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중요한 사실을 깜빡했지 뭐야?
- 리버티 호 선교 -
어슴푸레 밝아오는 항구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선원이 가져다준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삼등항해사 슬레어에게 물었다.
“슬레어 항해사, 별일 없었어?”
“넵! 별일 없었습니다. 선장님.”
“거, 다행이네. 솔직히 무슨 일 있을 줄 알고 잠도 제대로 못 잤거든.”
“네에….”
뭔가 늘어지는 슬레어의 대답에 눈을 돌리니, 영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깜짝 놀라며 얼굴을 돌렸다.
“뭐! 왜! 내가 제대로 잔 거 같아?!”
“아, 아닙니다!”
응, 미안. 사실 잘 잤어. 쓸데없이 예리하긴.
나는 머쓱해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화제를 돌렸다.
“전달받은 내용도 없어? 아무 일 없었대?”
“전달사항은 아닙니다만….”
“어? 뭐가 있어?”
전혀 기대 안 했는데 뭐가 있기는 있었나보다.
“선장님이 들어가시고 나서 얼마 후에 해군 수병들이 와서 난장을 피우고 갔다고 합니다.”
“어? 해군?”
“네. 술에 취했는지 선장님께 고맙다고 전해달라면서 현문 앞에서 난리를 피웠다는군요.”
“현문? 앞에서만? 올라오지는 않았고?”
“네?
“술 취해서 배에 올라오지는 않았냐고.”
“그건 아닌 듯합니다. 그놈들도 일단 뱃놈들인데 한밤중에 허가 없이 선교를 넘어오는 게 문제가 될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글쎄, 만취 상태로 굳이 부두까지 와서 난동을 피울 정도의 사람들이 그 정도 분별력이 남아있다는 게 더 신기한데?
막말로 군함에 침입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상선이잖아.
심지어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선원이나 해군이나 그렇게 예의범절에 깍듯한 사람들도 아닌데 말이야.
“갑판장님은?”
“갑판장실에 있을 겁니다. 안 나왔어요.”
“알았어. 해가 떴으니 별일 없겠지만, 교대로 선교는 지키도록 해.”
***
잠시 후 갑판장실 앞에 선 나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갑판장님, 잠깐 들어가도 됩니까?”
“크흠, 선장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한 갑판장님은 안에서 부스럭거리더니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문을 살짝 열며 말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들어오시죠.”
나는 약간 초췌해 보이는 에른스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서며 가볍게 물었다.
“주무셨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뭐하셨어요?”
“방금 일어나서 나가려던 참입니다.”
“피곤하면 좀 쉬셔도 되잖아요. 필요한 일 있으면 그냥 네이선이나 우르타에게 시키시고요.”
“우르타 녀석은 밤새도록 견시대에 올라가 있느라 지금쯤 세상모르게 자고 있을 겁니다. 네이선도 마찬가지구요.”
“그래도 걔들은 젊으니까요.”
“허허, 늙었다고 무시하시는 겁니까?”
나는 살짝 충혈된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살짝 떠보았다.
“요즘 어디 아프세요?”
“늙으면 다 아픈 법입니다. 특히 날이 추워지니 이거야 원, 이제 슬슬 은퇴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쳇, 방금 늙었다고 무시하냐면서요?”
내 말에 허허로운 웃음을 짓던 에른스트는 좁은 탁자 위에 물 두 잔을 올려놓고 말을 돌렸다.
“그래, 아침 댓바람부터 굳이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뭡니까?”
“해적이 참 많죠?”
“앞뒤 없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요즘 해적이 많아진 것 같다고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아, 그랬죠. 흠…. 그런데 이번에는 좀 예외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우리가 습격받은 지역은 해적 제도(에스피온사 제도)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까요. 내해라고 보기에는 좀 힘들지요. 서해 항로 근처는 예전부터 해적들이 판을 치기로 유명한 곳이니.”
“그래도 얼마 전에 고드실카 호를 탈 때는 이 정도로 자주 해적을 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내 말에 에른스트가 크게 웃었다.
“선장님, 해적들도 가성비라는 것을 따집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고드실카 호 같은 소형 상선은 털어봐야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해적들도 압니다. 소형 상선을 몰 정도면 자금력도 뻔하고, 그런 자금력으로 살 수 있는 교역품도 뻔하죠. 지금의 리버티 호 정도가 해적들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입니다. 소형 상선보다 수입이 쏠쏠하고, 선단이나 대형 상선보다 털기는 쉬우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거기까지만 이야기하고 잠시 뜸을 들이던 갑판장님이 물잔을 다 비운 후에도 잠시 주저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이번 습격에 다른 내막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상황이 좀 그렇잖아요.”
“그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 늙은이의 감으로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우리 쪽 피해도 별로 없고, 괜히 해군이니 나라 간의 정치니, 외교니 하는 쪽에 얽히면 더러운 꼴을 보기 쉽습니다. 일전에 선장님과 왕녀, 그것도 결국 나라 간의 정치, 외교 문제 아닙니까? 고드실카 호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잊지 마십시오.”
“…….”
나는 대답을 보류한 채 반쯤 남은 물 잔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도 알고 있다.
괜히 이번 일에 더 깊게 얽히면 좋은 꼴을 보기 힘들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봐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폭풍에 휩쓸린 조각배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상태다.
갑판장님께는 말할 수 없지만, 고드실카 호 선장님도 결국 이미 사건에는 얽혔는데 모르는 척하겠다고 꿩 새끼마냥 바닥에 대가리 박고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수장된 것 아닌가.
“점심 먹고 네이선이 일어나면 뒷골목에 한 번 가보려고요.”
“갑자기 뒷골목은 왜 가려고 하십니까?”
“이미 사건에 휘말린 것 같은데, 정확하게 무슨 사건인지는 알아야 앞으로 대응을 할 것 아닙니까?”
“선장님.”
갑판장님이 갑자기 목소리를 진중하게 바꾸며 나를 불렀다.
“이대로 경계를 잘하다가 내일 빨리 이곳을 벗어나시죠. 그대로 켄자스 항구까지 가는 겁니다. 거기에서 며칠 푹 쉬다가, 보석 원석과 견과류, 찻잎 같은 것을 사서 바로 론, 아니, 델라 항구까지 가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갑판장님.”
“안 됩니다.”
“켄자스까지 가는 길에 또 습격을 당하면요?”
“차라리 돈을 내고 해군에 호위 요청을 하십시오. 그 부함장이라는 놈과 이미 친분도 있으시다면서요? 한두 척만 호위로 돌릴 수 있어도 해적 따위는 얼씬도 안 할 겁니다.”
갑판장님도 답답해서 하는 말이겠지.
내가 뭐라고 해군이 호위까지 해주겠나?
돈 한두 푼으로 해군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조만간 바흐카덴에서 서해 항로를 향하는 대규모 선단이 움직일 텐데 쿠샤 왕국의 해군이 그 일을 내팽개치고 날 도울 리도 만무했다.
“말도 안 된다는 거, 아시죠?”
“선장님, 답답하시겠지만 이런 일은 그냥 잊는 게 제일 좋은 겁니다.”
“쉬세요, 갑판장님.”
“휴, 이런 고집불통 같으니. 이제 선장이라고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나.”
“아이참, 왜 또 그러세요? 그냥 가서 개략적인 정보만 얻을 거예요. 최소한 무슨 일에 휘말렸는지는 알아야지요.”
잠시 팔짱을 끼고 나를 쏘아보던 갑판장님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좋다. 대신 갈 때는 꼭 나도 데리고 가거라.”
“쉬시라니까요.”
“시끄럽고, 그냥 가면 오늘부로 난 배에서 내릴 테니 알아서 해라.”
“확 그냥 해고해 버릴까 보다.”
“자신 있으면 해보시던가.”
***
항구로 나와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 나와 에른스트, 네이선, 우르타는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슬럼가로 향했다.
“이제 아예 대놓고 감시하네.”
“그러게 말이야.”
불쾌하다는 것을 팍팍 티 내며 네이선이 중얼거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타가 말을 받았다.
“원래 뒷골목이 그렇잖아. 처음 오는 것처럼 왜 이래?”
내가 가볍게 핀잔을 날리자, 네이선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 그리고 우리가 낯선 사람도 아니… 어라?”
“왜?”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가 바흐카덴의 뒷골목을 몇 번 와봤다고는 하지만, 설마 뒷골목의 잭들이 모두 우리를 알고 있, 아하?!
“아, 그러고 보니 여기 발레아스 아저씨네 구역이었지?”
“응, 그 붉은 전갈파인가 그놈들이 여기 휘어잡았다고 하지 않았어?”
“우리 걔들이랑 별로 안 친하지 않아?”
고작 안 친한 정도겠냐, 발레아스 아저씨랑 매일 으르렁거리던 놈들인데?
“씨발,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고 있었지?”
내가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자, 갑판장님이 내 얼굴을 힐끔 보면서 물었다.
“뭐냐? 발레아스 이야기는 뭐야?”
“갑판장님, 일단 배로 돌아가죠. 가서 이야기해요.”
우리는 허겁지겁, 하지만 서두른다는 것을 최대한 숨기면서 골목을 거꾸로 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한 것처럼,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여어, 리안이었지? 오랜만이야?”
“누구세요? 전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만?”
낯익은 잭이 건들거리며 길을 막고 내게 아는 척을 했다.
잽싸게 주변을 둘러보니 앞은 셋, 뒤는 넷, 그리고 오른쪽 골목에 셋, 왼쪽 골목에 둘. 총 12명이 어느새 우리가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점유하고 있었다.
1초의 망설임 없이 내 이름을 부정했지만, 잭은 오히려 기분이 더 나빴던 모양이다.
“너, 너! 너는 자존심도 없냐! 그 옆에 그 덩치 큰 놈! 옆에 꺼벙한 놈! 내가 너희를 못 알아볼 것 같아?!”
으음, 맞아. 나 같아도 내 어깨에 바람구멍 냈던 놈 얼굴을 잊지는 않을 것 같긴 해.
“이봐, 잭.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봐서 비키는 게 어때?”
갑자기 갑판장님이 한발 나서며 점잖게 타이르셨다.
이 노인네가 노망이 났나, 자기가 무슨 암흑계 보스라도 되는 줄 아시는 거야?
그리고 놀랍지 않게도, 잭은 노망난 할아범을 알아보지 못했다.
“뭐? 늙은이가 누군데? 거, 손 안 대도 곧 땅속으로 들어가셔야 할 것 같은데, 명 재촉하지 말고 뒤로 빠져 있어.”
당연한 대답이었지만 그게 나름 충격이었는지 갑판장님은 인자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대로 동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기요, 아저씨. 저희가 진짜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런데 그냥 좀 비켜주시죠. 특별히 여기에 주머니는 놓고 갈게요.”
주머니에 꽤나 거금이 들어있기는 한데, 괜히 뒷골목에서 어둠의 자식들이랑 싸우는 것보다는 나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고작 12명이지만, 싸움이 시작되면 어디선가 너댓 배쯤 몰려올 거거든.
“고작 주머니? 그것 말고 네놈 모가지를 놓고 가라. 아니지, 네놈은 혀와 오른쪽 손모가지로 용서해줄 수도 있다.”
애석하지만 이 세계에서 혀를 잘리는 것은 물론, 손모가지만 잘려도 죽을 확률이 50%가 넘는다.
한 마디로 목을 놓고 가라는 말이랑 손목을 놓고 가라는 말이랑 의미가 거의 같다는 거지.
“네이선, 앞! 내가 뒤! 갑판장님은 네이선에게 나가는 길 좀 알려줘요!”
내가 기습적으로 외치자 네이선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마치 용수철 인간이 된 듯한 격한 움직임이었다.
10m 정도의 공간을 순간적으로 달려 나와 칼을 휘두르는 네이선에게 대응하려면 인간을 초월한 반사 신경이 필요했다.
그리고 잭들에게 그런 반사 신경이 있을 리가 없었다.
“으앗?!”
낯익은 잭은 괜히 앞에서 건들거리다가 외마디 비명만 남긴 채 목덜미에 칼이 박혔고, 남은 두 잭 중 한 명도 허둥지둥 칼을 뽑다가 팔과 허리에 칼침을 맞고 비명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기적적으로 한 번의 칼질을 막았지만, 두 번째 칼질에… 미안, 못 봤다.
아니, 볼 수가 없었던 게, 잭의 비명을 신호로 좌, 우, 뒤에 있던 잭들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눈앞에 검광 번쩍거려서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 씨, 이럴 줄 알았으면 칼질 연습 좀 더 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