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기막힌 재회 >
사람을 던졌다고 해서 막 대포알처럼 날아왔다는 것은 아니고, 살짝 떠서 균형을 잃은 채로 바닥에 떨어져 구르면서 네이선의 진로를 막았다는 뜻이다.
그 해적 때문에 네이선이 주춤하는 사이에, 라프나는 재빨리 해적선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 꼴을 본 해적들도 앞다투어 다시 해적선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공격! 도망가게 두지 마! 다 죽여!”
나는 갑작스러운 반전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보통 때라면 도망가는 해적들을 쫓아가서까지 공격하지는 않겠지만, 저 라프나라는 놈은 너무 무섭잖아.
괜히 저런 놈들은 살려서 보내면 나중에 후환이 되는 법이다.
물론 우리가 입힌 상처가 작은 것은 아닌데, 괴물 같은 놈이 고작 저 정도 상처로 곱게 죽어줄 것 같지는 않다.
내 명령이 떨어지자 선원들도 그동안 계속 밀리면서 울화가 쌓였던 것인지, 네이선이 라프나를 이긴 것에 고무된 것인지, 함성을 지르며 역공을 취했다.
하지만 막상 살아남은 해적들이 모두 해적선으로 건너가자 선뜻 널빤지에 발을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기세가 죽어버리자 나는 잇소리를 내며 네이선이 있는 방향을 보았지만, 얼굴을 찡그리고 어깨로 숨을 쉬는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미련을 접었다.
대충 둘러보니 이쪽의 투입 가능 인원은 30명 미만, 해적들의 수도 대충 30명쯤으로 머릿수는 백중세였다.
하지만 우리는 공격이 익숙하지 않은 선원들이 주력이고, 아무리 배 위라도 공격 측이 방어 측보다 불리한 것은 상식이다.
돌파력 좋은 네이선, 아니, 하다못해 갑판장님이라도 정상이면 어떻게 비벼보겠는데, 이대로는 무리였다.
“칫···! 포기하자.”
양 쪽 모두 전투 의지가 없다보니 빠르게 갈고리가 떨어지고 널빤지가 회수되거나 파괴되었다.
나는 그 모습을 착잡하게 지켜보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눈을 옮겼다.
그곳에는 옷을 벗고 상처를 치료하며 나를 노려보는 라프나가 보였다.
라프나는 통증이 있는지 잠시 인상을 찡그리더니, 오른손 엄지로 자기 목을 천천히 긋는 시늉을 했다.
하, 역시나 저 새끼 살려두면 안 되는 거였어···.
“우르타, 아니, 포술장. 지금 당장 포갑판으로 내려가서 저놈들 이탈하면 바로 쏴버려. 그리고 일등항해사는 지금 당장 우현에 결속된 갤리선 떼어내!”
“선장님! 어차피 지금 갤리선을 떼어내도 바로 기동할 수는 없습니다···.”
“저거 살려 놓으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것 같은데···.”
“선장님, 포격··· 어떻게 할까? 한 발이라도 쏠까요?”
나는 이제 멀어지고 있는 해적선을 노려보며 우울하게 물었다.
“포술장, 어차피 지금 당장 내려가도 바로 못 쏘지?”
“마지막 포격하고 바로 올라왔으니까··· 힘들지··· 요.”
“그럼 관두자···.”
나는 바닥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쇠뇌에 잠시 시선을 주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네이선과 싸울 때의 움직임으로 볼 때, 이 정도 거리에서 쿼럴 한두 발로 잡을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라프나의 해적선이 적당히 멀어지자, 우리는 분주하게 뒷정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바로 나포한 갤리선의 확인이었다.
“네이선, 정리는 확실하지?”
“네, 그리고 선저에 노 젓는 포로들이 있었습니다. 해적으로 전향한 녀석들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노예?”
“건강 상태나 대우로 볼 때 사로잡힌 포로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확실하지 않아서 일단 입구는 밖에서 막아 두었습니다.”
“으응, 잘했네. 우리 쪽은 포로 없어?”
“스무 명 정도 있습니다. 내일이면 열 명 정도만 남을 것 같습니다만.”
“씁···. 상황부터 보자.”
우리 쪽 포로는 당연히 사로잡힌 해적들이다.
모든 국가에서 사로잡힌 해적은 에누리 없이 사형이며, 해적을 사로잡은 군함이나 상선이 즉결처분하더라도 벌을 받지 않았다.
배에서는 포로를 위한 공간이나 식량, 식수를 배려하기 어렵기 때문인데,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해적은 물론이고 해적에게 잡혀있던 포로들을 건사하는 것도 어려웠다.
내가 먼저 방문한 곳은 당연히 선장실이었다.
해적선에서 부피가 작고 값비싼 귀중품이 모이는 곳은 선장실 아니겠어?
“애걔? 이게 선장실이야?”
나를 따라온 우르타가 대놓고 실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장실은 비좁았고, 별것 없는 내 선장실만큼 볼품도 없었다.
바닥에는 싸구려 럼과 진이 담겨있던 빈 병이 굴러다녔고, 요상하고 불쾌한 냄새가 감돌았다.
항해 도구들은 모두 낡아서 그리 큰돈이 될 것 같지 않아서 그냥 따라오던 삼등항해사 슬레어에게 던져주었다.
“이건 앞으로 삼등항해사가 쓰도록 해.”
“엣?!”
“매번 나랑 아인델프에게 빌려 쓰기 불편했지? 낡았지만 그럭저럭 성능은 잘 나오는 것 같으니까 써도 될 거야.”
“감사합니다, 선장님!”
그 외에 또 쓸만한 게 없는지 뒤져보는 중에 우르타가 한 건을 올렸다.
“응? 여기 좀 이상한데?”
“왜?”
“왠지··· 이상한데?”
우르타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별것 없는 책상의 서랍을 자꾸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비켜봐!”
우르타를 치운 나는 먼저 서랍을 모두 분리했다.
그리고 책상의 안쪽부터 확인했다.
혹시나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다음으로 나는 서랍의 내용물을 다 바닥에 버리고 부수기 시작했다.
“엑? 리안! 뭐 하는 거야?!”
“이상하다며?”
“어? 그, 그렇긴 한데 서랍을 왜 부수냐고.”
“그거야, 자, 봐.”
나는 마침 두 번째 서랍의 바닥이 부서지며 나타난 것을 우르타에게 보여주었다.
부서진 서랍의 바닥 아래로 다른 바닥이 있었고, 그 바닥과 바닥 사이에는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된 열댓 개 정도의 진주가 있었다.
“으아앗?! 이걸 어떻게 알았어?!”
“흐흐흐, 이 정도 트릭은 기본이지.”
내가 진주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자, 눈을 반짝거리던 우르타는 다른 서랍들을 신나게 부숴대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보통 이런 비밀 상자는 하나뿐이란다, 우르타.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와아앗! 나도 찾았다!”
“어?!”
내가 당황해서 우르타를 보자, 우르타가 당당하게 나무 부스러기가 묻은 종이 한 장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게 뭔데?”
“몰라!”
뭔지도 모르면서 뭘 저렇게 당당하게··· 그런데 도대체 뭐지?
나는 우르타에게 그 종이를 받아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그 종이에는 두 줄에 달하는, 28개의 숫자가 정성스럽게 쓰여 있었다.
“이게 뭐야?”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내가 육성으로 소리를 내뱉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타의 머리통이 쑤욱 들어 왔다.
“엉? 웬 숫자야?”
“나도 몰라.”
한동안 숫자를 노려보던 우리는 곧 항복을 선언했다.
아무런 규칙성도 없는 숫자는 그 자체로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비밀공간에 이렇게 정성스럽게 적어서 보관한 것을 보면 중요한 것 같기는 한데···.
종잇조각을 일단 품에 넣고 선장실을 탈탈 턴 우리는 금화 약간이 들어있는 작은 상자를 끝으로 탐색을 마쳐야 했다.
우리가 선장실 탐색을 마치고 갑판으로 나오자, 선창을 확인한 아인델프가 약간의 자재와 맥주, 소금, 피혁, 양모 등을 찾았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이어서 조리장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선장님, 식량창고에서 맥주와 식량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상당량의 물도 있습니다.”
“아! 진짜요?! 다행이네요. 며칠 분이나 될 것 같아요?”
“사망자와 포로들을 고려하지 않을 때 대략 4~5일분은 될 겁니다.
“좋아요, 일단 빨리 선원들을 시켜서 리버티 호로 옮기도록 하죠.”
“네, 선장님!”
“일등항해사는 여기 선창 좀 정리하고. 선창에 있는 걸 리버티 호 쪽으로 옮기기는 힘들겠지?”
“네, 수량과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미 리버티 호는 최대 적재 상태라 더는 힘듭니다.”
“아깝네. 예항할 수 있다면 꽤 돈이 될 것 같기는 한데··· 여기에 닻을 내리고 두었다가 다시 오더라도 못 찾겠지?”
“하하하, 어렵지 않겠습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나포한 선박은 돈이 꽤 된다.
그래서 웬만하면 나포한 선박은 끌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다면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는 언제일까?
첫 번째로 나포한 선박의 함령이 너무 오래되고 파손이 심각하여 땔감으로나 팔릴 것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겠다.
두 번째로 항해 일정상 나포한 선박을 끌고 갈 정도로 여유가 없을 경우가 있겠지.
일단 예항이라는 행위 자체는 선박의 속도를 굉장히 늦추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가 두 번째 상황과 비슷했다.
비록 리버티 호보다 작은 갤리선이지만, 이걸 예항하려고 했다가는 속도가 더 떨어질 것이다.
식량 사정은 조금 나아졌지만, 일정이 촉박한 손님 태운 입장에서 일정이 더 늘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 예항을 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일정을 더 늘리지 않겠다고 일부러 피할 수 있는 전투를 피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손님인 그들이 전투에 참여까지 했다.
순간적으로 앙셀과 호위대 등을 모조리 수장해버릴까 하는 못된 생각도 들었을 정도로 손해가 막심했다.
갤리선 가격도 가격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교역품들까지 하면 어휴···.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차라리 리버티호가 갤리선이었다면 더 빨리··· 응?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나는 급하게 하부 갑판으로 향했다.
땀 냄새, 분변 냄새, 오물 냄새, 음식물 썩는 냄새 등··· 세상의 온갖 악취가 그곳에 모여 있었다.
어두컴컴한 그곳에는 인간의 형상을 한 생명체들이 희망을 잃은 탁한 눈빛으로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들의 팔목과 발목에는 굵은 쇠고랑이 채워져 노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중에 그 누구도 그 구속구를 풀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그것은 뭐랄까,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우읍, 오펜, 오펜이랑 수습 선원들 시켜서 여기 환기랑 청소 좀 시켜. 건강한 사람도 여기에서 한 시간만 있으면 병에 걸리겠다. 그리고 딱 봐도 다 해적한테 잡힌 포로들 같은데, 어떻게든 살려보자고. 다행히 음식물에 여유가 생겼으니까···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려야지.”
어둠 속에서 아인델프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선장님 굳이··· 휴, 아닙니다. 해적이 아니라면 살리는 것이 맞겠지요. 그런데 굳이 이곳을 청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일단 이 인원을 우리 배에 태우려면 식량을 덜어내건 교역품을 덜어내건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우리 이 갤리선도 가져가자.”
“네에?!”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까 빨리 여기부터 어떻게 해봐. 선원들 시켜서 이 사람들 구속구 좀 풀게 하고!”
“알겠습니다, 선장님.”
잠시 후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긴 선원들이 왔다 갔다 하며 노 젓던 포로들을 하나씩 갑판 위에 모아놓기 시작했고, 오펜과 다른 수습 선원들은 내부 청소를 시작했다.
배의 크기와 노의 개수 등을 확인하고 여러 가지 계산을 하는 중인데 갑자기 하부 갑판에서 오펜의 비명이 들렸다.
“으아아아! 형! 혀어어엉! 이, 워트 형! 이, 이게, 이게 뭐야! 왜··· 왜··· 혀어어어엉!”
< <123화> 기막힌 재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