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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47화 (147/420)

147화. 간발의 차이

리버티 호에 시시각각 가까워지던 미확인 선박은 결국 그 정체를 드러냈다.

메인 마스트 위에 달려 있는 쿠샤 왕국의 국적기를 슬레어가 확인한 것이다.

“쿠샤 왕국 국적기만 있다고? 해군기는 없고?”

“네, 쿠샤 왕국 고속 상선이나 연락선으로 추정됩니다.”

“정말?”

“그게….”

내 반문에 슬레어가 쭈뼛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자기 딴에도 지금 우리를 뒤쫓는 배의 행동이 너무 이상했으니까.

“국적기 정도야 뭐, 마음만 먹으면 구하지 못할 것도 없지. 계속 주시해. 아마 해적일 거다.”

“네! 알겠습니다!”

차라리 해군기를 달았다면 모르겠다.

해군 선박이라면 비상 검문이거나, 우리 배에 대한 제보가 들어왔다거나, 뭐, 그런 우리를 쫓아올 만한 여러 가지 경우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해적들이 여러 나라의 국적기를 달고 상선으로 위장해서 다닐지는 몰라도 해군으로 위장을 잘 하지 않는 이유는, 괜히 해군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뱃사람들의 자존심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해군(특히 장교 계급)의 자존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으니, 괜히 해군 위장을 했다가는 수배당하기 딱 좋았다.

결국 10여 분 후, 슬레어의 신음 같은 보고가 선교를 울렸다.

“쿠샤 왕국 선박, 깃발을 바꿨습니다! 졸리, 졸리 로저(해적기)입니다!”

“그럴 줄 알았지. 애초에 그냥 졸리 로저를 달고 올 것이지. 쳇.”

짐작대로 해적임이 확실해지자 괜히 볼멘소리로 혼잣말을 한 나는 선교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 질렀다.

“견시! 주변에 다른 선박 안 보여?!”

“현재 보이는 선박은 해적선 한 척 외에는 없습니다.”

“쯧! 거기! 포술장에게 적 해적선이 포격 범위 안에 들어오면 바로 쏴버리라고 전달해!”

“네, 선장님!”

지나가는 선원에게 포격 지시를 전달한 나는 부쩍 가까워진 해적선을 바라보며 승산을 가늠해봤다.

우리 쪽 인원은 나까지 포함해도 50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절반은 감기를 앓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알게 모르게 체력적 부담이 있을 것이 뻔했다.

그에 반해 해적선에 타고 있을 해적의 수는 한 70명은 되지 않을까?

아무리 전략 병기 네이선을 이용해도 쉬운 싸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전투 준비를 마치고 최종 점검을 할 때쯤, 해적선은 이미 포격 범위 안쪽으로 접근한 상태였다.

다만 집요하게 리버티 호의 선미에 붙어서 따라오고 있었기에, 양현에 현측포만 가지고 있는 리버티 호가 포격을 가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장님? 이 상태라면 결국 따라잡힐 때까지 우리는 대포 한 번 못 쏴볼 겁니다.”

“그렇다고 지금 방향을 돌리면….”

“뭘 기대하시는지는 알겠는데, 솔직히 다른 상선이 근처에 있더라도 전투에 합류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해군이라면 합류할지도 모르지만, 아시다시피 벨로키나 왕국은 쿠샤 왕국과 적대적 관계고, 이곳은 쿠샤 왕국의 영해죠.”

“그럼 갑판장님은 지금이라도 맞서 싸우는 게 옳다고 보세요?”

“승산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더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라고 봅니다.”

“일등항해사는 어떻게 생각해?”

“저는 마지막까지 전투를 회피하는 선장님의 선택이 옳은 것 같습니다. 솔직히 대포를 사용한다고 해도 고작 한 번에 세 발씩, 잘해봐야 세 번쯤 포격할 수 있을 텐데 고작 그 정도로는 범선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주기 힘듭니다.”

“그래, 상대방이 포격전을 받아주지 않는 이상 포격에는 한계가 있지.”

갑판장님이 이제 꽤나 가까워진 해적선을 물끄러미 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포격전이 벌어지면 그것도 나름대로 문제 같습니다만.”

해적선의 옆구리에는 무려 여덟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내가 어영부영 제대로 결정을 못 하는 사이에 결국 해적선은 100미터 안쪽까지 다가왔고, 더 이상은 포격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괜히 방향을 돌려서 포격 각을 만드려고 했다가는 대포를 쏘기 전에 저놈들이 달라붙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대기 중이던 전령 역할의 수습 선원을 시켜 포갑판에 있는 인원을 불러올리려는데, 견시가 외쳤다.

“우현 020도! 섬 뒤쪽에서 선박 출현! 갤리선입니다!”

저 멀리 작은 섬을 보면서도 설마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불길한 예감은 꼭 빗나가지 않는 법이다.

나는 눈앞이 순간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거리! 거리 얼마나 돼?!”

“거리 1500, 아니, 1300!”

섬이 너무 작아서 매복은 힘들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섬과 너무 가까이 침로를 잡은 것이 패착이었다.

자기들이 추격하면 역풍이 부는 방향으로 도망갈 것을 예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해적들의 매복은 훌륭하게 성공했다.

하긴, 우리 같은 규격 외 전투력(네이선)을 가진 상선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보니, 슬루티 한 척으로 해적질을 하기에는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입맛이 쓰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뒤에 따라오는 슬루티 급이 이상행동을 하자마자 먼저 두들겨 패버리는 쪽이 나았을 텐데 말이지.

하지만 후회는 나중에 해도 되는 거고, 일단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보자.

“조타수! 좌현 전타! 일단 이놈들 한쪽으로 몰아야 해. 양현에 떨어지면 합공 당한다! 거기 너, 포술장에게 우현에 새로운 해적선 나타난 거 알리고, 어느 쪽이건 포격 준비 되는대로 쏴버리라고 전해!”

전령을 맡은 수습 선원이 뛰어가는 것을 확인 한 배에 힘을 주고 소리쳤다.

“겨우 이 정도는 위기도 아냐! 걱정마라!”

선원들의 사기를 고려해서 짐짓 괜찮은 척 소리는 질렀지만, 사실 좀 불안했다.

얼핏 확인한 갤리선이 엄청 크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2:1이면 해적의 수가 분명히 100명 이상일 테니 이긴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선원이 죽어 나갈 것이 뻔했다.

***

첫 번째 포성이 울렸다.

그리고 우리의 의도를 알았는지, 우리 뒤쪽의 슬루티급 해적선은 우리의 좌현 쪽으로 붙기 위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좌현에 접현해서 우리의 기동력을 떨어뜨리면, 섬 뒤쪽에서 나타난 갤리선이 우현에 붙어서 잡아먹는다는 계획인 것 같았다.

하지만 기회를 포착한 우르타, 아니, 포술장님의 기막힌 타이밍 공격이 터졌다.

두 선박의 거리는 가장 짧은 곳이 대략 40m에 불과할 정도로 근접한 상태였기에 명중률이 높을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위치가 약간 뒤쪽이라 포격을 할 수 있는 각이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하지만 포술장은 거의 대포를 끝까지 움직여서(당연히 인력(人力)으로 그 무거운 대포의 위치를 틀었다는 말이다) 포격각 끄트머리에 해적선이 걸리자마자 쏴버렸던 것이다.

사이좋게 날아간 3발의 대포알은 아주 아름다운 파괴음을 내며 해적선을 두들겼다.

한 발은 선수를 두들겨서 박살 내며 서너 명의 해적을 바다에 다이빙시켰고, 한 발은 우현으로 파고 들어가 해적선에게 끔찍한 상처를 남겼다.

심지어 마지막 한 발은 우현 난간을 부수고 뒤쪽에 서 있던 해적들을 통과(?)해서 바다에 떨어졌다.

인간의 육체보다 단단한 쇳덩이가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빠른 속도로 지나갔으니, 그 경로상에 피보라가 몰아치는 것은 당연했다.

잘 쏘기는 했는데, 적의 기동력에는 전혀 피해를 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거리가 워낙 가까웠던 만큼, 포격이 끝나기 무섭게 해적선은 노골적으로 우리에게 접현하기 위한 기동을 펼쳤다.

그리고 결국 두 번째 포격이 가해지기 전에 양측의 쇠뇌 사격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사수로는 1티어에 해당하는 포 담당 인원들이 아직 포갑판에서 올라오지 못한 관계로 이등 항해사 지휘하에 예비인원이 사격을 가했는데, 딱히 명중률이 좋지는 않았다.

뭐, 저쪽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평소라면 한 번, 혹은 두 번쯤 일제사격을 더 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수들의 숙련도가 너무 안 좋았다.

어설픈 사수들이 허둥대며 엄폐해서 재장전하는 사이에 세심한 조절로 우리 옆에 붙은 해적선에서 줄 갈고리가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등 항해사에게! 장전 다 끝나고 대기, 놈들이 넘어올 때 마지막으로 일제사격 하라고 전달해!”

“네, 선장님!”

내 명령을 받은 수습 선원이 달려 나가자, 나는 바로 슬레어에게 물었다.

“갤리선은? 얼마나 따라붙었어?”

“700 정도 됩니다!”

“젠장, 금방 붙겠는데?”

그때 견시대에서 기쁨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010도, 남동쪽에 선단! 아니 함대 출현! 구성 선박 3척!”

“함대?!”

“네! 쿠샤 왕국 군함인 것 같습니다!”

견시수의 말을 이해한 선원 몇 명이 함성을 질렀고, 나머지는 따라서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해적선에서 날아오는 갈고리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해적질은 단순하게 전투에서 이긴다고 끝나지 않는다.

포로를 잡는다면 포로를 묶어서 창고에 가두는 작업이 필요하고, 선박을 나포한다면 배를 운용할 인원을 나누거나 예항 준비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 떠나서 포로도 안 잡고 나포도 안 한다면, 최소한 약탈물을 자기들의 배로 옮겨 싣는 과정이라도 필요하다.

해군으로 추정되는 함대의 위치는 상당히 멀고, 우리에게 접근하기까지 적어도 20분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단순하게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라면 몰라도, 뒤처리까지 하고 튈 수 있느냐 하면 그게 좀 애매해진다.

상선의 교역품이라는 것이 한 상자, 두 상자 이런 소량이 아니다 보니, 단순하게 교역품을 들어 옮기는 시간만 해도 상당한 것이다.

해적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허둥지둥하자 나는 바로 소리를 질렀다.

“이등항해사! 쏴! 지금 당장 쏴버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쪽에서 쿼럴이 날았고, 전과는 달리 몇 명의 해적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게 만드는 성과를 냈다.

그리고 거의 시간차 없이 이어진 포격.

이번에는 우현의 포대에서 세 발의 포탄이 날아갔고, 세 발 모두 갤리선의 우측 선수 근처에 떨어지며 물기둥을 만들었다.

“슬레어! 해군 함대 보고!”

“쿠샤 왕국 해군 확실합니다! 해군기 확인했습니다! 정정합니다! 함대 구성 총 5척입니다!”

“방향! 침로는? 이쪽이야?!”

“네, 이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 진짜 다행이다.

일단 해군이 근처에서 공격당하는 상선을 구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착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해군의 주적은 타국의 해군이지 해적 따위가 아니거든.

물론 해군의 임무 중에 자국 상선을 보호하는 것이 엄연히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냥 추가 서비스 같은 거다.

막말로 그게 주 업무면 해적 따위가 상선을 공격할 기회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자국 상선이 공격당하는 것을 보고도 무시하는 해군이야 없겠지만, 그게 타국 상선이라면 좀 애매해진다.

전쟁이 터지면 해당 국가의 상선을 공격하는 것도 해군의 임무 중 하나가 된다.

그런데 타국, 그것도 전쟁 상태는 아니지만 충분히 적대 관계인 국가의 상선이 해적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면?

영원한 비밀이라는 것은 없으니 대놓고 공격하지는 못하겠지만, 꼼수를 쓸 방법은 충분히 많다.

지금 당장 저들이 선수를 돌리기만 해도 해적들은 하던 일을 마저 하려고 할 테니까 말이다.

해적질이 끝난 다음에 해적들 뒤통수를 치던지, 다 털린 우리를 보면서 비웃던지 그건 알 바 아니고, 저들이 우리를 엿 먹일 수많은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쿠샤 왕국 해군, 교전기를 올렸습니다! 전투에 가세하려는 모양입니다!”

견시수가 소리를 질렀지만, 사실 이건 보고라기보다는 해적들에 대한 경고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철수 중이지만 말이다.

쇠뇌 일제사격을 당하고도 혼란에 빠져 반격할 엄두도 못 내던 해적선은 결국 몇 가닥 걸려있던 갈고리의 줄을 끊어버리고 황급하게 이탈하기 시작했다.

갤리선도 급선회하며 선수를 돌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추격할까요?”

“추격은 개뿔, 포술장에게 사람 보내서 포격 중지시켜. 포탄이랑 화약 아까워.”

“네, 선장님.”

어차피 지금 포 몇 방 쏜다고 저들이 항복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상금을 주는 것도 아니니까 괜한 곳에 돈을 쓸 필요는 없다.

화약이건 포탄이건 보통 비싸야지 말이야….

슬레어는 편안해진 얼굴로 자신이 직접 포갑판으로 내려갔고, 나는 뒷정리를 하고 있는 갑판장님에게 소리쳤다.

“갑판장님! 피해는요?!”

“곧 보고하겠습니다, 사망자는 없습니다!”

대충 봐도 사망자는 없어 보인다.

물론 팔에 쿼럴이 박힌 선원이 한 명 보이기는 하는데… 겨울이니까 잘만 치료하면 괜찮을 거야, 아마.

그나저나 벌써 두 번째로 쿠샤 왕국 해군에게 도움을 받은 건가? 이것 참… 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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