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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19화 (119/420)

< <119화> 도둑고양이 >

앙셀은 마차와 짐수레를 급하게 매각하고, 일당으로 고용한 마부나 잡부 등과 계약을 끝내는 등 짐을 최대한 줄이고 인원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애초에 항해를 고려하지 않은 이상에야 상행의 규모를 줄이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게다가 인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위대와 용병들이 적지 않은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저기, 저 봐. 또 싸우네.

“이보시오, 앙셀 보좌관. 이건 계약 위반 같은데? 처음에 배를 탄다는 말은 없었지 않소?”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배를 탄다고 해도 어차피 일당을 지불할 텐데요. 출발지와 목적지가 동일할 경우 경로가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셨잖아요?”

“아니, 경로의 변경이라는 것은 다른 길을 간다는 거지, 배를 탄다는 뜻이 아니지 않소?”

“그게 무슨 소립니까? 경로는 어디까지나 이동할 수 있는 길이고, 해로도 당연히 경로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하여간 용병 대표로 말하는데, 우리는 저 위태로운 판자 조각에 목숨을 맡길 의향이 없소.”

하여간 무식한 용병 놈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쯧쯧쯧.

이 아름답고 튼튼한 리버티 호를 보고 판자 조각이라니, 이게 무슨 망발이야?

뭐 어쨌든, 앙셀 씨의 고충이 이해는 된다.

용병이 전체 병력의 절반쯤 되는데, 용병이 계약을 해지하면 배 안에서 앙셀의 상단은 완전히 약자가 되어버린다.

상황이 급박해서 일단 내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도 나를 완전히 믿기는 힘들 것이다.

전에도 말하지 않았던가? 용병이나 선원이나 도적이나 다 거기서 거기라고.

완벽한 도덕성과 인품을 갖춘 내가 도매금으로 넘어가서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앙셀 씨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할 기준이 없을 테니 어쩔 수 없다.

* * *

우여곡절 끝에 선적이 다 끝나고 출항 준비를 하는 중인데, 배 한켠에서 소란이 일었다.

작은 소란이야 늘 있는 것이고, 이런 사소한 일까지 선장이 개입하면 선원들의 자율성(?)을 크게 해치게 될까 봐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이질적인 소음이 들려서 결국 발걸음을 하고 말았다.

확실하지는 않은데, 칼이 뽑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거든.

게다가 그쪽을 보니 선원들과 용병 몇이 모여 있지 않은가?

무식하고 난폭한 녀석들이 서로 무기까지 가지고 있으니, 자칫 피바람이 몰아칠 가능성이 있었다.

“무슨 일이야? 어?”

내가 뒤에서 인기척을 내고 묻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리고 나는 용병과 호위대가 아밍 소드와 숏 소드 등을, 선원들은 단도를 뽑아 들고 대치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람?

“거, 다들 무기는 집어넣지?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내 앞에서 그따위로 날붙이 꺼내 들고 있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내 말이 끝나자 선원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단도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용병과 호위대 놈들은 칼끝을 내리기만 할 뿐, 칼집에 넣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하, 이런 싸가지없는 손님들 좀 보게?

“당신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손님이면 손님답게 예의를 지키시지?”

내가 살짝 삐딱하게 말을 걸자, 그제야 한 놈이 칼을 집어넣더니 내게 대답했다.

“선장, 우리는···.”

“씨발, 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입 닥치고 당장 날붙이 치우라고! 그게 싫으면 당장 내려!”

칼만 집어넣었을 뿐 건방진 태도를 유지하며 대답하려는 놈의 말을 끊고 소리를 지른 나는 내 옆에 선 선원에게 말했다.

“너, 지금 가서 돌격대장이랑 갑판장에게 선원들 무장시켜서 이쪽으로 오라고 해. 그리고 일등항해사에게 앙셀 씨에게 퇴거 요청하라고 해. 내 배에 도적놈들이 발을 디디는 것은 한 번으로 충분해.”

갑작스러운 막말에 욱하며 욕을 내뱉던 용병과 호위대는 내가 극단적으로 말하자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런 일련의 행동은 굉장히 위험한 짓이다.

칼 든 놈들 앞에서 이렇게 미친개처럼 짖다가 칼이라도 맞으면 어떡해?

하지만 괜히 여기서 쫄리는 표정 지으면 앞으로 진짜 피곤해진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던 놈들은 결국 하나씩 슬그머니 무기를 집어넣었고, 네이선이 커틀라스를 쥐고 십여 명의 선원들과 함께 합류하자 결국 기세가 완전히 죽어버렸다.

“흠, 이제 이야기할 분위기가 된 것 같군. 문제가 뭐야?”

내가 냉랭하게 질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옆에 있던 선원이 일러바치기 시작했다.

“저희가 정중하게 ‘손님들’께 무장 해제를 요구했습니다만, 저렇게 다짜고짜 무기를 뽑아 들고 저희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딱히 ‘정중하게’ 말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하, 거기 손님들. 선상 반란, 아니지, 이번에는 탈취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배에 욕심이 나셨습니까?”

“선장, 말씀이 조금 심하시오.”

“심하기는 개뿔,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왜 무장 해제를 거부한 거요? 이 비좁은 배 안에서 그대들을 위협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배는 잘 안 타봐서 모르는 모양인데, 사람은 바닷속으로 다니지도 않고, 물 위를 걸을 수도 없으니 좋게 협조합시다.”

내가 설득(협박이라고 읽는다)을 시전하고 있을 때 헐레벌떡 달려온 앙셀이 말을 걸었다.

“선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앙셀 씨, 잘 오셨습니다. 여기 이 친구들이 무장 해제를 거부했다는데 그쪽의 지시한 겁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요.”

“그게···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이야기를···.”

마음 같아서야 당장 내리라고 하고 싶지만, 집단의 수장인 앙셀을 더 압박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저쪽도 괜히 욱해서 그냥 내린다고 하면 나도 나름 난감하기도 하고.

내가 알겠다는 제스쳐로 한발 물러서자, 잰걸음으로 용병과 호위들에게 다가간 앙셀이 뭐라고 나지막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판장이 다수의 무장한 선원들과 현장에 합류할 무렵, 내게 돌아온 앙셀이 나를 붙잡고 구석으로 이끌었다.

“앙셀 씨, 이런 식이면 굉장히 곤란합니다. 우리 인원과 비슷한 수의 무장 병력을 태우는 것 자체도 저희에게는 상당한 부담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무장 해제까지 거부하면···.”

사실대로 말하자면 인원수는 우리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고, 아무리 육상전에 이골이 난 용병과 호위대라도 선상 전투에서 우리가 밀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부담은 부담이다.

“제가 알아듣게 이야기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칼밥을 먹고 사는 친구들이라 비무장 상태로 무력하게 있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입니다. 어떻게 조금 양해해 주실 수 없습니까?”

“앙셀 씨, 솔직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앙셀 씨도 당연히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30명이 넘는 무장 병력이라면 리버티 호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에 충분한 인원이니까요. 그러니 무장 해제는 필수입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호신용 무기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호신용이 어디까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호신용 무기’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한참을 이야기하던 우리는 결국 커틀라스와 비슷하거나 짧은 숏 소드와 단도까지는 소지를 허용하기로 했다.

당연히 장거리 무기인 활이나 쇠뇌, 창과 도끼 등은 압수 대상이었다.

그리고 압수한 무기를 보관하는 것을 상단 측 대표가 참관하고, 해당 창고를 지키는 것도 양측 두 명이 동시에 지키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 * *

만재배수량의 흘수선이 간당간당할 정도로 꽉 들어찬 리버티 호는 드디어 그 무거운 몸을 바다 위에 띄웠다.

예전보다 더 자주 고성이 오가고, 선원들도, 손님들도 예민하기가 긴장한 고슴도치 수준이었지만, 그럭저럭 별일 없이 며칠이 흘렀다.

“네이선, 속도 재고 왔어?”

“네, 현재 속도 2.7노트입니다.”

“으음···.”

나는 침음성을 삼키고 쨍쨍한 태양을 괜히 노려보았다.

이제 기온은 상당히 떨어져서 대낮에도 5도 안팎에 불과했고, 새벽에는 영하의 기온이 당직자들을 괴롭혔다.

이런 상태에서 만약 비라도 내렸다가는 감기 환자가 폭증하겠지만, 다행히 날씨는 맑았다.

문제라면 너무 맑아서 바람도 많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아, 진짜 짜증나네. 바람도 바람이지만 배가 너무 무거워. 인원도 너무 많고. 아인델프는 해도실에 있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까 삼등항해사와 함께 들어가던데요.”

“잠깐 선교 좀 지키고 있어. 금방 해도실 좀 다녀올게.”

지금처럼 풍향이 일정하고 특별히 지시할 내용이 없다면, 잠깐 정도는 네이선 같은 비전문가가 선교를 지켜도 상관없었다.

24시간 내내 나와 아인델프가 선교를 담당해야 한다면 어떻게 버티겠어?

선교 옆에 위치한 해도실에 들어가자, 테이블에 놓인 해도를 바라보며 낑낑거리는 아인델프와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삼등항해사 슬레어가 보였다.

“일등항해사, 문제가 심각해?”

“아, 선장님. 아무래도 이게 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동풍이 부는 경우가 많아서 대륙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한 보름 정도만 더 지나고 해가 바뀌면 곧 풍향이 북풍으로 바뀌니까 그때를 노리는 편이 더 좋았다.

하지만 손님들은 그 보름을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기에 출항을 강행해야만 했다.

그리고 출항 전에 몇 번이나 악재를 고려해서 준비를 했지만, 늘 그렇듯, 현실은 예상보다 나빴다.

배는 예상보다 무거웠고, 역풍을 피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움직이다 보니 실제 직선거리보다 움직이는 거리는 한참이나 길어졌으며, 심지어 바람도 약했고, 우리의 손님들은 생각보다 보급 소요를 낭비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움직인 거리로 볼 때, 목적지인 일루딘까지는 앞으로도 7일은 더 가야 할 겁니다. 조리장이 보고한 남은 식량과 식수가 얼마나 됩니까?”

“으응, 앞으로도 7일이나 더 걸릴 것 같다고? 그럼 총 14일이라는 말이야?”

“네···.”

어젯밤에 조리장이 보고한 남은 식료품은 고작 4일 치에 불과했다.

손님들까지 100여 명이 10일간 항해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넉넉하게 15일이나 먹을 수 있는 대량의 식료품을 챙겼음에도, 손님들의 기막힌 배신 때문에 보급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이다.

“미치겠군···.”

해도를 확인한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해도상 우리의 위치는 내해의 거의 한가운데 지점,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항구는 일루딘이었다.

중간에 보급을 받거나 할 항구조차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14일이나 항해하면 이번 항해는 의뢰금보다 인건비가 더 비싼 꼴이 돼버린다.

게론드가 공금을 최대한 활용해서 귀금속을 한 박스 사 놓았기 때문에 손해까지는 아니겠지만,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보다 보급 문제는 어떻게 한담?

만약 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선원이라면 다 같이 제한 배식을 하면서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 된다.

남은 식량이 4일분이고 남은 항해 일수는 7일이니까 괴롭기는 하겠지만 사람이 죽어 나갈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골치 아픈 손님들을 모시고 있는 입장에서는 머리가 지끈거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손님들이 얼마 전에 사고를 쳐서 식량이 부족하게 된 것이니 말이다.

* * *

- 2일 전 새벽, 리버티 호 조리실 -

“진짜 이래도 괜찮을까?”

“아, 너도 배고프다며? 그리고 어차피 남은 게 이렇게 많은데 무슨 상관이야?”

“그래, 솔직히 행군하면서 보급물자 한두 번 훔쳐 먹지 않은 녀석이 어딨어?”

“그때야 길 가다가 마을에서 보충하면 되었지만 배는 아니잖아.”

“멍청하긴. 그래서 이렇게 많이 가져온 것 아니겠냐? 뱃놈들이 아무리 무식해도 딱 우리가 먹을 만큼만 가지고 왔겠어?”

“그건 그렇지?”

조리실의 식료창고 안쪽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도둑고양이들은 그렇게 작게 시시덕거리며 제일 안쪽에 보관된 육포를 뜯어 먹고 새 물통과 술통을 열어 물과 맥주를 마셨다.

식료창고는 밤에 지키는 사람이 없는 대신 두터운 자물쇠로 잠겨있었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용병들 사이에 이런 자물쇠를 감쪽같이 열 수 있는 녀석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다.

그들이라고 첫날부터 이런 발칙한 짓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평생을 좁은 배 위에서 거지처럼 사는 뱃놈들이 지급하는 식량과 물은 품질을 떠나서 양이 너무 적었다.

게다가 밤이면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잠자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니, 배고픔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절제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용병들의 인내심은 하루가 지나기 전에 동이 나버렸고, 둘째 날부터는 이렇게 도둑고양이로 변신하여 몰래 식량을 축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고작 한두 명이었다면 큰 문제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배덕적인 쾌감으로 가득한 모험에 끼지 않는 용병은 드물었고, 자물쇠만 멀쩡하다면 굳이 안쪽의 식료품을 확인하지 않던 조리장의 안일함은 점점 일을 키웠다.

* * *

하지만 결국 이들의 행각은 발각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어제 새벽,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안쪽의 식료품을 발견한 조리장이 경첩이 느슨해질 정도로 세게 선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이들의 도둑질은 끝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보고를 들은 나는 풀 데 없는 분노를 안으로 삭이면서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상황은 명백하다.

하지만 과학수사를 할 수 있는 세상도 아니고, 그냥 합리적 의심만 가지고 손님들에게 ‘이 개만도 못한 쓰레기들아!’라고 외칠 수도 없는 노릇.

한참을 고민한 나는 조리장에게 물어봤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누구누구죠?”

“네?”

“식료품이 약탈당한 것을 누가 아느냐구요.”

“그거야 물론 저와 선장님···.”

“그럼 지금 당장 조리실로 가서 아무도 모르게 해요.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아침 보급하시고.”

“어떻게 하시려고···.”

“조리장은 내가 시키는 것만 하시면 됩니다. 비밀 엄수는 필수니까 절대! 잠꼬대로라도 말하지 마시고.”

“알겠습니다, 선장님.”

< <119화> 도둑고양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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