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질병 >
게론드가 제출한 구매 계획서를 검토하던 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어포가 있네? 굳이?”
“다음 기항지가 로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으응, 아무래도 이 근방에서는 가장 큰 항구니까.”
“네, 그래서 어포도 괜찮지 않을까요? 큰 항구라 수요도 많을 테니까요.”
“어포는 돈이 되는 걸 떠나서 그 냄새랑 보관도···. 어휴, 상선들이 어포를 굳이 취급하지 않으려는 건 다 이유가 있다고···.”
항구에서 생선을 구하기 어렵다는 말만큼 웃기는 말도 없을 것 같지만, 가끔 큰 항구에서는 어포 가격이 오르기도 한다.
어장의 분포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생선을 손질해서 말린 어포는 거의 모든 어항(고기잡이배가 주로 정박하는 항구)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음에도 그렇다.
일례로 벨로키나의 론 항구 같은 경우, 근처에 쓸 만한 어장이 없기 때문인지 1년 내내 어포 가격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육상 이동이건 해상 이동이건 어포는 좋은 보존 식량이기 때문에 큰 도시일수록 수요는 많은데, 상선들이 화물로 취급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렇잖아, 진공포장이나 밀봉이 가능한 세상도 아니고, 그 꾸릿꾸릿한 비린내가···.
그걸 창고에 며칠이나 넣어두면 창고에 베인 냄새를 빼는 것도 일이다.
어포를 옮기고 나면 냄새가 배는 옷감 같은 것은 한동안 운송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오죽하면 어포를 취급하는 상선은 어포나 생선 기름 등 냄새나는 것만 운송하거나, 냄새가 밸 염려가 없는 금속류, 도구 종류까지만 취급한다.
“아하, 현실적으로 그런 문제가 있군요. 역시 사람은 실제 업무를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 많군요.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학자이신···.”
“아오, 그만! 차라리 여기 말린 과일이랑 견과류로 가자. 짧은 거리니까 기름도 괜찮겠다.”
“어, 음, 수익이 거의 안 날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그거 남았잖아, 귀금속. 대충 손해만 안 보면 돼. 어차피 로제에 갈 때 빈 배로 가는 걸 피하려는 거니까.”
“그럼 교역소에서 교역품 상태와 가격을 봐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라고. 그리고 갑판장 좀 불러줘.”
“네, 선장님.”
게론드가 나가고 잠시 후 에른스트가 들어왔다.
“선장님, 부르셨습니까?”
“둘밖에 없는데 편하게 하세요.”
“둘만 있더라도 공식적인 일만큼은 공대하는 것이 맞습니다, 선장님.”
“어휴, 그럼 출항 준비 보고해 주세요.”
“복귀 인원은 100%입니다. 아무래도 갤리선 매각 대금을 나눠주겠다고 한 것이 컸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추가 고용인원은 7명입니다.”
“어? 일곱이면 너무 적은데요?”
아 참, 나포한 갤리선은 105만 로스를 제시한 조선소에 매각했다.
상태가 양호해서 조선소가 바로 되팔기만 해도 50~100만 로스를 더 받을 수 있겠지만, 당장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105만도 경쟁이 붙어서 올라온 거지, 처음에는 70~80만 로스를 제시했더랬다.
그중에 90만 로스 정도는 선원들의 추가 수당과 치료비, 위로금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갤리선에 실려 있던 교역품을 판 대금이 있으니 수입이 상당했다.
아, 이 맛에 해적질을 하는 건가···?
“그게, 항구가 작아서 그런지 쓸만한 녀석이 없습니다. 어차피 다음 기항지가 가까우니 인원이 부족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회계사가 돌아오는 대로 바로 출항하도록 하죠. 팔은 괜찮으세요?”
“하하, 이정도면 아주 쌩쌩, 어억!”
나는 붕붕 휘두르는 갑판장의 팔을 툭 쳐서 신음성을 내뱉게 하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움직이지 마시라니까요? 늙으면 뼈도 잘 안 붙는다고요.”
“네가 자꾸 잔소리하니까 그런 것 아니냐, 에잉···.”
“이 기회에 네이선이랑 우르타에게 갑판장 일도 좀 알려주고 하면서 살살하세요.”
“배에 타 달라고 빌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퇴물 취급이냐?”
“뭘 또 빌었다고··· 어휴, 퇴물 취급 아니고 더 오래 부려 먹으려는 거니까 좀 참아요.”
* * *
게론드가 사 온 교역품과 보급품을 적재하고 있는데, 후줄근한 옷을 입은 40대 남자가 리버티 호의 현문에서 기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내 옆에서 한참 갈매기를 탐구하던 우르타가 그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어? 발드 아저씨다!”
“응? 아는 사람이야?”
“나 참, 이번에 구출한 포로 중에 있었잖아.”
“아, 아. 여기는 웬일이지?”
듣고 보니 기억이 났다.
구출된 포로들은 딱히 대표가 필요하지 않은 환자 집단이었지만, 그나마 몸이 조금 멀쩡해서인지 노도 열심히 젓고, 고맙다는 말도 참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내 우리와 눈이 마주치고는 크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떠나기 전에 다시 감사를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잠시 후, 선원 하나가 내게 발드 씨를 데리고 왔다.
“선장님, 구출된 포로 중의 한 명이라는데, 선장님을 뵙고 싶답니다.”
“그래? 잘했어, 가봐.”
선원이 떠나자, 발드 씨는 잠시 눈치를 보더니 약간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안녕하셨습니까, 선장님.”
“네, 뭐··· 발드 씨라고 하시던데, 오늘은 무슨 일로?”
“염치없지만 부탁을 하나 드리려고 이렇게 실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탁이라고요?”
사람들은 참 그렇다.
상대방이 호의를 보이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용하려고 든다.
그리고 끝내 호의를 권리로 생각하고, 호의가 사라지면 화를 내지.
“제 며칠 보아하니 항해사가 둘밖에 없는 것 같던데, 혹시 저를 고용해 주실 수 없습니까?”
“응? 항해사십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항해사였죠. 지금은 그냥 부상당한 부랑자입니다만···.”
그의 자조적인 웃음에 나도 모르게 그의 발에 눈이 갔다.
그는 왼발을 약간 절고 있었는데,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엑스레이도 없는 세상이다 보니, 외상이 없거나 통증의 발단이 되는 사건을 모르면 의사라는 놈들도 병증의 원인을 못 찾는 경우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물론 저희도 베테랑 항해사가 필요하기는 합니다만, 그, 이런 말씀을 드리기 정말 죄송하지만, 불구자를 고용하기에는···.”
“항해사가 다리가 멀쩡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리는 곧 나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리가 나은 후에 일자리를 알아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베테랑 항해사를 원하는 배는 많잖아요.”
“그게, 몸이 다 나을 때까지 이만한 돈으로 살아남을 자신이 없습니다. 기존 항해사 급여의 절반이라도 좋습니다. 제발 태워주십시오.”
절반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항해사는 고급인력이고, 아인델프의 경우 일반 선원에 비해 3배 이상의 급여를 받는다.
그런데 절반이면··· 다리가 좀 불편한 게 대순가?
“하지만 발드 씨의 경력이라면 일등항해사 정도는 드려야 할 텐데, 리버티 호의 일등항해사는 정해져있습니다. 혹시 부선장을 원하신다면···.”
“아이고 부선장이라니요? 저도 염치가 있지 그런 것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등항해사도 괜찮으세요?”
“물론이죠!”
“그럼 다리가 다 나으실 때까지는 임시 고용으로, 괜찮으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장님!”
지나가는 선원을 불러 발드 씨에게 빈 개인실로 안내하라고 하고, 마지막 정리 중인 선적상황을 살펴보는데 우르타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발드 아저씨는 급여 절반만 줄 거야?”
“아, 임시잖아 임시. 원래 임시는 절반만 받는 거야.”
“하지만 리안은 임시 갑판장 같은 거 할 때 똑같이 받, 읍!”
“닥쳐···. 넌 그 입이 항상 문제야!”
* * *
“···그래서 여기 발드 항해사가 리버티 호의 이등항해사로 합류하기로 했다. 다들 그렇게 알도록. 그리고 오펜.”
“네, 선장님.”
“오늘부터 수습 딱지 떼자. 그동안 고생 많았다.”
“서, 선장님···!”
“좀 이르기는 한데, 해적에, 폭풍에, 난파에 별꼴을 다 봤으니 이제 수습 딱지를 떼도 충분하겠지.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그만 해산! 겨우 3일짜리 항해지만 모두 방심하지 말도록!”
리버티 호에 수습 선원이 한 명 줄고, 항해사가 한 명 늘어났다.
* * *
항해는 순조로웠다.
발드 항해사는 생각보다 더 쉽게 배에 적응했고, 오펜은 정식 선원이 되고는 더 해맑게 빛났다.
나와 네이선의 상처도 대충 아물었고, 갑판장님은··· 감기에 걸렸다.
“갑판장님, 좀 괜찮아요?”
“쿨럭, 쿨럭, 말 걸지, 쿨럭, 마···. 목, 아프다, 쿨럭.”
“그러니까 술 좀 그만 드시라니까.”
“그게 무슨, 쿨럭, 상관이냐! 쿨럭, 쿨럭.”
“아, 진짜···. 하여간 기침 멎을 때까지 얌전히 안에만 계세요! 선장으로서 명령입니다. 당연히 상륙도 금지!”
당연히 갑판장님은 갑판장실에 격리 중이고, 나 외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게 했다.
그래서 팔자에도 없는 병수발을 들고 있는데, 별수 없잖아?
괜히 다른 놈 들여보냈다가 병원균 묻어와서 사방에 퍼트리면 대참사가 되는 거다.
다행스럽게도 항해 기간이 짧은 것에 비해 식수와 식량이 넉넉했고, 내가 손을 좀 씻을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갑판장실에서 나와 습관처럼 주변을 둘러보니, 한가롭게 떠가는 몇 척의 다른 선박들이 보였다.
죄다 우리랑 반대 방향이기는 한데, 원래 일루딘에서 로제로 가는 항로가 분주한 항로는 아니라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때 선실 쪽에서 나오던 네이선이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아, 네이선. 어때?”
“선원 중에 이상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그리고 선실은 지금 막 깨끗하게 치웠습니다. 하지만 선원들이 나눠준 물로 잘 씻을지는···. 흠.”
“그렇기는 하지···. 아오, 진짜 답답하구만. 너랑 우르타도! 응! 방 깨끗하게 써!”
“네···.”
그때 귀빈실에서 나오던 드웰이 손을 빠르게 비비며 내게 말했다.
“허허, 그 돌격대장이랑 포술장 좀 그만 잡게. 누가 보면 자네가 엄마인 줄 알겠어.”
“선주님 나오셨어요? 이놈들은 진짜 아직도 애라니까요? 어휴.”
“내가 보기에는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하는데 자네가 너무 과한 걸세.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보드카나 한잔하겠나?”
“대낮부터 무슨 술입니까?”
“재미없는 친구 같으니라구. 갑판장은 좀 나았으려나?”
나는 슬쩍 갑판장실을 향해 몸을 돌리는 드웰을 막아섰다.
“선. 주. 님! 절대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배에서는 선주라도 선장의 말을 들어야 하는 법입니다. 선장을 해고하기 전까지요.”
* * *
갑판장님의 기침이 적당히 잦아들 때쯤, 우리는 케이라 왕국의 로제 항구에 입항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교역품 거래를 위해 먼저 배에서 내렸던 게론드가 심상치 않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선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 회계사? 일찍 왔네?”
그놈의 과다설명증후군(?) 때문에 교역소에 가면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오는 게론드였기에 나는 약간 의외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선장실에 들어온 게론드의 얼굴은 그답지 않게 매우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선장님, 놀라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전염병이 도는 모양입니다.”
“어? 전염병?”
“네. 확실하지는 않은데, 분위기가 좀 이상합니다. 약재들 가격은 며칠 전부터 눈에 띄게 상승 중이고 혹시나 해서 시장 쪽을 들러봤더니 거리가 휑합니다. 경비 병력도 더 많은 느낌이구요. 아직 심각하지는 않거나 항구까지 퍼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전염병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지구에서도 전염병은 늘 문제였다.
심지어 세균과 박테리아가 발견된 이후로도 전염병은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최대 원인 중 하나였으니까.
지구의 중세, 혹은 그보다 못한 의학 수준을 가진 이 세상에 전염병은 말 그대로 재앙이다.
말 그대로 전염병 한 번에 국가가 휘청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겨울 초입이잖아.
대대적인 전염병이 발병하기에는 조금 시기가 애매한데?
올해는 흉작도 아니고 전쟁도 없··· 아, 그러고 보니 프레티아 내전이 있었군.
케이라 왕국은 프레티아 왕국과 국경을 접하지 않지만, 로제 항구는 프레티아의 내전 발생지역 인근인 롤레앙 항구와 거리가 멀지 않아서 두 항구 사이에 상당한 교류가 있었을 것이 뻔했다.
물류가 오가면 사람이 오가게 마련이고, 사람이 오가다보면 보균자나 균의 매개체도 분주히 오가게 된다.
까닥 잘못해서 우리 배의 선원들이 감염이라도 된다면, 우리 배를 따라 아마 다른 항구로 전파될 것이다.
이미 나간 배들이 잔뜩 있을테니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비상이다!
< <126화> 질병 > 끝
작가의말
으흠, 현재까지 이.흙.살에 출연한 인물명은 총 78명으로 대부분은 단역입니다.
이튼은 스코타 후작 가문의 기사로, 산적화된 용병 토벌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엘리안의 어머니가 되는 메릴린이 첫사랑이었죠.
워트는 길거리 생활을 할 때 오펜을 걷어 키운 남자로, 선원으로 활동하다가 해적에게 붙잡혀 강제노역을 당하다가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사망했죠. 오펜 앞에서요.
으음...죄송합니다.
불량작가의 정신머리가 가출했다가 온 모양입니다.
이게 다 코로나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