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21화 (121/420)

< <121화> 차악을 선택하는 이유 >

조리장 비에론 앞에 브랜디를 한 잔 놓아 준 나는 천천히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힘들죠? 한잔하고 이야기합시다.”

“감사합니다, 선장님.”

브랜디를 물처럼 들이킨 비에론은 인상을 쓰며 피식 웃었다.

“···크으, 간만에 마시니까 화끈하군요.”

“술이 많이 부족한가요?”

“그 망할 놈들이 식수를 죄다 오염시켜놔서··· 준비한 독주는 다 썼습니다.”

조리장의 특권이라면 아무래도 먹을 것 아니겠나?

특히나 배는 배급용 맥주뿐만 아니라 변질되기 시작한 식수의 역한 냄새를 가리기 위해서 40도 이상의 증류주도 상비해 놓는 편이다.

그리고 조리장이 그걸 한두 잔 몰래 마시는 것은 그냥 당연한 상식인 거다.

“하아, 진짜 그렇게까지 생각 없이 행동할 줄이야···. 입맛이 쓰네요.”

“선장님 잘못이 아닙니다. 어떤 뱃놈이 그런 걸 상상했겠습니까?”

“뭐, 이미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하고, 그놈들은 어때요?”

“이제야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눈치챈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배급량에 말이 많았는데 오늘은 조용하더군요.”

“이제 떠들 힘도 없겠죠. 선원들과 남은 손님들 상황은 어때요?”

“다들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닌데, 특별하게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식수가 조금 많이 부족하기는 합니다. 죄수들에게도 식수만큼은 제대로 공급해야 하니까요.”

“잘하셨어요. 오염된 식수 위주로 공급하더라도 최소한 탈수로 죽지는 않도록 조리장이 신경 좀 써줘요.”

그렇게 식량 상황에 대해 조리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인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면서 오펜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조리장을 한 번 보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선장님,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데?”

“일등항해사가 선교로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아인델프가 불렀다면 본인이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일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비에론에게 양해를 구했다.

“특별히 더 할 말이 없으면 이만 마치죠. 선교에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리장 비에론이 문을 나선 뒤 외투를 챙겨 입으며 아직 대기하는 오펜에게 물었다.

“요즘 춥거나 그렇지는 않아?”

“헤헤, 춥기는 한데 선장님이 사주신 옷이 있어서 견딜 만합니다.”

“다행이네. 다른 선원들은?”

“대부분 자기 옷이 있고, 당직 서는 사람들은 선장님이 사주신 외투까지 입을 수 있어서 괜찮은 것 같아요.”

“혹시라도 선원들 사이에 병이 돌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보고해, 알았지?”

“넷! 그런데 조금 서두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가자!”

오펜과 함께 선교로 올라가자, 심각한 표정으로 망원경을 보고 있는 아인델프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등항해사, 무슨 일이야?”

“선장님 오셨습니까? 일단 이것부터···.”

나는 아인델프가 건네주는 망원경으로 그가 바라보던 방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대로 다른 쪽도 확인한 다음, 바로 오펜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펜, 지금 당장 돌격대장에게 무기고 열라고 하고, 갑판장에게는 조용히 선원들 전투배치 시키라고 해. 포술장에게는 포문 열지 말고 포격 준비하라고 하고. 아, 앙셀 씨도 선교로 올라오시라고 전해.”

“네, 선장님.”

오펜이 급하게 자리를 뜨는 것을 확인한 나는 아인델프에게 물었다.

“일찍 발견한 것은 좋은데, 방향이 이따위면 회피는 힘들겠지?”

“네, 게다가 이 이상 항로가 꼬이면 식량과 식수 문제가 심각해질 겁니다.”

“쳇, 혹시 우리가 회피기동을 하는 척하면 포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끄응···. 하지만 만약에 추격이 길어지거나 다른 변수가 생긴다면 문제가 커집니다.”

우리가 진행하는 방향의 좌측과 우측의 먼 바다에서 갤리선 한 척과 범선 한 척이 이쪽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아직 국적기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멀기는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이라면 국적기도 가짜일 확률이 높았다.

저들이 상선이라고 가정하면 저렇게 사이좋게 움직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거든.

여기가 갤리선이 못 다닐 정도의 먼바다는 아니지만, 원래 상선들은 갤리선이 근처에 접근하는 것을 발작적으로 싫어한다.

그런데 우측의 범선은 갤리선과 멀어지기는커녕 우리 배가 있는 방향으로 Y자 형태를 이루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우리가 바로 배를 돌리면 된다.

지금 배를 돌려서 순풍을 타면, 범선은 몰라도 갤리선은 우리를 절대 못 쫓아온다.

하지만 그렇게 또 한참 동안 항로를 이탈해서 이동하기에는 우리 상황이 썩 좋지가 않았다.

당장 제한 배식을 하는데도 식량과 식수가 간당간당해서 한 이틀만 더 걸려도 위험해진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다시 해적을 만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차라리 싸울 체력이라도 있을 때 싸우는 것이 낫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추가 병력(?)이 있지 않은가?

마침 선교로 올라오는 앙셀이 보였다.

“앙셀 씨, 어서 오십시오.”

“리안 선장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혹시 일정이 조금 더 지체되어도 상관없겠습니까?”

“네? 여기서 더라면··· 식량과 식수도 모자란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기는 한데,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해적들과의 일전을 감수해야 하니 도와달라고 하면 왠지 우리가 부탁하는 것 같잖아.

“뭐, 그렇기는 합니다만, 저 앞쪽에 해적이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목표인 모양입니다.”

“네?! 해적이라구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 시간은 충분하고 앙셀 씨만 괜찮다면 한 사나흘 정도 돌아가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사나흘이라는 말에 앙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냥··· 돌파할 수는 없습니까?”

“상대에 갤리선이 있는 데다가 풍향이 우리에게 그리 유리하지 않아서 돌파는 어렵습니다. 굳이 강행한다면 전투는 불가피하죠.”

“전투라면···.”

“다행히 리버티 호는 대포도 있고 선원들도 숙련자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겁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앙셀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호위대를 무장시켜야겠군요.”

“좋습니다. 다만 전체 지휘는 저희 쪽이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혹시 용병들은···.”

“절대 안 됩니다. 이미 체력이 떨어져서 별 도움도 안 되는 데다가, 괜히 앙심을 품고 칼을 거꾸로 잡으면···.”

“그럴 사람들이 아닙니다! 비록 그들이 실수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게 매도하시면 저도 기분이 좋지는 않군요!”

용병 놈들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뭘 또 그렇게 발끈하고 난리람.

하지만 일단 상대가 손님이니 나는 빠르게 사과했다.

선상 전투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무장한 병력 16명이면 전투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죄수’들에게 무장을 시키는 것은 절대 반대입니다.”

“···알겠습니다. 호위대만 무장시키겠습니다.”

“네, 돌격대장에게 호위대의 무기고를 개방하라고 전하지요.”

* * *

우리가 전투준비를 마치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세 척의 선박은 어느 한 척도 뒤돌아 내빼지 못할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놈들은 우리가 그물 안에 들어온 고기라고 느꼈는지 본색을 드러냈다.

그런데 보통 이렇게 수상할 정도로 우리가 순순히 접근하면 저쪽도 의심을 하는 게 정상 아니야?

“놈들이 졸리로저(해적기)를 올렸습니다.”

“우리도 전투 깃발 올리고 포술장에게 좌현 쪽 범선에 포격 가하라고 해.”

“넵!”

“조타수, 우현 전타! 총원, 충격에 대비하라!”

잠시 후 묵직한 포성이 울리고, 좌현에서 접근하던 범선의 근처에서 세 개의 물기둥이 치솟았다.

신나게 접근하던 두 척의 해적선은 우리가 선공을 가하자 약간의 소란이 생겼지만, 곧 여기까지 들리는 시끄러운 함성과 함께 더 열심히 우리 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백병전이 시작되면 포격을 못 하고(포각이 안 나온다.) 대포도 얼마 안 되니까 지금은 자신감에 차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쪽 전력을 알고 나서도 저렇게 신날 수 있을까?

선원이 거의 60명, 추가로 호위대 16명,

거기에 괴물에 근접한 네이선과 만만치 않은 갑판장님까지 있다.

지금 접근하는 갤리선의 크기로 볼 때 노 젓는 놈들을 빼면 실제 전투 전력은 30~40명에 불과했다.

해적선의 노를 젓는 놈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해적으로 전향한 포로, 두 번째는 전향하지 않은 포로다.

똑같은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전향하지 않은 포로들은 쇠사슬에 묶여 죽을 때까지 채찍질을 당하며 노를 젓지만, 전향한 포로들은 해적들의 결원이 생기고 후배(?)가 생기면 노 젓는 일에서 해방되어 신참 해적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전향한 포로들이 노를 젓는 해적선의 경우, 가끔 백병전이 벌어지면 노 젓던 인원까지 무기를 들고 뛰쳐나올 수도 있다.

그것을 감안해도 50~60명, 밀릴만한 숫자는 아니다.

그러니까, 좌현 쪽 범선을 제외하면 그렇다고···.

활과 쇠뇌 등 장거리 무기를 든 사수들을 준비시키는 갑판장을 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아인델프가 보고했다.

“선장님, 명령하신 대로 믿을만한 녀석으로 열다섯 명을 추렸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대기. 너희는 예비대야.”

“네?”

“잘 봐. 리버티 호가 무슨 벌판처럼 넓은 것도 아니고, 바리케이트까지 설치해서 지금 남은 인원으로 전체를 커버할 수 있어. 그러니까 괜히 힘 빼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지만···.”

하긴, 군대도 안 다녀온 녀석들이 ‘예비대’의 개념에 대해서 어떻게 알겠냐마는···.

특히나 냉병기로 하는 백병전은 엄청난 체력을 소모시킨다.

전력을 다해서 칼질을 한다면 1분? 그 정도만 싸워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전투의 중반쯤 되면 피아를 막론하고 무릎 붙잡고 헐떡이다가 등짝에 칼 맞는 경우가 종종 보이고는 했다.

그러니까 전열에 서지 않는 인원들을 조금씩 빼서 잠깐 쉬게 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우리는 저놈들만 때려잡으면 되는 게 아니고 좌현의 범선도 상대해야 하니 말이다.

“그보다··· 삼등항해사? 칼질은 좀 할 줄 아나?”

“네? 네, 네!”

나는 손이 하얗게 되도록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는 슬레어의 오른손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손에 힘 빼, 그렇게 힘주고 있다가는 진짜 싸워야 할 때 제대로 못 움직인다.”

“네!”

힘 빼라고 한다고 바로 힘을 뺄 수 있다면 연습이니 경험이니 하는 게 필요 없겠지.

그 순간 갑판장의 단단한 외침이 들렸다.

“발사!”

이쪽에서 화살과 쿼럴이 치솟자, 저쪽에서도 질 수 없다는 듯이 강철의 대가리를 가진 나무막대를 쏘아 올렸다.

나는 상대의 침로와 거리, 리버티 호의 이동속도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조타수를 밀어내고 타륜을 잡았다.

“넌 저쪽, 예비대들이랑 같이 대기해. 일등항해사!”

“네, 선장님!”

“좌현 범선 위치 확인하고 수시로 나에게 보고해!”

“네! 현재 적선 방위 310, 거리 600입니다.”

우현의 갤리선은 이미 접현을 시도하기 위해 선수를 돌리고 있으니 조만간 우리 배 역시 기동력을 상실할 게 뻔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포격을 더 많이 가할 수 있도록 세심한 조절이 필요했다.

그 사이에 다시 한 번 포성이 울리고, 잠시 후 선원들의 함성이 터졌다.

좌현의 범선을 보니 현측에 큼지막한 상처가 생긴 것이 보였다.

전투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편의 사기를 높이고 상대의 사기를 낮추는 효과 정도는 충분했다.

그보다 쉽게 맞추기 어려운 거리인데 우르타 녀석 제법이군?

범선은 고작 상선을 상대하다가 이 거리에서 유효타를 얻어맞을 줄은 몰랐는지 약간 주춤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우리의 선미 쪽으로 침로를 약간 바꾸어 접근하기 시작했다.

나는 타륜을 조절하며 최대한 놈이 우리의 포격 유효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하지만 곧 갑판장의 우렁찬 외침이 들리면서 타륜을 놓아야만 했다.

“충돌한다! 우현 충돌 대비!”

쿠우우우웅! 꾸드드드득!

“와아아아아!”

“다 죽여 버려!”

“막아! 해적 놈들을 모조리 바다에 처넣어버려!”

“우아아아!”

충돌의 진동이 다 가시기도 전에 온갖 악다구니와 함성, 비명이 리버티 호를 점령했고, 졸지에 방어의 한 축을 맡게 된 호위대 역시 영 탐탁지 않아 하던 표정을 악귀같이 바꾸고는 그 살인 축제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선원이나, 해적이나, 용병이나, 죄다 미친놈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는 예전과 달리 선교에 서서 전투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선장이고, 옛날처럼 눈알이 뒤집혀서 칼을 들고 설치는 것은 내 본분이 아니다.

우리의 희생을 최소로, 상대의 피해를 최대로.

내가 비록 전체 지휘 경험은 없어도 어렵게 준비한 예비대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으니, 최소한 다른 멍청이들보다는 더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을 거다.

< <121화> 차악을 선택하는 이유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