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의견 수렴과 토론의 가치
“에, 그런 이유로 다음 기항지나 목표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해.”
내 말이 끝났음에도 다들 난감한 표정만 지을 뿐 딱히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어색하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법, 총대를 메기로 결심한 아인델프가 조심스럽게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선장님, 원래 항해 계획은 선장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저희가 함부로 뭐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그렇지, 일등항해사 말이 맞기는 해. 하지만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나는 여러 사람 이야기가 듣고 싶어. 어차피 결정은 내가 하더라도 이야기 정도는 들을 수 있지 않겠어?”
아인델프의 표정이 약간의 당황과 어색함으로 물들었다.
내가 선장을 하기에는 경력이 조촐한 것처럼, 아인델프 역시 일등항해사를 할 경력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것이 자리에 적응하게 마련이고, 일등항해사 정도가 되면 자기가 선장이나 부선장이라면 항해계획을 어떻게 잡을지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거다.
“말이 나온 김에 일등항해사부터 한번 이야기해 보지?”
“어? 저 말씀이십니까?”
“응, 편하게 말해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던 아인델프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서해 항로에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내해 교역으로는 규모를 늘리는 것에 한계가 있는 데다가, 전쟁과 전염병으로 이후에 움직일 방향도 여의치 않습니다. 전염병이 빠르게 가라앉는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우연에 기대어 계획을 짤 수는 없으니까요.”
아인델프의 말이 끝나자 나는 살짝 웃으며 작게 박수를 쳤다.
처음이라 꽤 어려울 수도 있는 요구였는데 제법 괜찮았다.
이럴 때 칭찬을 해 줘야 다음 사람이 용기를 갖게 되는 법이지.
“좋아, 의견 잘 들었어. 그럼 다음은 갑판장님이 해주시겠어요?”
“전 서해 항로는 반대입니다. 아무리 많은 배들이 움직이는 시기라고는 하지만, 그만큼 기대 수익도 떨어지고 그렇다고 위험이 엄청나게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까요. 폭풍 지대가 힘이 약해진다고 해도 여전히 폭풍은 위험하고, 해적들도 한탕을 노리고 만전을 기해서 움직일 겁니다. 게다가 돌아오는 시기가 조금만 늦어도 발이 묶일 텐데, 첫 시도치고는 위험도가 너무 높습니다.”
갑판장님은 지목을 당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사실 갑판장님은 내심 찬성했어도 반대 의견을 내셨을 거다.
선장, 일등항해사, 갑판장이 모두 같은 의견을 내놓으면, 처음으로 반대 의견을 내야 하는 사람은 그 부담을 감수하느니 그냥 우리 의견에 동조하는 쪽을 택할 확률이 높으니 말이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갑판장님의 이야기를 듣는데 몇 명이 움찔하는 것이 보인다.
“자, 다음은 이등항해사….”
“선장님,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내가 지목을 하기 전에 우르타가 손을 들며 자기가 먼저 말하겠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물론 선장이 말하는 것을 중간에 끊은 것이 정중한 것은 아니지만, 우르타니까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라고 하자.
“그래, 우르, 아니 포술장이 먼저 이야기해 봐.”
이런 것부터 바꿔보자.
갑판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임명한 갑판장과 돌격대장을 나조차도 잘 부르지도 않는데, 선원들이 마음속으로 그걸 인정할 리가 있겠는가?
솔직히 선원들이 네이선과 우르타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것은 네이선의 무력에 기댄 감이 있다.
수틀리면 훈련을 빙자해서 쥐어 패버리니, 겉으로나마 따르는 척을 하는 것이다.
“저도 향료 제도는 반대입니다. 향료 제도를 간다면 다른 상선대에 합류해야 하는데, 현재 리버티 호의 상태로는 썩 내켜 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신뢰도나 뭐 그런 것이 떨어지는 상선대를 찾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노, 놀랍다! 나 뿐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놀랍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우르타를 보고 있었다.
“그, 그렇지. 계속해봐, 포술장.”
내 추임새에 다들 정신을 차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우르타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잠시 사람들을 둘러보던 우르타는 더욱 신나서 열정적으로 말을 이었다.
“네! 계속하겠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상선대가 정상일 확률은 점점 낮아집니다. 항해 중에 어떤 불행한 사고가 나더라도 이상하지 않게 되는 거죠. 솔직하게 말해서 해적들도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 상선대보다는 뭔가 문제가 있는 상선대 쪽이 더 먹음직스럽지 않겠습니까?”
잠시 동안 정적이 흐르고, 내가 애매하게 틀어지는 표정을 필사적으로 유지하면서 물었다.
“어, 음, 잘 들었어, 포술장. 그런데 아주 막힘없이 말하던데, 미리 생각해 둔 건가?”
“네! 어제 네이선과 이야기하다가, 아앗! 말하면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선장님.”
신나서 이야기하던 우르타가 갑자기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깜짝 놀라더니, 곧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봤다.
이틀 전에 두 녀석과 술을 마시며 슬쩍 운을 띄운 적이 있는데, 어제 네이선과 이야기하면 제법 머리를 굴렸던 모양이다.
이게 무슨 기밀도 아니라서 미리 누군가에게 이야기했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데, 선장과 친하다고 회의 주제를 미리 알고 준비한 것 같아서 민망한 모양이다.
“괜찮아. 무슨 회의 주제가 기밀도 아니었고. 미리 의견도 나눌 수 있지 뭐. 말 나온 김에 물어보지. 돌격대장은 포술장과 같은 의견인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우르타를 보고 있던 네이선이 갑작스러운 지목에 당황하며 엉덩이를 반쯤 들었다가 다시 앉았다.
“아?! 나, 아니, 저 말씀이십니까?”
“음. 어제 포술장과 이야기했다며?”
“네, 네,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어제 이야기를 했으면 돌격대장도 생각이 있을 것 아냐? 한 번 이야기해 보지?”
“그게….”
잠시 주저하던 네이선은 우르타를 한번 힐끔 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서해 항로를 타는 쪽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우르타, 아니, 포술장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서해 항로는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네. 아무래도 대규모 상선대가 움직이는 만큼 쿠샤 왕국 해군도 더 신경을 쓸 테니 안전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우, 포술장의 말대로 그만큼 더 치밀하게 준비한 해적들이 비교적 준비가 덜 된 상선대를 노릴 테니까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지금의 상태로는 너무 위험한 도박인 것 같습니다.”
정말 놀랍군.
지금 네이선이 우르타에게 말로 설득된 거야?
심지어 네이선이 말을 저렇게 잘한다고?
내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우르타와 네이선을 번갈아 가면서 보는데, 모인 사람들 모두가 차례대로 서해 항로를 타고 향료 제도로 향하는 것에 대해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 의견을 내놓고 토론을 거치자 의외로 쉽게 결론이 나왔다.
“전체적인 의견은 부정적인 것 같네. 그렇지?”
“네, 선장님. 아무래도 회계사의 의견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회의를 끝내려는 내 질문에 아인델프가 모두를 대표해서 대답했다.
서해 항로를 타는 것에 극단적으로 반대한 게론드가 한 말이 정말 결정적이기는 했다.
게론드가 지적한 것은 다름 아닌 리버티 호가 벨로키나 왕국에서 상업 허가를 받은 선박이라는 것이었다.
일레드 왕국과 벨로키나 왕국이 군사 동맹을 맺고 쿠샤 왕국과 전쟁을 벌인 이후로 쿠샤 왕국의 제1 적성국은 벨로키나 왕국이었다.
물론 지금은 종전 상태이기 때문에 대놓고 해군의 공격을 받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쿠샤 왕국에서는 벨로키나 국적 선박을 굉장히 꺼리고 있었다.
쿠샤 왕국이 내해와 향료 제도를 쥐고 흔들던 시절, 식민지인 향료 제도에 보급품 전달(이번 항해 이후 한동안 대륙에서 향료 제도로 가는 항로가 험해진다)을 위해 시작된 대규모 항해였다.
지금도 참가하는 선박은 대부분 쿠샤 왕국의 상선이고, 이 시기만큼은 향료 제도가 쿠샤 왕국의 그럴듯한 식민지로 보이고는 했다.
그런데 적성국의 국적기를 단 상선 한 척이 덜렁덜렁 와서 ‘나도 끼워주세요!’라고 하면 퍽이나 잘 끼워주겠다는 것이 게론의 논지였다.
그런데 미처 생각을 못 했을 뿐, 반박의 여지가 없는 정론이기도 했다.
“좋아, 회계사만 남고 모두 해산하지. 오늘도 수고하라고.”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가볍게 눈웃음을 한 뒤 선장실을 빠져나갔다.
“한 잔 줄까?”
내가 브랜디 병을 흔들며 묻자, 게론드는 병을 유심히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전 아침부터 독주를 마시는 취미는 없습니다. 혹시 와인 없습니까?”
“난 와인은 취하면 안 되는 상황이 아니면 안 마셔. 도대체 왜 마시는 거야?”
“와인을 왜 마시냐구요? 와인은 정말 훌륭한 음료입니다. 와인의 재료인 포도부터 설명을 드리자면….”
“그만, 그만! 회계사가 뭐라고 해도 와인은 없으니까 마실지 말지만 결정해.”
“휴우… 그냥 거기 땅콩이나 조금 주시죠.”
“언제 그런 걸 다 봤어? 아껴먹는 중인데… 에잇.”
내가 꺼내 준 땅콩 몇 개를 꼭꼭 씹어서 삼킨 게론드가 물었다.
“다음 상품에 대해 지시를 내리시려구요?”
“어? 어, 이미 알고 있다니까 따로 설명할 것 없겠네. 적성국이라고는 해도, 전쟁 상황은 아니니까 쿠샤 왕국에 가는 것이 나쁘지는 않아. 항해에 필요한 기름, 목재, 곡물가루, 육포 같은 것을 실으면 꽤 돈이 될 것 같은데 어때?”
“네, 뭐 포탄이나 무기류, 직물이나 모피도 괜찮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쿠샤 왕국을 가셔야겠습니까?”
“으응?”
아, 그러고 보니 게론드는 벨로키나 왕국 출신이구나.
“왜? 조금 불편한가?”
“그렇다기보다는, 그 사략 해적이라던가, 꽤 위험하게 보여서 말입니다. 론 항구에서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거나 일레드 왕국으로 가서 모피나 가죽, 목재를 구해오는 방법도 있습니다. 특히 지금 시기라면 일레드 북부지방의 모피가 넘어올 시기인데, 모피의 질이 엄청 뛰어난 것으로….”
“모피에 대해서는 그만 알려줘도 되고, 자네 생각만큼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배도 많이 다닐 시기인데 굳이 국적기까지 달려 있는 작은 상선을 공격해서 엄한 빌미를 만들 만큼 쿠샤 왕국 놈들도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뭐, 그쪽 해군이라면 내가 아는 사람도 있고 말이지.”
분명히 마다카트 섬의 미르바프 중령이 아마 해군으로 소속을 옮긴다고 했었다.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그 미르바프가 그사이에 죽거나 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마 군함의 함장이나 부함장 정도로 근무 중이지 않을까?
해군의 인맥이라는 것이 꽤나 좁으니, 함장이나 부함장급 인사라면 해군 내에서 이름만 대도 대충 알아들을 거다.
아무 대가 없이 큰일을 도와줄 만큼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해준 일이 있으니 이름 정도 팔아먹는 것은 그도 양해해 주겠지.
이후로 한동안 현재 교역품의 상태와 어떤 교역품을 구매할지에 대해 나와 이야기하던 게론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땅콩을 다 먹었는지 손을 털고 일어선 게론드는 인사를 하고 나서 생각이 났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그 산호랑 진주는 어떻게 합니까? 저 혼자 처분하고 올까요?”
“아니, 그건 나와 함께 가지. 입항하는 대로 자네는 교역소에 가서 계약 체결하고, 실제 거래는 갑판장에게 위임하고 나와 함께 산호와 진주를 처분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선장님. 그럼 이만.”
그 자리에 있었던 간부들에게 일정한 상여금을 내주기는 해야겠지만, 누가 뭐래도 상호와 진주는 내 개인 획득 물품이다.
‘거래한 음식의 대부분은 공용 식료품인데 왜 네 거냐?’라고 묻는다면, 어차피 이건 정규거래가 아니라 나의 ‘밀거래’에 해당하니까 ‘내 꺼’라고 말할 수 있다.
인어, 아니, 어인, 아니, 인어…. 하여간 그 종족의 존재는 지금도 비밀인데, 이걸 밝혀서 상여금을 분배하는 것도 웃기지 않는가.
참고로 문제의 ‘베르시아나 와인’과 위스키병은 내가 꼼꼼하게 따개비를 제거하고 개인 금고 한쪽에 고이 모셔놓은 상태다.
아, 물론 완충재를 빵빵하게 넣어서 배가 뒤집히더라도 깨지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썼다.
와인은 그렇게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며 게론드가 혀를 찼지만, 알게 뭐람? 내가 마실 것도 아닌데.
***
론 항구에 입항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음?! 로제 항구라고? 그쪽은 전염병 때문에 난리라던데. 괜찮은 거 맞소?”
배에 올라서 대충 검사를 하던 항구관리관이 깜짝 놀라 내게서 한발 멀어지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거기 출항 날짜를 보면 아시겠지만, 저희가 출항할 때까지만 해도 전염병 같은 기색은 없었습니다. 우리 선원들도 모두 건강하구요. 의심스러우시면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내 말에 날짜를 다시 확인한 항구관리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선장님 말씀대로 출항 날짜는 전염병이 돌기 이전이기는 한데… 전염병이라는 게 워낙 무서워서 말입니다. 잠시 현 위치에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내 말에도 상관없이 제 할 말만 마친 관리관은 함께 온 경비병들과 함께 부랴부랴 리버티 호를 떠났다.
아, 왠지 병원균 취급받는 것 같아서 열이 받네?
론 항구 앞바다에서 하릴없이 둥둥 떠 있기를 몇 시간, 지나가는 배들의 선원들이 왠지 우리를 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락으로 처박히고 있는데, 드디어 세 척의 보트가 우리 배에 접근했다.
그리고 그 배에는 완전 무장한 경비대 30명이… 아니, 쟤들은 해군 육전대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