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33화 (133/420)

133화. 귀향

“오늘따라 정신없이 바쁘네요.”

“나도 한 잔 다오.”

“더 좋은 거 가져다 드시면서, 쳇.”

“그래도 선장이 주는 술이랑 같냐?”

“누가 따라도 술맛은 다 똑같죠, 그보다 무슨 일이세요?”

“뭐야? 기다리고 있던 것 아닌가?”

갑판장님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째려보았다.

“기다리기는 뭘 기다려요?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하나도 없거든요? 무슨 일이세요?”

“허, 진짜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그 암호 말일세.”

“암호? 아, 그 종이요? 푸셨어요?”

“풀기는 했는데, 허허, 이거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라서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이구만.”

나는 허탈한 표정의 갑판장님을 보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진짜로 깜빡 잊고 있었다.

애초에 별로 기대감이 없었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아예 기억의 저편에 미뤄 둔 것이다.

선원들이라고 딱히 다르지는 않지만, 해적이야말로 진짜 목숨 걸고 한탕 해서 개처럼 놀고먹는 한탕주의 인생을 하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모아봐야 뭘 얼마나 모았겠는가?

그리고 하루아침에 주인이 없어진 눈먼 돈이 10년이 넘도록 방치될 정도로 세상이 만만하지는 않다.

“필요 없는 것과 애매한 것들을 다 빼면 좌표가 나오는데… 해도실에서 확인해 보니 케르빈 섬 동쪽의 제도가 나왔다. 너도 알다시피 내해 해적들의 주요 근거지인 곳이고, 과거 붉은모래 해적단의 근거지가 있던 곳이지.”

케르빈 섬의 동쪽이라고 하니 불현듯 얼마 전에 갑판장님과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떠올랐다.

“흐으…. 그리고 갑판장님은 일레드 왕국이 그 해적들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믿고 계시죠.”

“음….”

“제가 또 중요한 것들은 잘 기억합니다. 갑판장님 설마 그거 알아보려고 괜히 저 속이시는 건 아니죠?”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이런 걸로 장난질을 칠 것 같냐?”

“농담이에요. 그래도 너무 위험하네요. 굳이 가보고 싶지 않아요.”

“흠, 그래. 선장이 그렇다면 뭐. 사실 나도 이런 부실한 배로 그 악마 소굴을 찾아가는 것은 말리고 싶었다.”

역시 갑판장님은 믿어도 괜찮을 것 같다.

실제로 중형 상선인 리버티 호는 전투에 그리 적합하지 않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장갑도 부실하고, 선회속도도 형편없으며, 무장이라고는 꼴랑 중거리 대포 6문뿐이다.

그 옛날 고드실카 호에 비하면 엄청난 전투력을 자랑하지만, 상선으로 활동하던 이클로나 호 수준만 되어도 리버티 호 두 척 정도는 가뿐하게 상대할 거다.

그런데 그런 허약한 배를 몰아서 해적 소굴로 들어가다니, 그냥 죽여 달라는 것과 뭐가 달라?

몰래몰래 해적인 척 위장해서 잠입하면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런 리스크를 감당하기에 보상이 너무 작다.

심지어 무슨 좌표인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무슨 좌표인지 전혀 단서가 없어요?”

“몇 가지 단어가 나오기는 했는데 말이 되는 조합이 없어서 말이야. 네 말대로 지금 당장은 너무 위험하고, 여기에 좌표를 적어 놓을 테니 적당할 때 한 번 가볼 테냐?”

“어우, 글쎄요? 최소한 대포 30문 이상에 선원 100명쯤은 되어야 도전해볼 만하지 않겠어요? 그것도 해적 놈들이 조직적으로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말이죠. 만약 갑판장님 추측대로 일레드의 통제를 받고 있다면….”

“그래, 최소한 해군 함대급 전력이 움직여야겠지.”

개인이 해군 함대급 전력을 갖추기는 불가능한 일이니, 나라의 도움의 받아야 한다는 뜻인데 그 정도로 스케일이 커질 일이 있을까 싶다.

잠시 목을 축인 갑판장이 물었다.

“선주님은 좀 어떤 것 같아?”

“그냥, 이래저래 심란한 모양입니다.”

“8년 만에 만나는 가족이라…. 그걸 더 이상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군. 가장이 없는 가족의 삶은….”

“미리 속단하지는 말죠,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

이틀 후, 우리는 소박한 크기의 어항인 멜라나인에 입항했다.

항구만 보면 고기잡이배들이나 드나드는 작은 항구였지만, 청어 철을 맞이해서 고기잡이배들은 물론이고 생선을 취급하는 각종 중소형 상선들까지 잔뜩 모여서 제법 시끌벅적했다.

항구 한쪽에 몰려있는 조선소들이 제법 많았는데, 드웰의 말로는 원래 멜라나인이 소형 상선이나 어선 건조지로 꽤 유명하다고 한다.

누가 봐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뱃전을 서성이는 드웰이 보였다.

이맘때쯤이면 입항에 방해가 될까 봐 늘 귀빈실 밖으로 나오지 않던 그도, 오늘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의 모습을 약간 안타깝게 바라보던 나는 지나가던 네이선을 불렀다.

“돌격대장.”

“네? 부르셨습니까, 선장님?”

“아무래도 선주님이 불안해 보이시는데 돌격대장은 입항 준비보다는 선주님께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

“아, 네.”

“혹시라도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특히 현문 설치되면 바로 뛰어나가실 기세니까 무조건 쫓아가서 호위해. 아무리 고향이라고 해도 무려 8년이나 발걸음하지 않은 곳이야.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

상황을 이해한 네이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아니, 적어도 비극적인 결과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잠시 후, 항구관리관이 타고 있는 보트가 접근했다.

그는 리버티 호도 청어를 옮기는 상선으로 생각했는지 처음에는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내가 적재 화물표를 보여주자 눈빛이 바뀌었다.

“확인 좀 해 봅시다, 리안 선장님.”

“네? 확인이야 당연히 하셔야 합니다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전에 기항한 곳이 로제 항구로 되어 있는데…. 가지고 오신 종이도 로제 산이고 말이죠.”

“네, 그것이 문제가 됩니까?”

나는 바로 전염병 소식이 퍼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했다.

다행히 갑판장님의 감기도 다 나았고, 어제 선원 전원을 꼼꼼하게 검사했지만 의심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선원도 없었다.

어제 검사를 하면서도 정말 고민이 많았다.

만약 이상 반응을 보이는 선원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게 만약 전염병 증상과 너무 유사하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량과 식수는 넉넉하게 챙겼지만, 전염병이라는 것이 며칠 지난다고 눈에 띄게 좋아지는 병도 아니라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더랬다.

최악의 경우 공포에 빠진 선원들이 탈주(사망확률 99% 이상이다)하거나, 병에 걸린 선원을 살해 및 사체유기 하거나, 그냥 산채로 바다에 빠뜨릴 가능성도 있었다.

또 그 와중에 몸싸움을 통해 병균이 퍼지고, 감염자가 나타나고, 다시 싸우고, 서로 숨기고…. 그렇게 유령선이 되는 거다.

과도한 과장 같은데, 놀랍게도 이 세상에서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갑판장님을 격리시키고 나만 병수발을 든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뱃사람들은 미신에 약하고, 미지에 대한 공포는 패닉을 불러오며, 패닉에 빠진 인간은 통제할 수 없게 되거든.

“지금은 아직 확인 단계입니다만, 로제 항구 근처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혹시 로제 항구를 출항하실 때 별문제 없었습니까?”

“글쎄요? 항구가 평소보다 활기가 없어 보이기는 했습니다만… 저희야 잘 모르는 일이죠.”

이미 확인이 끝났다면 몰라도, 확인 중이라면 말을 아끼는 편이 좋았다.

괜히 어느 한쪽에게 불리한 사실을 전달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진짜 골치 아파지거든.

게다가 리버티 호는 ‘공식적으로’ 전염병이 로제 항구에 퍼지기 전에 출항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어도 닦달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도 일단 소문이 워낙 흉흉한 만큼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선원들 전원에 대한 건강 검사와 식당 검사까지 해야겠는데요.”

“아니, 무슨….”

나는 일부러 당황하는 척을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 정도 연기는 해 줘야 저쪽도 나를 믿어주기 편한 거다.

“휴우…. 전염병이라니 어쩔 수 없군요.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선원들을 불러 모을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아이들(남은 수습 선원들)을 보내 선원들 모두를 불러 모으자, 쌍소리가 섞인 불만을 토하며 선원들이 모였다.

그리고 인원을 확인한 갑판장이 내게 와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장님, 선내 총원 집결 완료입니다.”

“아, 수고하셨어요. 갑판장님.”

내가 항구관리관에게 선내 승조원을 모두 모았다고 말하자, 항구관리관이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들에게 하나씩 명령을 내렸다.

마지막 한 명에게 조리실을 확인하라고 명령하던 관리관이 멈칫하더니 내게 요청했다.

“선장님, 아무래도 조리실은 안내할 사람이 한 명 필요하겠는데요. 괜히 식재료에 저희 손이 타는 것도 달갑지 않으실 것 같구요.”

저런 어설픈 표정으로 거짓말을 하다니, 정말 못 봐주겠군.

항구관리관과 경비병은 이미 오염되었을지도 모르는 식재료를 손대기 싫은 거다.

병원균이 꼭 식재료나 물에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평범한 무기질 쪽보다는 식재료 쪽이 균이 생존하기 유리하게 마련이고, 균의 개념을 모르는 사람들도 경험적으로 식재료가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아는 것이다.

나는 살짝 짜증이 났지만 일단 조리장을 불렀다.

어차피 우리가 별문제가 없다는 것을 아니까 이왕이면 조리실을 잘 아는 조리장 쪽이 낫다.

“조리장, 안내를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선장님.”

드디어 마지막 경비병이 조리장과 떠나자, 항구관리관은 혹시 자리를 이탈하는 인원이 있는지 날카롭게 살피기 시작했다.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나름 직무에 충실한 인간이었다.

“선원들의 건강 상태는 대부분 좋아 보이는군요.”

“물론입니다, 제법 긴 항해이기는 했지만, 딱히 식량과 식수가 부족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원래는 론 항구까지 갈 생각이었거든요.”

“그렇다면 멜라나인에는 굳이 왜 들르신 겁니까? 배를 보아하니 청어가 필요하셨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여기, 멜라나인이 우리 선주님의 고향입니다. 선주님께서 지금 탑승하고 계시거든요.”

“오, 그렇습니까? 한번 뵙고 싶군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나는 항구관리관을 간부들과 함께 한쪽에 서 있던 드웰에게 데리고 갔다.

어차피 이 항구에 정착할 생각이라면 항구관리관은 알아두면 좋은 인맥이니 말이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잡담을 하는 사이에 경비병들이 하나씩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목적은 아마 선내에 숨어있는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겠지.

우리는 딱히 꺼릴 것이 없는 만큼, 성과를 거둔 경비병은 없는 모양이었다.

경비병들의 보고를 다 들은 관리관이 경비병들에게 선원들의 건강 검사를 지시한 다음 내게 다가왔다.

“저쪽이 개인실입니까?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곳이니 선장님께서 저와 동행하시지요. 그동안 가드들이 선원들의 건강 검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설마 선장실이나 귀빈실까지 뒤져보겠다는 겁니까? 항구관리관님, 이것은 상당히 무례한 요구입니다만….”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싫은 티를 팍팍 내자, 살짝 표정이 굳은 항구관리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전염병은 들어온 후에는 수습이 어렵습니다. 특히 지금 본 항구는 대목을 맞이해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구요. 만약 제 실수로 항구에 전염병이 퍼진다면 아마 전 대륙이 전염병으로 신음할 수도 있습니다. 협조를 부탁합니다.”

말로는 부탁한다고 하는데, 태도에서는 부탁을 안 들어주면 강행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귀찮기는 한데, 정말 볼수록 괜찮은 사람이다.

심지어 뇌물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솔직히 처음 살 때 슬쩍 주머니를 찔러주려고 했는데, 단호하게 밀쳐내더라.

“이쪽이 선장실입니다.”

“흠, 꽤 취향이 독특하시군요.”

항구관리관은 한쪽에 고이 모셔 둔 산호와 돌, 조개껍데기 등을 보고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버리기는 왠지 아까워서 놔둔 건데, 솔직히 내가 봐도 조금 이상하기는 하다.

형형색색의 돌이나 조개껍데기라니, 이건 너무 여성 취향이잖아!

이런 것을 선물할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서글퍼진다.

선장실을 마지막으로 살펴본 항구관리관은 데리고 온 경비병들에게 선원들의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듣고 나서야 입항 허가를 내주었다.

역대 입항 허가 심사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오래 걸린 심사였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바란다고 선주님께 전해주십시오.”

보트로 돌아가기 전에 항구관리관이 내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뒤에 있던 드웰의 표정을 살펴보니,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이 뭔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 듯했다.

쯧, 이럴 줄 알았으면 경비병들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집중할 것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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