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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49화 (149/420)

149화. 선장의 무게

대충 수습이 끝나자 조함을 담당한 삼등항해사 슬레어를 제외한 모든 간부들이 선장실에 모였다.

나는 모여 있는 사람들 모두와 눈을 한 번씩 마주친 다음, 조금 민망하지만 사과의 말을 꺼냈다.

물론 이렇게 공식적으로 내 실책을 인정하면 선장으로서의 권위가 조금 실추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 전투를 찬찬히 되짚어보니 실수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선장은 배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이고, 선장에 대한 신뢰는 그의 판단이 대부분 옳다는 경험에 기반한다.

그래서 괜히 나에 대한 불신의 분위기가 생기기 전에 먼저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으음, 오늘 내 부족한 지휘와 판단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열심히 해줘서 고맙게 생각해. 앞으로는 이런 실수를… 응? 다들 표정이 왜 그래?”

나름대로 분위기를 잡고 사과를 하려는데, 왠지 모두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내가 말을 멈추자 선장실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고, 이를 참지 못한 갑판장이 괜한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크흠, 선장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를 못 하겠군요. 혹시 지시를 듣지 않은 사람을 질책하시려는 겁니까?”

내 잘못을 이야기하는데 왜 다른 사람이 잘못했냐는 말이 나오는 거야?

“아니, 난 어디까지나 내가 판단 실수를….”

“선장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급히 내 말을 끊은 갑판장님이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선장님의 판단은 크게 틀린 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아쉬웠던 부분을 굳이 이렇게 이야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갑판장님의 배려는 고마웠지만, 솔직히 이건 내가 아쉬운 게 아니고 그냥 틀린 것 아닌가?

“글쎄요, 애초에 슬루티 급 해적선을 피해 도망가기보다 맞서 싸웠다면 더 쉬운 전투를 벌였을 것이고, 교역품을 아끼지 말고 일찍 파기했다면 더 안전하게 해군의 도움을 받았을 겁니다. 식량과 식수도 너무 급하게 파기한 느낌이구요.”

내 말이 끝나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이등항해사 발드가 손을 들며 말했다.

“선장님, 제가 조금 더 먼저 바다에 나온 선배로서 말씀드리자면,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선택은 없습니다. 선장이 신이 아닌데 어떻게 미래까지 예측해서 판단하고 결정하겠습니까? 지금 말씀하시는 부분들은 어디까지나 결과를 놓고 보니 아쉽다는 것이지, 그게 옳은 것은 아니지요.”

아인델프가 말을 받았다.

“물론 선장님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쉽게 상황이 풀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결과를 보십시오. 압도적인 수의 해적들을 상대로 별 피해 없이 빠져나오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운이 좋아서 그런 거잖아.”

“운이 아닙니다. 정말 다른 선택을 했으면 결과가 지금보다 좋았을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과거에 ‘만약’은 필요 없는 법이니 당연히 확신은 못 한다.

내가 대답할 말이 궁해서 입을 다물자, 갑판장님이 다시 말을 받았다.

“물론 제 말대로 포격을 했으면 결과가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교역품을 포기했다면 다친 선원이 없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막말로 교역품을 버렸다면 이번 항해의 손해는 막심했을 것이고, 그런 상태로 지금처럼 해군의 도움을 받았다면 오히려 이를 두고 선장의 결정을 비난하는 녀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리버티 호는 상선이고, 당연히 전투는 최대한 피하고 손해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미덕 아닙니까?”

거기까지 말한 갑판장이 피식 웃으며 은근하게 말했다.

“누구나 겪는 과정입니다. 자신의 결정에 다수의 운명이 걸리는 중압감을 느낀다는 뜻이지요. 그것을 무시하라고는 못 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그 무게에 짓눌리지는 마십시오. 선장님은 충분히 훌륭한 선장입니다.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괜찮습니다.”

“아, 음, 그, 그래요. 그럼 뭐… 상황 파악부터 해 볼까요? 조리장?”

나는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갑판장님의 시선을 피하며 조리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칭찬이라던가 그런 건 왠지 조금 민망하다.

***

이후로 바흐카덴 항구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겨우 이틀거리이기도 했고, 무려 해군 분함대와 함께 가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원래대로라면 식량이 조금 부족했겠지만, 노련한 조리장이 식량을 굉장히 후하게 하루치 남기고 파기하는 바람에 오히려 선원들이 좋아했다.

원래 이럴 때 파기 1순위는 무겁고 싼 것, 2순위가 덜 무겁고 싼 것이다.

그러니까 남은 식재료들은 최대한 가볍고 비싼 것만 남았다는 뜻이다.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라고는 해도 한 푼이라도 더 비싼 식재료가 더 맛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양이 약간 부족한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항구에 도착한 후에도 해군 분함대와 함께 입항해서인지 입항 절차는 매우 쉽고 간단하게 끝났다.

쿠샤 왕국과 벨로키나 왕국의 관계 때문에 평소였다면 꽤나 까다로웠을 것 같지만, 감히 해군 함대와 함께 입항한 상선에게 까탈스럽게 굴 만큼 배짱 좋은 항구관리관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바흐카덴에서 딱히 뭔가를 교역할 생각이 아니고 단지 보급만 받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더 과정이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선장님, 현문 설치 완료했습니다. 며칠이나 기항하실 생각이십니까?”

“해군이랑 약속도 있고, 선원들과 약속한 것도 있으니 사흘 정도는 있어야겠네요.”

“그럼 그렇게 알고 당직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갑판장님, 이번에는 교역품이 계속 배에 있을 테니 당직자 좀 넉넉하게 배치해 주세요. 괜히 쓸데없는 일 생기지 않도록요.”

“걱정 마십시오.”

갑판장이 자리를 떠나자 차례를 기다리던 게론드가 다가와서 물었다.

“식량과 식수는 언제 채워 넣을까요? 아시다시피 당장 오늘 먹을 물과 음식도 없는 판이라….”

“뭐, 어차피 당직자들과 몇 명만 먹을 테니까 많이 필요 없지 않을까? 적당히 일부만 오늘 넣고, 항해에 필요한 양은 평소처럼 출항하기 전에 넣도록 하지.”

“혹시 모르니 곡물이랑 위스키 매입 가격을 한번 알아볼까요?”

“아, 그래. 관세까지 고려해서 회계사가 잘 판단하라고.”

“네, 그럼 이만.”

게론드까지 인사를 하고 함교를 떠나자, 멀리서 눈치를 보고 있던 네이선과 우르타가 달려왔다.

“일 끝났어?”

“이제 반말해도 되는 겁니까? 아니, 되는 거지?”

“왜, 왜?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난리야?”

“여기 그 돼지고기 튀김? 그거 맛있지 않았어?!”

“바흐카덴에 왔으면 진(gin)을 마셔줘야지!”

“미안하지만, 오늘은 너희끼리 가.”

“어?!”

“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는 우르타, 떨떠름한 표정으로 우르타를 보는 네이선.

이 녀석들은 내가 없으면 영 친하게 못 지낸다.

아니, 친하기는 한데, 뭐랄까… 서로 어색해 한다고 할까?

하지만 진짜 오늘은 안 된다.

“선장님, 준비 끝났습니다.”

“어, 아인델프. 이등항해사는?”

“곧 나올 겁니다. 바로 현문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래, 가자고.”

내가 두 사람을 무시한 채 아인델프와 선교를 떠나려고 하자, 우르타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왜 우리랑 같이 안 가?”

“아, 오늘 해군 놈들 술 사줘야 한다고 말했잖아. 벌써 까먹었어?”

“맞다…. 그랬지….”

우르타가 시무룩하게 물러서자, 이번에는 네이선이 나섰다.

“선장님, 저도 셀레스타에 승함했던 사람이니 저도 가야 하지 않을까요?”

틀린 말은 아닌데, 그냥 발드 항해사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솔직히 네이선은 무력 말고는 딱히 쓸모가 없잖아?

접대는 아무래도 팔팔한 청년보다는 능글맞은 중년이 더 낫지.

“위험한 일도 아닌데 뭘 굳이 네가 가? 그냥 쉬고 있어. 일등항해사랑 이등항해사와 함께 갈 거야.”

“아니, 왜 이등항해사를…?!”

“너는 가서 술만 엄청 마실 거 아냐? 차라리 이등항해사처럼 뭔가 정보라도 빼 올 수 있는 사람이 낫지.”

“그, 그런가? 알겠습니다….”

결국 네이선까지 물러섰고, 현문 앞에서 발드와 합류한 우리는 항구 안쪽의 선술집을 향했다.

그런데 항구 전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그렇고, 우리를 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영 심상치 않았다.

“뭐지? 우리가 벨로키나 왕국 국적선을 타고 와서 그러는 거야?”

내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발드가 경직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작게 대답했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봅니다. 물론 쿠샤 왕국에서 벨로키나 국적선이 약간 차별을 받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만, 이렇게 이상한 분위기는 처음 봅니다.”

“그럼 뭐가 문제지? 우리가 군함이랑 같이 들어와서?”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나는 반대쪽에서 따라오는 아인델프를 힐끗 보았지만, 이내 단념했다.

저놈은 나보다 경험이 더 일천하잖아, 차라리 갑판장님을 데리고 나올 걸 그랬다.

“일단 조금 서두르자. 그냥 미리 가서 기다리는 쪽이 더 낫겠어. 그편이 모양도 좋고 말이야. 뭔지 모르지만, 굉장히 기분이 더럽네.”

“네.”

“그러시죠.”

그렇게 발걸음을 재촉해서 도착한 술집은 꽤 규모가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수백 명을 수용할 정도의 크기는 아니고, 기껏 해봐야 백여 명을 수용할 정도의 크기였지만, 이곳을 고른 당사자가 제이멀 함장이니, 알아서 하겠지 뭐.

우리가 주인에게 미리 맥주를 준비하라고 당부하고 기다린 지 한 시간쯤 흐르자, 제이멀 함장을 필두로 수많은 해군 수병들이 술집으로 모여들었다.

술집 주인은 술을 많이 팔아서 신나고, 수병들은 공짜 술을 마셔서 신나고, 제이멀 함장은 라몬트 제독이 불참하면서 눈치 볼 사람이 없어서 신났다.

…물론 돈을 내야 하는 나는 별로 신나지 않았다.

제이멀 함장과 미르바프 부함장에게 수많은 장교들을 소개받았다.

함장도 있었고, 일등항해사도 있었고, 갑판사관도 있었고….

그런데 그게 한두 명이어야 기억도 하는 거지, 스무 명이 넘어가니까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더 기분 나쁜 것은 대부분의 장교들이 나를 소개받으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고맙다고 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사주는 술을 마시면서 저런 표정을 짓기도 쉽지 않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미르바프 중령님, 항구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항구에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닙니다, 그냥 전체적으로 활기가 좀 떨어진 것 같아서요. 조만간 대규모 선단이 출발하지 않습니까?”

“네, 그렇죠. 덕분에 저희도 조금 바쁘구요.”

“그런 것 치고는 뭐랄까, 항구에… 아닙니다, 그냥 제가 착각한 모양이군요.”

“흐음…. 뭐, 알겠습니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자, 제이멀 함장과 미르바프가 나를 한쪽으로 불러냈다.

“리안 선장, 우리 쪽에서 작은 부탁이 있소만….”

“네, 말씀하시지요, 함장님.”

“별것 아니기는 하오. 하지만 이게 우리가 굳이 항로를 이탈해가면서 리안 선장을 도운 이유기도 해서 말이지.”

그럼 그렇지.

굳이 이들이 우리를 도운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가 있다고 믿기에는 내가 겪은 일이 너무 많은 모양이다.

“목숨을 구함 받았는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구해진 것을 널리 알렸으면 좋겠소.”

“……네?”

“어, 이것 참, 말하기가 너무 민망하군. 자네가 대신 말하게.”

엉뚱한 말을 늘어놓고 얼굴이 벌겋게 변한(어쩌면 술 때문에 변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제이멀 함장이 양손을 드는 제스쳐를 취하며 한발 물러섰고, 미르바프가 할 수 없다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본국과 벨로키나 왕국이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 그렇죠.”

살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전쟁만 안 할 뿐 적대관계지, 이 사람아.

“하지만 본국도 그렇고 벨로키나 왕국도 그렇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해서인지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게 국가 간의 묘한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 보니, 그냥 화해 분위기로 전환하기는 그렇고, 뭔가 계기가 있었으면 하는 거죠.”

“아! 그래서?”

“꼭 이번 사건을 노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사실 본 항구에 함께 입항할 것을 권한 것도 같은 맥락이기는 합니다만….”

“그거야 저 같은 상인에게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군요. 정말 최대한 열심히 이 미담을 사방에 퍼트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리안 선장님.”

“젊은 사람이라 이해도 빠르고 좋군. 잘 부탁하겠소, 리안 선장.”

나는 두 사람과 크게 웃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하지만 말이지, 뭔가 냄새가 나지 않냐?

너무 공교롭잖아?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슬루티 급 선박을 탄 해적들, 묘하게 속도를 조절하는 것 같았단 말이지?

내막을 알아낸다고 해서 내게 좋을 것도 없으니 그냥 묻고 가겠지만, 왠지 기분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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