지지.”

내 말에 조선공이 울상을 짓는다.

“저 진짜 쫓겨납니다···.”

“이 정도 일로 사람 쳐내고 그럴 사람이면 당신도 일찍 다른 일 알아보는 게 좋아. 그리고 마이스터 보건께서는 그런 찌질한 분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가서 전달이나 해. 어서!”

내 재촉에 못 이긴 젊은 조선공은 결국 뛰다시피 조선소 한켠에 있은 작은 사무실로 향했다.

와, 진짜 사무실에 숨어 있었다고?

슬슬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으니, 사무실에서 나온 마이스터 보건이 어색하게 내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쿨럭, 리안 선장. 내가 어제부터 몸이 안 좋아서 쿨럭, 커헥, 웬만하면 사람을 안 만나려고···.”

“마이스터 보건, 괜히 아프지도 않은 목 아프게 만들지 말아요.”

“아니, 내가 진짜, 콜록콜록, 아픈데 자네라서 응? 쿨럭, 나온 거야. 콜록. 멍청한 도제 놈이 선장을 못 알아본 모양인데···.”

“아, 진짜! 괜히 불쌍한 도제 탓하지 말구요. 그냥 정확한 사정이나 알아보러 왔어요. 연기 좀 그만해요. 연기도 진짜 못하시면서.”

“······어, 그, 많이 티 나나?”

으이구, 이 순진한 아저씨 같으니라고.

“네, 많이, 아주 많이 티 나니까 그만하시고 설명 좀 해봐요. 도대체 소문이 얼마나 지랄같이 퍼진 거죠?”

내가 추궁하자 보건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진짜 내가 그런 게 아니고, 알다시피 우리 아이들도 그 리버티 호를 다 보지 않았나? 그 아이렌 목재가 덧대어져 있는 것도, 응급 수리용으로 마구잡이로 쓰인 것도 봤잖아. 그런데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지. 나도 나름대로 쓸데없는 소문을 내지 말라고 단속을 하기는 했는데, 한두 명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막겠어? 응?”

조선공이 평생 부대끼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뱃사람들이다.

뱃사람 대부분이 허풍과 허세를 빼면 반 시체나 다름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들과 부대끼는 조선공들의 허풍과 허세가 그 못지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배가 습격을 당할 정도라니, 도대체 소문이 어떻게 퍼진 거예요? 우리 애들이 셋이나 죽었어요. 알아요?”

내가 ‘죽음’을 이야기하자 보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런가, 그렇게까지 될 줄은··· 정말 미안하네. 그게 아무래도, 내가 소문을 잡으려고 하던 것이 더 독이 된 모양이야. 얼마 전에는 자네들이 전설의 보물섬에 다녀왔다는 소문까지 돌더군. 그 정도면 너무 허황된 이야기라 그냥 웃어넘겼는데 이렇게 될 줄은···.”

심란해하는 보건을 보자 나도 입맛이 썼다.

보건의 잘못이 아주 없다고 할 수도 없지만, 딱히 결정적인 잘못을 한 것은 아니었다.

뭐랄까, 모두의 약간씩 틀린 선택과 오해, 욕심이 뒤섞여서 만들어 낸 참사라고나 할까?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 항구에 영향력이 지대한 마이스터 보건과 이 정도 일로 사이가 틀어질 생각도 없었고, 소는 다 털렸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했다.

“마이스터 보건, 이미 지나간 일은 그만 이야기합시다. 그냥 앞으로는 속 시원하게 밝히세요. 리버티 호가 무인도의 난파선에서 우연히 입수한 목재가 아이렌 목재고, 그 무인도 위치는 대충 케르빈 섬 동쪽의 해적 놈들 근거지 근처라고. 정확한 위치는 항해 장비가 하나도 없던 리버티 호의 사람들도 모른다고 말이죠.”

“그렇게 말하면··· 휴, 그보다 진짜 그 목재를 더 구할 수 없나?”

나는 인상을 팍 구겼다.

아 노인네가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마이스터 보건, 진짜 더는 못 구합니다. 애초에 저도 그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요. 목재가 된 상태로만 봤으니까. 그러니까 욕심 버리세요.”

“그, 그런가···. 알았네.”

보건은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더 이상 나를 독촉하지는 않았다.

내 말이 거짓말은 아니다.

난 진짜 그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다시 그 섬에 갈 생각도 없는 데다가, 간다고 해도 페리아 족이 목재를 착착 준비해 놓지 않는 이상에야 더 가지고 올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참고로, 일반적으로 나무를 베어서 선박이나 건축용 상급 목재로 만들려면 최소한 1년 이상은 세심하게 관리하며 건조를 시켜야 한다.

생나무를 베어서 창고에 싣고 와봤자, 대부분은 그냥 땔감용으로밖에 못쓰게 된다는 말이다.

“그럼 앞으로 제발 쓸데없는 소문 안 나게 잘 좀 부탁드릴게요. 항구에서 배가 습격을 받다니,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거든요?”

“알겠네. 그러니 혹시라도 목재를 조금 더 구하게 되면 꼭 우리 조선소에···.”

“에헤이! 진짜 그럴 일 없다구요! 진짜 제가 구할 수 있다면 벌써 구하러 갔겠죠. 안 그래요?”

“그, 그렇기는 하지. 알았네, 알았어.”

딱히 보건이 소문을 퍼트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일부러 중요한 부분은 크고 또박또박 말했고, 조선소에는 작업을 하는 척 우리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운 인부들이 수십 명에, 조선소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우리 이야기를 경청하는 방청객도 엄청났으니까.

제발 내 생각대로 잘 풀려서 앞으로 이런 대형 사고는 좀 없었으면 좋겠다.

* * *

리버티 호의 습격 소식이 핫이슈가 되어서인지 기존 선원들은 대부분 복귀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리 배에 타고 싶다는 의견을 타진해 온 선원들도 몇 명 있었다.

물론 의도가 뻔히 보여서 새로 고용한 선원은 없지만··· 뭐랄까, 이제야 배가 제대로 굴러가는 것 같아서 뭔가 감성이 충만해졌다.

최소한 기존의 선원들만큼은 이제 대놓고 내 지휘력을 의심하거나,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한 간부들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그거야 독심술을 깨우치지 않는 이상에야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조선소를 나온 내가 오펜과 함께 리버티 호로 복귀했을 때, 말이 쓸데없이 많다는 단 한 가지 단점을 제외하면 완벽한 게론드 회계사가 교역품 구매는 물론 파손된 물자와 항해에 필요한 보급품까지 완벽하게 배에 적재해 놓은 상태였다.

갑판장은 복귀한 선원들을 부려서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고 청소까지 마쳐 놓은 상태였으며,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아인델프는 당당하게 출항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보고했다.

“이봐, 일등항해사. 입 열 때마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데 정말 항해 준비 다 된 거 맞아? 난 리버티 호를 조함할 항해사가 준비되지 않은 기분인데?”

“죄, 죄송합니다!”

아인델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내 옆에 선 오펜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주량이 얼마인데 어제 술 몇 잔 마셨다고 지금까지 티가 날 리가 없잖아?

델라 항구를 출항한 후에 간부들은 평소와는 달리 긴장한 표정으로 연신 주변을 살폈다.

선원들 중에서도 일을 하는 도중 허리를 펴는 척하며 주변을 살피는 녀석들이 몇몇 보였다.

선장실에서 잠시 쉬고 나온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어지간한 에른스트 갑판장까지 눈에 핏발이 선 상태로 아직 못 자는 것을 보니 엊그제의 사건이 정말 충격적이기는 했던 것 같다.

“아인델프, 가서 눈 좀 붙여. 지금 메인 마스트에 누가 올라갔지?”

“우르타 포술장입니다, 선장님.”

“그럼 긴장 좀 풀어도 되겠네. 다른 건 몰라도 눈 하나만큼은 믿을만한 녀석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눈 벌겋게 뜨고 노려본다고 준비한 해적들이 습격을 포기하겠어? 정말 습격이 걱정된다면 미리미리 체력을 보충하는 게 나아. 이번에는 포탄이랑 화약도 조금 샀잖아. 너무 걱정 말라고. 아 참, 저기 걱정 많은 갑판장님도 좀 쉬시라고 전해.”

“그게···.”

난처한 표정을 짓는 아인델프에게 나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짓고 훈계를 늘어놓았다.

“일등항해사. 물론 갑판장님이 어렵겠지. 나도 쉽게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부선장이 없는 리버티 호에서 나를 빼고 서열이 가장 높은 것은 자네야. 갑판장님에게도 할 말은 할 줄 알아야···.”

“그게, 선장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건방지게 내 말을 끊은 아인델프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갑판장은 선장님이 들어가시기 무섭게 갑판장실에서 자다가 지금 방금 나왔습니다.”

“······.”

우리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타륜을 잡고 있던 조타수가 갑자기 자기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런데 저 노인네 눈이 왜 저래?”

“피로가 덜 풀린 상태로 일어나면 보통 저렇게 됩니다. 그, 선장님도 비슷합니다만···.”

“···으흠, 빨리 들어가서 좀 쉬게, 일등항해사. 명령이야.”

* * *

괜한 우려와는 달리 바다 위에서 리버티 호를 습격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자신의 포술 실력을 보여 주겠다며 의욕이 잔뜩 올랐던 우르타는 가스벨 항구가 보일 때까지 습격 시도가 없자 복잡한 표정으로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습격을 받지 않아서 다행스럽기도 하고, 자기 포술 실력을 못 보여줘서 아쉽기도 하고 그런 모양이다.

항구에 정박한 뒤 게론드에게 바로 교역품 판매 교섭을 맡기고, 나는 우르타와 네이선을 대동한 채 시장으로 나왔다.

게론드와 함께 교역소로 가는 것은 못 할 짓이지만, 상선의 선장이 기항한 항구의 경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상품이나 뭐 이런 것이 제한된 교역소보다는 시장을 가는 쪽이 경제 상황을 알아보기에는 더 좋았다.

“와, 바로 옆 항구인데도 물가 차이가 많이 나네?”

우르타가 중얼거린 것처럼 리버티 호에 담아온 생필품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품목이 상당히 비쌌고, 물품이 부족해 보였다.

호객하는 상인들의 얼굴에도 일말의 불안이 깃들어 있음은 물론, 돌아다니는 손님들도 별로 없었다.

뭘 살 생각이었는지 돈주머니를 꼭 쥐고 나온 우르타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결국 포기했고, 상처에 잘 듣는 약이라면서 정체불명의 연고를 팔고 있는 상인 앞에서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던 네이선이 내게 귀를 잡혀서 끌려왔다.

“저런 검증되지 않은 약에 혹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저건 진짜 같았는데! 너처럼 크게 베인 상처도 저 약을 바르면 열흘이면 흉터도 안 남는대!”

열흘 만에 낫는 것도 믿기 힘들고, 흉터가 안 남는 것은 더 믿기 어렵잖아 바보야.

미련이 남는 듯 계속 뒤를 돌아보는 네이선을 단단히 단속해서 리버티 호로 복귀하니, 게론드가 낯선 남자와 함께 갑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계사, 일은 마무리했어?”

“네, 선장님. 교역품은 다 하역했고 여기 거래 내역서입니다.”

“으음, 들어가서 보도록 하지. 그런데 이쪽은?”

“아, 리비다드 상단의 앙셀 씨입니다. 선장님께 드릴 제안이 있다고 해서 모시고 왔습니다.”

“갑자기 방문해서 죄송합니다. 리안 선장님.”

게론드의 소개에 남자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리비다드 상단이면 나도 이름 정도는 몇 번 들어본 중간 규모의 상단이다.

조막만 한 상선 한 척을 운용하는 나와는 급이 다른 상단이지.

“리비다드 상단에서 무슨 일로··· 뭐, 일단 안에서 말씀하시죠, 앙셀 씨.”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선장님.”

선장실로 자리로 옮긴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쓸데없는 사과와 공치사로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리비다드 상단의 보좌관이나 되는 분이 제게 무슨 용건이 있으신 겁니까?”

“한 가지 의뢰를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예? 의뢰라니요?”

내가 알기로 리비다드 상단도 보유한 상선대가 있다.

그런데 멀쩡한 자기들의 상선대를 놔두고 리버티 호에 의뢰한다고?

내가 의심스러워하는 것이 티가 났는지, 앙셀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의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상행을 하나만 운용하는 것도 아니고, 저는 육로 교역을 맡고 있는데 얼마 전에 용병들의 공격을 받아서 호위대가 조금 많이 상해거든요. 상품은 지켜냈지만 아시다시피···.”

잠시 뜸을 들이던 앙셀이 말을 이었다.

“이미 보셨겠지만, 이곳의 사정이 별로 안 좋습니다. 피해를 입은 호위대만 믿고 육로로 더 이동하는 것은 어렵겠지요. 비용은 충분히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손해를 조금 보더라도 계약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같은 상인으로서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으음, 앙셀 씨의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가 부드럽게 시간을 달라고 하자 앙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여기 게론드 회계사님께 저희가 가진 품목과 목적지를 말씀드렸으니, 충분히 검토하시고 부디 좋은 판단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머무는 여관은 마을 안쪽의···.”

적당히 인사를 마친 앙셀을 배웅한 뒤, 수습 선원들을 시켜 간부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일단 게론드 회계사를 불러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으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앞뒤 사정도 모르고 회의를 주관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앙셀 그 사람, 너무 능구렁이처럼 뭔가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아서 상황이 이해가 잘 안 되네?”

“그러니까 말입니다···.”

< <117화> 두 번째 의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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