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나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
- 멜라나인 항구 리버티 호 -
드웰은 초조한 눈으로 천천히 조여지는 계류색을 바라보았다.
조바심에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는 느낌이었지만, 아직까지 현문 설치를 재촉하거나 물에 뛰어들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선주라면서 지금까지 대우를 받으며 지냈는데, 본인이 먼저 배의 규칙을 어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웬만하면 품위를 지키고 싶은데 벌렁거리는 심장이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오늘따라 정박 과정이 너무 느리게만 느껴졌다.
리버티 호의 우현에 현문이 설치되기 무섭게 선주 드웰이 반쯤 뛰다시피 부두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뒤를 돌격대장 네이선이 날렵한 몸놀림으로 따라붙었다.
평소에 느긋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던 높으신 선주님의 의외의 모습이었지만, 놀라는 선원은 없었다.
선주 드웰의 사정은 딱히 비밀도 아니라서 대부분의 선원들이 대략적인 사정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햇수는 몰라도 수년을 밖으로 떠돌다가 돌아온 고향이라니,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급히 뛰어나가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
현문이 설치되기 무섭게 이성을 반쯤 잃은 상태로 리버티 호에서 뛰어내린 드웰은 처음에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잠시 후에는 반쯤 뛰다시피, 마지막에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뛰기 시작했다.
무려 10년 가까이 흘러버려 예전과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살던 집을 찾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뭐라고 소리치며 따라왔지만,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분명히 항구관리관이라는 남자가 말하기를 ‘폐가’라고 했었다.
심지어 수년 전에 이미 다른 가족이 그 터에 새집을 지었다고 한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달린 뒤에야 드웰은 속도를 늦추었다.
8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익숙한 동네가 조용히 드웰을 반기는 것 같았다.
아니다, 어쩌면 왜 이리 늦었냐고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정신이 돌아오자, 드웰은 뒤쪽에서 젊은 남자의 거친 호흡이 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힘겹게 뒤를 돌아보니 돌격대장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데없이 한바탕 뜀박질을 했으니 당황하거나 짜증 낼만도 하건만, 그는 오히려 다 이해한다는 듯 평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장도 그렇지만, 정말 좋은 청년들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선주(船主)라고 주장을 하면서도 과연 그게 먹힐까 싶었다.
섬을 빠져나온 다음에는 살해당하거나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며칠이나 잠도 제대로 못 잤었다.
평생을 부대끼며 살아온 뱃놈들이라는 작자들은 대부분 그랬으니까.
신뢰니 신용이니 하는 말은 그놈들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단어들이었다.
그래서 가끔 드웰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때가 있을 정도였다.
새파랗게 젊은 항해사, 알고 보니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녀석을 선택할 때는 방법이 그것뿐이었다.
사실은 너무 지친 나머지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젊은 항해사는 수많은 위기를 놀라운 방법으로 해결해왔고, 심지어 드웰에 대한 의리까지 지켜주었다.
고작 몇 달 만에 그는 존경받는 어엿한 선장이 되었고, 사실상 그의 족쇄가 되어버린 드웰을 최대한 배려해 주는, 놀라운 배려심을 보여주었다.
나이답지 않게 속 깊은 선장의 배려를 생각하며 조금 숨을 고른 드웰은, 잦아드는 호흡과 달리 더욱 거세게 뛰는 심장 고동을 느끼며 천천히 동네를 걸었다.
다들 일하러 갈 시간이라서 그런지 인적은 거의 없었지만, 몇몇 집 안에서 외부인을 경계하는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아무리 마을이 항구도시 근방이고 항구는 외부인의 출입이 잦은 편이라고 하지만, 이런 구석의 작은 거주지까지 외부인이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드웰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래 그의 오랜 보금자리가 있어야 할 그곳에, 낯선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분명히 마을의 다른 건물들과 다를 것 없는 허름한 주택이었지만, 드웰의 눈에만큼은 너무 이질적으로 보였다.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 집에 도착하자, 뒤뜰에서 집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세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평범한 주부였다.
그 뒤에는 치마폭에 숨은 대여섯 살 정도의 어린아이 두 명이 보였다.
어린 남매는 몸은 엄마의 뒤로 숨겼으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해 머리를 빼쭉 내밀어 드웰과 네이선을 관찰하고 있었다.
“누구신데 우리 집에… 곧 남편이 돌아올… 그럴… 리가….”
“…비올라….”
신음 같은 한 마디가 드웰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 말을 들은 여자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어린 남매가 울음을 터뜨렸고, 그 소란의 와중에서도 드웰은 바닥에 못 박힌 듯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마 앞으로 내밀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그의 손이, 그의 복잡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네이선이 뒷머리를 긁적이는 사이에 소란을 들은 몇몇 주민들이 멀리서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여자와 노인이었기에, 건장한데다가 칼까지 허리에 매달고 있는 네이선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몇몇 아이들이 전력으로 뛰어가는 것이 곧 남자들을 데리고 올 모양이었다.
“갑자기 악역이 되어버린 기분인데… 선주님.”
“…….”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없자 네이선은 드웰의 어깨를 툭 치면서 다시 그를 불렀다.
“선주님, 선주님!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습니다만, 빨리 상황을 수습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계시면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아요.”
“어? 그, 그런가? 아, 알았, 알았네.”
말을 더듬으며 고장 난 로봇처럼 삐그덕 거리며 움직이던 드웰은 용기를 내어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하지만 그 용기에 대한 보답은, 날카로운 비명에 가까운 거부였다.
“그만! 다가오지 마세요! 당장, 당장 내 집에서 나가요! 당신이 감히,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멀쩡한 얼굴로오오오!! 어떻게 내 앞에 그렇게 있을 수 있어!! 나가요, 당장!”
“…비, 비올라.”
당황한 드웰이 다시 한 걸음, 아니, 두 걸음 물러서며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지만, 반응은 더욱 격하게 돌아왔다.
“그 이름 부르지 마! 당신이 어떻게 그 이름을 불러!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 이름을 부를 수 있어?! 당신, 당신이 그렇게 떠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데!”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분노가 터져 나오며 호흡조차 잊은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서 목 놓아 우는 듯하다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차라리 팔, 다리라도 잘려서 오지 그랬어! 눈이라도 멀어서 오지 그랬어! 그러면, 그러면 조금은 이해하기라도 했을 텐데!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게 내 앞에 나타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엄마아아….”
“흐에에엥….”
기가 질릴 정도로 격한 분노를 터뜨리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린 어린 남매가 바닥에 주저앉은 엄마에게 안기며 서럽게 울었다.
더 이상 악다구니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부인과 두 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고 있으니, 누가 봐도 드웰과 네이선은 악당처럼 보였다.
네이선조차 드웰이 저 여자에게 못 할 짓을 했던 것은 아닌지 순간적인 의심이 들었을 정도니까.
물론 대충 느낌적으로 지금 울고 있는 여자가 드웰의 딸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음,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자신들에게 매우 불리해 보였다.
“그, 선주님? 정말 죄송한데 아무래도 잠시 따님에게 시간을 주시고 다음에 방문하시죠? 잘못하면 마을 전체와 싸우게 생겼습니다.”
“…….”
네이선이 당황한 것은 고작 일반인 몇 명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제대로 무기술을 익힌 적도 없고 전문적인 무기도 없는 민간인들이 무섭기야 하겠는가?
다만 눈이 뒤집힌 마을 사람들과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 드웰의 입장이 너무 곤란해질 것이 문제일 뿐이었다.
“……그래, 이만 돌아가지.”
드웰이 힘없이 돌아서는데, 저쪽에서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남자들이 보였다.
그중에 선두에 선 한 남자는 한 손에 낫을 치켜들고 당장이라도 살인을 저지를 듯한 눈빛을 뿌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쯧, 조금 늦었네요. 안 다치게 잘해보겠습니다.”
“무슨….”
“으아아앗!”
그 잠깐 사이에 드웰과 네이선의 근처까지 도달한 남자의 낫이 번개같이 아래로 떨어졌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내려찍기(?)였지만, 그 기세만큼은 드웰과 네이선을 동시에 죽여버릴 정도로 대단했다.
물론 이미 수십, 어쩌면 세자릿수의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는 네이선에게 먹힐만한 것은 아니었다.
챙강!
짧은 쇳소리와 함께 남의 손을 떠난 낫이 바닥에 떨어졌다.
손이 마비될 것 같은 격통과 함께 빈손이 되어버린 남자가 당황한 나머지 움직임을 멈춘 것은 덤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이라 거의 마법처럼 느껴지는 네이선의 한 동작에 기세를 올리며 도착한 다른 남자들도 자리에 서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흥분이 조금 가시고 나니 자기 목숨이 아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으음, 여러분! 우리는 정말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 여자분에게는 정말 손끝도 안 댔고 지금 당장 마을을 떠날 생각입니다. 진짜예요! 아…. 이런 건 리안이 전문인데….”
나름대로 억울한 심정을 표현해 보았지만, 네이선과 드웰을 포위한 인파는 전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강제로라도 뚫어야 하는지 네이선이 고민하고 있는데, 인파 중에 누군가가 미심쩍어하는 말투로 물었다.
“설마, 드웰…? 드웰인가?”
“드웰이라고?”
“드웰이 누구야?”
“그 드웰? 예전에….”
잠시 사람들 사이에 동요가 일더니, 한 중년 남자가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드웰을 살펴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그를 안았다.
“드웰! 진짜 자네가 맞군! 하! 진즉에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포호크, 살아있었나….”
“하, 하하핫, 정말 이거 꿈이 아니라고?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지면서도 믿기지 않는군. 비올라의 반응이 이해되는군, 휴…. 자네에게는 조금 매몰찬 말이지만, 그 아이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거야. 일단 자리를 피하지.”
포호크라는 남자가 드웰의 손을 붙잡고 한쪽으로 이끌자, 가장 먼저 달려들다가 낫을 놓치고 손목을 주무르던 남자가 그를 제지했다.
그는 약간 두려운 눈으로 네이선을 보았지만, 네이선이 딱히 제지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아저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저 사람이 누군데요?”
“아, 미안하다. 내가 너무 놀라서 깜빡했군. 인사해라, 네 장인어른이다. 뤼샨.”
“장인어른이요? 그게 무슨… 허!”
남자의 표정은 몇 차례 변했지만 결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정되었다.
“비올라의 아버지시니까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죠. 하지만 앞으로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못해 씹어뱉듯이 말을 던진 뤼샨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리고는 약간 경계하며 네이선을 지나쳐 아직도 서럽게 울고 있는 그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내저은 포호크가 위로하듯 드웰에게 말했다.
“휴우…. 자네가 이해하게. 자네가 떠난 뒤로… 으음, 어디에 좀 앉아서 이야기하지. 그런데 저기 저 친구는?”
“그래, 아, 나와 함께 일하는 친구일세. 네이선이라고 하지.”
“쩝, 저런 젊은 친구와 하는 일이라니,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건가? 일단 함께 가지.”
포호크는 비슷한 연배의 몇 명에게 귀엣말로 간단하게 설명을 했고, 몇몇은 드웰에게 애매한 표정으로 아는 척을 했다.
그렇게 한차례 변명과 양해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인파는 해산했고, 포호크는 드웰과 네이선을 한 선술집으로 안내했다.
***
- 리버티 호 선교 -
“오펜! 아직도 안 돌아왔니?”
“네, 선장님. 다시 현문에서 확인해 볼까요?”
“아니다, 어차피 나도 다 보이는데 뭘. 도대체 뭘 하고 있는데 소식이 없어? 우르타를 딸려 보내야 했나?”
이미 어두워진 바다를 배경으로 나는 괜히 신경질을 내 보았다.
정신적으로 거의 코너에 몰린 것처럼 보이던 드웰 씨가 불안해서 네이선을 붙여놓은 것까지는 좋았다.
원래 사람이 감정에 지배를 당하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사고도 못 피하고, 생기지 말아야 할 불행한 일도 생기게 마련이거든.
그래서 네이선을 붙여 두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현문이 설치되기 무섭게 두 사람이 사라졌다.
그래도 크게 걱정을 안 한 이유는 네이선 정도면 웬만한 일은 무력으로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라면 네이선 놈까지 몇 시간째 소식이 없다는 것인데….
이 단순한 놈은 내가 선주님을 지키라고 했으니 그냥 멍청하게 드웰 씨 옆을 지키고만 있을 거다.
걱정하는 내 마음도 모르고 말이야.
“선장님,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육포 질리는데… 이걸 그냥 두고 나가기도 그렇고….”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돌격대장이 붙어있는데 말이죠.”
“갑판장님은 참 속 편하셔서 좋겠습니다. 네이선 그놈도 완전 순댕이라구요….”
“흐흐흐, 언제까지 두 사람을 품 안에서 끼고 도실 겁니까? 이미 두 사람은 충분히 자기 몫을 하는 좋은 뱃놈들입니다.”
능력만 놓고 보면 갑판장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닌데, 난 왜 이렇게 얘들을 하나씩 떨어뜨려 놓으면 불안한지 모르겠다.
드웰 씨 표정이 심상치 않던데 그것도 영 불안하고 말이야….
“으음, 선주님께 별일 없겠죠?”
지나가는 듯한 내 질문에 잠시 대답을 주저하던 갑판장님이 괜히 하늘의 별을 관찰하며 중얼거렸다.
“하하호호 웃을 일이 기다리지는 않을 겁니다. 선장님도 예상하셨잖습니까?”
“그래도….”
“세상에 모든 나쁜 예상이 틀리는 경우는 더 나빠질 때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