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54화 (154/420)

154화. 돈이 필요한 이유

아지트를 나와서 케일린과 두 명의 잭을 따라 골목을 이리저리 돌다 보니 어느새 큰길에 도착해 있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출항한 다음에도 긴장을 늦추지 마세요. 치안관의 힘은 고작 이 항구에밖에 못 미치지만, 남작이라면 용병이나 해적선을 부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고맙습니다. 케일린 양. 그보다….”

“묻지 마시죠, 그냥.”

“으음, 질문이 뭔지 모르실 텐데?”

“왜 아빠를 안 따라갔냐고 물으시려는 거죠?”

“어, 음, 그렇습니다.”

“그건 다음에 만나면 알려드리죠. 잘 가요, 리안 씨.”

몇 번이나 물어보려다가 실패한 질문을 어렵게 꺼냈지만,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하기도 전에 케일린과 잭들은 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한바탕 활극을 펼친 다음이라 엄청난 피로감이 엄습했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상황은 아니었다.

최소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리버티 호 근처까지는 가야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겠지.

그렇게 억지로 주변을 경계하며 배로 돌아가는데, 어느 순간 또 우리를 뒤따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나마 큰길에서 칼질할 정도로 미친놈들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시선을 느낀 갑판장님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미치겠군. 도둑을 때려잡아야 할 치안관이 도둑놈들의 수괴라고?”

“갑판장님, 쉿쉿! 그래도 아직 마지막 선은 안 넘었잖아요.”

“허허허….”

바흐카덴이 어디 시골 동네도 아니고, 무려 대형 교역항이다.

치안에 관련한 부분이 상당히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게, 대로에서 난투극에 공공연한 살인까지 벌어진다면 그 항구에 어떤 선원이 오고 싶겠냐고?

만약 선장들이 이익 때문에 온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항구의 경제를 굴리는 선원들의 소비는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구나 목숨은 하나뿐이니 말이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우르타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이상하게 꼬이기는 했지만 결국 목적은 달성했네?”

“어…? 그렇게 되나?”

네이선이 멍청하게 머리를 긁으며 동의했다.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으며 녀석들에게 쏘아붙였다.

“목적을 달성하면 뭐 하냐, 문제는 더 커졌는데.”

“그래도 모르고 있다가 당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 그렇기는 하지.”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기는 하다.

아, 진짜 미르바프에게 도움이라도 요청해야 하나?

웬만하면 그 사람이랑 계속 엮이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야.

***

무사히 리버티 호에 도착한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몸을 일으킨 나는 몇몇 사람을 호출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장님?”

아인델프가 내가 내어준 음료를 마시다 말고 네이선을 힐끔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해군에 호위를 요청해야겠어.”

내 말이 끝나자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아인델프가 곧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대했다.

“설마 쿠샤 왕국 해군에 말입니까? 응할 리가 없습니다. 선장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고작 선장님의 얄팍한 친분 정도로 움직일 녀석들이 아닙니다. 아니, 그보다 그걸 모르시지 않으실 텐데, 왜…?”

“일등 항해사 말이 맞아. 원래대로라면 고작 중대형 상선 한 척 따위, 그것도 타국, 심지어 적대국의 상선을 호위하는 해군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우리가 그놈들이 벌인 일 때문에 위협을 겪고 있다면 다르지.”

“네? 그게 무슨?”

“선원들에게 소문 안 돌게 입조심하고….”

나는 아인델프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히 이야기해 주었다.

“으음, 그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면 해군 측에서도 뭔가 대응책을 내놓기는 하겠군요.”

“그래서 일단 미르바프 중령을 찾아가려고.”

“언제 가실 겁니까?”

“지금.”

“아, 그럼 준비를 하겠습니다. 일단 부탁하는 입장이니 선물 정도는 필요할 겁니다.”

“회계사한테 적당히 둘러대고 주머니 하나 만들어 와. 그리고 돌격대장.”

“네, 선장님.”

“혹시 모르니까 호위 인원 준비시켜. 과하지 않게 한 서너 명만.”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은 네이선이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너무 적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분명히 이전보다 더 강한 전력으로 덤벼들 텐데요.”

“아니야, 어차피 큰길로 해서 해군 계류지로 갈 거야. 치안관이 미친 게 아니라면 이번에는 손대기 힘들걸? 차라리 남는 인원들에게 배의 경계나 강화하라고 해. 배에다 장난질 치면 그게 더 큰 일이니까.”

“아, 알겠습니다.”

“일등항해사도 이등항해사에게 경계에 만전을 기하라고 다시 한번 당부하고.”

***

붉게 물은 노을을 배경으로 일행을 이끌고 해군 계류지에 다가가자, 경계 근무를 서던 병사들이 우리를 막아섰다.

“정지! 여기는 군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불가능한 곳입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셀레스타의 부함장인 미르바프 중령을 불러주실 수 있습니까? 리버티 호의 선장 리안이라고 하면 알 겁니다.”

“리버티 호라면….”

병사들은 리버티 호를 알고 있는지 자기들끼리 몇 번 눈빛을 주고받더니 한 사람이 약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는 약속이 된 것이 아니라면 불러드릴 수 없습니다만, 이번만 특별히 불러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약속 없이 찾아오시면 안 됩니다.”

“아, 미안합니다. 꼭 좀 부탁드리죠.”

병사 중의 한 명이 안쪽으로 뛰어갔고, 우리는 뻘쭘하게 병사들과 함께 멀뚱멀뚱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0분가량이 흐르고, 뛰어갔던 병사를 앞세우고 미르바프가 다가왔다.

“리안 선장님?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미르바프 중령님, 실례인 것은 압니다만 사안이 심각해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음, 일단 자리를 옮기시죠.”

미르바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작은 건물이었다.

건물에 도착하자 자연스럽게 문을 연 미르바프가 우리를 보더니 살짝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일행 좀 많으시군요. 조금 좁을 것 같은데….”

“아, 여기 일등 항해사만 같이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자 선원들을 한번 훑어본 미르바프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건물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들어가시죠. 지금은 비어있는 건물이니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네, 그럼 너희는 밖에서 대기해. 돌격대장도 선원들과 함께 대기하고.”

나는 네이선과 선원들에게 밖에서 대기하라고 명한 뒤, 아인델프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여간 미르바프 이 사람은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다.

지금도 우리 일행이 충분히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이렇게 좁은 곳으로 안내한 것이 뻔하다.

자신에게 물리적 위협이 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것이거나, 우리 쪽의 반응을 보며 사안에 대한 단서를 얻으려는 것이겠지.

하여튼 건물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약간 먼지가 쌓인 작은 테이블을 두고 잡동사니들을 대충 쌓아 만든 임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선장님이 직접 이렇게 오실 정도면 꽤 큰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무슨 일입니까?”

“사실 오늘 낮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설명을 다 마치자 미르바프가 심각한 표정을 연기하며 말했다.

“그것참 큰일이군요. 하지만 전 일개 중령에 불과합니다.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셔도 도와드릴 방법이 없네요.”

나는 얼굴색도 변하지 않는 그의 연기력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상황을 대충 알고 보니 어제의 해군 난동부터 이상하다.

아마 미르바프는 내가 말한 바흐카덴의 상황에 대해서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까 리버티 호에 치안관의 부하들이 장난을 치기 전에 해군을 보내 견제한 것이겠지.

그런데 지금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라니.

아, 명령을 내린 사람은 미르바프가 아닐 수도 있긴 하지만, 내 감은 이 남자가 반드시 연관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아쉬운 건 우리 쪽이니 어쩔 수 없다, 일단 살아남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그래서 무리한 부탁인 줄은 알지만… 켄자스 항구까지, 아니, 최소한 쿠샤 왕국의 영해를 벗어날 때까지 만이라도 해군의 호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장님, 상황이 곤란하신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방금 말한 것처럼 저는 일개 중령, 함장도 아니고 부함장에 불과합니다. 군의 기동에 관해서는 제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 평범한 일개 부함장이 함대의 작전을 감히 결정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고작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어젯밤 파티에서도 느꼈지만, 그를 대하는 다른 배의 함장, 부함장들의 태도부터 달랐으니까.

내 예상대로라면 그의 발언력은 12전대 기함의 함장이자 그의 직속상관인 제이멀 대령과 비슷하거나 더 높을 거다.

“중령님, 잘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리버티 호가 쿠샤 왕국의 영해에서 공격당하거나 실종된다면 벨로키나 왕국과의 화해 분위기가 제대로 조성되겠습니까?”

“흠,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상선이 해적에게 공격당하는 것은 평소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 아닙니까? 그리고 정보의 출처부터가 저는 좀 의심스럽습니다만.”

“출처는 둘째치고 저희가 공격당한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바다 위에서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거죠. 그리고 리버티 호가 누구에게 공격당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단 사건이 터지고 나면 중령님과 뜻이 다른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중령님의 계획에 재를 뿌리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그런 일이 없더라도 제2의 리버티 호를 다시 만들어야 하니 해군 측도 꽤나 귀찮은 일이 될 겁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눈짓을 하자 아인델프가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하나 꺼내서 테이블에 올렸다.

“부족하지만 저희를 도와주신 데 대한 성의입니다.”

“이런 것을 원한 게 아닙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저 이것은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거죠.”

내가 실수인 척 주머니를 쳐서 쓰러지게 만들었다.

약간 열린 틈으로 은화 무더기의 맨 위에 올려 둔 금화가 살짝 흘러나왔다.

그리고 금화를 본 미르바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것 참….”

“부탁드립니다.”

잠시 주저하는 척하던 미르바프는 자연스럽게 주머니를 집어 품에 넣더니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무리 이러셔도 제가 임의로 군함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드릴 수는 있겠네요.”

“역시!”

“물론 이런 정보를 흘리는 것도 군법 위반에 해당하지만, 리안 선장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에 알려드리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 이야기가 어디로 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좋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몰로스 제국의 힐로템으로 향하는 연락선이 출발할 겁니다. 켄자스 항구라면 가는 항로가 거의 겹치는 편이니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가시면 해적의 위협 정도는 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연락선의 함장에게 미리 귀띔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연락선이라면 좀….”

“아, 연락선 역할을 하지만 그래도 3급 전투함이 움직일 겁니다. 아무래도 목적지가 타국이니 작은 초계함 같은 것을 보내기는 좀 그렇죠. 웬만한 해적 놈들은 해군기만 봐도 꽁무니를 빼니까 괜찮을 겁니다.”

***

미르바프에게 연락선의 정확한 출항 시각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아인델프가 질문을 던졌다.

“미르바프라는 사람, 믿을 수는 있는 겁니까?”

“아니.”

“그렇다면 왜…?”

“그래도 이번 일은 거짓은 아닐 거야. 믿을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기 일에 관해서는 칼 같은 사람이거든.”

“네에….”

“물론 언젠가 그의 이익이나 목표에 우리가 방해가 된다면 인정사정없이 쳐내겠지만, 일단 지금은 우리가 살아 있는 쪽이 그에게 도움이 되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굳이 대가로 그 큰 금액을 주지 않았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자신의 계획을 다 짐작하거나 파악하고 있다고 여기는 쪽이 더 위험하니까. 차라리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더 나아. 그까짓 돈 몇 푼으로 그자의 방심을 살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지.”

“의외군요. 전 선장님이 돈을 정말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응, 나 돈 좋아. 하지만 돈은 원래 쓰려고 버는 거잖아. 필요한 게 있으면 사야지.”

“그렇습니까….”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일단 사야지. 괜히 돈 아끼다가 피나 목숨으로 그 값을 치르는 것을 피하려면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