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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53화 (153/420)

153화. 뒷골목의 케일린

“으히히힉!”

아니, 웃기려고 이런 감탄사를 내는 게 아니다.

누구라도 자기 눈앞 3cm 정도 차이를 두고 시퍼런 날붙이가 지나가면 이런 기묘한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그 감탄사를 제대로 끝내기도 전에 다른 칼이 날아 들어온다는 거다.

그걸 또 막아내거나 피하면 공격할 기회 따위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또다시 다른 칼을 쳐내기에 급급해지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실력으로 세 명은 좀 무리다.

일반적으로 무기의 길이가 길다는 것은 전투의 유리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날의 길이가 20cm 정도에 불과한 단검이나 단도를 든 녀석들보다 60cm짜리 커틀라스를 든 내가 더 유리해야 하는데….

여기가 좁은 골목길인데다가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공방이다 보니 짧은 단도가 더 위협적이다.

반대로 골목길이 좁아서 내게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녀석이 둘이라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으아악!”

뒤쪽에서 다시 비명이 울렸다.

목소리가 생소한 것을 보니 네이선에게 또 한 놈이 전투 불능에 빠진 것 같다.

나는 날아오는 단도를 힘껏 쳐내며 소리쳤다.

“네이선! 여기 좀 도와줘!”

용케 무기를 놓치지는 않았지만, 손에 충격이 상당한지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움켜쥔 녀석과 내 빈틈을 공격하려던 녀석들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야 뒤돌아 서 있으니 안 보이지만, 나를 상대하던 녀석들은 네이선의 활약상을 안 볼 수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네이선이 누군지는 몰라도 대충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지는 알 수 있을 터, 솔직히 좀 쫄릴 거다.

내가 잠깐의 틈을 이용해 두어 발 뒤로 물러서자 익숙한 등이 맞닿는다.

“으아아, 리안, 나 더 못 버티겠는데?”

조그맣게 속삭이는 우르타.

나도 버티기 힘들었으니 나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우르타가 여태까지 버틴 것만도 대단한 거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네이선이 전투 시작과 동시에 대가리를 쳐버려서 그런지 놈들의 기세도 그렇고 움직임이 영 시원치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눈치만 보고 얼른 달려들지 않고 있지 않은가?

“크흑!”

“앞이 뚫렸다. 셋 하면 뛰어.”

“네?”

“셋!”

상대하던 녀석 중 한 녀석의 팔을 베어버린 갑판장님이 빠르게 중얼거리고는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런 시부럴. 바로 셋을 세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법도냐?

하지만 나는 일단 불만을 접어두고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나와 우르타가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네이선이 오히려 뒤로 한 발 나서며 칼을 크게 휘둘렀다.

쨍!

“크헉!”

짤그랑!

힐끔 뒤를 돌아보니 바닥에 단검 두 개가 떨어져 있고, 한 놈은 핏물이 흥건한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설마 한 칼에 두 사람을 벤 것은 아니겠지?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무기를 쥔 잭들이 튀어나왔다.

몇 놈이야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러다 보면 시간이 걸리고, 그러면 또 포위되는 거다.

그렇게는 끝이 안 난다.

인간의 체력은 한계가 있고, 특히나 갑판장님은 말씀은 안 하셔도 나이를 숨길 수는 없는지 금방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문제는 그렇게 자꾸 방향을 틀다 보니 골목길을 벗어나는 게 점점 요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커브를 틀며 뒤를 확인하니 네이선의 견제 때문인지 우리 뒤로 몇 미터나 떨어져서 놈들이 쫓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헥헥, 갑판장님, 어떻게 하죠?!”

“헉헉헉, 이, 일단, 버, 벗어나야지! 헉헉.”

“아니, 헥헥, 그러니까, 어떻게요?!”

그렇게 코너를 돌아 몇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눈앞에 기묘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세 사람과 복면을 쓴 한 사람.

심지어 그 사람은 우리 쪽을 향해 쇠뇌를 조준하고 있었다.

“으허헛!”

“엎드려요!”

나와 우르타가 제대로 멈추지도 못하고 바닥에 엎어지듯이 넘어지자, 잠시 후 머리 위로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답답한 숨소리와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해요! 이쪽으로!”

“에에?”

“죽고 싶으면 그대로 있구요!”

급한 대로 머리를 굴려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뒷골목을 빠져나가기 전에 누구 하나 죽어 나갈 판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이 상황부터 타개하는 쪽이 옳은 거다.

그리고 딱 봐도 그거잖아. 그, 조직 간의 항쟁 같은 거?

저쪽에서 우리를 죽여서 이득을 본다면, 이쪽은 어떻게든 우리를 살려서 놈들이 이득 보는 걸 막으려고 하지 않겠어?

“따라가자!”

“어떻게 믿어?!”

“이렇게 쫓기는 것보다는 나을 것 아냐!”

나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한쪽의 좁은 골목으로 몸을 날린 남자를 뒤쫓아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르타도, 갑판장님도 나를 따라오는 것 같은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이선, 어? 설마 네이선이 맞은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몇 개의 골목을 지나쳤을까?

나 역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갑판장님은 거의 발을 질질 끌고 움직일 때쯤 우리는 겨우 멈춰 설 수 있었다.

***

“여기가 어디입니까?”

“우리가 누구인지부터 물어보는 게 순서 아닐까요?”

“그거야 뭐, 대충 짐작이 되고….”

“호, 그래요?”

내 앞에 앉아있는 젊은 여자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이제 잘해봐야 20대 초중반이나 되었을까?

뒷골목 조직에 이런 묘령의 여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여자가 이렇게 조직을 대표해서 말하는 자리에 앉아있는 경우는 또 처음이다.

“여기는 우리 세 번째, 아니, 두 번째 아지트. 남은 아지트가 몇 개 안 되지만 말이죠.”

“말 못 할 만하군.”

“그래서, 언제 할 거예요?”

“뭘 말이오?”

“고맙다는 말이요.”

“하… 도와달라고 한 적 없소만?”

어디서 날로 엮으시려고?

여기에서 고맙다고 하면 그대로 엮이는 거다.

설마 이놈들이 우리가 불쌍해서 구해줬겠어?

다 우리를 구하는 쪽이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니까 구해준 거다.

“대충 보아하니 저쪽 조직과 심각한 문제가 있는 모양인데, 그냥 저놈들 행사를 방해하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니오? 대충 그쪽 이득은 다 챙긴 것 같으니 우리는 이만 놓아주시오.”

“흐음, 눈치가 꽤 빠르네요?”

“매번 뒤통수만 맞고 다니다보니 조금씩 늘고 있는 중이오.”

“쉽게 맞고 다닐 것 같지는 않은데, 뭐. 좋아요. 가세요.”

“…응? 진심이오?”

“물론이죠.”

그녀는 거짓이 아니라는 듯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에 있던 문까지 직접 열어주었다.

“안 가요? 이대로 나가면 큰길까지 안내할 사람이 있을 거예요.”

이상하네? 이렇게 쉽게 보내줄 리가 없는데?

하다못해 목숨 값이라고 돈이라도 뜯어내야 뒷골목 놈들인데 말이다.

우르타는 아무런 생각 없이 나를 따라 일어섰고, 그 뒤로 네이선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계하며 따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따라오던 갑판장님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갑판장님?”

“……그래, 기억이 나는군. 케일린… 맞지? 꼬맹이가 많이 컸어.”

“후후, 아저씨. 알아보실 줄은 몰랐어요. 그때보다는 저 많이 예뻐졌는데.”

“허허허, 예뻐졌구나. 그런데 왜 네가?”

이건 또 무슨 전개람?

우리가 의문에 찬 눈빛으로 갑판장님을 바라보자 갑판장님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희는 잘 모를 수도 있겠군. 인사해라. 케일린이라고, 발레아스의 딸이다.”

“으에엑?!”

“으헉!”

“뭐요?!”

누구의 딸이라고? 무슨 산도둑 같은 아저씨 밑에서 저런 딸이 나와?

“리안 씨? 저는 몇 번 봤는데 기억이 안 나시나 봐요.”

“아, 음… 케일린 양? 제가 기억력이 그리 좋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녜요, 어차피 서로 인사한 것도 아니고, 제가 지나가면서 본 것뿐이니까요.”

“그럼, 혹시 발레아스 아저씨와의 관계 때문에 저희를?”

“호호호, 그럴까요?”

아니, 그렇기야 하겠어?

솔직히 이 자리에 발레아스 아저씨가 있다고 해도 다른 조직과의 불화를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를 구출했을지 확신이 안 서는데, 그 딸이라면 뭐….

“그냥 해본 말입니다. 혹시 바라시는 게 있습니까?”

“뭐, 바란다기보다는 알려드릴 게 있어요.”

“뭡니까?”

“조금은 부드러워도 될 텐데.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꼭 그렇게 말해야 돼요?”

“글쎄요, 케일린 양. 제가 발레아스 아저씨와 약간의 친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게 케일린 양이 제게 호의를 베풀 이유가 되지는 못하죠. 솔직히 이게 호의일지, 악의일지, 아니면 그냥 이용하는 것일지 잘 모르겠네요.”

냉정한 내 말에 살짝 얼굴이 굳은 그녀는 몸을 뒤로 빼며 팔짱을 꼈다.

팔에 눌린 가슴 윗부분이 도드라지며 순간적으로 내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나는 빠르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물론 악의까지라고는 생각 안 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호의라고 믿기는 힘든 것도 사실이죠.”

“흐응, 좋아요. 뭐… 우리 같은 밑바닥들을 믿기 힘들다는 것은 이해해요. 하지만 진짜 당신이 살아서 이 항구를 벗어나기만 해도 우리에게는 꽤 도움이 되니까 호의라고 생각해도 되요.”

잠시 투명한 그녀의 눈을 보며 진위를 가늠하던 나는 곧 깨끗하게 포기했다.

눈으로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건 보통 완전히 초짜들에게나 통하는 거지, 어느 정도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 안 통한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좋습니다. 알려주실 내용이 뭡니까?”

“해군 쪽에서 대충 이야기는 들었죠? 이 나라와 벨로키나 왕국과의 문제에 대해서.”

“네, 우호 분위기를 만들려고 한다더군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죠. 아무래도 벨로키나가 일레드와 한 판 붙으려는 생각인 것 같으니까요.”

“아….”

“습격은 왜 당했을까요?”

“뭐, 저쪽도 제 얼굴 아는 놈들이 좀 되거든요. 발레아스 아저씨랑 친하게 지내면서 사고를 좀 쳤으니.”

“풉, 진짜 그런 이유?”

“그게 아니라면….”

“이봐요, 리안 선장님. 당신 말대로 저놈들이 리안 씨에게 유감이 많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빠가 여기를 포기한 이상 당신은 잠재적인 새로운 고객이에요. 굳이 당신을 죽여서 좋을 게 없다는 거죠. 심지어 이쪽, 실력이 어마어마하던데요?”

케일린의 시선이 네이선에게 가서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갑자기 자신을 향하자 약간 당황하던 네이선은 곧 표정을 다잡으며 도전적인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래봐야 이미 하나도 안 무섭다 이 자식아….

“솔직히 놀랐어요. 우리도 정보를 너무 늦게 입수해서 한둘은 죽을 줄 알았거든요. 실력이…어후, 혼자서 다섯 정도는 눕힌 것 같던데.”

“일곱이오.”

“아, 네…. 대, 대단하네요.”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급하게 말을 꺼냈다.

“그럼 놈들이 우리를 노린 이유가 뭡니까? 그 말을 해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간단해요. 붉은 전갈 놈들, 치안관과 아주 끈끈한 관계거든요. 그리고 치안관은 두 나라의 평화를 원하지 않아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치안관의 뒷배인 니콜라 데시마 남작이 원하지 않는 것이겠지만요.”

“평화를 원치 않다니… 굳이 왜? 혹시 군부에서 세력이 강하거나 군납을 하는 사람입니까? 그 남작이라는 사람.”

“호호, 재미있는 발상이네요. 애석하지만 아니에요. 그냥 친일레드파일뿐이죠.”

“친일레드파라….”

“쿠샤 왕국이 계속 긴장 관계를 유지해줘야 벨로키나 왕국이 일레드로 눈을 못 돌리니까요.”

“허허허,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이라니요? 무려 국가 간의 이해관계라구요. 최소한 일개 상선의 선장보다는 중요한 일이죠.”

굳이 그렇게까지 말을 해야 하나?

역시 뒷골목 출신답게 웃으면서 사람을 말로 죽이는 재주가 있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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