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송년 파티 >
내 엄포가 통했는지 배에서 내리겠다는 선원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다들 불만은 조금씩 있는 모양이지만, 세상에 불만 없는 선원이라는 것은 순결한 창녀만큼 흔치 않은 법이다.
그리고 불안해 보이는 이 남자는 선원들이 자신의 근처에 접근하지 않는 것과 나와 게론드가 천을 입가에 두르고 있는 것을 이해한 듯 이미 얼굴이 창백했다.
“그, 이렇게 빨리 출항하는 이유가···.”
“선내에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감기 같은데··· 괜히 전염병이니 뭐니 말이 나올 것 같아서요. 그래서 우리 애들은 상륙도 안 시켰습니다.”
전염병이라는 말에 항구관리관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감기 정도야 뭐···.”
“이미 교역품도 다 샀는데 더 있어서 뭐 하겠습니까? 오늘이 가기 전에 출항하고 싶은데 잘 좀 부탁드립니다.”
내 손에서 나은 주머니가 넘어가자 항구관리관의 혈색이 약간 돌아오며, 대충 선창을 둘러보고 농땡이를 피우고 있던 경비병들에게 눈짓했다.
“크흠, 그럼 평안한 항해가 되시길 바라오.”
그렇게 출항 절차가 마무리되자마자 나는 선교에서 대기 중이던 아인델프에게 신호를 보냈다.
“리버티 호 출항!”
“출항! 전 계류색 걷어!”
겨울이니까 의외로 전염병 사태가 빨리 끝날지도 모르지만, 원래 세상일이라는 것이 희망 회로를 돌리며 살다가는 거지꼴 되기 십상인 거다.
그러니 당분간 이쪽은 쳐다보지도 말아야겠다.
* * *
출항 당일, 저녁 식사가 끝나고 게론드의 처벌이 결정되었다.
죄목은 ‘직무상 실책에 의한 조직 내 혼란 야기’가 되시겠다.
“···따라서 판매되지 않은 물목을 판매된 것으로 오기(誤記)하여 선내에 불화를 일으킨 죄가 크지만, 횡령의 목적이 없었으며 스스로 죄를 인정하였으므로 1개월간 감봉하고 1일 동안 마스트에 묶어놓도록 한다.”
그렇다. 조작된 절도 사건의 범인은 바로 회계사인 게론드였다!
게론드가 얼렁뚱땅 판매 목록을 작성하다가 아직 팔지도 않은 귀금속을 판매한 것으로 처리를 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장부와 금액이 맞을 리가 없었고, 이 난리의 원인이 된 것이지.
하지만 이번 거래를 하면서 이미 판매된 것으로 되어 있는 귀금속 상자가 발견되었고, 이를 확인한 게론드가 스스로 죄를 고백했다.
···라는 시나리오였다.
이 계획이 입안되었을 때 게론드는 펄쩍 뛰며 자신이 그런 실수를 했다고 선원들이 믿을 리가 없다고 했지만, 지금 선원들 표정을 볼 때 안 믿는 녀석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마스트에 묶여있는 게론드를 괴롭히는 녀석은 없을 거다.
일단 조작된 사건 경위를 봐도 게론드가 무슨 악의적인 의도로 장부를 조작한 것도 아니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크게 손해 본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게론드가 회계사에서 해임된 것이 아닌 이상, 실질적으로 자신들에게 돈을 지급하는 회계사님께 함부로 할 수 있는 직원(선원)이 있을 리가 없잖아?
마스트에 매달리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감봉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줄 생각이다.
돈을 주는 사람과 장부를 쓰는 사람이 한통속인데 그 정도 장난질은 일도 아니지, 크헤헤헤.
* * *
“수고했어, 일등항해사. 별다른 사항은 없지?”
“파도가 조금 높습니다. 방금 전에 2.5미터 정도더군요. 그리고 좌현 쪽 작은 섬들은 주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시거리 내에 선박이 세 척 있는데, 의심스러운 구석은 없습니다.”
“음, 별거 없네. 삼등항해사는 요즘 어때?”
“이등항해사가 잘 가르쳐서 최근은 제법 괜찮습니다. 순항 중에는 혼자서 선교를 맡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잘됐네. 다음 당직부터 삼등항해사도 당직표에 넣어.”
“네, 선장님.”
“그럼 이만 들어가서 쉬라고.”
“네. 그럼 이만.”
파도가 조금 높다더니 배의 요동이 약간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특별히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으로 봐서 폭풍으로 발전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미리 준비는 해 둬야겠지?
특히나 이번에 가지고 가는 화물은 종이라서 선창이 침수라도 되는 날에는 진짜 끝장이 나는 거다.
“오펜, 갑판장님 좀.”
“네, 선장님.”
오펜은 아직도 형의 일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늘 우울했다.
정식 선원으로 올려주면 조금이라도 기분전환에 도움이 될까 했는데, 별로 소용은 없는 것 같다.
하긴, 오펜의 나이가 고작 15세, 내일이면 16세다.
워트라는 그 형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어린 나이에 힘든 뱃일까지 시작했는데, 막상 그 형이 만나자마자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해버렸으니···. 그 충격을 금방 떨쳐낸다면 오히려 그게 더 무서운 일일 것 같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이, 역시 시간이 약인 모양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 오펜도 가슴 한구석에 워트를 곱게 묻을 수 있겠지.
내가 그 아이, 일리나를 묻었던 것처럼···.
“선장님, 부르셨습니까?”
“아, 갑판장님. 선창 화물 좀 다시 점검해주시죠. 방수 준비도 다시 확인해 주시고요.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미리 해서 나쁠 것 없잖아요.”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정리하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아직 네이선이랑 우르타는 이런 일을 믿고 맡기기는 좀···.”
“하하하, 그 녀석들도 이제 제법 쓸만합니다.”
“그리고 몸은 좀 어떠세요?”
“벌써 퇴물 늙은이 취급입니까? 이 거추장스러운 막대기만 아니면 아주 좋습니다!”
에른스트가 팔을 고정하는 부목을 들어 올리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절대 푸시면 안 됩니다, 명령이에요.”
“어휴, 알겠습니다.”
갑판장이 장난스럽게 경례를 올리고 떠나고 잠시 후, 조리장 비에론이 조심스럽게 선교로 올라왔다.
“선장님, 지시하진 저녁 파티는 진행하시겠습니까?”
“흐음,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죠?”
“네, 시간이 걸리는 음식이 몇 가지 있어서 말이죠.”
“그럼 준비하죠. 폭풍으로 바뀔 것 같지도 않고 폭풍이 온다고 밥을 안 먹···. 어휴, 그냥 합시다.”
그렇다. 나는 지금 나름 직원 복지를 위해 송년 파티를 준비 중인데, 파티 음식이라는 것이 갑판이 미친년 널뛰듯 흔들리고 폭우가 쏟아지는 환경에서 먹기에는 좀 그렇다.
그런데 폭풍 걱정으로 준비를 안 하자니 이미 알음알음 알고 있을 선원들의 실망하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듯해서 꺼림칙한 관계로 그냥 강행하기로 했다.
“아 참, 그리고 혹시라도 선원 중에 배식을 안 받거나 몸이 아픈 사람은 없죠? 조금이라도 기색이 있으면 보고해야 합니다.”
“네, 배식 때마다 제가 주의 깊게 살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선원들을 책임지는 사람은 갑판장이다.
그런데 갑판장이 모든 선원을 매일 보느냐 하면 조금 애매해진다.
매일 1:1 면담을 진행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분명히 안 보고 넘어가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조리장이었다.
일단 배식을 받으려면 무조건 조리장의 얼굴은 봐야 하고, 조리장을 안 보고 밥을 타 먹는 간부들은 내가 매일 회의 시간에 보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시간이 흐르도록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볼 때 감염은 피한 것 같지만, 그냥 마음을 놓기는 또 어렵다.
* * *
대륙력 2715년 12월 30일, 한 해가 저무는 밤에 리버티 호의 승조원들은 갑판에 모두 모였다.
다행히 파도도 꽤 잦아들었고, 날이 어둡기 전에 수심이 낮은 곳을 찾아 투묘(닻을 내린 상태)한 상태였기 때문에 흔들림은 거의 없었다.
갑판은 수많은 횃불로 밝게 빛났고, 대형 테이블 위에는 선상에서 먹기 힘든 뜨겁게 조리된 음식들과 선원들이 맛보기 힘든 괜찮은 술들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물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만취하도록 마시지는 못하겠지만, 얼큰하게 취할 정도로는 마실 수 있을 터였다.
“총원 그대로 들어!”
내가 잔을 들고 크게 외치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여기에는 리버티 호가 다시 태어나던 날부터 함께해온 사람도 있고, 최근에 합류한 사람들도 있어. 비록 합류한 날은 다르지만 나는 리버티 호에 한 번 탄 사람이 다른 배로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아. 그리고 젊은 선장을 잘 따라주는 우리 승조원들에게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새해 첫날을 황량한 바다 위에서 맞이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오늘만큼은 푹 쉬고 즐겁게 놀았으면 해. 대신 사고는 치지 말고! 그럼 모두 잔 들어!”
“와아아아아!”
“선장님, 최고입니다!”
“마지막까지 리버티 호를 탈 겁니다!”
“어머니 바다의 가호를!”
한동안 환호가 이어지다가 잦아들고 모두의 손이 하늘로 치솟은 것을 확인한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첫 잔은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옛 동료들을 위하여.”
“위하여!”
첫 잔을 바다에 뿌린 나는 다음 잔을 들고 외쳤다.
“이 잔은 어머니 바다의 축복을 받은 우리를 위하여!”
“와아아아아!”
“위하여!”
신이 난 선원들이 술을 들이켜고 음식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나는 시끌시끌한 선원들 모두가 들리도록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어차피 오늘 밤은 여기서 움직이지도 않을 거고! 물과 음식, 맥주까지 충분히 챙겨 왔으니까 먹고 마시자!”
“먹고 마시자!”
그리고 나는 선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음식을 집어 먹었다.
식기는 무슨, 그냥 손으로 집어 먹는 거다.
국물이 있는 스튜는 그냥 그릇으로 퍼서 마신다.
오늘 같은 날 식기를 다 썼다가는 내일 아침이면 배식할 때 식기가 절반은 사라져 있을걸?
감염자가 있었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지만, 그나마 이번에는 운이 잘 따라 준 모양이다.
그리고 적당히 취기가 오른 나는 자리를 빠져나오며 우르타와 네이선을 불렀다.
“왜 불렀는지 알지?”
우르타가 대번에 불퉁한 표정을 짓고 네이선이 입맛을 쩝쩝 다신다.
“이 자식들이···. 야, 너희는 내일 먹고 마셔도 되잖아! 이럴 때 희생을 해야 부하들에게 존중을 받는 거야!”
“아, 알았어···.”
“아니, 꼭 싫다는 건 아니고···.”
“그만!! 자, 이제 들어가서 자. 우리 셋은 오늘 밤새야 해. 깨우는 것은 다른 간부들에게 모두 말해놨으니까 걱정 말고 어서 자. 귀마개 끼우고.”
시무룩한 표정의 두 사람이 터덜터덜 각자의 개인실로 가는 것을 확인하고, 갑판장과 일등항해사에게 뒷일을 부탁한 나는 선장실을 향했다.
바다 위에 가만히 떠 있다고 하지만, 선 내 총원이 정신줄 놓고 잠들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군가는 최소한의 경계라도 서야 하는데, 어느 누가 이런 파티에서 빠지는 것을 달가워하겠어?
그러니 가장 혜택을 많이 받는 세 사람이 오늘은 희생해야지.
막말로 우르타랑 네이선은 간부이기는 하지만 통상 항해에서 특별히 담당 업무가 있는 것은 아니라서 마음만 먹으면 내일도 놀 수 있거든.
* * *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정신을 차려보니, 갑판장님이 나를 조심스럽게 흔들고 계셨다.
“아, 갑판장님.”
내가 귀마개를 빼고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자, 피식 웃은 갑판장님이 대답했다.
“괜찮으십니까? 지금 조리장과 삼등항해사가 뒷정리를 지휘하는 중입니다. 돌격대장과 포술장도 깨우러 갔구요.”
갑판장님이 한마디를 할 때마다 공기 중의 알코올 농도가 1%씩 올라가는 느낌이다.
이 할아버지는 몸도 아프신 분이 술을 얼마나 드신 거야, 대체.
“어휴, 술 냄새. 저도 취하게 생겼네요. 어서 가서 쉬세요.”
“그런데 선장님. 일부러 본 것은 아닙니다만, 책상 위의 쪽지는 뭡니까?”
“네? 무슨 쪽지요?”
“숫자가 쓰여 있던데요.”
“아아아, 그거요···.”
밤에 바로 잠이 들지 않아서 해적선에서 우르타가 발견한 28개의 숫자가 나열된 종이를 보다가 잠들었는데, 깜빡하고 서랍에 넣지 않은 모양이다.
“전에 해적선에서 발견한 건데 도대체 내용을 알 수가 없네요. 중요하게 보관한 걸로 봐서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
“해적선? 설마 그 갤리선 말이냐?!”
“네? 네··· 왜, 왜요?”
갑자기 갑판장님의 눈이 빛나면서 말까지 짧아졌다.
내가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음에도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책상으로 가서 쪽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저 숫자가 도대체 뭔데 저렇게 돌변하시는 거야?
< <128화> 송년 파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