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의외로 귀하신 분
늘 장난기 가득하던 눈동자에 진지함이 들어차고, 웃음 짓던 눈매와 입꼬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순간 나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대답을 잘못하면 그의 마음이 떠나리라는 것을.
“으음… 게론드 회계사. 그것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네.”
“하지만 평소에 게론드 회계사의 입이 무거운 편은 아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
“……네.”
“좋아. 그럼 나도 사과하지. 사실 회계사에게는 필요 이상의 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막은 게 맞아. 가끔은 정보의 통제도 필요한 법인데 음, 자네의 입은 솔직히 신뢰가 가지 않았거든.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 선원들의 입을 타면 굉장히 곤란해. 하지만 꼭 알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말해주도록 하지. 자네에게는 그걸 요구할 자격이 있으니 말이야.”
“으음, 그렇다면 적당히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말씀하시죠. 사실 저도 제가 이런저런 말을 잘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괜히 말하면 안 되는 정보를 들어서 계속 신경 쓰기도 싫고요. 우선 이 베르시아나 와인. 도대체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어? 무슨 와인?”
“모르셨습니까?”
따개비밖에 안 보이는 병이 무슨 병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게다가 나는 와인에는 별로 관심이 없단 말이다.
조심스럽게 힘을 줘서 따개비 몇 개를 떼어낸 게론드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보관상태가 애매하기는 합니다만, 진짜 뚜껑도 따지 않은 베르시아나 와인이네요. 빈 병만 봤는데 말이죠.”
“어…. 혹시 그거 마실 수 있는 건가?”
“그건 모르죠. 보아하니 바닷속 깊은 곳에 오래 있었던 모양인데… 이런 게 그냥 떠다니는 양동이에 들어있었다고 하시니 제가 믿을 수 없는 겁니다. 다른 것들도 거의 마찬가지인 것 같네요. 어라? 이건 산호군요.”
끝내 산호까지 발견한 게론드가 해명하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 되면 거짓말로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괜히 급조한 어설픈 거짓말이 들통나면 게론드는 더 이상 나를 신뢰하지 않게 될 테니까.
다행히 본인의 단점을 아는 만큼 지금까지의 기만을 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거짓말을 한다면 기분이 정말 나쁘겠지.
믿을 수 없는 회계사라니, 끔찍하잖아?
결국 나는 게론드에게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선원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정보 통제를 부탁하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선장님께서는 인간의 욕심이 그 인어라는 종족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싫으신 것이군요?”
“미신도 곧잘 믿는 선원들이라면 이런 소문이 퍼짐과 동시에 이쪽에 인어를 잡겠다는 배들이 바글바글하게 될 테니까. 그들이 인간에게 잡힐지 안 잡힐지는 몰라도, 인간들이 몰려드는 것만으로도 결국 그들이 베푼 호의를 우리는 악의로 갚는 셈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기는 하죠, 그런데 제가 잘 들어보니 꼭 그들이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뭐? 어떤 부분이 말인가?”
“더 단순하게 생각해보죠. 선장님이 뱃사람 중에 특별히 생각이 많으신 편이지, 보통은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우리 이전에도 저들과 마주한 인간들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갑판장님처럼 인간이 먼저 적대적으로 대했겠죠.”
“…….”
“공격은 인간이 먼저 했겠지만, 선장님 말씀대로 인간이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화살 정도가 유일하고, 저들은 배의 바닥을 뚫어서 배만 가라앉게 만들면 이기는 것 아닙니까? 어쩌면 지금까지 이쪽 근해에서 실종된 선박들은 해적에게 당하거나 폭풍에 난파한 것보다 그들에게 침몰당한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아주 불가능한 가설은 아니었다.
증명할 방법이 없을 뿐 나도 어느 정도 생각했던 부분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만약 양동이에서 뱃사람들이 쓰는 물건들이 잔뜩 나왔다면 의심은 확신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선장님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저도 괜히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으니 최대한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흠, 베르시아나 와인과 비슷한 해에 만들어진 위스키 같군요. 이것도 애호가들에게 꽤 인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니, 그런데 그 와인이 뭔데 그러나?”
“400여 년 전 대화재가 발생했던 베스칸테 지방의 와인입니다.”
“베스칸테? 거기서 나오는 와인은 베스티아 와인 아닌가?”
“그것은 대화재 이후 복구된 포도 농장과 와이너리에서 제조된 와인이죠.”
“어? 설마….”
오래 숙성된 와인 중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싼 것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숙성’이라는 것은 적당한 환경에서 세심하게 관리되었다는 뜻이지, 저렇게 따개비가 덕지덕지 붙은 상태로 보관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 병 안에는 인간이 마실 수 없는 무언가가 들어있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다.
하지만 더 이상 생산할 수 없는 ‘희소성’이 추가된다면?
수백 년 전의 와인이니, 지금쯤이면 남아있는 것도 거의 없을 거다.
“생각하신 대로 대화재 당시 포도나무와 와이너리는 물론이고 재배법, 와인 제조법까지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복구된 와인에 전혀 다른 이름이 붙은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전에 만들었던 ‘베르시아나 와인’과 ‘베스티아 와인’의 맛과 향은 전혀 달라서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고 전해지죠.”
기대감과 얼떨떨함에 약간 넋이 나간 내게 게론드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진주? 산호? 그런 것도 제법 가치는 있지만, 이 녀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에는 얼빠진 귀족이 정말 많고, 그들 중에는 자신만의 ‘특별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어 하는 자들도 많거든요. 만약 아직 뚜껑을 따지 않은 ‘베르시아나 와인’이 존재한다고 알려지면 아주 난리가 날 겁니다.”
“그, 그렇게 희귀한 건가?”
“초고가의 사치품이기는 한데, 일단 음료 아닙니까? 장장 400년입니다. 그동안 ‘나는 비싸고 희귀한 와인을 마신다’라는 허세를 위해 뚜껑이 따여진 ‘베르시아나 와인’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빈 병만 해도 가격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개봉도 안 한 병이라면, 어후….”
“그, 하지만 어떻게 팔지? 회계사도 알다시피 나는 경매장이라던가 귀족과는 인연이… 음, 거의 없어.”
왕녀님 덕분에 스코타 후작 가문과 가늘기 짝이 없는 인연이 있기는 해서 아예 인연이 없다고는 말을 못 하겠다.
그리고,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장물 경매장은 알아도, 귀족님들을 위한 최고급 사치품 경매장은 당연히 모른다.
있을 것이라고 짐작이나 하는 거지,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른다고. 진짜야.
“굳이 경매장을 찾을 것도, 귀족을 찾을 것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적당히 소문만 흘려도 그쪽에서 먼저 접촉해 올 겁니다.”
“어… 그거 굉장히 위험한 발상 같은데?”
“왜요?”
‘왜요?’라니…. 그런 소문이 퍼지면 그냥 우리를 죽이고 탈취하거나 훔치는 쪽이 더 싸게 먹히지 않겠냐?
게론드는 정말 똑똑한 것 같은데 실전에 들어가면 가끔 이렇게 나사 한 개가 빠진 결론이 나오곤 한다.
진짜로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론드를 보며 한숨을 내쉰 나는 결론을 내렸다.
“우연히 구한 걸로 해서 여기 산호와 진주, 그리고 저 돌들도 돈이 되려나? 하여간 저것들까지만 처분할 방법을 찾아보자고. 여기 귀하신 술병은 일단 자네와 나밖에 모르니까 잠시 보류하지.”
“선장님, 괜히 보관하다가 깨지기라도 하면….”
“에이, 쓸데없는 소리! 그보다 저쪽부터 확인해봐. 뭐라도 건질 게 있는지.”
“네, 선장님.”
게론드가 테이블에 널린 여러 가지를 확인하는 동안, 나는 귀하신 와인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보면 정말 별것 아닌데 귀하신 몸이라니 신기했다.
판매 루트는, 글쎄….
게론드의 말대로라면 사실 얼마에 팔더라도 무조건 아쉬울 것 같다.
말 그대로 쥐고 있으면 실시간으로 가치가 올라가는 녀석 아닌가?
처음에는 안의 내용물이 상했는지 어떤지 모르는데 무슨 가치가 있냐고 생각했는데, 게론드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을 해봐라.
집 한 채 값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와인이다.
이건 관상용이자 허세용이지, 절대 음용(飮用)이 아니다.
병 안의 와인이 상했는지 안 상했는지 확인을 못하니까 겉보기에만 멀쩡하면 되는 것이다.
그보다는 보관이 문제다.
이 세계의 유리는 색도 탁하지만, 굉장히 약해서 작은 충격에도 잘 깨진다.
배라는 공간이 흔들림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어딘가 안전한 곳에 보관을 해야겠는데….
서랍 하나를 비우고 완충재를 채워놓고 있는데, 뒤에서 게론드의 말이 들려왔다.
“선장님, 대충 분류를 끝냈습니다.”
“어? 쓸만한 게 있나?”
“보석류라고 할만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희귀한 조개껍데기나 장식용으로 좋은 몇 가지를 묶어서 장식 도구로 팔면 팔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교역소는 힘들고 직접 번화가의 소매상을 찾아야 하겠지만 말이죠.”
“흐음, 자네가 직접 품을 팔정도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냥 내버려 두지.”
“제가 직접 말입니까?”
“그것들의 가치를 알고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자네밖에 없잖아?”
게론드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그리 비싸게 팔릴 것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굳이 이런 것까지 제가…. 솔직히 내키지는 않는데요.”
“그럼 그냥 내 방 장식으로나 쓰지 뭐. 그럼 거기 진주랑 산호는 회계사가 적당히 보관하고 있다가 같이 가서 처분하자고.”
“네, 그럼 이것들은 제가 금고에 보관하도록 하겠습니다.”
게론드가 나가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데, 배가 우현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우회전을 한다면 아마 ‘멜라나인’ 근처에 도착한 모양이다.
며칠 전부터 바람이 좋더니 예상 시간보다 하루 정도 빠른 것 같다.
지금쯤이면 선주님의 마음이 싱숭생숭하겠는데, 어떻게, 가서 위로라도 해드려야 하려나?
멜라나인 항구는 교역항은 아니고 어항(漁港)인데, 지금쯤이면 청어가 출하될 시기라 꽤나 복작복작할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나는 비린내가 진동하는 청어 따위를 소중한 리버티 호에 실을 생각이 없다.
하지만 1년 중 항구가 가장 붐비는 시기이니만큼, 지금 싣고 있는 종이를 꽤 좋은 값에 팔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론 다음 기항 예정지가 대형 교역항인 론 항구인 만큼 못 팔아도 별 상관이 없지만 말이다.
“선장, 시간 좀 괜찮나?”
“어? 선주님? 들어오시죠.”
며칠 사이에 상당히 초췌해진 드웰 씨는 선장실에 들어와서 한동안 말없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7년, 아니, 이제 거의 8년 만에 가족이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그의 심정을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기에 나 역시 아무 말 없이 그의 앞에 럼주 한 잔을 밀어주었다.
“내가 잘하는 것일까?”
“뭐가 말입니까?”
“하루에 수십, 아니, 수백 번씩 마음이 바뀌네. 확인을 하고 싶다가도 그냥 확인하지 않는 쪽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에 오펜의 일을 보면서 더 심해진 것 같네. 오펜 그 아이, 만약 자네를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지금도 향료 제도의 어딘가에서 자신을 찾아올 형을 기다리고 있을 것 아닌가. 지금처럼 아프지는 않았겠지.”
“선주님, 저도 어느 것이 옳다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불안하고 답답하게 평생을 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이라도 가는 것이 더 늦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미 결정된 사안이니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잖아요?”
그때 또다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오늘따라 손님이 굉장히 많은 것 같다.
“선장님, 갑판장입니다.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에른스트는 드웰을 보며 잠시 멈칫하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선주님도 계셨군요. 두 분이 중요한 이야기 중이면 다음에 찾아오겠습니다.”
“아니요, 갑판장. 입항 관련해서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내가 자리를 비켜드리지. 선장, 술 잘 마셨네.”
반쯤 비워진 잔을 두고 드웰이 일어섰고, 그 자리에 갑판장님이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