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악천후와 불청객 (2)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내 예상대로 항구 경비대였다.
그리고 그들을 인솔하는 항구관리관도 보였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비공식 관리관이 아닌, 진짜 항구관리관이었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귀족 나으리다.
공식 직함도 없는 비공식 항구관리관이 하는 말 따위를 귓등으로라도 듣겠냐고.
“크흠, 리바체 자작님?”
“뭐야? 감히…!”
항구관리관이 자신을 부르자 이제야 상황을 깨달은 것인지, 안 그래도 붉게 상기되었던 얼굴을 더 빨갛게 물들였다.
어우, 진짜 바늘로 건드리면 ‘펑!’하고 터지지 않을까 싶다.
“자작님, 이러시면 저희 입장이 굉장히 난처합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흥, 네놈이 뭔데 내게 이래라저래라한단 말이냐?”
자작은 마지막까지 위세를 부려보지만, 누가 봐도 그냥 애들이 떼쓰는 정도에 불과했다.
항구관리관이 데리고 온 경비병은 넷에 불과했지만, 이미 기세는 항구관리관 쪽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제가 감히 자작님께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렇게 절차를 무시하고 행동하신 것을 제 주인이신 발레리아 백작 각하께서 아신다면 좋아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감히! 감히 네가 네 주인의 위세를 빌어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협박이라니요? 당치않습니다. 혹시라도 제 말이 기분이 나쁘셨다면 용서를 바랍니다.”
항구관리관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승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상황은 명명백백했고 자작은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상황을 인지한 집사 알프레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자작에게 작게 말했다.
“자작님, 오늘은 이만 물러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이익!”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항구관리관은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결국 선장실 문의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게 물었다.
“저 문은 어찌 된 거지?”
“저… 자작님께서….”
“흠, 선장은?”
“그게….”
내가 대답할 말이 궁해서 눈치를 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빠르게 다가온 아인델프가 항구관리관에게 인사하며 대답했다.
“항구관리관님, 제가 이 배의 일등항해사 아인델프입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그렇소? 흠, 그럼….”
“아,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리안, 이만 가 봐도 좋다. 갑판장님에게 선원들 해산시키라고 전해.”
“네, 일등항해사님.”
내가 아인델프에게 찡긋하고 눈인사를 보낸 뒤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벗어나는데, 다른 사람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인델프 항해사, 보다시피 우리 리바체 자작님께서 실수하신 모양인데… 좋게 해결할 수 없겠소?”
“으흠, 제가 선장님께 좋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만, 이 문을 보시면….”
“그건 당연히 자작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자작님?”
“크윽….”
“무, 물론입니다! 이미 자작님께서 제게 다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밖으로 나오자 갑판장님과 오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다가 나를 보며 반색했다.
재빨리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갑판장님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흐흐, 미친놈이 선장실 방문에 칼질을 하더군요.”
“뭐? 정말 정신 나갔군.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뻔하죠. 그런데 경비대는 언제 불렀어요? 오펜에게 말하기는 했는데….”
“저놈이 접근할 때부터. 바로 애들 보냈지.”
“역시 갑판장님!”
갑판장님을 향해 엄지를 척 올려준 나는 오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말했다.
“오펜도 오늘 잘 해줬다. 덕분에 꽤 도움이 됐어.”
“헤헤, 별말씀을요.”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아무리 잘나가는 가문이라도 감히 론 항구를 지배하는 발레리아 백작에 비하면 고만고만한 중소 귀족에 불과할 테니 결과는 뻔하죠. 적당히 사과하고 우리 쪽에도 성의를 보일 겁니다. 괜히 우리가 이 사실을 스코타 후작에게 알렸다가는 더 심한 꼴을 당할 테니까요.”
“앗, 저기 나옵니다!”
오펜의 말에 우리는 서로 약간 거리를 두고 딴청을 피웠다.
온갖 성질을 다 내며 나온 리바체 자작은 현문을 지나면서 갑판장님을 한번 째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배에서 내렸다.
알프레드 집사도, 사병들도 제 주인을 따라서 다 내릴 때쯤, 아인델프가 항구관리관과 함께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는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네요. 갑판장님이 뒷정리 좀 해주시고 일등항해사랑 같이 선장실로 오세요.”
“알겠습니다. 선장님.”
***
선장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갑판장님과 아인델프가 들어왔다.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오늘 내로 수리비로 25,000로스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뭐 귀족 간의 문제나 행정적인 절차는 자기들이 알아서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따로 후작에게 보고하지만 말아 달라고 하더군요.”
비록 우리가 후작과 딱히 연이 없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편지 정도는 보낼 수 있다.
후작이 직접 보지는 않더라도 가문에 관련된 일이니 누군가가 보게 될 것이고, 일단 보게 되면 가문의 명예 때문에라도 스코타 후작가는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상황이 그쯤 되면 발레리아 백작도 가만히 있기 애매한 것이, 바로 자기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어쩌면 리바체 자작이 발레리아 백작을 모시고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 그건 아니겠구나.
아무리 멍청한 놈이라도 감히 자기 주군의 직할령에서 이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하여간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나머지 문제는 발레리아 가문에서 처리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럼 대충 끝난 것 같군요.”
“흐음, 난 조금 찝찝한데….”
아인델프의 안심하는 말에 갑판장님이 토를 달자, 아인델프가 의문을 표했다.
“갑판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으으음….”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갑판장님에게 물었다.
“비는 언제쯤 그칠 것 같아요?”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쯤? 늦어도 오후에는 그칠 겁니다.”
“내일 출항하겠네요. 비만 그치면 새벽에라도 출항할 거니까 갑판장님은 선원들 최대한 소환하세요. 부족하면 새로 모집하셔도 좋습니다.”
“잠시만요! 선장님, 그리 급하게 출항할 필요가 있습니까?”
내 말에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인델프가 내게 질문했다.
“일등항해사, 잘 생각해봐. 지금 나간 미친놈이 이대로 포기할 것 같아?”
“하지만 그자가 더 이상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그가 원하는 게 뭘까?”
“진주를 얻은 방법이나 위치일까요?”
“단순하게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인어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지.”
“네에?!”
“중요한 것은 그가 필요한 정보를 리버티 호의 선장이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거야. 오늘 자존심까지 잔뜩 상하셨는데, 과연 그가 가만히 있을까?”
“설마….”
“그래, 분명히 납치건 협박이건 오늘 밤에 행동할 거다.”
우리가 말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던 갑판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왠지 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나가서 미리 준비를 좀 하겠습니다. 끝나고 보고드리죠.”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갑판장님.”
약간 멍한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 가며 보던 아인델프가 엉거주춤 일어나서 물었다.
“어, 음, 그럼 저, 저는 뭘 해야….”
“앉아, 앉아. 어차피 갑판장님이 다 준비할 테니까. 아, 자네는 교역소로 가서 내일 비가 그치는 대로 우리 배의 교역품을 옮겨달라고 전하게. 아마 꽤나 주문이 밀려있을 테니 주머니가 하나 필요할 거야.”
나는 미리 준비해둔(언제 필요할지 몰라서 비상용으로 몇 개 가지고 있다) 작은 뇌물 주머니를 꺼내서 아인델프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간부 전원 복귀시키고, 돌아올 인원들 다 승선하면 현문 철거해 버려. 항구에서 큰 소란이 생길 정도로 사건을 일으킬 배짱은 없어서 보이니, 경계만 잘하면 포기할지도 몰라. 사건은 없는 게 제일 좋지.”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후로도 나는 네이선과 우르타에게 상황을 알리고 준비를 시켰으며, 갑판장님이 선원들을 몰래 무장시키는 것을 확인했다.
우르타가 내 두건을 보며 호기심을 보이는 것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원래 그런 놈이니까 뭐….
***
완전히 어둠이 찾아오자 비는 보슬비로 바뀌었다.
아직 별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비가 곧 그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별도 없는 밤은 정말 눈앞에 손을 갖다 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지만, 곳곳에 숨어있는 물웅덩이가 불청객의 방문을 알려주었다.
“선장님, 접근하는 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나인가….”
“준비한 대로, 횃불 올려!”
내 명령이 전해지자,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리버티 호의 여기저기에서 횃불이 올라갔다.
보슬비 정도로는 횃불이 꺼질 리가 없었기 때문에 주변은 단번에 밝아지며 나름대로 조용히 접근하던 침입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뭐…!”
“제기랄, 발각됐다!”
“어, 어쩌지?!”
“공격해! 어차피 선원 놈들쯤이야… 응?!”
“건너갈 방법이 없어!”
“어떻게 공격하라는 거야?!”
그들은 현문이 철거된 리버티 호의 모습에 급격하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건 뭐 상대도 하기 전에 한숨부터 나온다.
너무 수준이 떨어지잖아….
“뭐 하는 놈들이냐?! 당장 물러가지 않으면 적대행위로 간주하겠다!”
네이선이 당당하게 소리쳤고, 우르타가 일곱 명의 사수들과 함께 쇠뇌를 견착했다.
적의 수는 30여 명으로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당장 이쪽으로 넘어올 방법이 없는 이상 원거리 무기를 가진 우리 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자, 잠깐만! 우리는…!”
퍼억!
엉겁결에 손을 들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던 남자가 뒤통수를 누군가에게 가격당하며 쓰러졌고, 그를 재빨리 받아 낸 남자가 소리쳤다.
“후퇴! 작전은 실패다! 튀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멀리서 무엇인가 바다에 빠지는 것과 같은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일부러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내가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는지, 가만히 내 옆에서 기다리던 아인델프가 물었다.
“왜 쏘지 않으셨습니까? 시체건, 포로건 이번 일을 증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요.”
“어? 그렇게 해서 내가 뭘 얻는데?”
“네?”
“저놈들이 누구 사주를 받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어?”
“그건 아닙니다만….”
“일등항해사, 아무리 병신 같아도 그놈은 귀족이야. 우리 같은 평민을 실수 혹은 실수를 가장해서 죽여도 처벌받지 않아. 벌금 정도 내려나?”
“하지만….”
“정체를 밝히면 뭐 하겠어? 괜히 저 가문과 적대감만 높아지지. 그러면 우리는 론 항구에서 상행위에 피해를 받을 수 있어. 그러니 저들이 이대로 포기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네에?! 설마 또 몰려올 것이라고 예상하십니까?”
“걸어서 못 오면, 헤엄쳐서라도 오겠지.
아인델프가 못 미더운 표정으로 나와 바다를 번갈아 가면서 보았다.
하지만 나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 리바체 자작이라는 놈이 이렇게 포기할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15분간 전원 휴식하고, 이후로는 2교대로 바다를 경계하도록 한다. 전부 불 꺼!”
아니나 다를까?
약 40분이 흐른 뒤, 배 근처에서 기묘한 움직임이 보였다.
나름대로 조용히 수영을 한다고 한 모양이지만, 인간이 물고기이거나 특수한 훈련을 받은 게 아닌 이상 물속에서는 소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선원들이 신호를 보내는 곳으로 뛰어가 내 태양열 충전 랜턴을 비추었다.
기존의 자연적인 불을 이용한 횃불이나 등불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렬한 빛이 바다를 비추었고, 그 빛에 걸린 남자들은 다시 잠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오, 역시 마법의 빛인가? 상상을 초월하는군!”
“이야, 저렇게 밝은 빛이라니! 놀라워!”
“저런 거라면 나도 하나 갖고 싶은데… 비싸겠지?”
“당연하지! 세상에 싸구려 마도구는 없다고!”
“헹, 선장처럼 수완이 좋으면 몰라도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돈이 있어도 못 구할걸?”
마도구는 아니지만, 너희가 구할 수 없는 것은 맞지.
의외로 이상한 곳에서 활약하게 된 랜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