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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38화 (138/420)

138화. 둥지를 떠나는 시간

출항준비에 한창인 리버티 호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 바로 이 배의 선주이자 제작자인 드웰이었다.

잠시 그를 지켜보던 나는 가벼운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선주님.”

“아? 리안 선장. 이거이거, 이제 리버티 호에 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묘하군.”

“풋, 리버티 호는 선주님의 배입니다. 언제든지 원하실 때 타실 수 있어요.”

“아니야, 배는 이제 그만 타고 싶네. 그런데 마치 애지중지 기르던 딸을 시집보내….”

말을 하다 말고 드웰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 참, 요 며칠 사이에 몸은 더 늙으셨으면서 마음은 애가 되셨다.

“집은 알아보셨어요?”

“으, 으응? 집? 아, 집 말이군. 오늘 가게 주인과 함께 보러 가기로 했네. 아무리 항구라고 해도 외곽의 집은 싸서 쉽게 구할 것 같아.”

“몸 좀 추스르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계세요. 최대한 빨리 조선소를 인수할 정도 자금을 모아 올 테니.”

“너무 급하게 일을 진행할 필요는 없네. 어차피 손을 풀어야 할 시간도 필요하고. 포호크가 아는 조선공이 있다니까 적당히 일하면서 기다리도록 하지.”

그때 리버티 호에서 타종 소리가 울리며 한 선원이 뱃전에서 소리쳤다.

“선장님! 출항 준비가 끝났습니다!”

나와 드웰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어 굳게 잡았다.

“부디 순조로운 항해가 되기를 빌겠네.”

“다시 돌아올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그럼 이만.”

내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서자, 차례를 기다리던 다른 간부들이 드웰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분명히 재회가 약속된 이별임에도 불구하고, 늘 이별은 어렵다.

바다라는 곳은 그 약속을 흔적도 없이 삼킬 수도 있기에 더 먹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

“바람 좋고! 이대로라면 닷새도 안 걸리겠군.”

“네, 선장님. 바다도 잔잔한 게, 항해하기 정말 좋군요.”

“발드 항해사는 요즘 어때? 적응은 다 했나?”

“물론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배를 타기 시작한 이유로 요즘처럼 좋았던 적이 없습니다.”

“그거야 얼마 전까지 노잡이 노예였으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왜 노예가 된 거야? 해적들도 항해사는 웬만하면 포섭하려고 하지 않나?”

내 질문에 쓴웃음을 지은 발드 항해사가 쓸쓸하게 대답했다.

“해적 놈들이 항해사가 귀한 것도 맞고, 절 포섭하려 한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죽으면 죽었지, 그놈들을 위해 항로를 안내하고 싶지는 않더군요. 물론 배고픔과 폭력에 굴복해서 노를 저어 그들의 약탈에 한몫하기는 했습니다만….”

“그거야 어쩔 수 없지. 솔직히 그 상황에서 노를 젓지 않고 고문당하다 죽기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어?”

“그렇기야 합니다만… 그래도 제가 친형님처럼 따르던 선장님을 죽인 놈들인데, 그런 놈들이 또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에 협조했다고 생각하면 요즘도 가끔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납니다.”

어휴, 괜히 말을 꺼낸 것 같다.

이놈의 세상은 어떻게 된 게 기구한 사연 없는 인물이 없냐.

평범하고 무탈하게 살다가 죽는 인생이 한없이 어려운 세상이 바로 이 세상인 것 같다.

이러다가 우르타랑 네이선도 과거를 까보면 막장 드라마가 하나씩 나오는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

내가 괜히 얼마 되지도 않는 하늘의 구름을 관찰하고 있자, 작게 웃은 발드가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세상에 주변 사람 하나도 잃지 않는 뱃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때 항복하지 않은 덕분에 이렇게 좋은 선장님과 동료들도 만났으니까요.”

“그, 그래. 그렇게 생각해주니 참 고맙네. 참, 다리는 좀 어때?”

“그게…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다 아문 것 같습니다만….”

말꼬리를 흐렸던 발드가 입술을 몇 번 축이더니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걸을 때마다 통증이 조금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장님.”

“나아지고 있으면 된 거지. 뭘 죄송까지 하고 그래. 너무 그렇게 의기소침하지 말라고. 발드 항해사는 충분히 자기 몫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감사합니다, 선장님.”

“아니야, 안 그래도 우리 항해사들이 좀 어려서 문제가 있었는데 발드 항해사가 중간을 잘 잡아줘서 고맙게 생각해. 우리 오래 함께하자고!”

“물론입니다!”

휴, 겨우 좋게 마무리했다.

그런데 진짜로 발드 항해사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발을 저는 것이 유일한 단점인데, 다른 장점들에 비하면 그것은 단점 축에도 못 낄 정도였다.

솔직히 다리가 다 회복되면 다른 배로 떠나버릴까 봐, 다리가 낫지 말라고 약간 나쁜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니까?

“그럼 무슨 일 생기면 애들 보내.”

“네, 들어가십시오, 선장님.”

선교를 나온 나는 불쌍한 선원들을 쥐어패고 있는, 아니, 훈련시키고 있는 네이선이 있는 선미 갑판을 확인했다.

저놈은 진짜 훈련을 너무 무식하게 한다.

이제 선장이라서 저놈에게 훈련을 받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네이선에게 크게 다치지 않게 주의하라고 한마디를 한 뒤, 포갑판으로 가서 잘 쓰지도 않는 대포를 닦으라고 선원들을 쪼아대는 우르타를 보았다.

으음, 선원들이 괜히 우르타를 째려보거나 구시렁거리기는 하는데, 원래 이게 맞기는 하다.

전투 준비는 평소에 해놔야지, 막상 전투 상황이 돼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게다가 보통은 이렇게 미리 준비되지 않은 사소한 문제가 발목을 잡고는 하니 말이다.

일등항해사, 이등항해사, 삼등항해사가 제 자리를 찾으니까 선장인 내가 할 일이 많이 없어졌다.

선교 당직에서 내 시간은 완전히 빠지거나 불가피한 상황에서 땜빵 정도로 들어갈 뿐이고, 항해 중에 선박 관리는 갑판장님이 하시고, 교역품 거래와 창고 관리는 회계사가, 식료품 관리는 조리장이 하는데 내가 뭘 하겠냐고.

물론 가장 중요한 ‘항해 계획’은 내 일이었지만, 모두가 예상하다시피 계획은 중요한 일이지, 양이 많은 일은 아니다.

그나저나 이번 기항지인 론 항구까지는 간다고 하고, 다음 기항지를 어디로 할지 고민이다.

향료 제도를 다녀오기 전의 나라면 안전하게 쿠샤 왕국 남부의 비요렐 항구나 모지 항구, 또 는 벨로키나 왕국의 켄자스 항구까지 갔다가 오는 항로를 생각했겠지.

(참고로 그보다 남단인 몰로스 제국의 힐로템 항구는 군항이라서 상선은 못 들어간다.)

그런데 쿠샤 왕국 근처까지 오니, 향료 제도의 대박 성과가 눈에 아른거린다.

심지어 이번에는 시기도 좋다.

물론 그 말도 안 되게 힘들었던 여정과 목숨이 여벌로 열 개쯤 필요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유혹에 흔들리면 안 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최소 몇 배, 최대 수십 배의 교역을 경험했는데 다시 5%, 10% 마진의 교역을 하려니까 뭐랄까, 흥이 안 난다.

막말로 한 번 성공하면 배가 한 척씩 더 생기는 거다.

문제라면 판돈으로 걸어야 하는 게 내 목숨이라서 원 코인 챌린지가 된다는 것이지만….

“선장님?”

그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갑판장님이 들어왔다.

“네? 무슨 일이세요?”

“그저 술이나 한잔 얻어먹으러 왔는데, 괜찮나?”

“무슨 여기가 술 창고도 아니고… 왜요? 멜라나인에는 괜찮은 술이 없었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술병 보관고를 열어 술을 꺼냈다.

멋지게 전시된 술병을 꺼내오면 좋겠지만, 안 그래도 내구성이 형편없는 유리병을 배에서 그따위로 보관하면 매일 깨진 유리병 치우는 게 일이 될 거다.

다행스럽게도 선장실에는 4m쯤의 높은 파도가 치더라도 파손을 피할 수도 있는 전용 술병 보관고가 있다.

물론 외형보다는 내구성과 내부 충전제에 전력을 다한 녀석이라 그리 볼품은 없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그, 술병을 꺼낼 때 뭔가 우아하고 이런 게 아니라 어설픈 좀도둑이 남의 집 서랍 뒤지는 포즈가 되어버린다.

“아, 멜라나인. 드웰에게 들을 때는 그래도 제법 큰 항구인 것 같았는데 말이야.”

“생각보다 크던데요? 어항이 그 정도면 큰 거죠.”

“아니! 번화가가 너무 작지 않냐!”

“어… 당연하죠, 외부인이 거의 없는 동네니까요?”

“에잉…. 그래서 그런지 쓸 만한 녀석이 없었어.”

언젠가 말한 것 같은데, 우리 갑판장님은 받은 수당의 대부분을 술 사는 데 사용하신다.

갑판장님 수당이 적은 편은 아니라서 평범한 선원용 싸구려 술 말고, 진짜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들이 찾는 고급술을 사드신다.

심지어 내 방의 술보다 고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괜찮은 술이 몇 종류 보이던데…?”

“너무 비싸더라고.”

“에이, 비싸 봐야….”

“며칠만 더 있으면 론에 가는데 비싸게 그걸 사고 싶겠냐?”

“그렇기는 하죠.”

“잔소리 말고 가득 따라 봐.”

내가 병에 남은 술을 모조리 따라주자 만족스럽게 술을 한 모금 삼킨 갑판장님은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며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론에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쿠샤 왕국 쪽으로 이동할 거냐?”

“지금 생각 중이기는 해요.”

“아래까지 간다면 아예 론에서 곡물과 주류를 사서 켄자스로 가는 방법도 괜찮더라. 아무래도 둘 다 벨로키나 왕국이다 보니 관세를 안 내도 되는 것이 꽤 크더라고.”

“그런 것도 괜찮긴 하죠. 그래도 쿠샤 왕국 항구 하나 정도는 들러서 재보급하고 가는 쪽이 안정적이기는 하겠지만 말이죠.”

“바흐카덴 근해에는 해적이 많으니까 꽤 주의하는 게 좋아. 가능하면 해군과 같이 움직이면 더 좋지.”

“아이고, 말도 마세요. 전에 서해 항로 다녀왔다고 했잖아요? 그때도 아주 개고생을 했다니까요?”

“아, 아, 들었는데 깜빡했다. 이렇게 늙으면 자꾸 뭘 잊어버린다니까.”

“그냥 제대로 안 들으신 것 같은데?”

“어험! 그나저나 그 꼬맹이가 이렇게 커서 서해 항로를 타고, 나도 못 가본 향료 제도를 다녀왔다니, 거참! 지금도 믿기지가 않는구만.”

어느새 내 머리로 손을 뻗는 갑판장님의 마수를 피해 재빨리 물러서며 머리를 털었다.

“에이, 언제적 이야기를 자꾸 하세요? 이제 저한테 고용되신 분이. 크크크크큭.”

“가고 싶냐?”

“네?”

“그 향료 제도 말이다. 곧 있으면 겨울 항로가 열릴 시기 아니냐?”

“에이, 그게 얼마나 위험한….”

“네 눈에 욕심이 가득하다, 이놈아. 허허허허.”

“…….”

“아니라고 할 테냐?”

“히힛! 그게 보여요?”

아, 갑판장님 눈치 백 단이시네.

진짜 자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단점은 안보이고 장점만 보인다.

경험도 있으니 왠지 잘될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긴단 말이다.

나, 우르타, 네이선 이렇게 세 명에 발드 항해사도 경험이 있다고 했고, 오펜은 아예 향료 제도 출신이다.

“솔직히 잘할 것 같기도 한데….”

“글쎄다, 리안. 나도 다녀오지 않아서 이렇게 말하기 민망하다만, 이왕이면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은 어떠냐?”

“안 그래도 아인델프랑 게론드를 불러서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요.”

“이왕이면 네이선과 우르타도 불러라. 그 녀석들도 함께 다녀온 것 아니냐?”

그게 맞기는 한데 말이죠.

왠지 내가 우르타나 네이선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나 어색했다.

약간 굴욕적인 느낌도 있고, 하여튼 좀 그렇다.

“선장인 네가 그 아이들을 인정하지 않는데 선원들이 인정할 것 같냐? 네가 계속 그 아이들을 품 안에 싸고돌면 그 아이들도 네 앞에서는 언제까지나 아이일 수밖에 없는 법이야.”

“어? 제가 싸고 돈다구요?”

“그래. 잘 생각을 해봐라. 일등항해사도 네이선보다 고작 대여섯 살 많을 뿐이고 삼등항해사는 비슷하지. 그런데 네가 일등항해사나 삼등항해사를 대하는 태도와 네이선과 우르타를 대하는 태도를 스스로 비교해 보거라.”

“…….”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언제부터인가 내가 일일이 챙겨주고, 시키고, 뒤처리하는 게 익숙해진 거지.

그런데 그 녀석들도 벌써 수년 차 숙련 선원이고, 이 배의 간부다.

내가 진짜 어리게 취급한 것 같아서 왠지 미안해진다.

“새끼 새가 다 자라면 어미들은 일부러 새끼를 밀어내서라도 둥지 밖으로 내보낸다. 몸이 다 크고 날개가 튼튼해졌어도 어미가 밀어내지 않으면 새끼들은 자기가 다 컸는지 모르거든. 처음에는 당연히 날지 못하지. 날갯짓은 어설프고, 어쩌면 비행에 실패해서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과정이 없다면, 새끼는 영원히 새끼일 뿐 성체가 될 수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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