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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25화 (125/420)

< <125화> 기분이 더러워지는 선행 >

나는 에른스트와 함께 뱃전에서 가만히 서서 바람을 맞았다.

앞쪽의 갤리선에서는 노를 저을 때 박자를 맞추는 북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바다 멀리 눈곱만하게 보이는 다른 선박들도 몇 척 눈에 띄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역시 잔머리는 대단해.”

“잔머리라니요?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과학? 진짜 어디서 학자 나부랭이에게 뭘 배우기라도 한 거냐?”

“제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렇기는 한데··· 거참, 널 본지 벌써 몇 년째인데도 아직 너를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요.

20년을 넘게 본 저도 절 모르는데 갑판장님이 어떻게 알겠어요?

저도 제가 신이 안배한 특별한 인간 중의 한 명인 줄은 얼마 전까지도 몰랐어요.

“팔은 좀 괜찮으세요?”

내가 부목을 댄 에른스트의 팔을 보며 묻자, 살짝 인상을 찡그린 그가 대답했다.

“옛날에야 이런 거는 침만 발라도 나았지만, 이제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 말이야. 젊을 때는 이런 나무쪼가리 붙이느니 창피해서 그냥 바다에 빠져 죽었을 텐데.”

뼈가 부러졌는데 침 바르면 낫는다니, 그게 말이야 망아지야?

게다가 부목이 창피하다니, 도대체가 무슨 삶을 살아오신 거예요?

물론 이 세상 의술 수준이 워낙 치명적이라 치료를 받는 쪽이 더 위험한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부목은 대야죠···.

조만간 제대로 된 선의를 구해야겠다.

내 부족한 의학 지식으로 커버를 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치트키쯤 되는 항생제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의사를 하나 구해야겠어요.”

“의사? 죄다 돌팔이들이야. 멀쩡한 사람을 죽이는 게 그놈들 일이지.”

“크크큭, 대부분 그렇기는 한데, 정말 괜찮은 의사도 있더라구요. 롱베르 씨 같은 분.”

“롱베르가 누군데?”

“아, 전에 타던 배의 선의님이에요. 원래 제국 대학 교수셨으니 지금도 교수를 하고 계실 텐데···.”

“몰로스 제국 대학? 제도 엠페리움에 있다는 대학 말이냐? 거기는 너무 먼데? 내륙 도시라서 접근도 힘들고 말이야.”

“에이, 그냥 그런 분도 있다는 거지 그분을 데리고 올 수는 없죠. 교수나 하는 분이 굳이 힘들게 리버티 같은 작은 배에 타시겠어요?”

“교수라면 그렇기는 하겠군.”

잠시 조용히 있던 나는 품으로 파고드는 찬바람을 느끼며 외투를 여몄다.

“날도 추워졌는데 입항하면 바로 의사에게 가봐요, 괜히 뼈가 잘못 붙으면 어떡해요? 무리하지도 마시고, 부목도 절대 떼지 말고, 드린 약도 잘 드시구요.”

“에잉, 선장이 되더니 갈수록 잔소리가 느는군. 알아 모시겠습니다, 선장님.”

“그런데 해적이 더 많아진 것 같아요. 예전에도 이렇게 해적을 자주 만났던가?”

“응? 언제 해적을 만났냐? 이번 말고는 뭐··· 고드실카를 탈 때도 몇 번 만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최근에 합류한 갑판장님은 잘 모르겠군.

생각해보니 리버티 호로 해적과 직접 교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왜 요즘에 해적을 자주 보는 기분이 드는 거야?

“아녜요, 그냥 좀, 라프나를 만났던 곳도 해적을 자주 만나는 곳은 아니잖아요.”

“그거야··· 이 시기에 그쪽 항로를 이용할 정도면 굉장히 급하거나 귀한 화물이고, 바다 특성상 우리처럼 대인원을 태우기는 조금 어렵지 않냐? 사실 나도 출발하기 전에 선원을 조금 해고하자고 권하려고 했다만···.”

“에이, 이제 잘 키워서 쓸 만해졌는데 해고할 수는 없죠. 그나저나 선원을 또 고용해야겠네요.”

“으음··· 죽은 9명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부상자 15명은 더 이상 배를 태울 수 없으니 말이다.”

“입항하면, 오펜을 일반 선원으로 올리려구요.”

“음? 항해사로 키우려던 것 아니냐?”

“그렇기는 한데, 항해사로 한몫을 할 때까지 계속 수습으로 놓을 수는 없잖아요. 선원들도 오펜을 수습 선원 취급하지는 않던데요, 뭐.”

“그렇기는 하지. 알겠다.”

* * *

이틀 후, 우리는 무사히(?) 일루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연히 범선의 앞에 갤리선을 연결한 기묘한 우리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꽤나 비웃음을 당했다.

괜찮아, 저걸로 벌 수 있는 돈이 얼마인데 그까짓 비웃음 정도야, 뭐.

“선장님, 감사했습니다.”

“아, 앙셀 씨. 물건에는 별문제가 없던가요?”

“네. 아시다시피 쉽게 망가지는 물건은 아니니까요.”

“다행이네요. 너무 늦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덕분에 겨우 일정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처에 추가 병력도 도착했다고 하니 병력 문제도 해결되었고요.”

“그, 혹시 용병들이 불만을 표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슬쩍 묻자, 앙셀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하···. 전혀 불만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그들은 지금도 ‘결과가 좋으니 다 좋은 거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니까요. 대신 별도의 금액을 지불해서 그나마 터지지 않을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하아, 진짜 구제불능인 놈들이군.

며칠 전에 운 좋게 해적을 만나고, 운 좋게 해적선을 나포하고, 운 좋게 그 해적선에 식량과 식수가 많았고, 운 좋게 그 이후로 아무 문제도 없었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삐끗했어도 대참사가 날 상황을 만든 주제에 뭐가 어째?

해적을 만난 것을 과연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화가 난다.

“쯧, 그런 놈들과 계속 부대껴야 한다니 앙셀 씨도 피곤하시겠군요. 그럼 앞으로 행운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네 리안 선장님과 리버티 호에도 무운이 함께하기를. 일정이 급해서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게서 멀어진 앙셀은 출발 준비를 마친 자신의 상단으로 돌아갔고, 이내 상단은 천천히 부두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멀어진 앙셀의 상단에서 몇 용병이 이쪽을 보고 몸짓 욕을 날렸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보다 급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

게론드에게 교역품의 매각을 알아보라고 했고, 갑판장과 네이선에게는 리버티 호와 갤리선의 분리 작업을 맡겼으며, 우르타에게는 조선소를 돌면서 갤리선을 매입할 곳을 찾으라고 했다.

그리고 아인델프와 함께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과 노 젓기가 끝나 다시 포박된 해적을 쥐처럼 몰고 항구경비대로 향했다.

우리가 우르르 몰려가자 경비병들이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소리쳤다.

“정지, 정지! 무슨 일이냐!”

“해적을 사로잡고 해적선에 잡혀있던 선원들을 구출해왔소. 경비대장님을 만나고 싶소.”

“해적?! 아니, 그놈들을 왜 바다에서 안 죽이고···.”

“그렇다고 이놈들을 항구에서 내 멋대로 죽일 수는 없잖소?”

“아, 아, 그렇기는 하지. 일단 안에 보고하겠소, 잠시 기다리시오.”

경비대 건물에 들어갔던 경비병은 잠시 후에 나와서 우리를 보고 물었다.

“그쪽이 대표요? 그쪽만 들어오시오.”

나는 아인델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경비병들에게 해적들과 포로들 인계하고, 자네는 선원들 데리고 복귀해. 내가 늦어지고 회계사가 먼저 도착하면, 회계사 의견대로 교역품 매각 절차 진행하고. 아, 배는 일단 둬.”

“선원들 외박은 어떻게 할까요?”

“음, 그때까지 내가 안 갈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정박은 3일··· 아니, 5일로 하자. 이번에 좀 힘들었으니까 푹 쉬어야지. 갤리선 매각이 끝나고 다시 복귀하면 추가 수입 지급한다고 전해. 그래야 복귀하는 놈이 늘겠지.”

“네, 그럼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아인델프가 선원을 수습해서 떠나고, 나는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경비대장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반갑소, 일루딘 항구 경비대장 오르손이오. 해적을 잡으셨다고?”

“리버티 호의 선장, 리안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르손 경비대장님.”

“젊은 나이에 선장이라? 집안이 좀 좋은 모양이군. 항구에서 정체가 발각되어 사로잡힌 해적은 봤어도 해적질하다가 사로잡힌 해적을 끌고 온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 굳이 왜 잡아 온 거요?”

“갤리선을 나포해서 오려는데 노를 저을 인원이 부족했거든요. 막상 도착하니 이놈들을 우리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데리고 왔습니다.”

“흠···.”

경비대장의 얼굴이 귀찮음과 짜증이 서리는 것을 보며 나는 준비한 주머니를 밀어주었다.

“공사가 다망하신 분에게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와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그만큼 경비대장님을 존중한다는 뜻으로 이해해 주시고 이것으로 좋은 와인이나 한잔하시지요.”

“허허, 뭘 이런 걸 다···. 그 해적 놈들은 걱정 마시오.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날을 잡아서 광장에서 사형을 시키도록 하겠소. 이 항구는 정당한 법과 규칙에 의해 통치되고 있으니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 없거든.”

“물론 그러시겠지요.”

순식간에 사라지는 주머니와, 짜증과, 귀찮은 표정을 보면서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사회생활을 위한 미소를 유지했다.

선장이 되고 나니 왠지 배알이 뒤틀리는 일이 더 많아진 기분이다.

“그런데 그 거지 떼? 거지 떼도 데리고 오셨다고? 어쩌자는 거요?”

“그게, 해적선에 포로로 잡혀있던 사람들입니다.”

“해적선? 그럼 해적 아니오?!”

“아니, 해적은 아니고 해적선에 잡힌···.”

“어허, 해적선에 타고 있다면 그게 해적 아니오? 그놈들도 같이 사형을 시키면 되는 거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기가 막혀서 말을 맺지 못했다.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거다.

지금 저 눈깔을 보라, 다시 탐욕에 물들고 있지 않나?

역시 뇌물은 용건을 다 마치고 주는 게 좋아···.

혹시나 해서 하나 더 준비해 두길 잘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부하들도 생각하셔야 하는데 제가 깜빡했습니다.”

“···으흠, 눈치가 참 빠르시구만.”

“부하들을 이렇게 생각하시다니 정말 인품이 훌륭하십니다. 일루딘의 경비대는 정말 좋은 상관을 모시고 있군요.”

“으하하하, 리안 선장이라고 하셨던가? 그쪽도 그 젊은 나이에 큰 배를 이끌만한 인재인 듯하군. 그런 선장이 보증하는 자라면 내, 힘을 좀 써서 그 거지 떼, 아니, 간악한 해적에게 포로로 잡혔던 불쌍한 자들에게 거주권과 통행권을 발급하도록 하겠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오르손 경비대장님.”

사실 내가 포로 잡혔던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인간 된 도리라는 것이 있잖아?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이나 더러운 하부 갑판에 감금되어 노를 젓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겨우 구출되어 맞닥뜨린 현실이 사회적으로 ‘사람’으로 인정도 못 받는 무일푼의 부랑자라면 너무 불쌍하잖아.

내가 돈이 좀 들더라도 힘들었던 사람들이 조금 더 사람처럼 살게 해주는 것이 도리지.

내가 경비대 밖으로 나오자, 이미 해적들은 어디론가 끌려간 뒤였고, 추레한 복장의 포로였던 남자들만 남아있었다.

하필이면 구출된 시기가 겨울이라 헐벗은 그들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이것까지는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다.

이 세상의 옷은 비싼 편이고, 월동복은 더 비싸다.

쓰레기 더미에서 옷을 구하건, 노를 젓고 받은 돈으로 싸구려 옷을 사건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영하까지 떨어지는 날씨는 아니라서 적당히 바람만 잘 막아도 자다가 동사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다행히 경비대장님이 여러분의 사정을 이해해 주시고 거주권과 통행권을 발급한다고 하셨으니, 등록을 마치고 가시기 바랍니다.”

“가, 감사합니다. 선장님.”

“감사합니다.”

“오오···. 축복을 받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나름 착한 일을 했는데도 기분이 개운하지가 않다.

과연 저 사람들 중에 내년 봄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몸이라도 건강하면 무슨 일이라도 해서 입에 풀칠하겠지만,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저들의 건강은 좋은 편이 아니다.

감기 같은 질병에 걸리기도 쉬울 거고, 그런 병에 걸리면 그대로 굶어 죽을 거다.

사회에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안전망이 없다는 것은 정말 잔인한 일인 것 같다.

< <125화> 기분이 더러워지는 선행 > 끝

작가의말

우리 독자님들도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오펜의 형 워트 씨는 해적으로 활동하다가 전투 후 회복이 불가능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오펜에게 발견되어 오펜의 손에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원래 플롯이었습니다만...

원래 플롯대로 갔으면 소포로 잘 갈린 사시미를 받았을지도 모르겠군요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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