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치명적인 밀항자들
“슬레어 항해사, 이스트렐리아 거리 보고.”
“이스트렐리아, 우현 70도 방향, 거리 250입니다.”
“음….”
내가 무심결에 인상을 찌푸렸던 모양이다.
내 옆에서 난간에 기대에 있던 갑판장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선장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아니요, 그냥 좀….”
“뭐가 마음에 걸리시는 겁니까?”
“저 이스트렐리아요, 왜 굳이 켄자스 항구로 가려는 것일까요?”
“그거야 뭐, 저 꼴을 하고 있으니 그나마 믿을 만한 우리와 함께 움직이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우리보다는 헤이디에게 호위를 받고 싶은 것이겠지만요. 하지만 헤이디를 따라 제국 군항인 힐로템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나는 답답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리기를 바라면서 옷깃을 조금 벌린 뒤 말했다.
“이스트렐리아는 쿠샤 왕국 상선이에요.”
“네, 알고 있습니다.”
“켄자스 항구는 벨로키나 왕국의 항구죠.”
“그렇죠.”
“우리야 지금 쿠샤 왕국과 벨로키나 왕국이 외교관계를 바꾸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당연히 당장 수리가 필요하고 두 항구의 거리가 비슷하다면 자국 항구로 가는 게 맞는 것 아닐까요?”
내 말에 말문이 막힌 듯 잠시 고민하던 갑판장님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일반적으로 선장님의 말씀이 맞기는 합니다만, 저들도 저들만의 입장이 있지 않겠습니까? 전투에서 어리바리한 행동도 그렇고, 포격도 그렇고, 딱 봐도 전투를 자주 겪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겁에 질려서 자국 해군과 함께 움직이는 우리와 떨어지기 싫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선장님, 선장님의 기우가 맞는다고 해도, 저놈들 실력으로는 우리를 못 이깁니다. 덩치는 저놈들이 조금 더 크기는 합니다만, 어차피 포문 수도 똑같고 포술은 우리가 더 뛰어나지 않습니까? 놈들도 우리 포술장의 실력을 두 눈으로 봤으니 뭐.”
나를 안심시키려는 갑판장님의 노력에 억지로 한 번 웃어 준 나는 해도실로 들어갔다.
“어디 보자….”
대충 계산해 보니 내일 늦은 오후 정도면 헤이디와 항로가 갈라질 것으로 보였다.
그럼 그때부터는 우리와 이스트렐리아 두 척만 함께 이동하게 될 터였다.
“흐음, 그래도 헤이디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별일 없겠지.”
만약 이스트렐리아 호가 더러운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감히 해군 군함이 바로 앞에 있는데 허튼짓을 벌이지는 않을 터였다.
문제는 헤이디와 항로가 갈라진 이후다.
항로가 갈라진 이후부터 켄자스 항구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예상 시간은 약 이틀.
하지만 만 하루 정도만 움직이면 연안 경비대의 경비 구역에 진입한다.
그러니까 딱 하루 정도, 그것만 조심하면 될 것 같다.
설마 벨로키나 왕국의 영해, 그것도 연안 경비대의 경비 구역에서 벨로키나 국적의 상선을 상대로 장난질을 치지는 못할 테니까.
***
“선장님, 변침하겠습니다.”
“음, 감사 메시지는 보냈지?”
“네. ‘무사 항해를 빈다’라는 답 메시지도 받았습니다.”
“무사 항해라고?”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아니, 변침해.”
이등항해사 발드의 부드러운 지휘에 맞춰 리버티 호가 좌측으로 선회하고, 그대로 직진하는 헤이디와 점점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무사 항해라, 단순하게 생각하면 평범한 이별 인사지만 내 마음에 찜찜함이 있어서인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리버티 호가 침로를 잡고 안정상태가 되자 나는 우리의 뒤를 따르는 이스트렐리아 호를 망원경으로 확인했다.
우현 쪽 후방, 거리는 약 200미터, 같은 선단이라고 보기에는 약간 멀고 관련 없는 선박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
만약 잘 모르는 선박이었다면 경고 신호를 보내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해 지려면 얼마나 걸릴까?”
내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중얼거리자, 해의 위치를 잠시 가늠해보던 발드가 대답했다.
“남쪽으로 많이 내려왔으니 대략 세 시간 정도면 해가 완전히 질 것 같습니다.”
“세 시간이라, 그럼 난 이만 들어갈게. 특이사항 있으면 보고하도록 해.”
“네, 쉬십시오, 선장님.”
선교를 나와 내가 향한 곳은 선장실이 아닌 우르타의 방이었다.
대포는 오전에 닦았고, 지금 견시대에 올라가 있는 것도 아니니 보나 마나 방안에서 게으름이나 피우고 있겠지.
요즘 들어 우르타 녀석이 부쩍 게을러진 것 느낌이다.
전투에 관련된 일을 맡으면 평시에는 일이 좀 없는 것이 맞기는 한데, 대낮부터 방안에 콕 박혀있으면 왠지 얄미워진다.
“야, 우르타! 뭐해?”
쿵!
들썩.
뭐야? 문이 잠겼잖아?
당연히 안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을 열던 나는 꿈쩍도 하지 않는 문 때문에 괜히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하며 문에서 손을 뗐다.
“이 녀석이 어디 갔지? 네이선에게 갔나?”
네이선의 방 방향으로 세 발자국쯤 걷던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일단 네이선은 방 안에 없다.
생각해보니 얼마 전에 선원들 훈련시키겠다고 보고했거든.
보통 훈련을 시작하면 서너 시간쯤은 하니까 아마 아직 훈련 중일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우르타의 방 안에서 인기척, 그러니까 달그락거리는 듯한 잡음이 들린 것 같다.
다시 문 옆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허리춤에 달린 칼의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로 약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르타, 안에 있어? 혹시 자냐?”
“…….”
흠, 이 정도면 자다가도 일어났을 것 같은데?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쿵쿵쿵!
나는 문을 주먹으로 약간 세게 두드린 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공격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목소리를 더 높였다.
“우르타! 안에 있냐고?! 대답해.”
“…….”
잠시 기다렸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바다가 아무리 잔잔하다고 해도 배는 늘 움직인다.
그래서 배 안에서 사용하는 집기들은 대부분 고정형이거나 안정성이 매우 뛰어나지만, 그렇다고 작은 소음조차 생기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배에서 한 5년쯤 지내다 보면 대충 소음만 들어도 이게 자연적으로 뭔가가 흔들리거나 떨어져서 나는 소음인지, 인위적인 조작에 의해 생기는 소음인지 대충 구분이 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르타는 잠귀도 그리 어두운 편이 아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나는 칼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선장이다! 그 안에 있는 거 알아! 당장 나오지 않으면 문을 부수겠다!”
잠깐 시간이 흐르니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 목소리를 들은 선원들이 모여드는 모양이었다.
이러고 만약 안에 사람이 없으면 상당히 쪽팔릴 것 같기는 한데, 이미 내친걸음이다.
“선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포술장의 숙소에 침입자가 있는 것 같다. 지금 당장 가서 돌격대장 호출해. 그리고 너, 갑판장님께 말하고 문 부술 수 있는 도구 들고 와.”
“네, 알겠습니다.”
“네, 선장님.”
내게 명령을 받은 두 선원이 급히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굳건하게 닫혀있던 방문이 빼꼼 열렸다.
“…….”
“뭐, 뭐야?”
누군가의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소리만큼 크게 들렸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남아있던 서너 명의 선원들이 들고 있던 단검과 단도를 가슴높이까지 들어 올렸고, 저 멀리서 다가오던 아인델프와 슬레어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급히 뛰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 나야….”
그때, 문틈 사이로 우르타의 머리통이 슬며시 나오더니, 한껏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
“포, 포술장님?”
“침입자라고….”
이 사고뭉치가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꺼낸 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선원들, 명령을 실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선원들, 그리고 달려오다가 그대로 멈춰버린 아인델프와 슬레어.
“너, 너, 이 망할, 아니 포술장, 은 개뿔! 이 미친놈아! 안에 있으면서 왜 대답을 안 해?!”
“아니, 난 그냥….”
여전히 문을 붙잡고 제대로 대답도 못 하는 녀석을 보다가, 예고 없이 바로 문을 박차고 들어가며 칼을 휘둘렀다.
침입자가 우르타를 인질로 잡고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내보였다면 분명히 뭔가 걸릴만한 위치였다.
“애옹!”
응? 애옹? 갑자기?
애석하게도 내 칼은 허공을 갈랐고, 내 쇼를 본 고양이가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어? 이게 뭐야?”
우르타의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우르타 한 명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협박당하거나 인질로 잡힌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르타가 그런 행동을 해야만 했던 이유가 내 눈앞에 있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듯한 새끼 고양이 세 마리.
새까만 털에 목덜미와 네 발만 하얀 녀석이 한 마리, 흰색과 노란색, 검은색의 얼룩이가 한 마리, 이마 일부와 꼬리 끝만 노랗고 나머지는 새하얀 녀석이 한 마리.
방금 운 녀석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 녀석들은 처음 보는 내가 신기한지 불안해 보이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 기막힌 광경을 보던 나는 머리를 짚으며 우르타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포술장, 변명은 준비했겠지?”
***
모여든 선원들을 해산시키고, 아인델프에게 상황 정리를 맡긴 뒤 우르타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우르타는 내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반성… 은 개뿔, 품 안에 고양이 세 마리를 안고 놀아주고 있다.
“내가 동물 싫어하는 거 알지?”
“응.”
“그런데 걔들은 뭐야?”
“아니, 그래서 리안한테는 말을 안 하려고 했지.”
보통 선장이 싫다고 하면 안 키우는 게 정상적인 사고방식 아니냐?
내가 동물을 싫어하는 데에는 개인적인 호불호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이유가 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항해는 결핍과 궁핍의 중간 어디쯤 속한 고행(?) 같은 것이고, 선원들은 더럽다는 말조차 아까울 정도로 더럽게 산다.
위생 점수를 매긴다고 하면 0점이 아니라 마이너스로 한 백만 점쯤 줘야 할 거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동물을?
겨울에는 조금 낫겠지만, 여름이면 선원 모두가 온갖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전염병으로 전멸하고 말 거다.
그리고 동물에게는 또 얼마나 못 할 짓이냐는 말이다.
사람은 목적이 있으니까 부족하고 더러운 환경을 인내심으로 참아낼 수 있지만, 동물이라면 반드시 병이 들거나 과도한 스트레스로 사망할거다.
“도대체 어디서 데리고 온 거야?”
“데리고 온 거 아닌데?”
“뭐?”
“창고에서 찾았어!”
“창고 고양이가 왜 있어?!”
“그건 나도 모르지.”
아이고, 머리야….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우르타와 이야기를 해 보니, 출항하기 직전에 창고에서 새끼 고양이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느 정신 나간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장소로 우리 배를 선택한 모양이다.
치명적인 귀여움에 홀랑 빠진 우르타는 새끼 고양이 세 마리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왔고, 내가 동물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지금까지 숨기고 길렀다고 한다.
내가 알면 바다에 던져버릴 줄 알았다나 뭐라나, 내 인성을 얼마나 막장으로 보고 있는 거야?
그나저나 아직 젖도 못 뗐을 녀석들을 지금까지 건강하게 키운 것을 보니 나름 대단하긴 하네.
“리안, 나 고양이 키우면 안 돼? 응? 고양이는 쥐도 잡고! 다른 배도 많이 키우잖아!”
“이거 보세요, 포술장님. 얘들은 쥐를 잡기는커녕 쥐한테 처맞고 다닐 것 같지 않니?”
참고로 배에서 자주 발견되는 쥐들은 몸통만 거의 20~25cm쯤 되고 여러 마리가 모여 있으면 사실 사람도 좀 쫄릴 정도로 흉폭한 맹수(?)다.
이제 겨우 손바닥만 한 새끼 고양이 따위, 단번에 목덜미를 물어 죽여버릴 거야.
그리고 이 작은 배에 무슨 고양이를 세 마리나 키워?!
“어휴, 일단 당장은 버릴 수 없으니까 네가 알아서 책임져. 켄자스 항구에 도착하면 대신 키울 사람을 구하거나 버릴 거야.”
“안 돼! 아직 혼자서 사냥도 못 하는 애들이라구, 버리면 당장 죽어버릴걸?”
“그래서 일단 사람을 구해 본다고 했잖아.”
“하지만….”
“너 동물 같은 거 키워본 적도 없잖아. 지금이야 귀엽고 행동반경도 좁지만, 나중에는 도저히 수습 못 할걸?”
“아닌데!? 진짜 잘 키울 수 있는데?!”
내가 지금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이랑 대화를 하는 거냐, 일곱 살짜리 애가 땡깡 부리는 것을 받아주고 있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