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악천후와 불청객 (1)
일단 기항일은 3일로 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일 당장 출항하고 싶지만, 선원들의 사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물론 3일이라고 하니 불만을 토로하는 녀석이 꽤 많았지만, 다음 기항지인 바흐카덴에서 5일의 기항을 약속함으로써 그럭저럭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깜빡한 것이 있는데, 배의 출항 시기는 가끔 인간이 아닌 자연이 정할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 씨발, 아니지?”
이틀째 방에 감금(?)된 우르타가 가끔 와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어제까지는 그럭저럭 괜찮게 넘어갔다.
갑판장님께 각별한 경계를 부탁드렸고, 특별히 수상한 사람이 접근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게론드에게 켄자스 항구에서 판매할 술과 곡물에 대한 매수 계약도 진행하게 시켰다.
게론드가 나가는 것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는데, 어쩔 수 없잖아, 게론드가 회계사인걸.
하여튼 게론드에게 딸려 보낸 발드 항해사의 말대로라면 게론드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고, 게론드도 나름 긴장한 것인지 말을 꽤 아꼈다고 한다.
게론드가 말을 아끼다니 이게 진짜 놀라운 일 아닌가?
그랬는데, 그렇게 이틀째도 잘 넘어가고, 이제 일어나서 선원들 복귀시켜서 출항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창문 없는 선장실이지만, 나도 나름 바다에서 굴러먹은 시간이 있다.
공기 중의 습도만 가지고도 대충 날씨를 파악할 정도는 된다는 거다.
눅눅한 공기, 오래된 나무 냄새가 바다 냄새에 섞여 내 코를 간질인다.
나는 눈곱도 제대로 떼지 않고 선교로 달려갔다.
그리고 내가 도착하기 무섭게 먼저 와 있던 갑판장님이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비가 꽤 오고 있습니다. 새벽에 내리기 시작한 모양인데….”
“아아악! 어때요? 출항 가능하겠어요?”
갑판장님은 고개를 들어 먼 바다의 하늘을 한번 살펴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은 괜찮은데, 솔직하게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먼 바다에서 폭풍이 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하필이면 지금….”
“안 그래도 새벽에 배가 한 척 들어오는 것 같아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곧 소식을 가지고 올 겁니다.”
생각보다 굵은 빗줄기와 제법 세게 부는 바람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선원 하나가 홀딱 젖은 모습으로 선교로 올라왔다.
나를 보고는 멈칫한 그는 내게 목례를 하고 갑판장님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입항한 상선은 남쪽에서 올라온 게 맞습니다. 남서쪽 해상에서 비구름이 상당히 뭉치고 있었다고 하니까 아마 폭풍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가봐.”
갑판장님은 선원에게 은화 하나를 던져주고는 선교에서 내려보냈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출항, 강행하시겠습니까?”
왠지 놀리는 것 같아서 나는 불퉁하게 대답했다.
“강행은 무슨, 다 아시면서. 비 그칠 때까지 출항 보류합니다. 당직표 추가 작성해주시고, 원하는 선원들은 다시 내보내세요. 비 그치면 바로 복귀하라고 하시고.”
“사실 복귀한 녀석도 거의 없습니다.”
“이런 젠장…!”
나는 괜히 엄한 타륜을 한번 걷어차고는 선교를 나서다가, 괜히 미워진 갑판장님에게 복수의 칼을 던졌다.
“갑판장님, 혹시 폭풍이 여기까지 올지도 모르니까 황천(비바람이 심한 날씨를 이르는 말) 대비 좀 해주세요.”
힐끗 보니 갑판장님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배에 복귀한 선원이 거의 없다고 했으니 당장 황천 대비를 위해 물건을 옮기고, 고정하고, 점검하려면 갑판장님의 고생이 눈에 훤하다.
비록 항구의 방파제 같은 시설들과 지리적 특성으로 폭풍이 오더라도 정박한 배가 심각한 피해를 입는 경우는 없지만, 폭풍이 올지도 모르니까 미리 대비하라는 내 명령은 충분히 정당하다.
***
비는 이틀을 줄기차게 내렸다.
오늘 낮에 입항한 상선 한 척은 폭풍을 뚫고 왔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니, 항구에 정박한 배들은 더욱 몸을 사렸다.
그리고 내 불안감은 끝내 현실이 되어 찾아왔다.
침대에 누워 땅콩을 씹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들어와.”
“선장님,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펜이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인사하며 말했다.
“응? 비라도 그쳤어?”
“그게 아니고, 무슨 자작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어? 자작? 귀족? 아니지, 귀족 나으리가 여기까지 직접 온 건 아닐 거고, 하인? 집사?”
“아무래도 본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젠장! 지금 누가 상대하고 있어?!”
“갑판장님이 현문에서 제지 중입니다만, 오래 버티지는 못하실 겁니다. 병사들도 잔뜩 데리고 왔어요.”
나는 옷장에서 미리 준비한 허름한 선원 복장을 꺼내서 재빨리 갈아입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상당히 길러놓은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짧게 자르기 시작했다.
전에 말한 것처럼 나는 검은색에 가까운 어두운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고, 이 머리색은 정말 흔하지가 않았다.
“서, 선장님?”
“과한 대비는 피곤할 뿐이지만, 부족한 대비는 목숨을 위험하게 하는 법. 어차피 머리카락은 다시 기르면 그만이야.”
대충 머리를 잘라낸 나는 두건으로 머리카락이 안 보이도록 꼼꼼히 감싼 뒤 오펜에게 말했다.
“가자. 지금부터 ‘선장님’ 안 돼. 그냥 ‘리안’, 아니, 그게 좀 힘들면 ‘선배’ 정도로 하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네, 선장, 아니, 선배님.”
우리가 갑판으로 나가자 현문 쪽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한 떼의 인간들이 보였다.
이미 근처에는 선원들이 제법 모여 있었기 때문에 나와 오펜은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근처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가까이 가니 소란스러운 와중에 꽤 열 받은 느낌의 갑판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장이 없다고 몇 번째 말하고 있지 않소?”
“배에 선장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분명히 귀족을 사칭한 사기꾼들이 이 배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단 말이다!”
“제기랄!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배에는 귀족을 사칭할 미친놈도 없고, 사기꾼도 없소! 무식한 뱃놈들이 무슨 사기를 쳐?!”
“시끄럽고, 그렇다면 비켜라! 우리가 직접 찾아본다고 하지 않았나!”
“당신이 뭔데 감히 배를 수색한다는 거요?! 우리는 정당하게 스코타 후작 각하께 상업 활동을 허가받은 상선이오! 당신이 아무리 귀족 가문의 집사라도….”
그때 병사가 들고 있는 넓은 차양 밑에서 비를 피하던 남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갑판장님의 말을 끊었다.
“그만!”
“앗, 자작님. 죄송합니다, 이 늙은이가 말이 안 통해서….”
“내가 언제까지 이 구질구질한 곳에 있어야 하지? 심지어 비까지! 하…. 알프레드.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자작님.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시면….”
“시끄럽다! 그리고 거기 너, 늙은이!”
“…….”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들더니 결국 자작이라고 불린 남자가 갑판장님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눈빛이 아주 불손하군. 나는 리바체 자작이다. 조금 더 존경심을 표시하는 게 좋을 거야. 귀족 모독죄로 당장 눈을 뽑아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그의 말에 갑판장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까딱거렸다.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자작 나으리. 이 늙은이가 배운 것이 없어서 제대로 된 예를 모르는 것을 한 번만 봐주십시오.”
“에잉, 이래서 천한 것들이란! 더 이상 잔소리 말고 비켜라, 네놈 말대로 진짜 이 안에 선장이라는 놈이 없다면 우리가 직접 가서 확인할 것이니.”
“하지만 나으리, 세상에 이런 법은 없습니다! 수색을 하시려면 최소한 적절한 죄목을 붙이시고 항구 경비대를 대동하셔야 합니다.”
“흥! 그런 하잘것없는 것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 비켜라!”
결국 그 귀족 놈은 갑판장님을 밀치며 안으로 파고들었고, 선원들은 주저하면서도 결국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건 충성심을 떠나서 귀족의 앞길을 막을 정신 나간 평민은 없다는 것이 맞는 거다.
나는 오펜에게 눈짓으로 갑판장님께 가라고 지시하고, 재빨리 그 귀족 놈의 옆으로 다가섰다.
“뭐냐?!”
“아이고, 나으리. 배라는 곳이 나으리처럼 귀하신 분이 몸소 돌아다닐 만큼 좋은 곳이 아닙니다. 나으리께서 찾으시는 곳이 선장실이라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그래도 제정신인 놈이 한 놈은 있군. 좋아. 안내해라.”
내가 앞으로 나서려는데 알프레드라는 집사 놈이 내 옆구릴 쿡 찌르더니 으르렁거렸다.
“미리 말하지만 괜한 수작 부릴 생각 말아라. 나도 왕년에 배 정도는 타봤으니.”
“아이고, 당연한 말씀을요. 제가 가장 빠르게 선장실로 가는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대충 들어보니 이놈도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까지 정보가 밝혀졌는지를 알아야 이후 대응을 할 것 아니야?
“그런데 귀족 사칭이라니, 그런 미친놈이 있습니까?”
“흠, 흠, 뭐 사칭까지는 아니지만, 이 배에 귀족인 척을 한 괘씸한 놈이 있다더군.”
“네에?! 으헤헤헤헤, 말도 안 됩니다요. 귀족이라면 나으리처럼 기품이 있고 멋져야 하는데 이 배의 뱃놈들은 딱 봐도 천하게 생겼는걸요?”
“흥, 그건 네놈이 알 바가 아니다! 그보다 선장실은 멀었느냐?!”
“죄송합니다, 나으리. 여기입니다, 여기 코너만 돌면 됩니다.”
드디어 선장실 앞에 선 리바체 자작의 얼굴이 똥 씹은 듯이 구겨졌다.
선장실은 선박에서 상당히 중요한 시설 중에 하나다.
그리고 나는 원래 남을 믿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선장실 안에 있는 항생제와 랜턴은 일단 남들의 눈에 띄면 딱히 좋을 일이 없는 것들이라 선장실의 보안은 확실했다.
“이런 젠장! 단단하게도 막아놨군! 너! 당장 가서 열쇠를 가지고 와!”
자작은 나를 지목해서 열쇠를 가지고 오라고 했지만, 그걸 내가 왜 쉽게 가져다주나?
“네?! 하지만 나으리, 선장실 열쇠는 선장만 가지고 있습니다. 제게 아무리 말씀하셔도….”
아, 물론 열쇠는 내 주머니에 들어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꿈에도 알 턱이 없는 자작은 얼굴이 붉게 물들더니, 옆에서 연신 굽신거리는 알프레드라는 남자에게 지시했다.
“알프레드, 부숴.”
“네?!”
막무가내로 여기까지 온 것답지 않게 알프레드라는 남자는 문을 부수라는 명령에 깜짝 놀라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작님, 하지만 배에 손상을 입히면 아무래도….”
“그래서! 지금 이대로 멍청하게 돌아가자는 거야?! 그러니까 그 ‘인어의 눈물’을 내게 가지고 왔어야지! 내가 여기까지 와서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죄송합니다, 자작님. 하지만 선박을 부수는 것만큼은….”
확실히 집사 양반이 배를 타보기는 한 모양이다.
귀족이니까 배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정도로는 처벌하기가 어렵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대는 고귀한 귀족이고, 배에는 죄다 평민들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배를 부순다면 조금 애매해진다.
배에 상업 허가를 내린 귀족에 대한 무례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 중 하나인 선장실을 문을 부수고 난입한다? 이건 거의 전쟁이다.
막말로 리바체 자작이 스코타 후작 가문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꼴이 되는 것이다.
이걸 수습하려면 적지 않은 성의 표시와 최소한 한 놈의 목이 필요했다.
“하지만 자작님, 이 배가 스코타 후작 가문의 허가를 받은 배라고 합니다. 만약 잘못되면 스코타 후작과 적대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자작을 설득했다.
이 멍청한 알프레드는 우리가 선장실 문을 곱게 열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알프레드가 모시는 자작님은 더 심각하게 멍청하고, 다혈질이었다.
갑자기 허리춤에서 숏 소드를 뽑아 든 리바체 자작은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문의 잠금장치를 내려쳤다.
카아앙!
째지는 금속음과 함께 작은 불꽃이 튀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 정도로 쉽게 부서질 잠금장치를 달았을 리가 없잖아?
깡! 깡! 퍼억! 까강! 퍼억! 깡!
하지만 리바체 자작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칼을 휘둘렀다.
검술이 딱히 뛰어나지는 않은지 절반쯤은 방문에 박히며 예쁜 내 방문에 상처를 냈지만, 어찌 되었건 잠금장치는 끄떡없었다.
그래, 계속 때려라, 이 기회에 잠금장치를 아주 최고급으로 바꿔야겠다.
하지만 속으로 한껏 비웃는 나와 달리 이미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알프레드 집사는 필사적으로 리바체 자작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아이고, 아이고! 자작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차라리 뱃놈들을 시켜 선장을 찾아오게 하십시오! 자작님!”
“으아아아악!”
집사의 애절한 호소 때문인지 제 성질을 못 이겨서인지, 자작은 끝내 숏 소드를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저 멀리 복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자작, 집사, 그리고 사병으로 보이는 남자 일곱 명.
사병까지 끌고 다닐 정도면 제법 위세 있는 집안이겠지만, 글쎄? 설마 이 항구의 주인보다 위세가 높지는 못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