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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36화 (136/420)

136화. 용서의 선행 조건

잠시 빨라지나 싶었던 드웰의 발걸음이 다시 느려지기 시작했다.

저런 속도로 걸었다가는 해가 지더라도 도착하기는 글렀다.

“또 느려지시네. 좀 빨리 걸어요. 무슨 도살장 끌려가는 소도 아니고….”

“…어흠, 그냥 오늘은 돌아가는 게 어떨까? 그 아이도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할 거고….”

“또, 또! 절대 안 됩니다.”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고 그를 뒤에서 밀기 시작하자, 드웰 씨는 약간 억울한 듯한 반론을 중얼거렸다.

“내 가정의 일인데 왜 결정을 자네가 하나…?”

“그거야 선주님의 결정이 틀렸기 때문이죠. 원래 선주는 배의 운영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는 쪽이 제일 좋은 겁니다. 선장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아니! 글쎄, 이건 뱃일이 아니래도!”

“몰라요, 일단 제 말대로 해요.”

불안한 듯 내 뒤를 따르던 포호크 씨가 내 팔을 붙잡으며 부탁했다.

“리안 선장, 젊어서 그런지 일을 너무 급하게 처리하려는 경향이 이….”

“아이참, 제 말이 맞다니까요! 비올라 씨도 제 또래 아닙니까?! 또래는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인 법입니다. 두 분이 자꾸 저를 말리시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는 한데, 어차피 객관적인 지표니 데이터니 하는 개념이 희박한 세상이다.

그냥 대충 그럴듯하면 나머지는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결국 우리는 드웰의 고향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부터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기는 했지만 포호크 씨가 함께여서인지 특별히 우리를 제지하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예요?”

“그, 그래….”

“제가 먼저 나서보죠.”

“이봐요, 리안 선장!”

포호크가 한발 늦게 나섰지만 나는 이미 마당 안에 들어선 다음이었다.

“계십니까?”

이미 인기척을 느꼈는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막내딸이라고 했으니 실제로는 20대 초반이겠지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던 그녀가 내 뒤의 드웰을 발견하고는, 눈이 크게 확장되며 떨리기 시작했다.

“누, 누구신지 몰라도 전 할 말 없어요. 돌아가세요.”

“부인, 그러지 말고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죠. 잠시면 됩니다.”

“아, 글쎄 할 말이 없다구요! 다시는 오지 마세요!”

그녀가 갑자기 뾰족하게 소리를 지르자,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비, 비올라…!”

일단 내가 나선다니까 참….

물론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생각한 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기는 하지만 말이지, 이건 너무 안 좋잖아.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녀의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졌다.

“그마아악! 그 이름 부르지 마! 당신이 내 이름을 어떻게 그 더러운 입 밖으로 낼 수 있어! 제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꺼져! 영원히 사라지라고!”

거의 목이 찢어질 듯한 소리로 내지르는 비명 같은 외침에 나는 부지불식간에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이 정도면 거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수준 아닌가?

아무래도 쉽게 풀릴 일은 아닌 것 같다.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부인.”

나는 정중히 목례를 하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품에 있던 주머니를 꺼내어 포호크 씨에게 건네주었다.

“아무래도 내일 다시 와야겠군요. 포호크 씨, 이것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요?”

“저희가 돌아간 뒤에 그녀가 조금 안정되었을 때 전해주세요. 선주님 이야기는 하지 마시고 제가 전해주었다고 하시면 됩니다.”

“저 아이는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말이오?”

“대충 짐작은 할 겁니다. 그래도 누구라고는 대답하지 마시고, 내일 다시 올 거라고만 말씀해주세요. 지금은 그 정도가 가장 좋아 보이네요.”

“알겠소.”

나는 의기소침해 있는 드웰 씨를 보고는 얼른 손을 잡아끌었다.

“다 감수하기로 하셨던 일 아닙니까? 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일찍 주무시죠.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 겁니다.”

“그, 그래…. 고맙네, 선장.”

다음 날 아침, 나는 혼자서 다시 비올라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나는 비올라 대신 그녀의 남편과 이야기해야만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뤼샨 씨 맞습니까?”

“그렇소. 당신이로군. 무슨 일인지는 포호크 아저씨에게 대충 들었지만, 이만 돌아가시오. 나는 내 가족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자신의 가족을 버린 남자와 더 이상 상종하기 싫소.”

가시 돋친 말을 내뱉은 그는 내 발치에 주머니를 하나 던졌다.

어제 내가 포호크 씨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그 주머니였다.

하지만 주머니를 던지기 전, 그의 눈빛과 손짓에서 미세한 갈등이 보이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은 거의 30만 로스에 달하는 금화와 은화.

드웰 씨가 내게 빌린 금액 중에 최소한의 정착 자금을 제외하고 동원 가능한 모든 금액이었다.

그리고 일반인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주머니를 집어 들고 말했다.

“흐으음, 잃어버린 8년에 대한 보상치고는 좀 작지요?”

“흥! 잃어버린 8년? 비올라에게는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8년이었소. 그 남자는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거요.”

“지금 그 책임을 지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상황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선주님도 좋아서 8년이나 고향에 돌아오지 않은 것이 아니거든요.”

“그만하시오. 그자의 변명에는 관심 없소. 이만 가보시오.”

냉정함을 가장하고 등을 돌리는 그에게 나는 여상하게 말했다.

“제재소 일, 힘들지 않습니까? 아이들까지 건사하기가 쉽지 않으실 텐데. 정말 오늘 일을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번개처럼 뒤돌아선 남자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기세로 빠르게 몇 발자국 다가왔다.

하지만 그가 주먹을 들어 올리기 전에 내가 허리춤의 칼에 손을 대자, 그 모습을 힐끗 보더니 힘들게 화를 참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나를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가족은 내가 알아서 할 거요.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역시 분노 조절에는 칼이 최고다.

아무리 비올라를 데리고 돌아와서 마을 내 평판이 나쁘지 않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불쌍한 여자들을 빚으로 엮어서 창관이나 운영하던 놈의 부하였던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놈들일수록 칼 쥔 놈이 얼마나 무서운지 더 잘 알게 마련이다.

“100만 로스라면 어떻겠습니까?”

“뭐요?”

“좀 더 할까요? 1,000만 로스라면 어떻습니까?”

“…….”

“만약 이 주머니에 고작 30만 로스가 아니고 1,000만 로스가 들어 있었다면, 당신은 그것을 제게 던질 수 있었을 것 같습니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냥 눈 꼭 감고 와이프가 드웰 씨를 아버지라고 한 번만 부르면, 제재소 잡부가 평생을 모아도 가지지 못할 돈이 생기는 거다.

“그게 무슨 상관이오? 가시오! 당신과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리던 그가 씹어뱉듯이 말을 던지고 돌아설 때, 내가 다시 한마디를 던졌다.

“선주님도 마찬가지인 겁니다. 누구도 선주님께 가족을 버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말했을 뿐이죠. 그게 돈을 벌기는커녕 8년간 가족을 그리워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살게 되는 길인 줄은 아무도 몰랐죠.”

“그자의 사정 따위, 궁금하지 않소.”

“당신의 아내도 그럴까요?”

갑자기 나를 돌아보는 그의 눈길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당신, 선 넘지 마시오.”

“뭐…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주머니는 일단 두고 가겠습니다. 내일 다시 받으러 오죠.”

내가 그의 발치에 주머니를 던지고 돌아서자,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에 뤼샨의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오지 마시오! 제발 우리 가족을 그냥 놔두란 말이오!”

하지만 뤼샨은 끝내 주머니를 내게 던지지는 않았다.

***

시장에서 구입한 견과류와 말린 과일 봉지를 들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우르타가 씹고있던 음식을 삼킨 뒤에 물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데? 그냥 화나게 할 뿐이잖아?”

“비올라는 말이야, 선주님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야.”

“에엑?! 이번에는 리안이 틀린 것 같은데? 진짜 완전 화난 것 같은데?!”

“비올라가 왜 화가 났는데?”

“어? 그거야 선주님이 자기를 버렸으니까?”

“그게 왜?”

“무슨 말이야? 당연히 선주님이 아빠니까 그렇지.”

“선주님이 아빠가 아니라면?”

“어? 어? 그러니까….”

비올라의 분노는 드웰이 아버지일 때 성립한다.

드웰을 완전히 남으로 여겼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화낼 필요도 없고, 돈을 거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의 꼴도 보기 싫다는 말은 ‘내 화가 풀릴 때까지 용서를 빌어.’라는 뜻이다.

꼴도 보기 싫다고 해서 진짜로 그녀 앞에 안 나타나면 여자는 더 화를 내고 그럼 관계가 끝나는 거다.

물론 드웰과 비올라의 갈등은 별것 아닌 연인들 간의 싸움과는 스케일이 다르지만, 일단 맥락은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비올라는 ‘아빠는 내가 용서할 때까지 내 분노를 받아주고, 용서를 빌어야 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그게 언제인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8년?”

“미친놈아!”

***

다음 날, 나와 드웰 씨는 우르타와 네이선을 데리고 다시 비올라의 집을 찾았다.

역시나 단순한 사람이다.

혹시나 했더니 오늘은 집 안에 건장한 남자 세 명이 함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칼 든 사람이 네 명에, 그중의 한 명은 반 괴물이지.

“오늘은 또 무슨 일이오?”

약간 질린 표정의 뤼샨이 내게 물었다.

일부러 드웰과는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것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오늘은 친구분들이랑 함께 계시는데 방해한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아내분과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비올라를 불러달라고 하자, 뤼샨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신 정신이 나간 거요? 지금 그게 말이라고….”

“아이쿠, 다행히 오늘은 집에 계시는 모양인가 봐요?”

“뭐?!”

뤼샨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고, 씩 웃으며 내가 바라보는 곳에는 현관문이 열리며 초췌한 모습의 비올라가 나오고 있었다.

거봐, 결국은 한발씩 나아가게 된다니까?

슬쩍 눈치를 보니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어쩔 줄 모르는 드웰이 보인다.

우르타는 눈이 반짝반짝하는 게 무슨 연극 직관하는 관객 표정이다.

“당신이 왜 나와, 내가 알아서 한다고….”

“아녜요, 여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제가 직접 끝내야 할 일 같아요.”

“하지만….”

“여보, 한 번만 날 믿어줘요.”

“아, 알았어….”

뤼샨이 물러서고 비올라가 내 앞에 섰다.

창백한 얼굴과 거칠게 말라버린 입술, 가슴 가운데에 모은 두 손까지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많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빛을 잃지 않는 눈만큼은 또렷했다.

“리안 선장님?”

“네, 부인.”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네. 잠시 괜찮으십니까?”

“좋아요, 그 전에, 이 주머니는 당신이 주는 것인가요, 아니면 저 사람… 이 주는 건가요?”

그녀는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내더니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물었다.

아, 이렇게 대놓고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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