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닥터 롱베르
“제국에 계실 줄 알았는데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대학으로 돌아가신 것 아니었나요?”
내 말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롱베르 씨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헤어진 이후의 일을 풀어놓았다.
테일러의 야만적이고 비인륜적인 행동에 대단히 실망한 롱베르는 해군이라는 집단에 대해 진절머리가 났다.
심지어 테일러는 그전까지만 해도 군인답지 않은 합리적인 판단과 행동으로 꽤나 좋게 보던 사람이었기에 그 충격은 더 컸다.
그래서 향료 제도에서 복귀하여 힐로템에 기항하는 대로 짐을 싸서 제국 대학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테일러도 황제의 호출을 받아 제국 수도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함께 움직이는 쪽이 더 편했겠지만, 일부러 따로 움직였을 정도로 그 남자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대학으로 복귀는 수월했다.
교수직을 그만두었던 것도 아니고 장기 출장 정도로 처리된 상태였기에 행정적인 문제도 없었다.
다시 연구를 하고, 논쟁과 토의를 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따분한 일상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새로운 것,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신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지식들.
테이블 위에서 책 속의 지식만 가지고 누가 옳은지 언성을 높이는 미적지근한 논의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한 교수라는 작자는 남이 그린 그림과 책만으로 연구한 나머지 자신이 연구했다는 식물의 실제 모습도 모르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롱베르는 어리석은 샌님들과 탁상공론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진짜 연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해군부에 문의를 넣었지. 해군의 목표는 노던테라로 가는 항로를 찾는 것 아닌가? 물론 테일러 그자와의 기억은 최악이었지만, 그 외의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어.”
학자의 지식욕 같은 것인가?
멈춰버린 이 세상에서 참 흔치 않은 호기심이긴 한데….
“그런데 왜 군항인 힐로템도 아니고 켄자스에 계시는 겁니까? 심지어 여기는 제국도 아닌데요.”
“내가 해군에 문의를 넣은 시점에 이미 테일러의 제국 1함대는 노던테라를 찾겠다고 프롬힐을 떠난 후였어. 처음에는 테일러 그자가 성급하게 일을 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정치적인 문제가 엮였더군.”
그쪽 일은 나도 좀 알지.
정보 다루는 놈을 쉽게 생각했다가 제대로 얻어맞아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으니 말이야.
지금 생각해도 열 받네? 어후...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함대가 전멸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다방면으로 알아본 나는 그게 사실이라고 판단했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황실에서는 당분간 해군을 다시 양성할 계획이 없다는 것이었어. 제국에서는 내 꿈을 이룰 방법이 사실상 사라진 거야.”
“그래서 켄자스로 오신 겁니까?”
“교수 자리를 때려치우고 무작정 국경을 넘었네. 자네도 알다시피 제국 쪽에서는 배편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말이야. 그래서 이곳 켄자스까지는 왔는데….”
거기까지 말한 닥터 롱베르는 민망하다는 듯 턱을 긁으며 말을 아꼈다.
그리고 그때쯤 노크 소리와 함께 네이선의 말이 들려왔다.
“선장님, 돌격대장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 열려있어. 들어와, 돌격대장.”
문을 열고 들어온 네이선은 우리를 확인하고는 롱베르 씨에게 살짝 목례한 후 내게 보고했다.
“롱베르 씨가 이야기한 안정이 필요한 환자까지 제외하면 남는 인원이 얼마 되지 않아 절반씩 외출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회계사가 호위를 요청해서 금일 당직자 중에서 4명을 딸려 보냈습니다.”
“네 명이나? 오늘은 시세만 알아보러 가는 것일 텐데?”
“나포한 해적선 때문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 같아서 넉넉하게 할당했습니다….”
“애써 변명할 것 없어. 선원들이 콧바람이라도 쐬게 해달라고 억지를 부렸겠지.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라고 이야기는 했지?”
“네, 선장님. 어차피 회계사가 함께 있어서 술을 마시거나 딴짓은 못 할 겁니다.”
“하긴, 나라도 회계사의 잔소리를 듣느니 그냥 일찍 복귀하고 말겠다.”
보고를 마친 네이선은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이런 네이선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롱베르 씨가 주의를 환기시키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 나는 대충 그렇게 된 거고, 자네들은 어떻게 된 건가? 살아있는 것만도 신기할 판인데 리안 군은 선장이고 자네들도 한 자리씩 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게 말입니다….”
롱베르 씨에게는 얼마나 숨겨야 하는 걸까.
비록 롱베르 씨가 나에게 악의를 품을 일도 없고, 딱히 우리를 이용할 건덕지도 없어 보이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은 모르는 거다.
사실 테일러나 제국 해군과 접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놓고 거짓말을 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우리가 해군을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와 현재 상황을 매끄럽게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도 거짓말 같을 판인데, 그걸 단번에 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생각하신 거랑 비슷해요. 망할 일레드 놈들에게 공격을 당했고, 도망치다가 폭풍에 휩쓸려서 난파했죠. 기적처럼 무인도에서 이 배의 선주님을 만났고, 그렇게 탈출. 끝이에요.”
“허허,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될 내용이 아닌 것 같은데?”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기는 했는데, 딱 그 정도예요. 이야기해봐야 그리 재밌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도 생각만 하면 이가 갈릴 지경이라.”
내가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자, 롱베르 씨는 곧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질문을 완전히 그만두지도 않았는데, 이것만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으음, 확실히 그렇다면 이야기하기 불편할 수도 있지. 그런데 이것만 이야기해 보게. 어떻게 선장이 된 건가? 그저 탈출할 때 도움을 받은 정도로는 자네가 선장이라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
어, 음, 그건 그렇다.
가끔 나도 잠에서 깰 때 내가 선장이라는 사실이 꿈처럼 느껴지니까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럴듯하게 지어내야겠지?
“탈출할 때 항해술을 익힌 사람이 저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임시 선장이 된 건데… 탈출에 성공한 후에도 그냥 유지된 거죠. 선주님이 돈에 별 미련이 없기도 하고, 결국 제가 없었으면 탈출 불가능했던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에 대한 보답이랄까요?”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꾸몄다고 생각했는데 롱베르 씨는 조금 더 성의 있게 거짓말을 하라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롱베르 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솔직하게 전혀 이해가 안 되지만, 그 상황을 겪지 않았으니 뭐라 말하기 힘들군. 그래도 자네가 선장이라는 거지?”
“네, 보시다시피.”
“그럼 내가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내가 선장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한 롱베르 씨는 간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고, 내게 부탁해 온 것은 바로 자신을 배에 태워 달라는 것이었다.
“불편하다면 그냥 바흐카덴이나 론 항구로 데려다주기만 해도 괜찮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은데, 그걸 굳이 우리 배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배는 많았을 텐데요.”
“어흠, 그게 말이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롱베르 씨는 결국 작은 한숨과 함께 현재 상황을 고백하고 말았다.
“사실은 사기를 당했네.”
“네?!”
“으앗, 사기요?!”
“사기라니!”
의외의 고백에 우리 세 사람이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자,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롱베르 씨가 손을 들어 우리를 진정시켰다.
“쉿, 쉿! 뭘 자랑이라고 그렇게 크게 떠드는 건가? 그만하고 앉게, 이미 한참 전 이야기니까.”
“도대체 무슨 사기를 당하신 겁니까?”
“사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자신만만했네. 배를 안 타본 것도 아니고, 솔직히, 음…. 나 정도라면 어느 배에서나 선의로 데려가려고 하리라는 자만도 있었네. 가산을 정리해 왔으니 정 안되면 돈을 내고 그냥 배에 타도 되고 말이야.”
“잠시만요, 닥터. 도대체 배를 타고 어디를 가고 싶으신 건데요?”
“아, 그 이야기를 안 했군. 나는 향료 제도에 다시 가보고 싶네. 아니, 굳이 향료 제도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발이 제대로 닿지 않는 그런 곳 말이야. 그런 곳에 분명히 인간의 문명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줄 무엇인가가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거든!”
이 아저씨, 모험가가 다 되셨구만.
그런데 롱베르 씨의 계획은 처음부터 뭔가 잘못되어있다.
상선을 타려고 하신 모양인데, 상선은 절대로 인간이 개발을 마치지 않은 곳을 가지 않는다.
그런 곳을 가는 것은 탐험선이나 개척선이 할 일이지.
처음이자 마지막 항해를 하시면서 뭔가 큰 착각을 하신 모양이다.
이클로나 호가 서해 항로를 타다가 갑자기 오지 탐험을 한 것은 희박한 확률로 일어나는 ‘사고’잖아.
향료 제도를 가더라도 개발이 덜 된 시골이나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오지보다는 인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커다란 교역항만 골라서 움직이는 배가 바로 상선이다.
“닥터, 뭔가 잘못 아신 모양인데, 어떤 정신 나간 상선 선장이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오지를 갑니까? 차라리 탐험선이나 개척선을 타신다면 모르겠네요.”
그러자 롱베르 씨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그걸 모르겠나? 하지만 제국은 외양 탐사에 관심이 없고, 타국은 내가 아는 인맥이 부족하니 어쩌겠나? 상선이라도 일단 타면서 배에 더 익숙해지면 기회가 오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지….”
아, 교수까지 하던 양반이 그걸 모를 리가 없구나.
그런데 그렇게 머리 좋으신 분이 무슨 사기를 당하신 거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사기를 당하셨는데요?”
“이곳 켄자스에 도착하자마자 향료 제도로 향하는 선편을 알아봤네. 하지만 서해 항로의 출발점은 이곳이 아니라 바흐카덴이나 론 항구라더군. 못 갈 것은 없지만 여기에서 출발하는 배는 거의 없다고 말이야.”
“그렇긴 하죠. 아무래도 그게 효율적이니까요.”
“그래서 일단 바흐카덴이나 론 항구로 이동한 선편을 구하고자 했네. 아무래도 육로는 이동이 불편하니까.”
“정석적이군요.”
“다행히 여기 항구관리관과 인연이 조금 생겨서 바흐카덴으로 향하는 배를 찾아 승선을 부탁했네. 선장이 쉽게 허락하더군. 뱃삯도 필요 없으니 항해 중에 선원들 건강관리나 부탁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짐을 옮겨 놓았는데….”
“튀었어요?”
“…음….”
하여간 뱃놈들이란….
그래도 닥터가 그 배에 타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일 수도 있다.
생색내기용 호신 무기조차 없는 롱베르 씨 정도면, 가는 길에 쥐도 새도 모르게 바닷속에 수장당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어휴, 차라리 안 타시길 다행이네요. 탔으면 아마 지금쯤 살아계시지 않을 것 같으니.”
“항구관리관도 비슷한 말을 하더군. 여튼 그런 관계로 지금은 항구관리관의 도움으로 여기에서 의사 짓을 하며 기다리는 중일세. 항구관리관이 믿을만한 배편을 알아봐 주기로 했거든. 하지만 자네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굳이 신세를 질 필요가 없겠지.”
“그러고 보니 항구관리관이랑은 또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별거 없네, 길에서 놀다가 다쳤는지 팔이 부러진 아이를 만났고, 치료해 줬을 뿐이야. 그런데 그 아이가 항구관리관의 아이더군.”
아니, 항구관리관이면 이 항구에서 꽤 높은 신분인데, 그 집 아이가 왜 길바닥에서 다쳐서 돌아다니는 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냥 평민이라서 그런가?
하지만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쥐면 흔들고 싶은 게 인간 아니었나?
“항구관리관, 어떤 사람이던가요?”
“항구관리관? 나도 몇 번 인사한 게 전부인데 얼마나 알겠나? 일단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더군.”
“그렇군요…. 아, 식사하셔야죠? 많이 늦었네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좋은 식당 좀 안내해주세요.”
“어이쿠, 시간이 많이 늦었군. 자네들도 함께 가지. 오랜만에 자네들을 보니 참 좋구만.”
롱베르 씨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네이선과 우르타에게 권했고, 두 사람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선장, 오늘은 선장이 사는 거지?”
“리안이 쏘는 거겠지?”
난 픽 웃으며 장난스럽게 두 사람의 엉덩이를 때렸다.
“으이구, 이번에 번 돈이 얼만데. 걱정 말고 먹어. 닥터도 그동안 고생하셨는데 오늘 편하게 즐기시구요.”
“아, 갑판장님도 같이 가면 좋은데….”
“야! 갑자기 그 말은 왜 해?!”
우르타가 뜬금없이 갑판장님 이야기를 꺼냈고, 네이선이 인상을 팍 쓰며 우르타를 쥐어박았다.
“그만, 닥터가 제대로 치료했으니 괜찮으실 거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자. 닥터, 우리 갑판장님 괜찮은 것 맞죠?”
“갑판장이라면 아까 개인실에 있던 분인가? 뭐, 말한 그대로일세. 내장과 뼈가 상한 게 아니고 근육만 크게 벌어져서 위험하지는 않을 걸세. 물론 지금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당분간은 회복이 더디겠지만 말이야. 회복이 빠를 나이도 아니고…. 그런데, 흠….”
뒷말을 삼키는 롱베르 씨에게 약간의 찜찜함을 느낀 나는 롱베르 씨를 독촉했다.
“뭔데요? 무슨 문제가 있어요?”
“…….”
내 질문에도 한동안 곰곰이 생각만 하던 롱베르 씨는 결국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닐세, 어차피 내일 다시 한번 봐야 할 것 같으니 그때 이야기하도록 하지.”
뭐야, 불안하게.
***
식사를 하며 나는 롱베르 씨를 리버티 호의 선의로 고용했고, 롱베르 씨는 크게 기뻐하며 집을 정리해서 나온다며 식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우르타, 네이선과 함께 배로 돌아오는 길에 배 근처에서 몇 명의 인영이 초조하게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사위는 어두워진 지 오래고, 드문드문 피워둔 횃불로는 사람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우리는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그리고 리버티 호를 살펴본 우르타가 조용하게 말했다.
“배는 괜찮아, 현문에 인원이 추가된 걸 보면 상황을 알고 있는 모양이야.”
“이 시간에 뭐지? 보아하니 적대적인 행동을 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끼리 떠들어봐야 답이 나올 리가 없으므로 우리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향해 걸었다.
우리가 근처까지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남자들이 동시에 우리 쪽을 보더니, 그 중 한 명이 잰걸음으로 다가오며 약간 큰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쪽에 오시는 분들은 리안 선장님 일행이십니까?”
내가 급히 네이선의 옆구리를 찌르자 의문부호로 가득 찬 표정을 짓던 네이선이 내 손짓을 보고 나서야 급하게 대답했다.
“나는 리버티 호의 돌격대장이다. 그쪽은 누군데 늦은 시간에 배 앞에서 서성이지?!”
“아, 저희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돌격대장이면 혹시 선장님과 함께 나가신 것이 아닌지요?”
“누구냐고 물은 것 같은데?”
“저는 베나드 상단의 콜레모스라고 합니다. 리안 선장님께 좋은 제안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상단?”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상대가 조금 자세하게 보였다.
인원은 총 5명, 콜레모스라는 남자는 호신용 단도 정도를 허리에 차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호위인 듯 아밍 소드와 핸드 액스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장거리 무기만 없다면 안심이다.
어차피 네이선 혼자서도 제압이 가능할 테니 말이다.
“제가 리버티 호의 선장 리안입니다. 거래를 하기에는 상당히 늦은 시간인 것 같은데요. 내일 이야기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나는 일단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간단하게 상대를 떠보았다.
정말 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아니면 이 시간에 무리해가며 나를 기다리지 않았을 테니, 내 말은 상대방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을 콜레모스라고 밝힌 남자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손을 살짝 들어 적의가 없다는 것을 표시하며 내게 빠르게 접근했다.
“리안 선장님이시군요. 초면에 정말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거참, 무슨 일인데 이 시간에 이러시는 겁니까? 교역품이라면 교역소에서 정식으로 거래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가끔 상단이나 상회에서 교역선에 은밀히 접근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어떤 상품을 독점하거나 경쟁자에게 상품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임의로 거래하자는 경우인데, 그 순간은 상당히 고수익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 나쁘게 결론이 나곤 했다.
손해를 보게 된 상인의 미움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만약 꿍꿍이가 있는 쪽이 잘 되더라도 보통은 해당 상품의 독점형태가 되면서 아무리 교역소를 통해도 값을 제대로 못 받게 되기 때문이다.
교역소에서 구매 신청을 내는 사람이 딱 하나라면 가격이 좋아질 리가 없잖아.
그런데 우리가 가져온 품목이 막 독점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고 희귀한 상품이 아닌데?
“아이고, 무슨 큰일 날 말씀을. 저희도 정상적인 교역품은 교역소를 통해서 거래합니다. 오늘 이렇게 무례를 범한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만. 죄송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용무가 있다면 내일 다시 정식으로 방문하시지요. 가자, 얘들아.”
나는 쉴새 없이 이어지는 콜레모스의 말을 단호하게 저지하고 빠른 걸음으로 리버티 호를 향했다.
상대가 무엇을 제안하건 어차피 아무런 정보도 없는 내가 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괜히 단서도 없이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는 일단 시간부터 버는 것이 맞다.
게다가 핑계도 완벽하지 않은가?
나는 미련이 남은 듯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콜레모스에게 단호하게 한마디를 던지고 현문에 올랐다.
“콜레모스 님이라고 하셨지요? 제안이라는 것이 분명히 거래에 관한 것일 텐데, 이 시간에 제안하는 거래가 딱히 좋을 것 같지는 않군요. 정당한 거래라면 내일 아침에 논의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장님, 그러지 마시고….”
“현문 올려. 아침에 내가 내리라고 할 때까지 현문은 설치 금지다. 새벽 복귀자도 받아주지 마.”
“알겠습니다, 선장님.”
내가 냉기를 풀풀 풍기며 현문까지 걷어버리라고 말하자, 콜레모스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현문 앞에서 끙끙거리기만 했다.
괜히 더 밀어붙이면 내 기분이 상할까 봐 조심하는 것 같다.
그런데 도대체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나가야 할 물건이 나한테 있나?
설마 그 와인에 대한 소문이 퍼진 것은 아니겠지?
그건 진짜 소문이 날 수가 없는데?
내가 이런저런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게론드가 급하게 다가오며 내게 말했다.
“선장님,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아, 회계사. 혹시 저 사람들과 관련된 이야기야?”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내 방으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