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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58화 (158/420)

158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 이스트렐리아 호 선장실 -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탓에 독한 럼으로 무료함을 달래고 있던 코페이 선장은 문가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장, 갑판장이오. 일어나셨수?”

“오, 그래, 들어와.”

코페이 선장이 문을 열어주자, 키가 2m는 될 법한 거구의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선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일찍 일어나셨구만. 준비 끝났소.”

“좋군, 아이들 상태는? 아니지, 한 잔 할 텐가?”

“아니, 술은 일 끝나고 마시는 게 좋은 거요. 아이들은 뭐, 좀이 쑤셔서 지랄을 좀 떨기는 했는데, 몇 놈 쥐어패니 괜찮아졌소.”

코페이가 인상을 와락 구기며 힐난조로 말했다.

“오늘 움직일 애들이야, 설마 과하게 손을 쓴 건 아니지?”

“아, 그게 맘대로 되겠소? 그래도 일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닐 거요.”

코페이 선장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자, 갑판장이 흉측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어차피 저놈들 숫자라고 해봐야 50명도 채 안 되는데 뭘 그리 걱정하시오?”

“하긴 뭐, 별 상관없겠지.”

“흐흐흐, 하늘이 우리를 돕는지 오늘은 구름까지 잔뜩 끼어있더군.”

“크큭, 그래, 이왕이면 더 어두운 게 낫겠지.”

코페이는 단단하게 조여졌던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방법이다.

이번에는 예상 밖의 쿠샤 왕국 해군이 끼어들어서 완전히 망가질 뻔했지만, 그래도 결국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리고 있지 않은가?

솔직히 해군기를 단 전투함이 교전기를 내걸고 달려올 때는 거의 오줌을 지릴 뻔했다.

거기다가 이 멍청한 동업자 놈들은 몇 번 손발을 맞추면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는지, 해군을 상대로 교전에 접어들 때의 막막함이란.

그래도 아주 망하라는 법은 없는지 동업자들은 잘 도망갔고, 자신은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물었다.

이번에는 허탕이 아닌가 싶었는데 말이지.

물론 저쪽의 선장 놈은 젊은 놈치고는 꽤 조심성이 많은지 이쪽을 몇 번이나 살펴보는 것이 눈에 띄었지만, 그래봐야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이쪽의 화물(?)이 조금 가볍다는 정도나, 인원이 50~60명이라는 것 정도?

실제로 작전의 주 역할을 맡을 녀석들은 선창에 처박혀서 밖으로 전혀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가지, 슬슬 움직일 시간인 것 같은데.”

“그럽시다.”

코페이는 잔인한 웃음을 짓는 갑판장을 보며 내심 움찔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신도 어디서 칼질로 빠지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저놈은 말 그대로 규격 외였다.

1:1로 붙으면… 글쎄, 맞서기는커녕 놈의 칼을 몇 번 피하다가 결국 도륙 나고 말 거다.

하지만 코페이가 선장이고 그가 갑판장인 이유는 딱 하나, 바로 머리.

머릿속까지 근육으로 되어있을 것 같은 갑판장은 이런 고난도의 계산이나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능력이 없었다.

잠시 후, 조금씩 리버티 호에 가까워지던 이스트렐리아 호는 어느 순간 양현의 식별등을 꺼버리고 적극적으로 리버티 호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버티 호에서 이를 알아챘는지 경고용 발광신호가 나오며 소란이 감지될 때쯤, 이스트렐리아 호의 선원, 아니, 해적들은 벌써 줄 갈고리를 던지고 있었다.

“흐흐흐, 여기서 기다리쇼. 난 먼저 가볼 테니.”

“하하, 너무 기분 내지 말게.”

어렴풋이 못 박힌 널빤지가 놓이는 것을 본 코페이는 이번 습격의 성공을 확신할 수 있었다.

***

- 15분 전 리버티 호 선장실 -

똑똑똑

잠시 선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노크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 문 앞으로 걸어갔다.

“누구야?”

“선장님, 아인델프입니다.”

“일등항해사? 무슨 일이야?”

내가 문을 열어주자, 약간 초조한 표정으로 급히 목례를 한 아인델프가 빠르게 보고사항을 전달했다.

“방금 전에 이스트렐리아 호의 식별등이 꺼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게다가 구름이 심하게 끼어서 시정이 너무 안 좋아 발견이 조금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남아있던 잠기운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빠르게 선교로 움직였다.

그리고 나를 따라오는 아인델프에게 물었다.

“역시나. 대응은?”

“경고 신호 내보내는 중이고 돌격대장과 포술장에게 준비하라는 전령을 보냈습니다.”

“잘했어. 아직 저놈들은 눈치 못 챘겠지?”

“그럴 겁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대기합니까?”

“일단 선교에 도착하는 대로 선원들 다 무장시키고, 저놈들이 넘어오기 시작하면 싹 쓸어버리자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저 가증스러운 해적 놈들의 정체가 까발려진 이상, 이대로 도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정정당당(?)한 전투라면 우리가 입을 피해 때문에 일단 회피하고 보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놈들의 계획을 예상하고 역공을 할 수만 있다면 입어야 할 피해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늘 이야기하는 것처럼, 상선이나 해적이나 해군이나 주업이 다를 뿐 하는 짓은 다 비슷비슷하다.

그리고 애석하지만 나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선교에 올라가니 갑판장님이 이미 올라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갑판장님, 선원들 무장 부탁해요, 약간 소란스러워도 상관없어요. 그 정도 소란도 없다면 오히려 저쪽에서 의심할 테니.”

“알겠습니다. 그럼.”

갑판장님이 빠르게 선교에서 내려가고, 나는 어둠을 노려보며 주머니 속의 랜턴을 만지작거렸다.

아인델프 말대로 하늘에 구름이 가득 찼는지 별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사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저놈들도 오늘 날씨를 보면서 하늘이 자기를 돕는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잠시 쓰잘데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발소리에 이어 우르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선장님, 쇠뇌수 배치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두우면 맞추기 힘들 텐데….”

“걱정 마, 때가 되면 다 보이게 될 거야. 가서 선원들 불안해하지 않게 잘 도닥여. 어차피 재장전하고 또 쏠 여유는 없을 테니 한 발만 잘 쏘고 백병전에 가세해.”

“네!”

우르타가 내려갈 때쯤 현측에 갈고리가 걸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원래 보통 해전이면 이때쯤 양쪽의 함성으로 귀가 먹먹해야 하는데, 고요한 가운데 탁탁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기묘해졌다.

“갈고리가 걸린 모양입니다.”

“그러게. 이렇게 조용하게 싸우기는 또 처음이네.”

“그러게요, 기분이 묘하군요.”

물론 선원들이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소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 않다 보니 정말 조용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

우리 쪽의 준비가 다 끝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타이밍 좋게 널빤지가 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이스트렐리아 호에서 함성과 함께 횃불 몇 개가 치솟으며 놈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향해 랜턴을 켜서 비추었다.

횃불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렬한 빛이 널빤지를 타고 넘어오던 해적 놈들을 비추었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다린 우르타의 신나는 외침이 들려왔다.

“발사!”

예상을 한참 벗어난 상황 변화에 당황한 해적들의 함성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그리고 널빤지 위에서 주춤거리는 가장 용감하거나 가장 정신 나간 해적들에게 강철의 머리와 길쭉한 나무 몸을 가진 쿼럴이 마중을 나갔다.

십여 대의 쿼럴은 그 절반쯤 되는 해적들의 몸에 틀어박혔고, 쿼럴 숫자보다 많은 해적들이 차가운 바다로 다이빙했다.

개중에는 쿼럴에 맞은 놈에게 밀려서 떨어진 놈과 피한다고 몸을 움직이다가 균형을 잃고 떨어진 놈들도 있겠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지금 해수 온도는 끽해봐야 3~5도 정도 될 거고, 그 정도 온도와 칠흑 같은 어둠이 합쳐지면 인어가 아닌 이상에야 대부분 익사 확정이다.

하지만 해적들도 완전히 바보는 아닌지라, 곧 혼란을 수습하고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우르르 널빤지를 건너기 시작했다.

이쪽이 일제 사격을 했으니 재장전이 끝나기 전에 백병전으로 몰고 가려는 생각이겠지.

놈들이 적당히 넘어온 것을 확인한 나는 배에 힘을 주고 외쳤다.

“돌격대장, 지금!”

내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창고의 문이 열리면서 네이선과 칼질 제일 잘하는 열 명의 선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당황하는 해적들을 썰어 넘기기 시작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횃불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고의 광원은 바로 랜턴이이었다.

횃불이라는 것은 주변만 어렴풋이 밝히지만, 이 멋진 랜턴은 빛이 무려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가?

멀리서 전체를 보며 필요한 곳에 바로 빛을 쏘아주니, 안 그래도 우리에게 유리한 전투가 일방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전황을 관찰하고 있는데 아인델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장님, 적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아무래도 해적 놈들이 장난을 친 모양입니다!”

“뭐?”

그러고 보니 해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해적이나 선원이나 복장이 다 비슷해서 금방 알아채지 못했는데, 전체적으로 보니 지금도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는 해적의 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뭐야? 죽은 놈들까지 하면 100명은 되겠는데? 아, 이러면…!”

최고의 전술과 전략은 바로 머릿수다.

특히나 냉병기로 싸우는 전투에서 물량은 정말 거대한 폭력이 된다.

고작 잔머리 좀 굴리고 얄팍한 속임수를 쓴다고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잠시 상황을 보고 생각을 정리한 나는 발드에게 랜턴을 넘겨주었다.

“이등항해사! 선교 맡아! 전체 지휘하고 이걸로 필요한 곳에 빛 쏴주라고! 할 수 있지?!”

“네? 네, 네!”

얼떨결에 랜턴을 받아들고 기겁을 하던 발드는 바로 감정을 수습하고 다부지게 대답했다.

“일등항해사와 삼등항해사는 나와 함께 간다! 조타수, 그리고 거기 수습 선원들! 다 따라 나와!”

내가 칼을 뽑아 들고 앞장서자 아인델프가 질 수 없다는 듯이 바짝 붙어 따라왔고, 그 뒤를 슬레어가, 마지막으로 조타수와 따라왔지만 세 명의 수습 선원 녀석들은 우물쭈물하며 뒤로 쳐졌다.

“이번에 한 놈이라도 죽이면 일반 선원이다! 거기서 가만히 있는 놈은 내년에도 수습 선원 시켜줄 거야!”

이제 고작 1월인데 내년에도 수습 선원이라는 말은, 수습 선원만 2년을 하라는 말이다.

배를 타는 뱃놈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협박이지.

내 말이 끝나자 그나마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녀석이 굳은 얼굴을 하고는 따라붙었다.

그러자 다른 두 녀석도 자기들끼리 한 번 보더니 이를 악물고 따라붙었다.

애들에게 살인 교사를 하는 조직폭력배 같아서 되게 기분이 더럽긴 한데, 어차피 이 세상에서 선원으로 살고 싶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선교로 올라오려던 해적이 나를 보고 당황하는 사이에 힘껏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놈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추월한 아인델프가 그 뒤에 있던 해적에게 칼을 휘둘렀다.

횃불 몇 개 피웠다고 시야가 완전히 확보되는 것은 아니니까 괜히 타겟이 작은 목 같은 곳을 노릴 수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목을 노려 일격필살에 성공하려면 적어도 네이선 정도 실력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대충 쑤신 곳이 폐였는지, 격한 기침과 함께 걸쭉한 피(아마도?)를 내뿜는 녀석에게 관심을 끄고 다음 상대를 찾아서 칼을 휘둘렀다.

내가 한 놈이라도 더 빨리 죽일 때마다 죽어야 할 내 선원이 살고, 다쳐야 할 한 명이 안 다치게 되는 거다.

나는 낯익은 선원의 옆에서 칼을 휘두르는 해적의 팔을 보기 좋게 베어버리며 이를 악물었다.

나름대로 회심의 기습이라고 생각하고 덤빌 때까지는 좋았을 거다.

하지만 시작과 동시에 쿼럴 세례를 받고, 뒤이어 칼질에 도가 튼 덩치들에게 오히려 기습을 당했다.

게다가 우왕좌왕하고 있어야 할 선원들은 죄다 무장한 상태로 대기하고 있던 것도 모자라 선교에서까지 사람들이 튀어나와 칼질을 하자, 해적들이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계속해서 시선 강탈을 시전하는 랜턴 빛이 닿는 모든 곳에서 해적들이 죽어 나가고 있으니, 사기가 바닥을 치는 것도 당연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내게 칼을 휘두르는 해적의 안으로 파고들며 옆구리에 칼을 쑤셔 넣은 나는 긴장감으로 마르다 못해 갈라질 것 같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돌격대장! 대가리, 대가리를 잡아!”

대충 봐도 교환비는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지금까지는 말이지.

하지만 전투 중간에 뛰어든 나도 벌써 숨이 차오르는데 처음부터 전투를 치른 다른 선원들의 체력은 어떻겠는가?

이대로 5분, 아니, 3분만 더 전투가 지속돼도 교환비는 가파르게 하락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애초에 수가 적었던 우리가 전멸하는 것으로 결말이 나겠지.

그러니까 그 전에 이 전투를 끝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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