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현실과 소설의 차이점
내가 자괴감에 빠지건 자기혐오에 빠지건, 일단 전투는 마무리 지어야 했기에 나는 아인델프와 함께 남은 선원을 이끌고 해적선으로 건너갔다.
해적은 보통 자의로 항복하지 않는다.
어차피 항복해도 사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여기저기에서 칼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들리고 있었다.
“일등항해사는 절반을 데리고 선수 쪽으로 가면서 아군 지원해. 난 선미 쪽으로 가지.”
“알겠습니다. 선장님, 보중하십시오.”
“그래, 일등항해사도 조심하고, 끝나면 선교에서 만나자고.”
주변이 조금 밝아진 것 같아서 하늘을 보니 전투가 시작될 때는 안 보이던 별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이 많이 걷힌 모양새였다.
“와, 이 새끼들. 그러고 보니 오늘 달도 없는 날이잖아? 아주 처음부터 노리고 들어왔구만?”
내 혼잣말에 선원들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아,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선원들과 거리감 있는 선장이 되어버린 걸까?
네이선이 제대로 한번 휘저어 버린 듯 조직적인 저항을 하는 녀석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끽해봐야 대여섯 명이 모여서 저항하는 정도였는데, 이미 겁에 질린데다가 절반쯤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있어서 처리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선장님, 조심!”
“어?!”
갑작스러운 선원의 외침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해적의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끄으으으….”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그 뒤에서 해적의 목에 칼을 꽂아 넣은 선원이 모습이 드러내며 물었다.
“어, 고마워.”
“괜히 정리하다가 다치지 마시고 조심하십시오.”
“응….”
이름은 모르지만 낯이 꽤 익은 선원으로, 처음부터 리버티 호와 함께 한 이였다.
“거, 처음에는 좀 별로였지만 지금은 다른 선장 밑에서 일하는 건 생각도 못 하겠수다. 이왕이면 나 은퇴할 때까지 같이 가게 좀 조심합시다, 예?”
왠지 뻘쭘해진 분위기에 서로 민망해하고 있는데, 선교 쪽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으아아악! 저리 가! 갑판장, 갑판장은 어디 갔나?!”
잠시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우리는 곧 마음이 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이 뭐지?”
“왓킨입니다.”
“좋아, 왓킨. 다른 인원들 지휘해서 아직 수색하지 않은 구역 다 청소해. 나는 선교로 가 볼게.”
“혼자서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아, 어차피 우리가 정리한 구역으로만 이동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나도 내 목숨은 아깝고, 방금 겪은 일도 있으니 호위로 한두 명 정도 데리고 가고 싶기는 하다.
그런데 왓킨이 이끄는 인원이라고 해봐야 고작 네 명, 왓킨까지 다섯 명인데 거기에서 한두 명을 빼면 도대체 뭘 할 수 있겠어?
그럴 바에야 그냥 다 같이 움직이는 게 낫지.
왓킨의 말대로 어차피 전면전은 다 끝나고 뒷정리 중인데 괜히 희생이 늘어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
괜히 기습을 당하지 않는다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느라 약간 늦기는 했지만, 나는 결국 무사히 선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이미 피바다가 되어 있었고, 우리 쪽 선원들이 시체들을 대충 정리하고 있었다.
“어? 선장님?”
갑자기 출현한 나를 보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선원이 칼을 뽑아 들었다가 깜짝 놀라며 얼른 칼을 치웠다.
“다 정리한 거야?”
“네, 뭐… 그, 저쪽에 돌격대장님과 이야기하시죠.”
이미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네이선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어, 선장님! 여기 해적 두목 잡았어!”
어슴푸레한 배경의 피 칠갑 된 선교를 배경으로, 한 손에는 여전히 피가 흐르는 칼을 들고, 옷과 얼굴에 피를 잔뜩 묻힌 상태로 그렇게 해맑게 웃지 말라고.
무슨 호러 영화의 한 장면 같잖아.
“아앗?! 선장님도 왔어?”
어디선가 우르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얘는 또 언제 여기까지 왔담?
“야, 너는 칼질도 잘 못 하면서!”
“에헷, 그래도 안 다쳤어요! 갑판장님은 다쳤으니까 내가 갑판장님보다 잘 싸우는 거 아냐, 요?”
응, 그건 확실히 아니야.
“어휴, 말을 말자. 그보다 돌격대장. 두목을 잡았다니 무슨 말이야?”
분명히 아까 해적 두목을 죽인 것 아니었나?
“아까 죽은 녀석은 갑판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 녀석이 선장이라고 하네요.”
네이선이 몸을 돌려 한쪽 구석에서 벌레처럼 몸을 꾸물거리는 핏덩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곧 사람이 아니라 시체가 될 것 같은데?
“죽은 거 아냐?”
“나름대로 치명적인 부분은 피했는데, 조금 심했나?”
무심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네이선의 목소리에 은은한 분노가 묻어났다.
그 난전을 겪었으니 친하게 지내던 선원들이 많이 죽거나 다쳤겠지.
선원 중에 특별히 친한 사람이 없던 나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그들과 부대끼던 네이선의 분노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작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뭐, 어차피 해적 놈 따위 죽거나 말거나 별로 상관없기도 하다.
“죽으면 말지 뭐. 어차피 죽일 놈이잖아.”
물론 잡스러운 해적이 아니라 해적 선장을 잡아서 경비대에 넘기면 포상금 같은 것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놈의 포상금을 줄지 안 줄지 확실한 것도 아니고, 준다고 해도 몇 푼 되지도 않는다.
막말로 경비대에서 ‘이놈이 해적 선장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라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잖아.
어차피 하루면 항구에 들어갈 테니 잡아가는 것은 부담이 없지만, 굳이 치료까지 해가면서 데리고 가고 싶지는 않다.
“적당히 묶어놓고 우르타가 한 명 데리고 지켜. 그리고 나머지는 나랑 같이 가자. 남은 해적 놈들 치워야지.”
“대충 치워놓기는 했는데….”
“아인델프와 내가 데리고 온 왓킨이라는 친구가 벌써 선수와 선미 쪽으로 돌면서 정리 중이야. 빨리 끝내고 쉬자.”
“네, 선장. 그런데 왓킨이라면, 으응, 그 아저씨는 믿을만하지.”
“잘 알아?”
“아니… 요, 잘 안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처음부터 함께 한 사람이니까. 이제 진짜 몇 명 안 남았거든….”
***
해적선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해적 잔당을 치우는데 꼬박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 정도 되니 네이선조차 안색이 변할 정도로 지쳐버렸고, 다른 선원들은 말할 것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대충 끝난 것 같다. 이제 선수로 가서 투묘하고 퇴선하자. 아무래도 예항 준비는 내일 해야겠어.”
“그 해적 두목은요?”
“음, 일단 가져가야지. 선수 창고 같은 곳에 처박아 두지 뭐.”
그러자 합류해서 함께 움직이던 아인델프가 피곤함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선장님은 먼저 가서 조금 쉬시지요. 여기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음, 그래도 될까?”
“어차피 아침에 누군가 지휘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퇴선할 때 널빤지 다 제거하고 50m 정도 떨어뜨려서 리버티 호도 투묘해.”
“네?”
“혹시 살아남은 녀석이 생각보다 많으면 어떡해?”
“아, 네….”
낮이었다면 전투 후 정리를 하면서 살아남은 녀석이 대충 몇 명쯤 되겠다고 예상이라도 하겠는데, 오밤중에 전투를 벌이다 보니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애초에 해적이 총 몇 명이었는지 예상하는 것부터 틀렸으니, 계산하는 것이 부질없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꼼꼼히 뒤진다고 했는데 다들 피로와 탈력감으로 주의력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확신은 금물이었다.
물론 해적이 열댓 명쯤 살아있다고 해도 그 인원으로 우리를 공격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배를 움직여서 도주할 확률이 높지만,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나포한 배를 잃는 게 낫지, 안심하고 있다가 기습당해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는 것은 사절이다.
그런 의미에서 50m를 띄운 것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50m나 떨어진 배에 단번에 옮겨 탈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만약 배를 움직인다면 당연히 견시수가 발견할 수 있고, 단정을 쓰는 것도 소음을 내지 않거나 눈에 띄지 않기가 어렵다.
마지막으로 이 날씨에 50m를 헤엄쳐서 이동하겠다는 말은 그냥 자살하겠다는 말이랑 별로 다르지 않다.
리버티 호로 건너가니 갑판은 대충 정리가 된 모양새였다.
그리고 내가 건너가자 현장을 지휘하던 슬레어가 해쓱해진 모습으로 나타나서 보고했다.
“선장님, 갑판장은 상처가 심해서 안정을 취하게 했습니다.”
“뭐? 심각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모양입니다. 날씨도 그렇고 좀….”
“그래? 그런데 삼등항해사는 왜 여기 있어? 딱히 다친 것 같지도 않구만.”
“저, 그게….”
갑자기 슬레어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아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팔에 붕대를 감은 선원이 킬킬거리며 웃더니 대신 대답했다.
“크크큭, 선장님, 삼등항해사는 선장님 따라 돌격하다가 넘어져서 기절했답니다.”
“뭐?”
“으하하하핫!”
“그래도 머리가 안 깨져서 얼마나 다행이야?”
“말도 마라, 정신 차리고 머리에 묻은 피를 보고는 기겁을 하더라니까?”
다들 어디 한군데에 칼을 맞거나 부러져서 붕대를 감고 있으면서도 뭐가 그리 신나는 건지.
진짜 선의를 구하기는 해야겠어.
왜 이렇게 싸울 일이 많아?
“다들 조용, 슬레어 항해사. 마저 보고해.”
“네. 확인된 사망자는 12명, 중상 9명입니다.”
“하, 절반이 날아갔네.”
“그리고… 실종이 4명입니다.”
“…….”
지금 상황에서 실종이 뭘 의미하겠는가.
정말 기적 같은 상황이 아니고서는 그냥 사망이다.
중상자 중에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이 절반도 채 안 되고, 그나마도 당장 항구에 도착하면 배에서 내려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전체 인원 중 절반 이상이 다음 항해에는 함께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후우, 저쪽으로 넘어간 사람들 돌아오면 그쪽이랑 합쳐서 인원 파악 다시 하고, 일등항해사에게 다음 지시 내려놨으니까 아인델프에게 지휘를 받도록 해. 선원들은 가능하면 재우고 항해사들이 아침까지 고생 좀 하자.”
“네, 알겠습니다.”
내가 대충 손을 흔들어 선원들과 슬레어를 해산시키고 선장실로 향하는데, 불편한 걸음으로 선교를 내려온 발드가 내가 목례를 하며 물었다.
“선장님,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아, 이등항해사. 나는 괜찮아. 그보다 고생한 거 아는데, 새벽까지만 좀 더 고생하자고. 그래도 발드 항해사가 우리 중에 제일 멀쩡해 보이네.”
“네, 걱정 마십시오….”
발드가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선장까지 핏물로 목욕을 해야 했던 치열한 전투 상황에서 본인만 안전한 선교에 머물렀다는 자괴감 같은 것일까?
“이봐, 이등항해사.”
“네, 선장님.”
“사람은 모두 똑같지 않아. 그러니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막말로 이등항해사가 없었다면 나는 새벽까지 마음을 놓지도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괜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감사합니다, 선장님.”
“아 참, 회계사는? 혹시 안 올라왔어?”
“네? 선장님과 함께 간 것 아닙니까? 분명히 선교에 왔다가 선장님을 따라간다고 갔는데요.”
“뭐?!”
회계사 게론드는 지금까지 전투에 참여한 적이 없다.
아카데미를 나온 만큼 칼질을 아주 못하지야 않겠지만(모든 전문교육 시설은 교양으로라도 검술을 가르친다) 애초에 본인이 관심도 없고, 회계사의 업무가 전투에 직접 동원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나름대로 배가 위기라고 느껴서 고양이 손이라도 보태겠다고 전투에 뛰어든 모양이다.
찾으러 갈까 했지만 나는 곧 그만뒀다.
만약 사망자나 중상자로 잡혔다면 슬레어가 따로 보고를 했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찾을 방법도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