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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59화 (159/420)

159화. 현실에 NPC 001은 없다

- 리버티 호 갑판, 해적 진영 -

이스트렐리아 호의 갑판장 던은 신경질적으로 왼팔에 박혀 덜렁거리는 쿼럴을 뽑아버렸다.

살점이 딸려 나오며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낸다.

이따위 고통보다는 미친 듯이 흘러나오는 피가 더 문제다.

과도한 출혈은 전투력을 떨어트리고 결국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방금 죽인 선원 놈의 옷을 찢어 대충 상처를 묶었다.

이 정도로 출혈이 멈추지는 않겠지만, 그럭저럭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괜찮을 거다.

던이 일련의 행동을 하는 동안 아무도 근처에 접근하지 않는 것은, 그가 해적들 사이에 있기도 했지만, 잠깐 보여준 그의 위용에 선원들이 겁을 먹은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던의 공격을 막은 선원이 힘에 밀려 자기 칼에 찍혀버리는 것을 보면, 누구나 던을 피하게 되어 있었다.

분명히 널빤지가 연결되는 순간까지만 해도 던은 낙승을 예상했다.

어쩌면 자기가 칼을 휘두를 기회조차 없지는 않을까 걱정까지 했었으니까.

그런데 그놈의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오는 순간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강렬한 빛 때문에 본능적으로 몸을 틀고 시야를 가린 사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쿼럴이 날아왔고, 재수 없게도 개중 한 발은 그의 왼팔에 틀어박혔다.

그나마 그는 몸을 틀면서 팔에 맞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돌격대가 쿼럴에 희생되었다.

심지어 그 머저리들 중 몇 명은 자기 혼자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뒤를 따르던 다른 녀석들과 함께 바다에 입수했고, 덕분에 전투는 처음부터 꼬여버렸다.

겨우 나머지 돌격대를 수습해서 놈들의 배에 건너갔지만, 건너가서 자리를 잡기도 전에 상당한 실력의 선원 놈들이 1차 돌격을 가했고, 그 충격을 겨우 해소했을 즈음에는 다른 선원들도 이미 준비된 상태로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큰 희생이 따르기는 했지만, 그 정도에서 멈췄다면 어떻게든 승리까지는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가용 병력의 수가 두 배쯤 되다 보니 머릿수로 찍어 눌러버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 미친놈, 저놈이 문제였다.

혼자서 벌써 몇 놈을 베어버린 건지.

어둠 속에서 어렴풋하게 보이는 놈의 움직임은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들 정도였다.

별수 없이 상처를 대충 수습하고 그놈을 잡으려고 움직이는데, 선교 쪽에서 몇 놈이 튀어나와 또 이쪽 편의 옆구리를 찔렀다.

심지어 이쪽 놈들도 실력이 심상치 않은 듯, 선교를 점령하라고 보낸 녀석들을 단번에 쓰러뜨리고 전투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이가 없었다.

그래, 이놈들이 우리의 기습을 예상하고 준비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선장 놈은 매번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척은 다 하지만, 실제로는 항해학교를 제대로 마치지도 못한 반푼이에 불과하니까.

이 배의 선장이나 뭐 다른 사람이 그 반푼이보다 더 똑똑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저 미친 전투력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막말로 지금 상선을 상대로 싸우는 건지, 동업자랑 한 판 붙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던이 주변을 둘러보니 그나마 아직까지는 절망적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뒤통수를 맞았음에도 아직 머릿수는 이쪽이 더 유리했고, 곤두박질친 사기만 끌어 올리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듯싶었다.

그리고 어차피 분배받을 놈들이 줄어들면 본인 몫이 많아지니 딱히 나쁠 것도 없었다.

이 기회에서 선장 놈을 항해사로 떨어뜨리고 직접 선장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생각을 정리한 순간 선교 쪽에서 나온 놈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돌격대장! 대가리, 대가리를 잡아!”

흐흐흐, 뭐? 누가 누구를 잡아?

일단 돌격대장이라는 놈을 때려잡고, 방금 소리친 놈, 아마도 선장일 것 같은 놈의 대가리를 곤죽으로 만들어줘야겠다.

던이 생각하기에 이스트렐리아 호의 대장은 비리비리한 선장 놈이 아니고 바로 자신이었다.

***

- 리버티 호 갑판, 네이선 -

리안의 신호에 맞춰 숨어있던 창고에서 뛰쳐나온 네이선은 랜턴 빛의 도움을 받으며 해적 놈들을 베어 넘겼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리안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반격으로 수십 명의 해적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고,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 정도 피해를 입은 해적들은 도주를 선택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해적들은 끝장을 보려는 듯 꾸역꾸역 밀려들었고, 어느 순간 네이선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위험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전투를 하다 보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두 가지 확실한 것은, 아군은 꽤 지쳤고 해적의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거구의 남자, 그도 문제였다.

해적선으로 도망가려던 해적 한 명이 그의 칼에 목이 달아난 이후, 해적들의 혼란과 망설임이 크게 줄어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리안의 외침이 들려왔다.

“돌격대장! 대가리, 대가리를 잡아!”

아마 저 거구의 남자가 바로 리안이 방금 말한 ‘대가리’인 모양이다.

네이선은 주변의 해적들에게 적당히 칼을 날려 공간을 만든 뒤, 번개처럼 뛰어 거한의 앞에까지 다가갔다.

하지만 놈은 이미 네이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엄청난 기세로 칼을 휘둘러왔다.

어렴풋이 보이는 칼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이건 막으면 안 되는 공격이었다.

뭐랄까, 이건 직감의 영역이다.

자세를 다잡기도 전에 거의 주저앉다시피 자세를 낮춘 네이선의 머리 위로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칼이 지나갔다.

“흐, 눈치가 빠른 놈이군.”

“네놈이 선장이냐?”

“글쎄, 곧 죽을 놈에게 굳이 알려주고 싶지는 않군.”

네이선은 자세를 다잡으며 주변을 살폈다.

몇몇 해적이 이쪽을 주시하고는 있었지만 싸움에 끼어들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거한이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렀다.

“죽어랏!”

네이선은 차분하게 그의 칼을 빗겨냈다.

방금 전에야 자세가 안정적이지 못해서 할 수 없었지만, 단단하게 자세를 잡은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째앵!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고 네이선의 칼에 맞은 거한의 칼이 바닥을 향해 내리 꽂혔다.

흘려냈음에도 팔목이 욱신거릴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남자의 공격은 치명적이었지만, 그만큼 공격이 실패할 경우 생기는 빈틈도 치명적이었다.

네이선은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무방비 상태인 남자의 허벅지를 베었다.

“크흑!”

아무리 단련을 해도 근육은 쇳덩이를 이기지 못한다.

심지어 그 쇳덩이가 날카로운 날붙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둠 속에서도 핏물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움직임에 상당히 제한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한 상처였다.

그것으로 승부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한의 공격은 확실히 강력했지만, 네이선의 방어를 뚫을 정도는 아니었고, 틈을 노리는 네이선의 공격은 날카롭게 틀어박히며 거한의 전투력을 빠르게 제거해 갔다.

“헉, 헉, 너, 너는 누구… 커헉!”

끝내 궁지에 몰린 거한이 숨을 몰아쉬며 네이선에게 뭔가를 물으려고 했지만, 네이선은 가차 없이 그의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지금도 여전히 전투는 진행 중이었고, 네이선이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훈련시킨 선원들도 네이선이 거한과 1:1 대결을 펼치는 사이에 더 이상 대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각자 흩어져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전투가 더 진행되면 선원들의 피해가 크게 늘어날 수도 있었다.

“대장을 죽였다! 잔챙이들 다 쓸어버려!”

일부러 네이선이 크게 소리를 지르자 주변의 해적들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거의 동시에 타이밍 좋게 선교에서 비춰주던 빛이 죽은 거한의 시체를 비췄고, 해적들의 의욕은 완전히 꺾여버렸다.

“와아아아!”

“다 죽여버려!”

“이 개자식들!”

선원들이 함성을 질렀고 언제 지쳤냐는 듯 우왕좌왕하는 해적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은 네이선도 잘 알고 있었다.

기세가 올랐다고 소모된 체력이 보충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서 네이선은 더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한 놈이라도 더 죽여서 최대한 빨리 전투를 끝내야 했다.

***

나는 넘어진 선원에게 칼질하려던 해적을 뒤에서 머리채를 잡아당긴 후 목을 칼로 그어버렸다.

대충 상황을 보니, 네이선이 엄청난 키의 남자와 1:1로 싸우는 중이었고, 전황은 거의 백중세였다.

절반 정도는 서로 눈치를 보면서 대충대충 싸우는 흉내만 내는 것도 보였다.

아마 네이선과 거한의 전투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리라.

상대의 덩치가 워낙 압도적이라 네이선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사실 거기까지는 거리가 있어서 잘 안 보였기 때문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른 해적들을 상대로 드잡이 질을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네이선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대장을 죽였다! 잔챙이들 다 쓸어버려!”

역시, 우리 배의 전략 병기 네이선이라면 충분히 해낼 줄 알았다.

그리고 네이선의 외침과 함께 승기가 넘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뒤쪽의 해적들은 주춤거리다가 결국 다시 널빤지를 넘어 자기들의 배로 도주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발을 헛디디거나 다른 이에게 밀려서 생명이 끝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풍덩!

풍덩!

으아아악!

풍덩!

비켜!

풍덩!

밀지마!

풍덩!

풍덩!

나는 도망가려고 눈치를 보는 해적 하나를 또 베어 넘긴 다음 눈을 돌려 다른 간부들을 찾았다.

평소라면 이대로 해적들이 도망가게 두면 끝날 일이지만, 오늘은 일부러 피해를 감수한 만큼 남은 선원들이 만족할만한 이득을 챙겨야만 했다.

“흐윽, 흐어엉, 바라, 정신 좀 차려….”

그 와중에 나를 따르던 세 명의 수습 선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가장 먼저 따르던 녀석은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쥔 채 가만히 서 있었고, 다른 녀석이 나머지 한 녀석을 무릎에 누이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의식을 잃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면 살아남기는 정말 어렵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린아이에게 정말 못 할 짓을 한 것 같아서 가슴 한쪽이 아파 왔지만, 지금은 그것을 표현할 여유도 없었다.

그때 한쪽에 갑판장님의 희끗한 머리가 보여서 급히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갑판장님, 아직 괜찮은 녀석들 수습해서, 갑판장님?”

“으흠, 네, 선장님.”

“아니, 지금 그거… 다쳤어요?!”

“별거 아닙니다.”

갑판장님은 씁쓸하게 웃으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가 차마 손을 떼지 못하는 그의 옆구리는 새빨갛게, 아니, 어둠 속에서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뭐가 별게 아녜요! 딱 봐도 엄청 다쳤구만!”

“어허, 이 정도는 침 바르고 한숨 자면 다 낫습니다.”

“시끄러워요! 상처 수습하고 쉬세요. 나머지는 돌격대장이랑 내가 할 테니.”

비록 어둠 속에서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꽤나 치열한 전투이긴 했지만, 갑판장님이 칼을 맞을 줄은 몰랐다.

아무리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해도 칼질 실력만 놓고 보면 갑판장님은 우리 배에서 아인델프 정도나 겨우 비벼볼 만한 실력자였다.

아, 물론 네이선은 열외다.

“정말 괜찮습니다, 선장님.”

“그만! 명령입니다. 오늘은 상처 수습하고 쉬세요, 갑판장. 아니, 그보다 선교에 있는 이등항해사랑 다친 선원들 수습 좀 해요.”

“…네, 선장님.”

눈짓으로 갑판장님을 부축하던 선원에게 모시고 가라는 지시를 내린 나는 마지막 남은 해적들을 몰아붙이고 있는 네이선에게 소리쳤다.

“돌격대장! 해적선을 나포한다! 그대로 돌격해!”

“네, 선장님!”

잠시 후, 갑판장님이 선원의 부축을 받으며 떠나고, 아인델프가 다가왔다.

“피해 수습을 하시겠습니까?”

“아니. 일등항해사, 지금 배에 남은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이 얼마나 돼?”

아인델프는 이미 해적선으로 건너간 네이선과 선원들을 한 번 보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경상자까지 하면 열 명쯤 됩니다.”

“다 데리고 따라와. 저놈들부터 쓸어버린다.”

“네?”

“돌격대장이 데려간 인원이 열 명 남짓이야. 해적선으로 도망간 해적만 서른 명이 넘을 텐데, 혹시 모르니 지원부터 하자.”

“아, 알겠습니다.”

아인델프가 선원들을 모아왔을 때 나는 눈에 밟히는 얼굴을 발견했다.

“너, 이름이… 됐다, 수습 선원이지? 오늘은 네 몫은 다 했다. 이제 쉬어도 돼.”

방금 동고동락하던 동료 수습 선원이 죽는 꼴을 본 녀석이다.

그때야 상황이 너무 다급해서 그랬다지만, 지금은 굳이 더 이상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슈렌입니다, 선장님.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아니, 약속대로 넌 이제 일반 선원이야. 빠져도 괜찮아.”

“바라의…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

왠지 이러는 내가 너무 싫어져서 눈을 돌리는데, 온몸에 피칠갑을 한 오펜이 보였다.

어두운데다 얼굴의 절반이 피로 얼룩져서 금방 못 알아봤다.

그러고 보니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스스로를 경멸할 것도 없었구나.

시대가 어쩌니, 세상이 어쩌니 해도 결국 난 정말 인간 실격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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