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행운과 불운
나는 입을 오므리고 바람을 불어서 하얀 입김을 만들어 낸 뒤 인상을 찡그렸다.
“더 추워졌네요, 선원들은 어때요?”
“네, 아무래도 감기가 조금 심하게 도는 것 같습니다.”
“휴우… 이거야 원, 약도 없고 어쩐담.”
아무리 영상의 기온이라지만, 그래도 충분히 쌀쌀한 날씨에 제대로 된 방수 장비도 없이 비를 맞았으니 선원들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비를 맞고 제대로 씻기는커녕 축축한 옷을 그대로 입고 자는 녀석도 많아서 동사자가 안 나온 것이 용할 지경이다.
알다시피 배에서는 불을 피우는 것이 힘들다 보니, 선실에 감기가 돌기 시작하자 단 며칠 만에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개인실을 가지고 있는 우르타와 조리장 비에론까지 골골거리는 판이니, 일반 선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선실 안에 불이라도 피워야 할까요?”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자, 갑판장님이 피식 웃으며 대거리를 해주었다.
“몸이 녹기 전에 다들 연기로 질식해 죽을 겁니다. 모닥불의 열기보다는 창문을 열어서 연기를 빼는 사이에 들어오는 찬바람이 더 무서울 테니까요.”
“그렇겠죠? 지금 움직일 수 없는 인원이 얼마나 되죠?”
“감기 증상을 보이는 인원이 절반쯤 되고, 그중 12명은 작업 투입이 어렵습니다.”
“으음….”
상황이 이렇다보니 항생제를 써볼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몇 개 남지도 않은 약을 마구 사용하기도 그렇고, 항생제가 감기에 맞는 약도 아니다.
물론 고열로 사경을 헤매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열을 잡기 위해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열이 나는 사람들도 의식 수준이 떨어질 정도의 고열을 앓는 것은 아니라서 솔직히 약을 쓰기에는 아까웠다.
“갑판장님, 뭐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요, 항구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만, 지금 상태로는 저도 딱히 방법이 없군요.”
“옷은 다 말리라고 시키셨어요?”
내 질문에 갑판장님의 콧등이 찌그러졌다.
“일단 말은 했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겨울용 방한복을 여러 벌 가진 녀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게다가 당장 추우니까 영 벗을 생각을 안 합니다. 일단 말리려면 낮에 서너 시간은 볕을 쬐게 널어놔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제대로 햇볕에 말리지 않은 옷을 계속 입으면 감기나 다른 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니까요?”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말이죠, 저 무식한 놈들은 당장 춥지 않은 게 더 중요한 걸 어쩝니까?”
진짜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눅눅한 옷을 단순히 껴입기만 한다고 정말 따뜻하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일단 음식이라도 뜨거운 음식을 더 자주 내도록 하죠. 조리장에게 전달 좀 해주세요.”
“으음, 그러면 준비한 장작이 부족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자재를 태워서라도 일단 선원들부터 정상화시키죠. 뭐, 설마 딱 지금 상황에서 자재가 필요한 상황이 생기지는 않겠죠?”
갑판장님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보통 그런 생각을 할 때 문제가 생기죠.”
“…….”
잠시 후 조리장 비에론이 기침을 하면서 선교로 올라왔다.
“선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으힉, 거기서 말해요, 거기서!”
“쿨럭, 뜨거운 음식을 자주 내라고, 쿨럭쿨럭,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문제가 있나요?”
“자재를 태우기보다는, 쿨럭, 아침에 곡물죽을 많이 만들고 점심, 저녁은, 쿨럭, 데우기만 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면 장작이 덜 필요할까요?”
“쿨럭쿨럭, 매 끼니마다 뜨거운 요리를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쿨럭, 하지만 확실히 장작이 부족하기는 하겠지요.”
“일단 그렇게라도 진행을… 어휴, 그런데 조리장님 괜찮으시겠어요?”
“허허, 쿨럭쿨럭, 사실 요즘 전 지시만 하고 카드먼이 주로 요리합니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조심하시구요.”
그런데 카드먼이 누구더라?
***
내 조치가 도움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콧물을 흘리는 선원과, 기침하는 선원과, 끙끙거리며 화장실이나 겨우 가는 선원이 있었지만, 그럭저럭 배가 굴러갈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내 껌딱지도 건강을 되찾….
“선장니이임!”
“으앗, 콧물! 콧물! 오지 마!”
저 멀리서 코에 말간 콧물을 대롱대롱 매단 우르타가 달려왔다.
한참 달려오다가 내가 소리를 지르자 소매로 코를 쓱 훔친다.
물론 바닷바람을 계속 맞으며 코를 훔치다 보면 코가 얼얼해져서 콧물이 흐르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
그리고 선원이라는 인간들이 작업 중에 그런 사소한 일까지 하나씩 신경을 쓸 정도로 섬세하지 못하다.
그러니 콧물을 흘리다가 소매로 닦거나 바다에 ‘팽!’ 하고 풀어버리는 경우는 쉽게 볼 수 있다.
어떤 경우건 정말 비위생적이고 더러운 광경이지만, 원래 선원이 그리 깨끗하게 사는 직종은 아니라서 그럭저럭 어울린다.
그런데 얼굴이 멀끔한 우르타가 그러고 다니니까 뭔가 진짜 머리가 좀 모자란 동네 바보 같고 좀 그렇다.
그건 그렇고 저 녀석 그냥 놔두면 내 옷에 분명히 콧물을 뭍일 것 같다.
“왜, 왜? 거기서 말해!”
“여기 엄청 큰 고래가 있어!”
“고래?”
항해를 하다 보면 고래는 그리 보기 힘든 녀석들이 아니다.
물론 전문 포경선이 아닌 이상 사냥은 힘들지만, 돌고래는 물론 꽤 큰 여러 고래들을 볼 수 있다.
이 녀석들은 대부분 머리가 좋고 장난치는 것도 좋아해서 배가 지나가면 일부러 수면 위로 올라와서 선원들에게 장난을 걸고는 했다.
그리고 항해 중 많은 시간을 견시대에 올라가서 보내는 우르타에게 고래를 보는 것은 저렇게 달려올 정도로 큰 이벤트가 아니다.
그러니까, 보통 고래라면 말이지.
“저, 저게 뭐야….”
“맙소사, 저건….”
“저게 고래라고?”
“신이시여….”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일등항해사도, 이등항해사도, 심지어 갑판장님까지도 넋이 빠져서 수면 위로 드러난 거체를 바라보았다.
앞뒤로 40미터는 넘어 보이는 엄청난 길이, 점프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머리만 들었다 내렸을 뿐인데 배의 선수가 홀딱 젖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침로도 좀 틀어진 것 같다.
정신없이 초대형 고래를 바라보던 조타수가 황급하게 타륜을 돌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머리를 들었을 때 살짝 드러난 눈이 거의 미니 냉장고만 했으니, 얼마나 큰지 상상이 될 것이다.
다행히 동물이 아니라 괴수로 분류되어야 할 거대 고래는 자신의 덩치가 배에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우리 배에 접근하지도 않았고, 적당한 거리에서 유유히 배와 비슷한 속도로 한참을 달리다가 천천히 멀어져갔다.
“얼마 살지도 않았지만, 리버티 호 정도 크기의 중형 상선이 이렇게 초라해 보이기는 처음이군요.”
“세상에, 그 말도 안 되는 크기라니….”
“전 지금도 꿈을 꾸는 기분입니다….”
“거대 고래, 거대 문어, 거대 오징어, 거대 거북에 대한 전설과 소문은 많지. 하지만 그것을 직접 보았다는 놈들은 죄다 허풍쟁이인줄 알았는데, 정말 실존하는군. 경이로워.”
나는 감탄하는 갑판장님을 보고는 농담을 던졌다.
“솔직히 거대 문어나 거대 오징어는 거짓말 아니겠습니까? 보통 그런 것을 봤다는 놈들은 배가 공격당했다고 하는데, 저런 말도 안 되는 물리력으로 배가 공격당하면 생존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글쎄요? 만약 리버티 호에서 적당히 떨어진 배가 우리를 보았다면, 공격당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라? 말이 그렇게 되는 건가?
고래를 보면 행운이 깃든다는 미신이 진짜였던 것인지, 그냥 선원들에게 플라시보 효과(위약 효과)를 일으킨 것인지 몰라도 리버티 호를 휩쓸던 감기는 급속도로 힘을 잃었다.
며칠이 지나자 선원 중에 골골거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게 되었고, 비싼 자재를 장작으로 사용하는 참담한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
해도실에서 리버티 호의 현재 위치와 예상되는 남은 항해 일수를 체크하고 있는데, 다급한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이등항해사 발드가 머리를 들이밀고 급하게 말했다.
“선장님, 빨리 선교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발드는 비록 이등항해사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항해사로서의 경력은 리버티 호에서 가장 긴 베테랑이었다.
그런 그가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다급하게 보고하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해도를 팽개치고 급하게 선교로 향했다.
선교에는 삼등항해사 슬레어가 망원경으로 한쪽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슬레어 항해사, 보고.”
“네, 좌현 255도 지정한 미식별 선박, 여전히 리버티 호를 향해 접근 중입니다. 우리보다 확실히 빠릅니다.”
보고가 끝나자 슬레어는 절도 있게 내게 망원경을 내밀었다.
나는 목까지 치솟아 오르는 욕을 씹어 삼키며 망원경으로 슬레어가 보던 방향을 확인했다.
그곳에서는 무려 3 마스트의 슬루티 급으로 보이는 선박이 맹렬하게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슬루티 급은 고속 전투함으로 개발된 선박으로, 중형의 크기에 최대한 박아 넣은 3개의 마스트로 인해 화물 운송 효율은 나쁘지만, 그만큼 속도는 발군인 선박이다.
대부분 해군에서 사용하고, 일부 선박만 고속 화물 운송이나 연락선으로 사용되는, 나름 보기 드문 녀석이었다.
아, 이 배를 선호하는 한 부류가 더 있기는 하지, 바로 해적 놈들.
나는 슬레어에게 망원경을 다시 넘겨주고 빠르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삼등항해사는 계속 미식별 선박 주시해. 특이사항, 무장, 국적, 뭐든 알아내면 다 보고해!”
“네, 선장님!”
“이등항해사는 당장 갑판장과 포술장, 돌격대장 호출하고 바리케이트, 아니, 일등항해사에게 바리케이트 쌓으라고 전해.”
“갑판장과 포술장, 돌격대장은 이미 호출했습니다. 아, 저기 옵니다.”
말을 마친 발드는 절뚝이는 걸음으로 급히 선교를 떠났다.
그리고 반대로 헐레벌떡 선교로 올라온 갑판장님, 우르타, 네이선에게 나는 바로 명령을 전달했다.
“포술장, 당장 포문 열고 포격 준비. 적은 좌현 255도 방향 미식별 선박이다. 명령 떨어지면 바로 쏠 수 있도록 준비해!”
“네! 선장님!”
“그리고 갑판장은 지금 총원 전투배치 시키고 전투기 계양해! 지원요청 깃발도!”
“네! 선장님, 돌격대장은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좋아, 바로 움직여!”
모두가 분주히 뛰어나가자 나는 조타수를 밀쳐내고 직접 타륜을 잡았다.
“씨발, 하필이면 슬루티 급이야! 순풍 타면 무조건 잡히겠지? 살다 살다 일부러 역풍을 타기는 또 처음이군.”
물론 역풍이라고 해서 리버티 호가 저놈들보다 빠른 것은 아니다.
단지 따라잡히는 시간을 더 지연시켜줄 뿐.
하지만 상선 주제에 작정하고 쫓아오는 놈들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니까 일단 최대한 피해 봐야겠지.
나는 하필이면 조타수를 맡고 있다가 갑자기 밀려난 오펜에게 마지막 조치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오펜! 조리장에게 가서 이틀 치 식수와 하루치 식량만 제외하고 모두 당장 파기하라고 해! 그리고 이등항해사 찾아서 선적물…!”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황이 급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선적물을 다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그리고 놈들이 접근한 후에 선적물을 내다 버림으로써 그들의 약탈 의지를 약하게 하거나 추격을 늦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선적물은 신호 떨어지면 바로 파기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해! 무조건 내 명령, 내 명령이 있을 때 파기하라고! 알았지?!”
“네, 정확히 전달하겠습니다, 선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