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대출 가능합니다. >
게론드가 설명하는 내용 중 쓸데없는 내용을 빼면 이랬다.
앙셀은 벨로키나 왕국의 에스펜에서 케이라의 베른티스로 철괴와 면화를 수송하는 수송 책임자였다.
에스펜과 베른티스는 둘 다 바다와 먼 내륙 도시인만큼, 운송 방법을 육로로 설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라면 벨로키나 왕국의 중앙에 자리 잡은 스피킷 산맥 때문에 가스벨 방향을 택할 경우 상단이 움직일 수 있는 길이 매우 한정적이고, 무거운 철괴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길은 더더욱 한정적이며, 하필이면 최근에 고용주를 잃은 용병(보통 도적이나 산적이라고 읽는다) 수십 명에게 기습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야간에 가해진 기습은 치명적이기는 했지만 성공적으로 격퇴했고, 수송 물품에는 손실이 없었다.
하지만 상단 소속 호위대와 고용한 용병 중 1/3 정도가 죽거나 다치는 바람에 재정비를 위해 방문한 가스벨에서 발이 묶이고 만 것이다.
평시였다면 호위 인원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수송을 강행하거나 용병을 추가로 고용하는 방법을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스벨 인근, 특히 동쪽으로 가는 길은 망나니 같은 용병들로 통행 자체가 거의 마비된 상황이니, 줄어든 호위대를 믿고 돌파할 수도, 신뢰할 수 없는 용병을 추가로 고용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납기일은 정해져 있고, 육로로는 돌파할 방법이 보이지 않으니 앙셀이 생각한 것은 해로를 이용하는 것.
다행스러운 부분은 재정비를 한 가스벨이 교역항이라는 것이었고, 안타까운 부분은 항구의 규모가 큰 편이 아니라서 중대형 상선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면화라면 몰라도 철괴는 소형 상선 한 척에 싣고 움직이기에는 너무 무거워서 두 척에 나누어야 하나 고민하는 판에 게론드와 만난 것이었다.
“그러니까 교역소에서 계약을 마치고 나오는 자네를 따라와서 우리 배를 확인하고 수송을 제안했다?”
“네, 아무래도 거래량을 엿듣거나 한 모양입니다. 딱히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죠. 아무래도 소유주가 다른 소형 상선 두 척에 짐을 싣는 것보다는 우리 쪽이 더 매력적이지 않았겠습니까? 게다가 여기는 딱히 크게 돈이 될만한 교역품도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전체적인 물가가 올라서 우리가 수익을 얻었으니까요. 저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해서 선장님께 모시고 온 겁니다.”
“목적지는 케이라 왕국의 일루딘 항구라고 했지? 지금 시기면 바람이 별로 좋지 않아서 대충 열흘 정도 걸릴 것 같은데···? 게다가 그쪽은 일루딘에서 베른티스까지 또 움직여야 하잖아? 그건 어떻게 한다는 거야?”
“뭐, 거기까지는 저희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굳이 추측해보자면 위험도가 높아진 곳인 이 근처뿐이니, 이곳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거래한 적이 있는 믿을 만한 용병을 더 고용하거나 근처의 지부에서 호위 병력을 더 요청할 수도 있겠죠.”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다 보니 조건이 좋으면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된다.
지금 있는 가스벨에 매력적인 상품이 없는 만큼 어차피 빈 배를 몰아 다른 항구로 이동해야 하는 판이고, 목적지인 일루딘 항구에는 딱히 살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근처의 로제라면 상당히 큰 교역항이었으니까.
앙셀이 제안한 운임으로는 운항비용을 제외한 순수익은 3~5만 로스 정도지만, 빈 배로 움직일 때의 손실을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얻는 이익을 상단의 간부쯤 되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너무 관대한 조건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저쪽은 막말로 습격으로 발생한 손실에, 예정에도 없는 배까지 타면 오히려 손해가 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야.
내 말을 들은 게론드가 쉬운 질문이라는 듯이 거침없이 말했다.
“선장님, 저들은 그냥 일개 상인이 아니고 상단입니다. 개인이라면 이 거래에 의한 손실로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지만, 상단은 아니죠. 어차피 몇 개의 상행 중 하나 아닙니까? 여기에서 약간 손실이 나더라도 다른 곳에서 충분히 메꿀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납기일’안에 물건을 넘긴다는 신용만큼은 한 번 무너지면 다시 복구하기 어렵습니다. 무리를 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만?”
“하지만 저쪽에서 이쪽의 약점을 모를까? 회계사가 직접 말했잖아. 살 품목이 없다고.”
“아, 그렇기는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선창을 다 채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귀금속 약간과 보석 원석, 화약 약간은 살 수 있을 정도더군요. 물론 매각할 곳이 마땅치 않기는 합니다만, 산다고 해도 손해를 볼 정도 가격은 아니었습니다.”
“흐음, 귀금속이라고?”
“네, 양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만···.”
귀금속은 부피와 무게에 비해 단가가 높다.
물론 어디를 가도 시세가 비슷해서 진짜 싸게 사고 비싸게 팔아야 수익이 나오기는 하는데, 로제 항구 정도면 귀금속 수요가 어느 정도 있을 테니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머릿속으로 항로를 그리며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데 게론드가 말을 이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저쪽도 지금 몸이 달았습니다. 벌써 이곳에 머문 지 나흘째랍니다. 용병을 추가 고용하려고 노력도 해보고, 근처 지부에 사람도 보낸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가 봐도 배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 괜히 우리와 길게 협상하기보다는 빨리 결론을 내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는 것이 우리에게도 딱히 좋을 것은 없지만, 저쪽은 피가 마를 테니까요.”
“흐음···. 좋아, 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하지.”
* * *
잠시 후에 간부들끼리 회의를 한 결과, 앙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회계나 상행위에 대한 지식은 나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보니 다들 별생각 없어 보여서 회의를 왜 했나 싶기는 했지만···.
모두가 돌아간 뒤, 나는 귀빈실을 방문했다.
“선주님, 리안입니다.”
“음? 선장이 왜? 일단 들어오게.”
테이블에 마주 앉은 우리는 잠시 침묵을 즐겼다.
아니, 즐긴 것은 아닌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게 참 그런 것이, 무슨 말을 할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건데 먼저 말을 꺼내기가 참 곤란한 거다.
심지어 상대방의 본심은 서로 알고 있는데다가 그 입장이 반대이고, 한 사람은 설득을 해야 하고, 한 사람은 설득을 당해 줘야 하는, 그런 상황극 같은 것을 해야 하는 거거든.
결국 하급자이자 아쉬운 소리로 설득을 해야 하는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겠지만.
“선주님, 괜찮으십니까?”
“으음, 허허허, 괜찮다면 거짓말 아니겠나?”
“지금이라도···.”
“아니야, 이제야 처음 내가 했던 말이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였는지 깨달았네. 지금 내가 큰돈을 들고 빠지면 문제가 되는 것 아닌가?”
말문이 막혔다.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 앞에서 돈 돈 거리는 내가 너무 싫기는 한데, 드웰의 말이 맞았다.
드웰이 지금 당장 정착금이라고 전체 자금의 30%에 달하는 40만 로스 정도를 들고 빠지면, 바로 리버티 호의 재정은 삐걱거릴 거다.
아마 남은 돈으로는 아무리 싼 교역품을 채워도 다 채우기도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다가, 선원들 급여를 줄 돈까지 어느 정도 여유를 두면······ 어휴.
진짜 그런 상황이라면 아예 내 계좌를 깨서 운용자금으로 쓰는 게 나을 거다.
공용 자금과 개인 자금을 혼용하는 최악의 사태는 반드시 피하고 싶지만 말이다.
“선주님 말씀대로 지금 당장 선주님이 공용 자금을 빼시면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아마 조만간 해결되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선주님께서는 계속 기다리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후우···.”
드웰이 거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깊은 한숨에서 고뇌가 느껴진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가족이 있네.”
“네.”
“아니지, 있었어. 지금은 있는지 없는지, 아마 없겠지. 그래도 확인을 하고 싶은 것이 사람 아니겠나? 그게 절망일지라도, 낭떠러지의 끝이더라도, 그걸 알고 있어도! 그 끝을 보고 싶은 게 사람이라는 동물일세···.”
“이해합니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드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 욕심을 위해 다른 이들의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네. 선장의 뜻대로 하지.”
“그렇다면 다음 기항지는 일루딘으로 하겠습니다. 일루딘에서 로제 항구로 갈 생각입니다.”
“뜻대로 하라 하지 않았나.”
“로제에서 종이 같은 공업품을 사서 론 항구로 향할 생각입니다.”
“이만 나가주게. 그런 나중의 이야기는 다음에 해도 될 것 같군.”
“론 항구로 가는 길에 멜라나인이 있죠.”
“······.”
“멜라나인에 내려드리겠습니다.”
“나 때문에 일정을 지체할 필요는 없네.”
“아니요, 그 돈, 제가 빌려드리지요. 정착 자금이요.”
“그게 무슨 말인가?”
드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지만, 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린 판단이다.
드웰은 정착금만 가지고 고향에 가고 싶다.
공금에서 정착금을 빼면 리버티 호의 재정에 문제가 생긴다.
내 개인 자금과 공용 자금을 혼용하는 것은 전혀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개인 자금과 공용 자금을 분리한 상태로 유지하면서 드웰의 정착금을 해결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조용히 미리 준비한 문서 두 장을 테이블에 올렸다.
“이쪽은 담보 대출 계약서, 이쪽은 양도 계약서입니다.”
“담보 대출?”
“제가 지금 모아놓은 돈이 80만 로스 정도입니다. 담보 대출 계약서에 서명하시면 리버티 호를 담보로 80만 로스를 빌려드리겠습니다. 리버티 호를 포기하시겠다면, 선금 80만 로스, 이후 매년 26만 로스씩 20년간 상환하도록 하겠습니다. 구형 누벤테 급이니 600만 로스 정도면 시가와 비슷할 겁니다.”
음, 말을 하고도 참 민망하다.
80만 로스는 누군가에게 큰돈은 아닐지 몰라도 내게는 전 재산이다.
그런 돈이니만큼 그냥 빌려주기는 그렇고 해서 리버티 호를 담보로 돈을 빌려주려고 했는데, 사람은 강요받는다는 느낌에는 반발하기 마련,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조건의 양도 계약서를 선택지로 놓은 것이다.
막말로 거래가격이 6억 원쯤 하는 중고차를 선금 8,000만 원 내고 20년간 매년 2,600만 원씩, 이자 없이 총 6억 원에 사가겠다는 계약서를 내민 꼴이니 얼굴이 철판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면 민망할 수밖에.
심지어 내가 매년 26만 로스씩 납입하는 것도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멍하니 계약서를 보던 드웰이 피식 웃으며 펜을 집었다.
“머리 많이 쓴 모양이군. 웬만하면 리버티 호를 넘겨주고 싶지만 20년은 너무했네. 그걸 받기 전에 내가 죽을 확률이 더 높겠군.”
“에이, 갑판장님도 정정하신데 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드웰의 나이는 40대 후반, 이 시대 기준으로 충분히 고령이다.
60대로 알고 있는 에른스트 갑판장이 이상하게 나이에 비해 건강한 거지, 20년은커녕 10년만 지나도 드웰이 세상을 떠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고맙네, 리안 선장. 일전에 말한 대로 나는 리버티 호의 운용에 전혀 관여하지 않을 걸세. 하지만 자네가 가끔 나를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라도 리버티 호를 양도하기는 어렵겠군. 내 유서에는 자네에게 리버티 호를 양도한다는 말은 꼭 써주도록 하지, 하하하.”
드웰이 서명을 마친 종이가 내 손 위에 올라왔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너무 좋게 풀려서 약간 얼떨떨하기는 한데, 이 정도면 사실 리버티 호는 내 소유나 다름이 없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겠습니다. 아니, 함께 가시지요. 어차피 그 돈을 들고 다니실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으음, 그렇지.”
“그리고 마음 같아서는 바로 보내드리고 싶지만, 이쪽 육상이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지금까지도 기다렸는데 그것 며칠을 못 참겠나? 걱정 말게.”
* * *
다음 날 나는 게론드를 보내 앙셀에게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말을 전하게 했고, 나와 드웰이 은행에 다녀왔을 때 이미 선적을 진행하고 있었다.
멀리서 나를 먼저 발견한 앙셀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리안 선장님, 제안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계약을 위해 최선 다하는 앙셀 씨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본받을만한 상인의 표본이십니다.”
“하하하, 이렇게 금칠을 해주시니 민망하군요. 아참, 여기 선급금입니다. 그리고 우리 직원들과 호위대가 44명인데 배에 다 탈 수 있겠습니까? 회계사는 약간 곤란해 하는 것 같던데요.”
그 잘난 게론드 님도 사람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배 입장에서는 사람도 만만치 않은 대형 화물이다.
사람만 타는 게 아니고 개별 짐과 식사, 물까지 함께 챙겨야 하니 말이다.
“이미 갑판장에게 창고 몇 개를 임시 선실로 개조하라고 시켜 놓았습니다. 조금 비좁더라도 배라는 곳이 원래 그러려니 하고 열흘 정도만 참으시면 될 겁니다. 귀빈실에는 저희 선주님께서 계신 관계로 앙셀 씨께는 항해사용 개인실 세 개를 할당해 드리겠습니다. 앙셀 씨께서 인원은 할당하시면 될 듯합니다.”
“오, 개인실까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선장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하지만 리버티 호는 여객선이 아니라서 생활에는 약간 불편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지금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한 몸 누일 공간만 주셔도 감사해야겠지요.”
창고를 선실로 개조하는 것은 힘들거나 돈이 많이 드는 일은 아니다.
그냥 창고를 비우고 해먹만 설치하면 되거든.
물론 창고를 비우는 것도 일이고 그 창고의 물건을 쌓아놓은 다른 창고를 이용하기가 힘들어지겠지만, 그건 어차피 선원들이 걱정할 일이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잖아?
사람이 쉽게 변하는 법인지라, 선장을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선원을 하던 기억이 흐릿해지는 기분이다.
< <118화> 대출 가능합니다. > 끝
작가의말
원래는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였는데, 왠지 뒷수습이 안될것 같아서 급선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