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돌고 돌아 가족이었다
“좋아요, 그 전에, 이 주머니는 당신이 주는 것인가요, 아니면 저 사람… 이 주는 건가요?”
그녀는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내더니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물었다.
아, 이렇게 대놓고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는데?
잠시 대답에 따른 손익을 계산해 본 나는 조심스럽게 답을 내놓았다.
“선주님 명령으로 제가 드리는 겁니다.”
“…말장난이네요.”
나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이런 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그녀 스스로 납득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랄까?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큰 결심을 한 듯, 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
“좋아요, 내가 해야 할 일은 뭔데요?”
“저희 선주님의 말을 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싫다면요?”
나는 분노와 경멸로 가득 찬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한발 물러섰다.
“그렇다면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뭐라고요?!”
“아직 준비가 안 되신 것 같아서요.”
“지금 뭐 하는 짓이죠? 왜 평화로운 우리 가족을 못 괴롭혀서 난리냐구요!”
“그거야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만… 비올라 씨의 아물었던 상처는 이미 터지지 않았습니까? 당장 우리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상처가 빨리 아물도록 도와드리고 싶은 거고요.”
“이게 돕는 거라고요?!”
나는 살짝 몸을 비켜 비올라가 드웰을 잘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평온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당신의 분노와 원망,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드웰 씨도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물론 그의 선택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정도는, 그의 변명을 들어볼 수 있잖아요? 변명을 들은 후에 분노하고 원망을 해도 늦지 않아요.”
“저 사람! 저 사람 때문에 우리 가족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아요?! 당신이 뭘 안다고 나서는 거죠?! 당장 저들을 끌고 내 집에서 사라져요! 당장!”
아내가 거의 눈이 뒤집히자 한쪽에 물러서 있던 뤼샨과 친구들(?)이 얼른 뛰어서 주춤주춤 물러서는 비올라를 감쌌다.
나를 노려보는 뤼샨의 눈빛은 거의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마지막 경고요. 우리 마을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오.”
“뭐… 그렇다면 이것이라도 받아 주시죠.”
내가 돈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던지자, 잠시 그것을 노려보던 뤼샨은 주머니를 발로 차며 말했다.
“이런 더러운 돈은 필요 없소!”
“무슨 도둑질이나 살인해서 번 돈도 아닌데, 더럽기는 뭐가 더럽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더럽건 안 더럽건 어차피 돈의 가치는 똑같습니다. 거기에 두고 갈 테니 쓰시든가, 남들이 주워갈 때까지 놔두시든가 맘대로 하십시오.”
“…….”
“선주님 가시죠. 너희도 그만하고 나와.”
마을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드웰이 힘없이 물었다.
“내일도 갈 텐가?”
“내일은 힘들 것 같은데요?”
“뭐?! 그럼 이대로 끝이라고?! 그게 무슨 무책임한 짓이야! 자네 때문에 더 나빠지지 않았나?!”
나를 당장이라도 한 대 칠 듯이 달려드는 드웰을 네이선이 저지했고, 드웰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것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아이참, 왜 저 때문에 더 나빠졌다는 거예요? 원래 말 한마디도 못 거는 사이였다면서요?”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니까 딱히 나빠진 건 아니죠.”
“그건, 그렇지….”
우르타가 맹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하지만 드웰은 전혀 기세를 죽이지 않고 역정을 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네가 아니었으면 그 아이가 그렇게 화를 내며 자기 가슴을 후벼 팔 일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그건 선주님이 나타날 때부터 예정된 거예요….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으신 마음은 알지만 일단 저를 좀 믿어보시죠.”
“자네 지금! 어휴, 그만 하세. 그만 해….”
드웰 씨는 진저리를 치며 술집 쪽으로 향했고, 우리는 배로 돌아왔다.
“도대체 어쩔 셈이야?”
“진짜 이번에는 리안도 답이 안 나올 것 같은데?”
“흐음, 내일은 거기를 가보자. 제재소.”
“헐….”
“진짜 가끔 보면 리안은 미친놈 같아….”
대놓고 둘이 수군거리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이렇게까지 상황이 나빠질 줄 알았나….
대충 이렇게 몇 번 찾아서 욕 먹다 보면, 제풀에 지쳐서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할 줄 알았다.
애초에 내가 심리 전문가도 아니고 이런 문제에 대한 정확한 솔루션을 어떻게 알겠어?
***
다음 날 네이선과 함께 제재소를 찾아간 나는 뤼샨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나왔다.
그다음 날에는 제재소에서 흉기(?)를 들고 모여드는 사람들 덕분에 일단 자리를 피해야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
“으아아악! 도대체 언제까지 찾아올 거요?! 이러다가는 당신들 때문에 내 직장도 잃게 생겼소!”
“그것은 참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뤼샨 씨.”
“그게 지금 미안한 사람의 태도요?!”
뤼샨의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어떤 회사에서 회사 일에 악영향을 주는 사원을 좋아라 하겠는가?
특히나 고용과 노동에 관한 법률도 없는 이 세상에서 말이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마을로는 갈 수 없으니까요. 제가 다시 부인께 가기를 원하십니까?”
“당신 정말!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요?!”
“어, 음, 나름 ‘동료’ 같은 거라서 말이죠. 이왕이면 동료가 잃어버린 딸도 찾고 그러면 좋지 않겠습니까?”
“아내는 그 남자와 다시 마주하는 것을 원치 않소! 당신도 이미 확인하지 않았소?!”
“그래서 다시 기회를 만들어 달라고 이렇게 뤼샨 씨에게 찾아오는 것 아닙니까?”
“제기랄! 그놈의 주머니를 받지 말아야 했는데….”
그는 이를 갈며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더니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후우… 내일, 내일 저녁에 오시오. 아내는 내가 설득하겠소.”
“고맙습니다, 뤼샨 씨.”
“하지만 진짜 이게 마지막이오! 그 빌어먹을 주머니에 대한 것은 이게 끝이란 말이오!”
“네, 이번에는 진짜입니다.”
다음 날 저녁, 나는 다시 우르타와 네이선, 그리고 드웰 씨와 함께 뤼샨의 집을 찾았다.
이번만큼은 만전을 기하기 위해 각자 옷도 제대로 갖춰 입었고, 괜찮은 와인도 두 병 구입했다.
“계십니까?”
“…진짜 오셨군요.”
“뭐, 초대를 받았으니까요. 여기 받으시죠.”
내가 씨익 웃으며 와인을 건네자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받아 챙기는 뤼샨이었다.
보내준 돈이 의미가 있었는지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웬만한 식당의 음식보다 나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비올라는 주방에서 얼굴조차도 내밀지 않았다
서빙은 이제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 법한 꼬마들이 맡았다.
“고맙다, 꼬마 아가씨. 엄마는 부엌에 계시니?”
동전과 함께 건넨 내 말에 얼굴을 붉힌 아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들여보낸 나는 시선을 돌려 뤼샨 씨를 보았다.
“이제 부인을 불러오시죠. 마지막 인사 시간은 부인과 함께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크흠, 잠시 기다리시오.”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비올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드웰을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냉랭하게 말했다.
“좋아요. 이게 마지막이라니 한번 들어는 보죠. 그렇다고 해도 내게 용서나 뭐 그런 것을 바라지는 마세요.”
“비올라 씨. 저는 처음부터 비올라 씨가 단지 드웰 씨의 사정을 들어보기만 하기를 바랐습니다. 그 사정을 들어도 비올라 씨의 감정이 똑같다면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무슨 말을 들어도! 만약 저 사람이 지옥에 갔다가 기어 올라왔다고 하더라도! 난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네, 좋습니다. 다만, 이야기가 끝나고, 시간이 흘러서 비올라 씨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다면… 그때는 그 변화를 부정하지 말아 주세요.”
“흥! 그럴 일 없대도요!”
한바탕 폭풍이 지나고, 냉랭한 분위기에서 나와 미리 말을 맞춘 8년의 여정이 드웰 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난파한 드웰 씨는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는 집념 하나로 무인도에서 홀로 리버티 호를 수리하며 버틴 7년이 과장 없이 흘러 나왔다.
굳이 페리아 족의 이야기를 뺀 이유는 간단했다.
드웰이 탐사선은 탄 것도, 8년 만에 돌아온 것도 비밀이 아니다 보니 숨길 수 없지만, 페리아 족만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괜히 전설의 종족의 소재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 힘없는 평민인 드웰 씨의 가족들에게는 결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돌아왔단다. 네가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경멸한다 해도 나는 그것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나는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사죄하고 싶었다. 나를 이렇게 원망하는 너라도, 너라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흐느끼듯이 드웰의 말이 끝나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잠시 후.
쿠다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올라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졌고, 그녀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소리쳤다.
“나만! 나만 살았잖아! 엄마는! 오빠는! 언니느으은! 얼마나,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는지 알아?! 아빠가 떠나지만 않았어도! 그냥 그렇게 있기만 했어도! 그러면 얼마나 좋았어! 나를 봐! 나를 보라고! 나는, 나는 좋았을 것 같아?!”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는 옷을 벗어 던졌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우리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잠깐의 순간에 들어온 그녀의 몸은….
온몸을 휘감은 뱀 같은 흉터, 찢기고, 터진 뒤 엉망으로 아물었던 흉터, 흉터, 흉터, 흉터….
다른 의미로 차마 눈을 둘 곳을 찾을 수 없던 그녀의 몸이었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이야!”
뒤늦게 깜짝 놀란 뤼샨 씨의 목소리가 들리고 부산스럽게 자리를 떠나는 두 사람의 인기척이 사라진 뒤, 잠시 후 뤼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고개 돌리셔도 됩니다. 휴….”
“크흠.”
“음.”
“…….”
분노인지 수치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얼굴이 붉게 상기된 뤼샨이 말했다.
“내가 너무 늦었습니다. 혼자서 조직의 눈을 속이면서 아내를 탈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조직에게 공격당해서 무너지는 순간까지 기다렸는데….”
그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에 드웰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네.”
아마 뤼샨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드웰의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이미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더군요. 그녀를 치료하는데 꼬박 2년이 걸렸고, 이후로도 조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소문을 듣기 전까지 정처 없이 떠돌아야 했습니다. 두 아이까지 데리고 다니려니 더 힘들었죠. 그리고 2년 전에야 겨우 조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의 소원대로 이곳에 돌아온 것입니다. 이곳도 몇 년 전에 전염병이 돌면서 꽤 많은 사람이 죽은 다음이었습니다만….”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그만하십시오.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행복했을 겁니다. 그냥 멀리서 확인만 하지 그랬습니까? 그녀는 이미 너무 많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그 아픔을 다시 되새김질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는 뤼샨과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드웰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쳤다.
짝!
“자, 이제 일어납니다. 뤼샨 씨. 그동안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제 저희가 찾아올 일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하, 그것참 위로가 되는군요.”
“하지만 혹시라도, 우연히라도 선주님과 아내 분이 마주친다면, 두 분의 중재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오해하지 마세요. 단지 우리 선주님이 고향에 정착하기로 하셔서 말이죠. 같은 도시에 살면 아무래도 한 번 정도는 마주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기랄! 약속이 다르지 않소!”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
파티의 호스트가 접객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서인지, 거의 쫒겨다나시피 뤼샨의 집을 나온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선술집으로 향했다.
내가 계속 조용히 걷기만 하자 궁금증을 참지 못한 우르타가 물었다.
“이제 끝난 거야?”
“우리 일은 끝이지.”
“어?”
“우리 일은 여기서 끝. 이제부터 선주님이 하실 일이니까.”
내 말에 드웰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 나 말인가? 내가 뭘…?”
나는 그에게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앞으로 어차피 여기에 정착하실 것 아닙니까? 마을 안에는 좀 그렇고, 근처에 자리를 잡으세요. 그리고 가끔씩, 우연을 가장해서 마주치시죠. 특별히 말을 걸 필요도, 억지로 만날 필요도 없습니다. 일단 ‘아빠’라고 불렀잖아요. 감정이 다 희석되고 나면 결국 그것만 남을 것 아닙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가족’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