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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29화 (129/420)

< <129화> 암호의 정체 >

“뭔데 그래요? 눈빛이 무슨···.”

내가 당황을 숨기지 않았음에도 한동안 쪽지를 노려보던 갑판장은 한참 후에야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다시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선장, 혹시 붉은모래 해적단이라고 들어봤나?”

“붉은모래? 아, 망한 지 좀 된 해적단 아녜요? 꽤 날리던 해적단이었던데?”

“그래, 네 말대로 붉은모래 해적단이 왕년에 좀 날렸었지, 흐흐흐.”

“그런데 갑자기 옛날이야기가 왜 나와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묻고는 있었지만, 사실 이 정도면 나도 대충 예상이 가지 않겠나?

솔직히, 처음에 쪽지를 발견한 순간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그냥 암호잖아, 암호.

그런데 그게 해적선에서 나왔다고!

그럼 응? 딱 통밥을 굴려보면 대충 해적 근거지 또는 중요한 내용을 숨긴 암호 아니겠어?

문제라면 내가 암호해독 전문가도 아니고, 아무런 단서도 없이 숫자만 나열된 이 암호를 풀 방법이 없었을 뿐이지.

“그 붉은모래 해적단이 왜 망했는 줄 아냐?”

“글쎄요? 해군이랑 싸웠다던데?”

“그래, 일레드 왕국의 해군과 전면전을 벌여서 전멸했다.”

“아이참, 그래서 결론이 뭐예요?”

“잘 나가던 해적단이 갑자기 전멸했어. 그럼 그동안 모아 둔 돈과 교역품은 어디로 갔을까?”

“음···. 근거지?”

“일레드 해군에게 근거지까지 다 털렸다.”

“그럼 뭐, 해군 보급기지?”

내가 계속 오답을 이야기하자 갑판장이 껄껄 웃었다.

“크하하하, 웃기는 소리 그만해라. 너도 짐작하잖아.”

“설마 그 암호가 붉은모래 해적단의 보관소 위치라구요?”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이 암호가 붉은모래 해적단의 고유 암호라는 것 정도는 알아.”

아니, 그걸 그러니까 당신이 왜 알고 있는데?!

이 정도면 갑판장님의 전직이 해적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뭐, 여러 가지로 충격적이기는 한데, 그럼 뭐해요? 풀지도 못하는데.”

“흐음···. 선장이 원한다면 내가 풀어보지.”

“진심이세요?”

내가 어이가 없어서 되묻자, 에른스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놈이? 날 뭘로 보고!”

“아니! 지금 그게 문제예요?! 도대체 갑판장님이 왜 그걸 풀 수 있는 건데요?!”

“크흠, 예상한 대로다.”

“으아아앗! 진짜? 진심? 정말요?!”

“거, 소문내지 말고···. 손 씻은 지 한참이니까.”

“그게 손 씻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닐 텐데?!”

“그만해, 이놈아. 너만 조용히 하면 아무도 몰라.”

몇 차례 언급했지만, 해적은 잡히면 에누리 없이 만국 공통 사형이다.

살아서 손 씻는 해적? 그런 게 존재할 리··· 가 있구나?

그러고 보니 그 배신자 놈, 볼라트도 전직 해적이었지.

하긴, 수배령이 떨어져도 주민 등록이라던가 사진이 있는 세상이 아니다 보니, 정체만 잘 숨기면 전직 해적도 멀쩡하게 살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전직 해적이 갑판장이라니, 뭔가 등이 축축해지는 기분이야.

물론 그렇게 하나씩 다 따지면 이 배에는 살인자가 득실득실한 셈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가끔씩 드러나는 갑판장님의 난폭한 면이나 눈빛을 보면서 ‘해적보다 더 해적 같은’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진짜 전직 해적이라고 고백하실 줄은 몰랐다.

심지어 암호를 해독할 정도면 간부 출신인 거잖아.

“그래서 암호해독은 가능하시구요?”

“허허, 넌 아무렇지도 않냐?”

“뭐가요?”

“내가 해적이었다니까?”

“지금은 아니잖아요.”

“내가 이 암호를 들고 도망가면 어쩌려고?”

“으음···. 그럼 좀 큰일이죠.”

“그렇지?”

갑판장의 주름진 얼굴에 언뜻 실망이 비쳤다.

“새로운 갑판장을 구해야 하는데, 갑판장을 어디서 구해요?”

“······뭐?”

“그렇잖아요, 그 암호야 제게는 못 쓰는 거니까 딱히 아쉽지도 않고, 그걸로 갑판장님 노후 편하게 지내시면 아까울 것도 없어요. 그런데 당장 갑판장이 없어지면 골치는 아프죠.”

“하하하핫! 그러니까 이건 아깝지 않다고?”

갑판장님이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며 재차 묻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딱히요? 갑판장님이 풀어주기 전에는 그냥 불쏘시개 이상의 가치는 없잖아요.”

진심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풀지 못하는 암호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난 심지어 갑판장님이 말해주기 전까지 저게 어떤 암호인지도 몰랐으니, 어디에 팔아먹지도 못했을 거다.

지금이라고 딱히 팔릴 것 같지는 않지만···.

각설하고, 만약 저 암호를 보고 다른 생각이 들어서 갑판장님이 배에서 이탈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언젠가 배신할 사람을 나름대로 싸게(?) 걸러 낸 셈이 아닌가?

반대로 암호를 풀어서 솔직하게 나와 공유한다면, 전직이건 뭐건 진짜 갑판장님은 믿어도 되는 거다.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관찰하던 갑판장님이 피식 웃더니 중얼거렸다.

“도대체 알 수 없는 녀석이군. 어떨 때는 물욕이 많은 것 같다가, 이럴 때는 나름 초탈한 것 같기도 하고···.”

“물욕은 갑판장님도 없으시잖아요?”

갑판장님은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닌데, 수당을 받으면 돈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 비싸고 좋은 음식과 술을 드시는 편이다.

그렇다고 사치스럽냐고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수당이 부족하시냐고 조심히 물어봤더니 충분하다고 하셨거든.

그러니까 물욕이 많다기보다는 현실에 충실한 타입이라고 봐야겠다.

욜로다.

“나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이 아니냐? 돈이 많아 봐야 어디다 쓰겠느냐? 평생 돈 쓰는 방법이라고는 배워본 적도 없는 것을.”

“세상에, 돈 쓰는 방법을 굳이 배워야 아나요?”

“선장에게 존중받는 갑판장 생활, 내 인생에서 이보다 좋았던 적은 없다. 그러니 큰돈이라고 해도 욕심이 크게 생기지는 않는구나. 뭐, 전설에나 나오는 보물섬 같은 것을 한번 보고는 싶다만.”

“헛?! 설마 진짜 보물섬 지도예요?”

내가 보물섬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자, 갑판장님이 한심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세상에 그딴 게 어디 있겠냐? 아직도 헛소문을 믿다니 멀었구만. 쯧쯧쯧.”

다른 세상의 지식을 지닌 저도 있는데 그 정도는 있을 수도 있죠. 뭐···.

진짜 보물섬이라는 것을 발견하면 말 그대로 함대를 구성할 수도 있을 텐데 아쉽다.

“풀어봐야 알겠지만, 본거지나 비밀기지, 비밀 보관소의 위치 정도 아니겠냐? 그게 가장 좋은 경우고, 별거 아니라면 습격 장소와 시간 같은 약탈 지령, 집결 장소나 위치일 수도 있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네요?”

“네가 말한 발견 장소라면 이걸 숨긴 놈도 풀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말이야.”

“푸는 데 얼마나 걸리는데요?”

“글쎄다, 지금은 취해서 힘들고, 내일 풀어보마.”

“하긴 지금 상태로는 산수도 힘들겠네요, 어휴! 술 냄새.”

“그런데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라. 이미 십수 년 전에 망한 해적 놈들의 뭔가가 지금까지 남아있기도 힘들지 않겠냐?”

하긴 그렇다.

비밀기지건 뭐건 웬만한 인공적인 구조물은 발견되고도 남을 시간이고, 발견되지 않더라도 모든 물건이 다 삭아서 가치를 상실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화폐와 귀금속 정도는 남겠지만, 상식적으로 쓰기 제일 좋은 화폐와 환전성 좋은 귀금속을 굳이 거주지에 보관했을 리가 없잖아.

* * *

갑판장님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선교로 올라오자, 부스스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는 우르타와 네이선이 보였다.

혹시라도 못 잤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조금이라도 자고 온 모양이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갑판장님이랑 이야기 좀 하느라고. 다른 사람들은?”

“응, 방금 일등항해사가 다 정리해서 선실로 내려보냈어. 인원 확인 결과 이상 없대.”

“그, 이등항해사랑 삼등항해사가 자기들도 경계 서겠다고 기다리겠다던데···. 어떡하지?”

“가서 자라고 해. 어차피 내일 나 빠지면 그 사람들도 고생해야 하니까.”

“으응, 알았어.”

“그럼 우르타가 가는 길에 항해사들 자라고 하고, 너는 까마귀 둥지(견시대)로 갈 거지? 내가 선수와 좌현, 네이선이 선미와 우현, 이렇게 하자.”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뜨려던 우르타가 맹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뭘 경계해?”

“평소에 하던 대로.”

“보고는 어디에다가 해?”

아, 그러네? 선교 담당자가 없으면 마스트 위의 까마귀 둥지에서 뭔가를 보고하기가 힘들다.

냅다 소리를 지르면 들리기는 하는데, 그러면 자는 사람들도 다 들리잖아.

그런데 견시가 보고를 해야 할 상황이면 다 일어나야 하는 건가? 혼란스럽구만.

“리버티 호에 접근하는 이상 물체나 선박이 있을 경우에 소리를 질러서 보고해. 그 외에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도 보고하고. 어차피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잖아.”

“소리 질러? 다 깰 텐데···.”

“괜찮아, 그런 상황이면 어차피 다 일어나야 돼.”

“알았어.”

두 사람을 보내고 나도 좌현을 훑으며 선수를 향했다.

모든 배가 다 그렇다.

아무리 지구보다 밝은 밤이라지만,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는 만큼 적당히 방향만 조절해서 안전한 항로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그것은 해적이라도 마찬가지, 굳이 한밤중에 먹잇감을 탐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이 야행성이 아닌 이상에야, 별일 없이 지루한 밤이 될 것이다.

* * *

···그렇게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내 앞의 저것들을 뭐라고 해야 하나?

대략 리버티 호로부터 3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바닷속에서 뭔가 삐죽삐죽 올라와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부유물인 줄 알았다.

한밤중에 얼핏 보면 진짜 기괴하게 생긴 부유물들이 엄청 많거든.

대부분 부러진 나무이기는 한데, 산발한 사람의 상체 같거나, 거대한 문어 모양도 있다.

사람의 어떤 부위나 시체 같은 것은 수도 없이 많지.

진짜 시체도 많고···.

그러니까 내가 처음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그것(?)을 봤을 때 그냥 부유물이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굳이 문제라면 어디선가 흘러왔을 부유물을 뒤늦게 발견한 것 정도인데, 어차피 크기가 사람 머리통만 하니까 기뢰 같은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는 딱히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데 선수를 돌아서 다시 돌아올 때도 그 자리에 있는 그것을 보자, 나는 등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것을 자세히 관찰했다.

사람 머리 모양인데, 어두운 데다가 거리가 있어서 막 이목구비가 보일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 위화감이 느껴져서 주변을 살피는데, 살짝 옆에서 조용히 바닷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도 머리 모양···.

상식적으로 사람이 저렇게 있을 수는 없는 거다.

투묘를 위해서 아무리 수심이 얕은 곳을 찾아서 왔다고는 하지만, 이곳의 수심도 7미터쯤 된다.

밀물이면 조금 더 올라갈지도 모르겠는데, 하여간 인간이 바닥에 고정될 수 있는 깊이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도대체 저것들의 정체는 뭐야?

“리안···.”

“으갸갸갹!”

나는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조용한 목소리에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우씨! 깜짝 놀랐잖아, 뭐야?”

어느새 내 뒤에 접근한 네이선이 심상치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포위된 것 같아···.”

“무슨···.”

“이쪽도 있잖아, 봐.”

네이선은 어느새 내가 관찰하던 그것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애매한 크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왜 소리 질렀어? 리안??”

저 녀석은 안 보이··· 겠구나.

아무리 눈 좋고 관찰력이 좋은 우르타라고 하지만, 견시대는 먼 거리를 보기 위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배 근처는 굳이 살펴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게다가 너무 작아서 위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것 같고···.

그나저나 이거 정말 애매한데?

저 녀석들이 뭔지는 모르지만, 물속에서 공격이라도 한다면 진짜 대응 불가다.

“일단 괜히 소란피우지 말자. 아직 뭔지도 모르고 적대행위를 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이렇게 보다가 갈지도 몰라.”

혹시 놈들이 배에 기어오르거나 밑창에 구멍이라도 뚫으려고 했다면 모르겠지만, 저렇게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면 굳이 먼저 자극할 필요는 없잖아.

두려움은 보통 무지(無知)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쪼끔 무섭다···.

< <129화> 암호의 정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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