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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55화 (155/420)

155화. 예상대로 되는 게 없다

새벽부터 출항 준비를 마친 우리는 정해진 시간이 되자 칼같이 리버티 호를 출항시켰다.

선원 중에 미복귀자가 몇 명 있었지만, 나는 애써 그 사실을 무시했다.

단순하게 술에 쩔어서 복귀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치안관이 굳이 일개 선원들에게까지 손을 쓰려고 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괜한 소문을 퍼뜨리는 녀석들까지 살려 두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비정하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애초에 내가 모두를 구할 수 있는 슈퍼 히어로가 아닌 이상 별수 없는 일이니까.

나는 당당하게 내 선원들을 아낀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내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선원 모두를 보호하려는 이타심 강한 사람은 절대 아니다.

“선장님, 좌현 330도입니다.”

“음?”

나는 이등항해사 발드가 건네주는 망원경으로 그가 말한 방향을 확인했다.

수평선 근처에 걸린 선박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깃발이 보일 정도는 아니네.”

“네. 하지만 대략적인 형태라던가 침로가 선장님이 말씀하신 연락선과 일치합니다.”

“그럼 일단 침로부터 수정하지.”

“네.”

가볍게 내게 목례한 발드 항해사는 조타수와 조범수에게 능숙하게 변침을 지시했다.

확실히 이런 부분은 발드가 나보다 낫다.

항해 경력이 길다 보니 멀리서 대략적인 형태만 보고도 선박의 종류를 얼추 맞출 수 있다.

특히 나 같은 경우 경력의 대부분을 선원으로 지냈고, 선원이었을 때에도 견시대에는 거의 올라가 본 적이 없어서 선박의 종류별 외형적 특징을 잘 모르는 편이다.

망원경의 초점 맞추는 것도 아직 어설플 정도니까 말 다 했지 뭐.

우리가 방향을 바꿔서 목표로 잡은 배의 꽁무니를 열심히 뒤쫓고 있는데, 갑판장님이 선교에 올라와서 나를 불렀다.

“선장님, 선내 점검 완료했습니다.”

“혹시 문제는 없나요?”

“네, 벨러스트 구역까지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발견하지 못했고, 화물에도 이상이 없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선원들 사기는 어때요?”

“뭐, 솔직히 좋지는 않습니다.”

“당직 때문에요?”

“아아,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바흐카덴에서 제대로 놀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설마?”

“네, 저희만큼 노골적인 감시는 아니었지만, 감시하는 시선을 느낀 녀석이 좀 됩니다. 시비가 붙거나 술집과 창관에서 퇴거를 요구당한 경우도 있는 모양입니다.”

“곱게는 안 나왔겠군요?”

“팔이 부러졌는데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는 놈이 하나 있고, 치아 수가 줄어든 놈이 열 명쯤 됩니다.”

예전부터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이가 부러지면 진짜 아픈 거 아냐…?

다른 뼈랑 다르게 치아는 회복도 안 되잖아.

도대체 왜 이 몇 개 날아간 것은 부상 축에도 못 끼는 거지?

“팔 부러진 선원은 어떻게 했어요?”

“한 대 쥐어패고 팔에 부목을 대주었습니다.”

내가 어이없는 눈빛으로 갑판장님을 바라보자 그는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변명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냥 곱게 부러졌다고 인정하면 되는데,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지 않습니까….”

“아이고, 알겠어요. 그래도 애들 살살 다루세요. 그, 혹시….”

내 시선을 느낀 갑판장님이 떨리는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황급히 감췄다.

“괜찮습니다. 요즘 좀 피곤해서….”

“아무래도 진짜 선의를 하나 고용해야겠네요.”

“으흠….”

***

목표로 잡은 선박의 해군기과 함명을 확인한 후에 선장실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삼등항해사 슬레어입니다.”

“어?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삼등항해사가 살짝 목례하며 말했다.

“전방의 해군 연락선 헤이디로부터 수기신호입니다. 내용은 ‘100미터 이내 접근하지 말 것’입니다. 계속 따라가도 괜찮을까요?”

“어, 100미터까지 붙어도 괜찮다는 말이잖아. 뭘 이런 것까지 물어보고 그래?”

“아, 그런 겁니까?”

“다른 일은 없고?”

“그게….”

“뭔데?”

“조금 애매하긴 한데, 저희를 따라오는 선박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으음?”

이제 출항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다.

아직 항구 근처라고 할 수 있는 만큼 가시범위 내에 적지 않은 선박이 보일 터였다.

“누구 의견이야?”

“제, 제 의견입니다!”

호오, 이 녀석 제법이다.

언제까지나 초짜인 줄 알았는데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면서도 그걸 캐치할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같이 올라가 보지.”

“네넷!”

슬레어와 함께 선교로 올라가자 아인델프가 약간 놀라며 우리를 맞이했다.

“어? 선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일등항해사, 우리를 쫓아오는 선박이 있다는데?”

“예? 아니, 그게….”

말을 얼버무리며 아인델프는 내 뒤에 선 슬레어를 노려보았다.

나는 슬쩍 자리를 옮겨 아인델프의 시선을 차단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아, 그러지 마. 의심이 되면 같이 확인을 해야지. 어디야?”

“여기서는 제대로 확인이 안 됩니다. 선미(배의 뒷부분)로 가셔야 합니다.”

“완전히 후방인 모양이네.”

“그것보다 거리가 좀…. 그래서 조금 시간을 두고 관찰하다가 확실해지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선미로 자리를 옮겨서 쫓아온다는 선박을 확인했다.

그런데 말이지, 솔직히 형태도 제대로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멀리 있는 배를 보면서 우리를 쫓아오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네.

“그러니까, 저 배가 쫓아오는 게 맞아? 차라리 저쪽이나 이쪽이 더 신빙성이 있을 것 같은데?”

“하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짓던 아인델프가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다른 배들은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만, 저 배만 지금 두 시간째 저희 시야에서 나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뭐, 그거야 저쪽 조함술이 엉망이라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잖아?”

“그게, 사실은 몇 번이나 항속을 바꾸었는데, 계속 저 거리를 유지하더군요. 만약 우리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 가까워졌어야 하죠.”

“하아, 해군을 의식하는 건가?”

“해군을 의식하는 것일 수도 있고, 주변에 다른 선박이 많아서 일단 추적만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추적하는 선박 쪽을 한참 노려보다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속도를 늦췄다가 빠르게 하는 것을 반복했다면 해군 연락선이랑 거리가 많이 벌어졌을 텐데?

게다가 군함이 느리다 느리다 해도 적어도 화물선보다는 빠르다.

심지어 전투를 위해 무장한 것도 아니고 연락을 위해 움직인다면 뭐, 당연히 무장도 줄이고 전투 병력도 꽤 내렸을 테니 더 빠를 텐데?

“…잠깐, 내가 아까 제대로 못 봤는데, 헤이디였나? 앞서가는 해군 전함은 잘 따라가고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그쪽이 더 빠를 텐데?”

“아… 우리가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속도를 조절하더군요.”

“설마 수기신호로 쓸데없는 메시지를 보낸 건 아니지?”

“넵!”

수기신호는 말 그대로 깃발로 메시지를 보내는 거다.

최소한 깃발의 색과 움직임 정도는 알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보안성은 완전히 꽝이다.

견시대 위에서 깃발을 들고 춤을 추는데 근처에 있으면 누구든지 다 볼 수 있지 않겠어?

만약 저기 뒤따라오는 것으로 추정되는 선박 외에도 우리 근처에 감시하는 선박이 있다면 괜히 수기신호를 보냈다가는 우리가 가진 패를 까는 꼴이 되는 거다.

“저기 저놈들 말고도 더 있을지 모르니까 긴장 늦추지 말고, 헤이디 양(배는 여성으로 취급한다)을 잘 쫓아가자고.”

“네, 걱정 마십시오.”

***

그 후로 며칠이 지나도록 항해는 순조로웠다.

우리 꼬리에 달린 선박은 여전히 우리를 뒤쫓고 있었지만, 우리에게 노골적인 적대행위를 한 것도 아니고 근처에 접근한 것도 아닌지라 어떻게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아마도 앞에 가고 있는 헤이디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흐아아암, 아직도 꼬랑지에 붙어있어?”

“하하, 네….”

“저놈들도 이 정도면 우리가 해군이랑 뭔가 커넥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 같은데, 아직도 포기를 못 했다고? 뭘 기대하고 있는 거지?”

“아무래도 우리가 계속 해군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흐음….”

아인델프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해봤지만 그건 조금 확률이 희박했다.

그렇다면 내가 미르바프와 나눈 이야기라던가 해군의 작전상황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저렇게 어리석은 방법을 택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우리의 목적지인 켄자스 항구와 힐로템은 거리가 조금 있지만, 항로는 거의 비슷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군과 갈라지는 해역쯤 되면 다른 배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 그런 곳이라는 뜻이다.

해적질이라는 것이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닌 만큼 다른 배들이 없는 먼 바다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해적에게 공격받는 상선이 있다면 다른 상선들이 참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심지어 켄자스 항구는 벨로키나 왕국의 서쪽으로 나가는 유일한 항구라서 방어를 위해 배치된 연안 경비대도 있다.

우리가 연락선과 함께하기로 한 순간, 현실적으로 해군의 개입 없이 해적이 우리를 공격할 방법은 거의 없어진 것이다.

“그냥 다른 지시를 못 받아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 그렇잖아, 분명히 마지막 지시는 출항 전에 받았을 테니까 말이야. 상황이 바뀐다고 새 지시가 내려올 리도 없고.”

“아,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때 견시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우현 025도! 교전 중인 선박이 있습니다! 해적에게 쫓기는 모양입니다!”

“어?”

우리는 급하게 망원경을 들어 견시수가 말한 방향을 확인했다.

견시수의 말대로 이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배 한 척이 보였다.

“아직 깃발은 잘 안 보이는데? 야, 견시! 깃발 보여?!”

“네! 교전기와 지원요청기, 쿠샤 왕국 국적기 확인했습니다!”

“해적선은?”

“해적선은 아직, 아앗! 헤이디, 교전기 올렸습니다! 변침합니다!”

망할, 이거 뭔가 좀 꼬이는 기분이 드는데?

설마 여기까지 다 예상하고 함정을 파지는 않았을 거다.

현재 상황을 예상하고 함정을 팠다면, 내 상대는 미래를 보는 인간이거나 인간을 초월한 뭔가라는 말인데, 그거 너무 무섭잖아.

“선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깐만 기다려봐. 생각 좀 하자.”

지금 리버티 호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당연히 교전 지역을 피해 우리 갈 길을 가는 것이다.

예상외의 사태에 휘말리지도 않고, 어차피 헤이디가 참전했으니 도의적으로도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는, 그러면 헤이디와의 동행은 여기서 끝이라는 것이다.

아직도 이틀 정도는 더 가야 하는데, 이틀이면 우리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던 놈이 우리를 따라잡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두 번째 방법은 저 상선을 돕기 위해 전투에 뛰어드는 것이다.

첫 번째와 반대로 헤이디와 계속 동행은 가능하지만, 군함도 아닌 리버티 호가 쓸데없이 많은 피해를 입을 위험이 있다.

게다가 뭔가 예상치 못한 사태에 휘말리면 보통 좋게 끝나는 경우가 드물다.

“……우리도 교전기 올리자.”

“네?”

“일등항해사, 내가 해적을 몇 번 만나봤는데 말이야, 해적들은 피해 입는 거 진짜 싫어해. 그리고 제일 강력한 전력을 먼저 두들겨 패는 습성이 있거든? 우리 앞에 가는 헤이디는 무려 30문짜리 3급 전투함이라고. 우리는 그냥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생색만 내자. 이해했지?”

아인델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긴 나는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갑판장! 갑판장 어딨어?!”

잠시 후 하부 선창 쪽 해치를 열고 올라온 갑판장님이 나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선장님?”

“지금 교전기 올리고 전투배치 시키세요! 포술장에게 포격 준비시켜요!”

“갑자기 무슨, 여튼 알겠습니다. 총원 전투배치!”

갑판장의 선창을 따라 선원들이 전투배치를 외치며 바쁘게 움직였고, 나는 이미 변침 중인 아인델프에게 말했다.

“풀 세일로 하는데 각도 조금만 조절해서 속도는 약간 느리게, 도주 중인 선박의 좌현 쪽으로 지나서 해적선에 접근한다. 백병전은 최대한 회피하고 포격만 해.”

“알겠습니다.”

잠시 후, 견시수의 새로운 외침이 귓가에 울렸다.

“해적선 확인했습니다! 졸리로저입니다! 적함, 윽, 해적선 두 척입니다!”

“괜찮아, 두 척 정도는.”

“좌현 210도, 거리 2200, 상선에서 교전기를 올렸습니다. 이쪽으로 변침합니다. 전투에 합류할 모양입니다.”

“깃발! 깃발은?!”

“쿠샤 왕국 국적기만 확인됩니다!”

견시수의 말을 들은 나는 재빨리 좌현 쪽으로 나와서 망원경을 들었다.

지금처럼 긴박한 순간에 깃발만 보고 상대의 정체를 믿는 것은 진짜 신참들이나 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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