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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27화 (127/420)

< <127화> 위장 절도 사건 >

선원들의 외출은 모두 취소되었고, 현문은 철거했다.

그리고 급하게 소집된 간부진은 공석이 있었다.

“갑판장님은···.”

“갑판장님이 전염병은 아닐 거야. 하지만 인간의 무지에서 나오는 공포는 고작 기침만으로도 사람을 죽을병 걸린 환자로 만들 수 있어.”

침울한 얼굴로 걱정스러워하는 우르타에게 대답을 해주자, 이등항해사 발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선장님,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출항하는 것이 맞습니다만, 교역품의 판매 및 구입은 물론이고 재보급도 안 된 상태입니다. 게다가 이 배에 올라왔던 항구관리관 일행이 감염자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는 것 아닙니까?”

“그게 문제지. 이대로는 정말 갈만한 항구조차 없어. 보급이 없다면 원래 목적지인 론은커녕 일루딘으로 돌아가는 것도 힘들 거야.”

원래 입항하기 전에는 물이고 식량이고 넉넉하게 푸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선상 생활 자체가 아끼고 아끼는 짠돌이 같은 생활이라서 그렇다.

게다가, 대부분 보존식이라고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식재료의 맛이 없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괜히 몇 푼 아끼다가 선원들의 불만만 키울 수도 있고 말이다.

특히나 출항하기 전에 항해 일수가 거의 결정되는 단거리 무역 상선의 경우라면, 배가 입항한다는 것은 높은 확률로 식량과 식수가 거의 바닥이라는 뜻과 같다.

“게론드 회계사, 지금 전염병이 도는 것은 확실한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사실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항구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항구에도 발병자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이를 인지한 배들도 꽤 될 겁니다.”

“후우···. 진퇴양난이로군.”

나는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고작 전염병이 아니다.

치료시설이 미비한 이곳에서는 건강한 성인조차도 전염병으로 치사율이 20%가 넘어가기도 한다.

막말로 우리 배의 간부들이 모두 전염병에 걸릴 경우, 최소한 두세 명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감염을 막으려면 마스크를··· 아니지, 수인성 질환이라면 이 도시의 물을 배에 싣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일단 정확한 사실 파악이 필요하겠어.”

“선장님! 최대한 빨리 뜨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네이선. 우리 물이 없어. 조리장, 식수가 얼마나 남았지?”

“···그게, 죄송합니다.”

“무슨 말이야?”

“오늘 입항한다는 생각에 그만···. 남은 양이라고 해봐야 하루분도 안될 겁니다.”

“하아, 그게 조리장 잘못은 아니지. 아닌 말로 나도 물 막 썼잖아.”

나는 갑판장님 병간호한다고 물수건이니 뭐니 하면서 물을 쓴 것도 모자라서, 갑판장실에서 나올 때마다 얼굴과 손을 씻었다.

입항을 앞두고 마지막 식사에서 조리장이 얼마 남지 않은 물을 거의 다 썼다고 뭐라고 할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장님, 정확한 사실이라는 것이 뭡니까? 굳이 그걸 파악하시려는 의도가 있을 텐데요?”

아인델프의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차분하게 대답했다.

“최소한 이 로제 항구에 전염병이 얼마나 퍼진 것인지, 병의 매개체가 무엇인지, 병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야 대응을 하지. 막말로 이대로 계류색 풀고 튈 수는 없잖아.”

“선원들은 어떻게 할까요?”

“으음···. 알려줘야 하나?”

“로제 항구에 다시는 들어오지 않으실 생각이 아니라면 소문이 배 밖을 못 넘게 하셔야 할 겁니다.”

로제 항구 행정당국에서는 필사적으로 전염병을 숨기고 있는데, 우리 배에서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알려지면 여기서 장사하는 것은 포기해야겠지.

하지만 상륙을 안 시킨다고 해도 과연 그 소문이 밖으로 안 나갈 수 있을까?

발 없는 말은 천 리를 가고, 용감무식한 선원들의 입은 한없이 가벼운 법이다.

“선원들에게는 알리지 말자.”

“선장님! 그랬다가는 당장 난리가 날 겁니다! 항구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상륙을 막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마 절반쯤은 밤중에 몰래 도망갈 겁니다.”

“그걸 못 하게 해야지. 우리가 정보를 수집하는 동안 말이야. 우르타, 문단속 다시 해. 밖에 듣는 놈이 있으면 망하는 거야.”

* * *

상갑판에 모든 선원을 불러 모은 나는 배에 힘을 주고 소리쳤다.

물론 내 얼굴은 침통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연기하는 중이었다.

“입항을 했는데 갑자기 현문이 철거되어서 모두 놀랐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리버티 호에서 중대한 절도 사건이 발생했다.”

내 폭탄선언에 선원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배 안에서의 절도 사건은 흔하지 않아도 가끔 있는 일이다.

쉬는 시간에 술 마시고 도박하는 녀석들이 절도를 안 할 리가 있겠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원들끼리 이야기이고, 간부의 물건에 손을 대거나(개인실의 문을 따야 한다) 선박의 중요한 물건이나 돈을 훔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 배 안에서는 훔친 물건을 숨기거나 튈 곳이 마땅치 않잖아···.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일전에 탔던 무식한 용병 놈들에게 배운 것인지, 이번에 새로 합류한 얼치기들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에 보관 중이던 상당량의 자금이 사라졌다. 입항과 동시에 육지로 튀려고 한 모양인데, 지금 자수하면 마스트에 매다는 정도로 용서해 주겠다.”

당연히 범인은 없겠지만, 나는 선원들에게 잠시 시간을 주었다.

없어진 자금이 없는데 범인이 어디 있겠어?

오히려 범인이라고 나오면 진짜 난감한 거다.

그러면 그냥 선원들 다 내보내야 하잖아.

웅성거리던 선원들이 슬슬 서로를 의심하며 고성이 오가자, 나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아인델프, 네이선, 슬레어가 칼을 뽑아 들었고, 발드, 우르타, 게론드, 비에론이 장전된 석궁을 들어 올렸다.

싸늘한 바람이 장내를 훑고 지나가며 급격히 소음이 가라앉았다.

“그만. 나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너희들을 믿는다. 하지만 쥐새끼 한 마리는 골라내야겠지.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선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놈은 꼭 묶어서 바다에 던져버려야 합니다!”

“그 개만도 못한 놈을···.”

한동안 존재하지도 않는 범인을 성토하는 장이 열렸지만, 나는 점점 더 미안해질 뿐이었다.

미안해, 하지만 너희는 영원히 이 사실을 모를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이 거짓말은 영원히 묻어야 한다.

선장이 공식적으로 거짓말이나 한다고 하면 평판이 뭐가 되겠나?

나중에 다른 간부들이 말한다고 해도, 증거가 없으니 나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면 된다.

그냥 ‘음모론이다’라고 하면 어쩔 건데?

희생자인 회계사 게론드에게 애도를···.

범인 없는 절도 사건을 만들어 상륙 금지에 대한 불만을 가라앉힌 후, 상륙하기 전까지 항해일수로 인정(현문이 철거되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한다는 당근을 먹이고 선원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즉시 네이선과 발드를 시켜 배 전체에 대한 검수에 들어갔다.

선원들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난리를 치면서도 몰래 욕만 내뱉을 뿐 잘 참아주었다.

이런 인내심은 끽해야 하루나 이틀이겠지만,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누군가 외부와 접선할지도 모른다는 변명으로 선실을 봉쇄한 다음, 한밤을 틈타 아인델프와 우르타, 게론드가 몰래 배를 빠져나갔다.

아인델프는 시키는 일은 잘하는 편이고 우르타는 관찰력이 좋으니까 부디 제대로 된 정보를 물어오기를 바란다.

게론드는, 음···. 뭔가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서 알고 있는 것을 다 토해내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 * *

다음 날 밤, 외출(?)을 나갔던 세 사람이 돌아오자, 우리는 다시 선장실에 모였다.

이번에는 상태가 상당히 호전된 갑판장님도 함께였다.

“다들 아픈 곳은 없지?”

“네, 선장님이 주의를 주신 대로 입과 코를 가리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약간 이상하게 보기는 했습니다만···.”

대낮에 얼굴 가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정상 같아 보일 리는 없잖아.

그래도 괜히 병에 걸려서 돌아오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최소한의 조치라도 시킨 건데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소금으로 입안을 헹구는 거랑 손발 씻는 것은?”

“네, 그것도 사람을 만날 때마다 했습니다.”

“우르타도?”

“네? 아하하하···.”

“우르타!”

“해, 했어! 했어요! 진짜 이번에는 했다니까?!”

“네, 조금 대충 하기는 했지만, 포술장도 하기는 했습니다.”

“하아···. 그래 뭐, 안 아프다니 다행이군. 보고해봐.”

잠시 모인 사람들을 돌아보며 목을 가다듬은 아인델프가 대표로 보고를 시작했다.

“현재 로제 항구의 전면적인 통행 차단이 필요한 상황까지는 아닙니다. 전염병은 항구 도시의 동쪽에서부터 시작되어 주로 빈민층 거주지 위주로 느리게 확산 중이며, 발진과 발열, 구토를 일으키는 모양입니다. 사망률이나 치료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항구 쪽은 어때?”

“항구 쪽은 아직 눈에 띌 정도의 변화는 없습니다. 하지만 회계사 말로는···.”

순간 안절부절못하던 게론드가 말을 낚아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항구도 충분히 위험합니다. 아시다시피 전염병이라는 것이 감염 즉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까요. 전염병은 단 한 명만 감염이 되도 이 좁은 배 안에서는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심지어 다른 항구에 가더라도 입항이 거부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것도 큰 문제지.

괜히 전염병이 도는 곳에서 출항한 배라는 타이틀만 달려도 입항 심사부터 난리가 나는데, 병자가 있다? 빼도 박도 못하고 그건 그냥 입항 금지다.

바다 위에서 물이나 식량 정도는 보급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격은 눈알 튀어나오게 비쌀 거다.

“일단 내일 아침에 연기를 좀 해서라도 물건 내리고, 상륙은 최대한 막아보자.”

“어떤 식으로 사실을 밝힐 생각이십니까? 자칫 잘못하면 선장님의 권위가 무너집니다.”

“으음, 그건 잠시 생각 좀 해보자고···.”

* * *

다음 날 아침, 물과 식량이 떨어졌다는 핑계로 철저한 몸수색을 마친 게론드와 우르타가 상륙하여 교역소에 다녀왔다.

그리고 그들이 다녀오는 사이에 교역품을 하역하고 내려진 짐을 공개적으로 전수검사를 실시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뭔가 이상하기는 할 텐데, 진짜로 당장 물과 식량이 부족하기도 하고 간부들이 워낙 살벌하게 구니 선원들도 그럭저럭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어이, 거기! 쓸데없는 짓 하지 마! 함부로 뚜껑 열었다가는 손모가지 날아간다?!”

“야! 너 숨기는 거 뭐야? 손 내밀어!”

음···. 네이선의 칼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대충 하역 작업이 끝나고 선원들이 선실로 쫓겨나 마지막 식사(남은 식재료와 물을 모조리 사용한 식사라는 뜻이다)를 하고 있을 때쯤, 게론드와 우르타가 돌아왔다.

물론 물과 식량, 종이가 가득 실린 수레와 함께였다.

“선장님, 지시하신 대로 20일분으로 준비했습니다. 종이는 나머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구매했습니다.”

“으응, 교역소는 문제없었지?”

“네, 특별히 이상은···.”

“회계사 말고 포술장에게 물어보는 거야.”

“네! 전체적으로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기는 했지만, 발진이 있거나 열이 나는 것 같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확실해?”

“네, 음, 잠시···. 저 사람 빼고요.”

나는 깜짝 놀라 우르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는 나이가 지긋한 인부가 물통을 옮기고 있었는데, 딱히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우르타의 속삭임이 들렸다.

“엉뚱한데 보지 말고, 손등이랑 목 밑, 눈 밑을 봐.”

“응?”

“손등이랑 목 아래에 붉은 반점, 눈 밑에는 열기가 올라와서 빨갛잖아.”

“어?!”

“어떡하지?”

“입 가리고 접근해서 저 사람에게 힘들어 보인다고 좀 쉬라고 해. 너네 아버지랑 닮았다고, 은화 하나 주고. 그리고 모두 돌아가면 그자가 옮긴 물통, 파기해.”

“파기해? 정말?”

“그래, 괜히 위험을 무릅쓸 필요 없어.”

“물이 모자라지 않을까?”

“괜찮아, 어차피 비도 올 확률이 높으니까.”

“안 오면?”

“안 와도 부족할 정도는 아닐 거야. 빨리 움직여!”

미적거리며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보니 괜히 미안해지는 것은 아마 기분 탓일 거다.

* * *

어영부영 선적까지 마치고 나자 몇몇 선원들의 표정에 아리송함이 어리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출항 준비가 끝나버린 것이다.

물론 종이라는 교역품이 하루나 이틀쯤 선창에 더 있는다고 품질에 중대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건 소금기 머금은 습기는 종이에도 좋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원래 출항하는 날이나 출항하기 전날 배에 싣는 것이 정상이라는 뜻이다.

“총원, 그대로 들어.”

사방이 어둠에 잠기기 직전, 식사 직후 전원을 소집한 나는, 나를 응시하는 근 100여 개의 눈동자를 한번 훑어보고 안타까운 소식을 전달했다.

“오늘 교역소에 갔다 온 회계사와 포술장이 안타까운 소식을 가져왔다. 애석하게도 이 인근에서 전염병이 유행하는 모양이다.”

내 폭탄 발언에 갑작스러운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조용! 조용해! 다들 알고 있겠지만 전염병이라면 일단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비록 불미스러운 일이었지만 덕분에 우리는 상륙을 하지 못했으니, 이대로 떠나면 될 것 같다. 불미스러운 일은 배 위에서 해결이 가능하니 말이야. 혹시 불만 있는 사람 있나?”

잠시 선원들을 둘러보던 나는, 깜빡 잊었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 내리고 싶은 사람은 갑판장과 돌격대장의 소지품 검사를 받고 내리면 된다. 소지한 금액이 크다면 미리 회계사에게 말하는 편이 좋겠지. 그리고, 이번에 내리면 리버티 호를 다시 탈 생각은 말아야 할 거다.”

< <127화> 위장 절도 사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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