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22화 (122/420)

< <122화> 외날의 라프나 >

신들린 듯 손도끼를 휘두르는 갑판장과 해적을 쫓아다니며 도륙하는 네이선이 보인다.

아니, 쟤 아직 다 낫지도 않았을 텐데 저렇게 막 움직여도 되나?

나는 아직도 뻐근함이 느껴지는 왼팔을 슬쩍 움직여 보고 인상을 구겼다.

앙셀의 호위대도 제법 한몫하고 있어서 그쪽 널빤지는 조금 휑하다.

나 같아도 사람 키보다 긴 창을 내밀고 방패로 전면을 막은 그쪽으로는 가기 싫을 것 같다.

배가 많이 흔들리면 자세를 유지하기 힘들겠지만, 오늘은 바다가 잔잔해서 배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기세를 올리며 리버티 호에 기어오르던 해적들은 이제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올라오는 녀석들이 주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정도면 대충 난전으로 치달아야 하는데, 여전히 우리의 방어는 굳건하고 죽어나가는 것은 대부분 해적이었으니까.

“슬레어, 지금 예비대 몇 명이지?”

“다섯입니다, 선장님.”

“다 데리고 저쪽 애들이랑 교대 해. 그리고 다치거나 지친 애들은 다 빼도 되겠다. 아인델프에게 전달해서 애들 수습해서 복귀하라고 하고.”

“네! 선장님!”

나는 다부지게 대답하고 뛰어가는 슬레어를 보며 제발 다치지 말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녀석은 전투 내내 계속 내 옆에만 있었다.

딱 봐도 살인이랑 거리가 먼 녀석인데, 괜히 가서 패닉이라도 일으키면 대형 민폐니까.

하지만 어차피 뱃사람으로 살 거라면 지금처럼 여유 있을 때 전투를 경험해 보는 게 좋았다.

“선장님, 좌현에 적이 근접했습니다! 방향은··· 230, 거리는 70, 아니 80입니다!”

아인델프의 빈자리는 오펜이 메꾸고 있었다.

아직 방향이랑 거리를 잡는 것은 어설프지만, 그래도 똘똘한 녀석이라 얼추 비슷하게 잘 따라 하는 중이었다.

오펜의 보고를 듣고 좌현 후미 쪽을 보니, 이쪽의 상황을 잘 모르는 듯 기를 쓰고 접근하는 해적선이 보였다.

비어 있는 좌현에 접현해서 우리를 끝장내고 싶은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이쪽도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거든.

우리에게 접근 중인 해적선은 여기저기 개조를 많이 하기는 했지만 350톤 켈리언급 선박인 것 같다.

켈리언급 선박이라면 상업용으로 최적화된 누벤테 급과 달리 체구는 작아도 속도가 꽤 빠르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애초에 군용 연락선을 베이스로 개발된 모델이기는 한데, 민간에서 교역용으로 쓰이면서 뭔가 이도 저도 아닌 혼종이 되어버린 녀석이다.

대충 예상해보자면, 저 정도 크기의 켈리언급 선박이면 전투원은 많아 봐야 40명 안팎이다.

아무리 해적선이라도 선원으로 가득 채우고 다닐 수는 없잖아?

해적도 밥 먹고 물을 마셔야 하며, 약탈하면 약탈품을 챙겨 넣을 공간은 있어야지.

그때 포갑판에서 우르타가 십여 명의 선원을 이끌고 선교로 달려왔다.

“선장님, 더 이상 포격은 불가능합니다. 다음 명령을.”

“잘했어, 포술장. 상대방 피해는?”

“대여섯 발은 맞춘 것 같은데 맞은 곳이 애매해서···.”

“대포 세 문으로 그 정도면 잘한 거지. 맞은 부위야 뭐, 운이잖아? 일단 우현은 여유 있으니까 좌현으로 가서 백병전 준비해. 아 참, 우현에 버려진 쇠뇌 좀 챙겨가고.”

“네! 우리 애들이 쏘는 것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하니까!”

우르타가 대포를 다루던 선원들과 함께 달려가고, 뒤이어 아인델프가 일단의 선원들을 데리고 복귀했다.

우현을 확인하니 어느새 리버티 호에 올라온 해적은 남김없이 처리되었고, 네이선이 일부 선원을 이끌고 해적선으로 건너가는 것이 보였다.

“선장님, 부상자들과 복귀했습니다. 우현은 거의 제압되었습니다.”

아인델프의 온몸이 피로 물든 것을 보니 꽤나 치열하게 싸운 모양이다.

“수고했어, 일등항해사. 다친 데는 없고?”

“네! 전 괜찮습니다.”

“좋아, 수습 선원들 시켜서 부상자들 응급처치라도 하게 하고, 지친 인원으로 다섯 명은 대기시켜. 너도 좀 쉬고.”

“전 아직 괜찮습니다만.”

“쉬어, 아직 좌현에 한 놈 더 남았잖아.”

아인델프가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나자 앙셀이 말했다.

“선장님, 호위대는 어떻게 할까요?”

“가능하면 좌현에서 방금 전처럼 한 구역을 방어해 주실 수 있나요? 효과가 좋네요.”

“그렇게 하죠.”

내 요청을 선선히 수락한 앙셀이 빠른 걸음으로 선교에서 내려갔다.

저쪽은 앙셀이 직접 요청하지 않으면 말을 들어 먹을 생각을 안 해서 직접 움직이는 것이다.

원래 갑판장이 지휘하게 하려고 했는데, 말을 더럽게 안 듣는 바람에 빨리 포기했다.

그래도 제 몫은 했으니 할 말은 없다만···.

* * *

백기가 올라가지 않았을 뿐, 갤리선은 공격 역량을 완전히 상실했다.

네이선이 직접 건너가서 도망 다니는 해적들을 난도질하고 있으니, 끝난 거지 뭐.

그리고 상황을 수습한 갑판장이 남은 인원을 좌현에 배치하기 무섭게 갈고리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까딱 잘못해서 1~2분만 더 늦었다면 제대로 방진도 못 짜고 시작부터 난전이 될 뻔했다.

접현 직전까지 이루어진 사격전은 우리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해적들은 한 발 쏘고 바리케이트 뒤로 몸을 숨기는 까다로운 사수들보다는 대놓고 드러난 호위대를 향해 공격했고, 방패라는 선상 전투에서는 조금 생소한 무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은 그리 효과가 없었다.

배에서 방패를 쓰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크고, 걸리적거리고, 무겁다.

물론 배에서도 화살과 쿼럴을 막는 데에는 방패만 한 것이 없기는 하다.

하지만 배라는 곳은 구조물이 많고 행동반경이 좁아서 주무기로 짧은 커틀라스를 쓰는데, 그런 선원들에게 방패를 들고 싸우라는 것 자체가 모순이잖아.

해적들은 관성에 따라 갈고리를 던지고 못 박힌 널빤지로 두 배를 연결까지는 했는데, 막상 넘어오지 않고 함성만 지르며 당황을 숨기고 있었다.

이제야 우리 쪽 상황이 파악된 것이다.

자기들보다 숫자가 많은 갤리선 쪽 인원이 완전히 제압당한 것으로 보이고, 한 번 전투를 치른 것 같지 않게 선원들은 쌩쌩해 보일 테니 주저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대로라면 전투 없이 이놈들은 퇴각할지도···.

쿠웅!

하지만 내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널빤지를 밟지도 않고 도약만으로 이쪽으로 넘어온 거구의 남자.

“으하하, 해적이라는 놈들이 이깟 허약한 선원 놈들에게 쫄았단 말이냐?! 덤벼라!”

“끄아아아악!”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이 울렸다.

거구의 남자가 보기와는 다르게 엄청난 속도로 전투 도끼를 휘둘러 앞에 있던 선원의 가슴을 반쯤 갈라버린 것이다.

이후로 그는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두르며 우리 선원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가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 또는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그를 시작으로 해적들 역시 미친놈들처럼 리버티 호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규격 외였다.

일반 선원들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고, 우리 쪽 전열은 이미 붕괴하고 있었다.

“선장님!”

“젠장! 지금 상황이면 전략이니 전술이니 그딴 것은 필요 없어! 아인델프! 움직일 수 있는 인원 전부 저 괴물 놈을 막는다! 가자!”

끽해봐야 몇십 명이 맞붙는 전투다.

저런 놈이 날뛰면 단번에 전세가 기울어버린다.

마치 네이선이 적진에서 날뛰듯··· 그런데 네이선 이놈은 왜 안 와?!

우리가 전장에 합류하는 사이에 결국 갑판장이 그 괴물과 맞서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괴물의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재빠르게 몸을 피한 에른스트가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외날의 라프나인가?”

“호, 나를 아는구나? 늙은이는 누구야?”

“쯧, 어린놈이 건방지게!”

“크하하하, 어린놈? 그럼 늙은 놈은 뒤져야지!”

라프나라는 놈의 도끼가 다시 한번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고, 에른스트는 도끼를 막지 않고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라프나의 미소가 진해지는가 싶더니, 떨어지던 도끼가 거의 직각으로 꺾이며 그대로 에른스트의 허리로 향했다.

저걸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야?

이번만큼은 피할 수 없었는지 에른스트는 이를 악물며 자신의 손도끼로 라프나의 전투 도끼를 막았고, 굉음과 함께 에른스트가 튕겨 날아갔다.

그리고 나는 휑하게 비어 있는 놈의 옆구리에 회심의 일격을 먹였다.

“읏, 따끔하군. 네놈은 또 뭐야?”

망할, 너무 얕았나···.

에른스트가 위기에 처하는 바람에 약간 당황하기도 했는데, 라프나라는 이 미친놈은 내 칼이 닿는 순간 허리를 틀면서 피해를 최소화했다.

“흐흐흐, 뭐야? 항해사? 설마 선장인가? 어린놈이 제법이다만, 그 운도 오늘이 끝이다!”

콰앙!

엉겁결에 한 번 막기는 했지만 두 번은 절대 못 막을 것 같다.

상처를 고려하면서 싸울 상황이 아니라 양손을 사용했는데, 상처가 아물지 않은 왼팔은 절구통에 넣고 짓이기는 듯 아파 왔고, 오른손은 호구가 찢어진 것 같다.

“선장님! 피하십시오!”

심지어 거의 온몸이 마비되다시피 해서 다음 공격에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있는데, 왼쪽에서 전해지는 강렬한 충격과 함께 몸이 떴다.

우당탕탕!

쿵!

“커어억!”

“큭, 선장님, 괜찮으십니까?”

잠시 암전되었던 시야가 제대로 돌아오자, 내 앞을 지키고 선 아인델프가 보였다.

“아직 죽지는 않았어. 시발, 어떡하지?”

아인델프가 나보다 칼질을 잘하기는 하는데, 장담하건대 저 괴물에게는 안된다.

갑판장님이 조금만 더 버텨주었다면 우리 셋에 칼질 좀 하는 선원 몇 명 붙이면 견제는 될 것 같은데, 보다시피 글러먹었다.

자신만만하게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라프나를 보다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선원들은 연신 뒤로 물러서고 있었고, 해적 놈들은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방진을 지키고 있는 호위대 때문에 전면적으로 물러나지 않았을 뿐, 패배는 시간문제였다.

“이노옴!”

그때 갑자기 라프나의 뒤편에서 노호성이 울리더니, 장작에 도끼가 박히는 것 같은 파열음이 들렸다.

“큭! 늙은이, 살아있었나?!”

“흐흐, 네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기 전에는 못 죽지.”

호쾌한 말과 다르게 에른스트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

오른쪽 팔은 축 처져 있었고, 무기인 손도끼는 라프나의 등짝에 어설프게 박혀 있었다.

오른손을 못 써서 왼손으로 잡고 찍은 모양인데, 갑판장이 원래 왼손잡이는 아니다 보니 각도나 힘이 좀 모자랐던 모양이다.

“이것 참, 심심해서 놀러 나왔더니 꽤 재밌는 놈들이 있군? 내게 상처를 입히다니 제법이야.”

“흐흐흐, 조금 더 씨부려보거라 꼬맹아. 저기 네놈 모가지를 떼어 줄 우리 돌격대장이 달려오고 있거든.”

“응? 영감탱이, 여기에 쓸 만한 녀석이 더 있나?”

어라? 돌격대장이라고?

“네이선!”

“흐아아압!”

언제 달려왔는지 네이선이 기합 소리와 함께 라프나에게 칼을 내리그었다.

채앵!

“크흣, 정말 제법이구나! 으하하하하!”

“닥치고 이거나 막아봐라!”

허, 네이선이 전력을 다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이건 뭐 공방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냥 번쩍번쩍, 쾅쾅, 챙챙거리는데, 라프나라는 놈은 덩치가 워낙 커서 조금 보이기는 하지만, 네이선은 팔도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선원들과 해적들까지도 어느새 전투를 멈추고 두 사람을 멍하니 쳐다볼 정도였으니,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 상상이 가는가?

하지만 1분쯤 지나자 슬슬 승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가 입힌 상처는 그저 그럴지 몰라도, 아무리 가볍게라지만 등에 도끼가 박혔는데(지금은 빠져서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정상적인 전투력이 나오지는 못하겠지.

어느새 라프나는 도끼가 박혀있던 등의 출혈이 점점 심해지고 작은 상처를 입는 주기가 빨라졌다.

하지만 네이선은 약간 느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처 하나 없었다.

물론 저 무식한 전투 도끼에 상처를 입으면, 단순하게 그냥 상처로 끝나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네이선 저 녀석도 몸이 정상은 아니잖아?

그 순간, 지금까지와 궤를 달리하는 강렬한 충돌음이 울렸다.

채애앵!

네이선이 충격을 해소하려는 듯 살짝 한 발 물러서고, 그 사이에 라프나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오늘은 상처 때문에 이만 봐주도록 하지! 다음에 다시 붙어보자!”

“어딜!”

“이거나 받아랏!”

네이선이 급하게 뒤를 쫓자, 라프나는 옆에 있던 해적의 덜미를 잡더니 집어 던졌다.

와 씨, 인간이 인간을 한 손으로 집어 던진다고? 그게 가능해?

< <122화> 외날의 라프나 > 끝

작가의말

네임드 해적이 출현하였습니다!

외날의 라프나와 적대관계가 되었습니다!

식충이 28을 획득했습니다!

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