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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48화 (148/420)

148화. 이렇게 또 만난다고?

해적이 떠나간 후에도 해군과 우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신호기로 충분히 감사를 전하기에는 부족하니 우리가 다가가는 것은 그렇다고 하고, 저들이 계속 다가오는 것은 의외였다.

실제로 전투를 벌인 것도 아니니까 그냥 휑하고 가버릴 수 있다고도 생각했거든.

급한 일이 없거나, 감사의 마음이라고 쓰고 뇌물이라고 읽는 금품을 받을 생각이라거나 뭐, 그런 거겠지.

그래도 화물을 포기하거나 선원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치는 것보다는 싸게 먹히는 거다.

그럼, 뇌물 몇 푼쯤이야.

“선장님, 팔에 쿼럴이 박힌 놈 하나, 발목이 접질려서 못 걷는 놈 하나, 바리케이트 치우다가 손가락이 끼어서 부러진 놈이 하나, 발목 접질린 놈 돕다가 넘어져서 이마가 찢어진 놈 하나, 그 외에는 그냥 생채기입니다.”

“잠깐만, 왜 한 명 빼고는 다 비전투 부상인 거죠?”

“그래도 생채기 난 놈들 중의 두 놈은 쿼럴에 스쳤습니다.”

갑판장님이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리며 턱수염을 긁었다.

“하아, 다친 사람들 잘 좀 치료해 주시고, 다른 거 있나요?”

“저기 저 해군들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드렸지만 벨로키나와 쿠샤, 두 나라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도와준 사람들에게 인사도 안 하고 갈 수는 없잖아요? 괜히 찍히면 더 골치 아프니까.”

“그것도 그렇습니다. 해군에게 찍히면 어후… 언제 물귀신이 되도 안 이상하죠.”

갑판장님이 전직(?)의 트라우마가 남았는지 약간 노파심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들이 방금 전 그 해적들처럼 위장을 했다거나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배부터 그냥 누가 봐도 군함이었고, 5척이나 되는 그룹을 이루어서 해군을 사칭하는 정신 나간 해적 따위가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냥 해군 자체도 상선에게는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니기는 하다.

***

멈춰선 해군 함대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정선한 우리는 단정을 내렸다.

“갑판장님, 제가 없는 동안 배를 부탁드립니다. 일등항해사, 돌격대장은 나와 함께 가지.”

“선장님, 몇 명 더 데리고 가시죠?”

“아니요. 몇 명이 가더라도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요, 뭐. 노 저을 선원 네 명만 뽑아주세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보던 갑판장님의 눈가가 갑자기 파르르 떨리더니 휘청거렸다.

“어? 갑판장님? 왜 그러세요?”

“아, 으… 잠시….”

어지러운지 갑판장님은 난간을 붙잡으며 눈을 감았다.

단정에 탈 선원으로 뽑히기 싫어서 서로 눈치를 보던 선원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모여들었고, 감았던 눈을 뜬 갑판장님이 갑자기 가장 가까이에 있던 네 사람을 번개같이 지목했다.

“너, 너, 너, 너! 단정에 타!”

“아니! 갑자기 왜…!”

“맞고 탈 거냐, 그냥 탈 거냐? 돌아오면 100로스씩 주마.”

“고작 100로스는 너무한 거 아닙니까?”

“다음 출항에서 저녁 맥주 보급 두 잔씩 추가.”

갑판장님에게 반항하던 선원들은 내가 맥주 추가 보급을 선언하자,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선장의 말을 존중한다기보다는 괜히 버텨봐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갑판장님에게 한 대 맞고 일은 일대로 해야 할 테니, 그냥 입 다물고 주는 맥주를 마시기로 한 것이리라.

단정이 해군 기함으로 향하기 시작하자 나는 고개를 들어 리버티 호를 보았다.

우리가 내려온 우현 측에는 갑판장님을 위시한 승조원들이 모여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주머니 속에 들어간 갑판장님의 왼손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장님? 뭘 그렇게 보십니까?”

“아무것도 아냐, 그런데 왜?”

내가 돌아보며 묻자 네이선이 선원들을 힐끔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군함에 올라갑니까?”

“우리 셋만 올라가. 선원들은 단정에 있으라고 해.”

“선장님, 최소한의 호위는 필요합니다.”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의 네이선이 곤란하다는 듯 군함 위를 한 번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칼을 점검하는 척하며 다시 조용히 말했다.

“낌새가 이상하면 그냥 바다로 뛰세요. 뒤는 내가 지킬 테니.”

왠지 가슴이 간질간질하며 헛웃음이 나왔다.

심지어 이 자식 표정이 제법 비장하다.

“어이구, 힘 빼십시오, 돌격대장님. 그런 일 없으니까.”

“하지만 혹시라도….”

“별일 없다니까. 해군씩이나 돼서 뭘 얻어먹을 게 있다고 나를 죽이겠냐? 그냥 리버티 호를 다 털어버리면 몰라도.”

“그, 그런가?”

잠시 후 제독기가 게양된 군함의 옆구리에 붙은 우리는 먼저 단정을 배에 고정했다.

그리고 위에서 수병들이 내려주는 줄사다리를 잡고는 미묘한 표정의 선원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여기에서 대기해. 너희까지 올라갈 필요 없으니까.”

선원들의 표정이 약간 풀어지며 내게 고개를 까딱거렸고, 나는 줄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쿠샤 왕립 해군 12전대 전대장 라몬트 에이덤 준장이오. 셀레스타에 오르신 것을 환영하오.”

“리버티 호의 선장 리안입니다. 리버티 호의 승조원들을 대표해서 전대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내가 올라서기 무섭게 손을 내밀며 딱딱하게 인사했고, 나는 얼른 손을 맞잡으며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이 정도 규모의 전대면 사실 예전에 테일러가 이끌던 함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테일러의 당시 위상을 생각하면 허리를 90도로 접어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그쪽은 배도 다 신형이고 추가 건함 계획도 예정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테일러가 죽기 직전에 이끈 함대의 규모는 딱 이 정도가 아닌가?

내가 잠시 바닥을 보다가 다시 허리를 펴자, 이번에는 오른쪽에 선 50대의 남자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소, 리안 선장. 젊은 사람이 대단하군. 셀레스타의 함장, 제이멀 대령이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함장님.”

“별말씀을.”

제이멀 함장과 인사를 마치고 왼쪽으로 몸을 돌리자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셀레스타의 부함장, 미르바프 중령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안 선장님.”

“어, 어? 미르바프 중령?! 허…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반갑습니다, 미르바프 부함장님.”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되는군요. 그나저나 선장이라, 우리는 볼 때마다 직함이 바뀌는군요.”

“배를 타겠다고 하시는 것은 들었는데… 이렇게 볼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미르바프.

쿠샤 왕국 해군 대위였고, 마다카트 섬의 수비대 소속 내사과장이었으며, 나를 이용해 마다카트 섬의 반란을 진압한 재수 없는 인간이다.

왜 재수 없냐고? 내가 그때 이 자식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미끼 노릇하면서 죽을 뻔했거든.

그런데 뭐 볼라트의 배신에 대해 약간 힌트도 줬고, 나름 계산은 정확한 놈이라서 기회가 되면 그럭저럭 관계나 유지할 생각이었는데 그 사이에 꽤 거물이 되셨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미르바프를 알아본 네이선이 옆에서 기겁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얼떨떨한 기분을 겨우 수습하고 전대장인 라몬트 에이덤 제독(해군 장성은 제독의 호칭을 받는다)에게 시선을 돌리자, 흥미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보고 있던 그가 여전히 무뚝뚝하게 말했다.

“재미있군. 이미 아는 사이였나? 일단 자리를 옮기지. 손님에게 간단하게 다과라도 대접하는 게 예의일 테니.”

말을 마친 제독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앞장섰다.

귀족치고는 매너 있는 분이고, 군인 중에서도 되게 딱딱한 편에 해당하는 사람 같다.

물론 내 뒤에 선 네이선과 아인델프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작은 상선의 선장인 내게 먼저 악수를 권한 것만 해도 귀족치고는 엄청나게 친절한 거다.

***

라몬트 제독을 따라 자리를 옮긴 곳은 전대장실이었다.

셀레스타 자체가 최초 건조부터 전대 기함으로 건조되었는지, 함장실과 귀빈실이 있는 함미 상부 갑판 쪽에 전대장실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앉지.”

전대장실 안쪽의 회의용 테이블에 우리가 앉자, 기다렸다는 듯 노크 소리가 들리고 찻잔 여섯 개를 든 수병이 안으로 들어왔다.

“차를 준비했는데, 괜찮겠나?”

“목숨을 구해주신 것도 모자라 이런 귀한 것을! 전대장님 덕분에 저희가 호강을 하는군요. 감사합니다.”

나는 재빨리 일행들을 대표해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아인델프와 네이선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것이 보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원래 많이 굳어있어서 별로 티가 나지는 않는 편이었다.

향은 더 좋지만 거의 커피만큼 쓴 녹차라니, 뭔가 지구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혼종일 것 같지 않은가?

차를 접할 일이 없는 무식쟁이 선원들이 좋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아인델프는 예의상 몇 모금을 마시고, 네이선은 거의 입술만 축이는 수준으로 차를 식히고 있는데, 가만히 우리를 관찰하던 라몬트 제독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리안 선장, 어디 출신인가? 차를 마시는 폼이 평민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아, 평민입니다. 차는 어쩌다 보니 기회가 되어 몇 번 마셔 본 적이 있습니다.”

“흐음, 그렇군. 그래, 굳이 본 함에 방문해도 되냐고 물어본 이유는?”

뭐야? 이쪽에서 오라고 한 거 아냐?

수기 신호로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약간 오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니? 저희는 그런 적 없는데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물론 바쁘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목숨을 구함 받은 처지로서 그냥 수기 신호로 감사를 전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독님께 감사의 인사도 전하고 고생한 수병들에게 술이라도 한잔 돌리고 싶었습니다.”

“술을?”

라몬트 제독의 표정이 약간 불편해졌다.

우리가 직접 술을 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솔직히 배의 선창에 교역품으로 술이 잔뜩 실려 있는 상황이 아닌 이상에야, 다섯 척이나 되는 전투함의 승무원들에게 술을 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음이 그렇다는 거고, 저희가 지금 그만한 술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요. 그래서 여기 술값을….”

“감사 인사는 충분히 들었네. 수병들에 대한 것은 함장이 처리하도록 하지. 더 이상 용무가 없다면 난 일어나도 되겠나? 여기 부함장과 할 이야기도 있을 것 같은데.”

약간 표정이 풀어진 제독이 빈 잔을 살짝 보여주며 물었다.

말투는 영 아니올시다인데, 내용은 우리끼리 사담을 나누도록 자리를 비켜주겠다는 것 같다.

게다가 말이 좋아 수병들의 술값이지, 사실은 뇌물인데 그걸 함장에게 양보할 줄이야.

엄청난 귀족이라서 이런 푼돈은 눈에 차지도 않는 것일까?

그런데 말이 좀 이상하잖아.

여기는 전대장실이다.

전대장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면 어디를 가겠어?

“아닙니다, 전대장님. 저희가 일어서도록 하겠습니다.”

역시나 제이멀 함장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그 말을 받았고, 라몬트 제독은 어쩔 수 없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대답했다.

“나는 귀빈실에서 쉬어도 되는데 말이야, 하긴 자네들은 조금 불편하겠군.”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대장님.”

우리는 전대장에게 인사를 올리고, 함장과 부함장은 절도있게 경례를 한 뒤 차례대로 전대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적당히 함장실 방향으로 향하던 제이멀 함장이 웃은 얼굴로 물었다.

“리버티 호는 혹시 바흐카덴 항구로 향하는 중이었소?”

“네?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불편하게 여기서 이러지 말고 항구에서 보는 게 좋겠소. 그리고 이 술값은, 항구에서 수병들에게 직접 술을 사주는 쪽이 더 좋을 것 같군.”

함장은 내가 주었던 주머니를 고스란히 되돌려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아, 아닙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그리고 불편하다니요, 무슨 그런 말씀을!”

“허허, 선장. 뒤를 좀 보시오. 불편하지 않은 것은 선장뿐인 것 같군.”

내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깜짝 놀란 표정의 아인델프와 네이선이 보였다.

그렇지, 생각해보니 이놈들 죄다 경험 짧은 젊은이들이잖아.

다른 세상의 기억을 받은 내가 이상한 거지, 원래 이 나이 때는 생각과 기분이 얼굴에 어느 정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어쩌면 나도 드러날지도 모르지.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는 찰나, 미르바프가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리안 선장님, 그렇게 하시지요. 사실 군함이라는 곳이 민간인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 그럴까요. 미르바프 부함장님?”

“네. 함장님께서 이미 권하셨으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항구까지는 저희가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저희도 바흐카덴 항구가 목적지였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해군의 호위라니, 정말 깜짝 놀랄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 리버티 호가 벨로키나 왕국 소속인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 이유가 있나?

이들의 의도가 ‘가는 길이니까 어차피 같이 가자’라고 쉽게 생각하기에는 그동안 내가 겪은 일이 영 만만치 않다.

우리가 무슨 대형 상단이나 상회에 소속된 선박이면 그쪽과 용건이 있어서라고 이해하겠는데, 그것도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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