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물건의 가치
우르타와 네이선을 각자의 방으로 돌려보내고 게론드와 함께 내 방에 들어온 나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질문을 던졌다.
“뭐야? 이 시간까지 나를 기다릴 정도면 꽤 큰 건 같은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럴 만한 건수가 없거든?”
“저도 저들에게 직접 제안을 들은 것은 아닙니다만, 교역소에 다녀오면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뭔데?”
“최근 들어 목재 가격이 꽤 상승한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큰 화재가 발생해서 목재가 꽤 많이 소요되었다더군요.”
“그런데? 우리가 목재를 가지고 왔던가?”
“그건 아닙니다만, 엄청난 목재 덩어리를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까?”
“…아! 해적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게론드가 말을 이었다.
“심지어 이쪽에 기반을 둔 상단 중에 경쟁 관계인 베나드 상단과 일리오나 상단이 서로 추가로 상선을 확보하려고 혈안이 된 모양입니다. 그러니 딱 봐도 손상이 별로 없는 이스트렐리아 호에 욕심이 날 수밖에요.”
“흠, 좋은 기회네?”
게론드는 잘 모르는 부분이겠지만, 나는 다른 부분에도 금방 생각이 닿았다.
애초에 이쪽 대륙 남서부는 좋은 목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지형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건축용이나 선박 건조용으로 쓰기 좋은 품종의 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제국에서 함대를 만든답시고 목재를 죄다 끌어다 썼고, 최근에 화재까지 났다면 괜찮은 목재가 씨가 마를 수밖에.
더하여 목재를 구하기 쉽지 않다 보니 조선업도 그리 발달하지 않아서 선박 재고가 충분할 것 같지도 않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두 경쟁 상단이 얼마나 큰 규모로 상선을 운용하는지는 모르지만, 당장 한 쪽이 먼저 상선 한 척을 추가하면 상당한 격차가 벌어질 수 있었다.
만약 가격을 무시하고 신규 건조를 지금 의뢰한다고 해도, 목재가 부족해서 인수까지 1년은 충분히 걸릴 테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항구에서 중고 선박을 구매해야 하는데, 이건 너무 운에 기대는 거다.
그러니 우리가 나포해 온 이스트렐리아 호에 관심이 쏟아지는 것이겠지.
“아마 저쪽에서 접근한 이유는 상대 상단보다 먼저 교섭을 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괜히 경쟁이 붙으면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겠지?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의 관계가 우리에게 알려질 확률이 높으니까. 괜히 여러 가지 변수가 끼어들기 전에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먼저 계약하려고 한 것이겠군.”
“하하하, 느낌이 좋네요?”
“흐흐, 잘하면 한 몫 제대로 잡겠는데? 일단 계획을 좀 짜 보자구….”
처음으로 게론드와 죽이 맞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귀가 안 아프네?
***
다음 날 아침, 내가 조용히 호출한 오펜이 밖의 상황을 살피고 돌아왔다.
“선장님 말씀대로입니다. 두 그룹의 사람이 부두에 모여 있고, 서로 말을 하고 있지 않지만 누가 봐도 적대적으로 보이더군요. 돌아오기 전에 현문 설치하라고 전달했습니다.”
“잘했어. 요즘 항해술은 잘 공부하고 있어? 최근에 내가 신경을 많이 못 썼네.”
“이등항해사님이 잘 가르쳐주셔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열심히 공부하렴. 너는 더 크게 될 수 있어.”
“네!”
“수고했고, 나가는 길에 회계사에게 작전 시작하자고 말해줘.”
“작전이요?”
“응, 그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거야.”
“넵!”
오펜이 나간 후, 잠시 시간을 끌던 나는 우르타의 방으로 향했다.
원래는 네이선에게 가려고 했는데, 가는 길에 지나가는 선원에게 네이선이 어디 있는지 아냐고 물어보니 우르타 방에 있다지 뭐야.
어차피 둘에게 이야기해야 할 상황이니 오히려 잘된 건가?
“으앗, 간지러!”
“귀엽긴 하네.”
문을 열자마자 난장판이 펼쳐졌다.
일단 침대는 엉망진창, 베개와 이불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일단 그 냄새, 꼬릿한 그 냄새란….
거기에 다 큰 남자 둘이서 방에서 하는 꼬라지를 좀 보자.
네이선은 쪼그리고 앉아서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새끼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너무 세게 쥐면 다칠까 봐 만질 엄두가 못나서 부들대는 꼴이 어이가 없다.
우르타는 두 마리의 고양이에게 점령(?)당한 채 뭐가 그리 좋은지 미친놈처럼 히죽거리고 있었다.
진짜 점령당한 것이 맞다.
한 마리는 어깨위에 올라가 있고, 다른 한 마리는 무릎 위가 자기 집인 양 배를 발라당 까뒤집고 있으니까.
“…너네 뭐하냐?”
“어? 으흠.”
“리안? 어, 언제 왔어?”
후다닥 일어나 시선을 피하는 네이선과 조심스럽게 어깨 위의 고양이를 내려놓는 우르타.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동물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르타의 방에서는 도저히 뭔가를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라서 결국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두 사람을 호출하는 쪽이 나았을 텐데.
매번 두 사람을 내 방으로 부르면 친구(?)끼리 너무 권위적으로 구는 것 같아서 배려를 했다가 괜히 못 볼 꼴을 본 기분이다.
“이스트렐리아를 우리가 갖자.”
“엥?”
“갑자기?”
“너희도 갖고 싶다고 했잖아.”
“아니, 왜 안 되는지는 리안이 이미 다 알려줬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우르타 말대로야. 지금이라고 그때 안 되던 이유가 다 사라진 것도 아닌데 갑자기 무슨 말이야?”
호오, 요 녀석들 제법 사려분별을 하게 되었군?
나는 두 사람에게 현재 상황을 대략 설명하고, 지금부터 할 일을 알려주었다.
내 설명이 끝나자 두 사람의 얼굴에 악동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와! 재밌겠다!”
“그러니까 돈을 꽤 받을 수 있다는 거네?”
“항해사들에게는 내가 이야기해 두었지만, 선원들은 몰라야 해. 어디까지나 우리는 두 상단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취하는 형태여야 하니까 말이야.”
“역시 리안 나쁜 놈….”
“뭐?!”
“아니야, 암말도 안 했어!”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우르타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네이선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리안, 그러면 선원들이 좀 싫어하지 않을까? 다들 그래도 이번에 적어도 10만 로스쯤 챙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던데.”
그래, 이 정도 짬밥이면 이런 질문이 나와 줘야 정상인 거다.
확실히 네이선은 갑판장 대행을 하면서 눈이 좀 트인 모양이다.
“그래서 말인데, 그건 네이선이 잘 설명을 해줘야 해. 일단 이스트렐리아 호를 팔지는 않기로 했지만 지급할 금액은 충분하다고 말해야겠지? 그걸 확인하겠다는 미친놈은 없을 테니까.”
“으엑?! 리안 그렇게 부자였어?!”
우르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다.
약탈품을 분배받을 선원은 간부를 제외하고 21명이었다.
정말 짜게 계산해서 한 사람당 10만 로스만 지급해도 210만 로스, 지금 내가 감히 엄두도 못 낼 금액이다.
하지만 어차피 상관없다.
출항하기 전에 이스트렐리아 호는 팔릴 것이고, 그럼 700만 로스 이상의 금액이 수중에 떨어질 테니.
선원과 간부들에게 분배금을 지급하고, 이번 일에 협조한 녀석들에게 포상금을 지급해도 최소한 수백만이 남을 거다.
“우르타, 헛소리는 그만하고, 한 번에 다 지급한다고 하면 확실히 이상하겠지?”
“당연하지…. 물론 네 말대로 그걸 확인하겠다는 미친놈은 없겠지만, 누구도 고용된 선장이 그 정도로 부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걸?”
네이선이 어색하게 웃으며 바로 맞장구를 쳤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네이선에게 당부했다.
“다친 사람과 부상자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 때문에 당장 지급은 어렵지만 복귀할 때 5만씩 지급하고, 정산이 끝나는 대로 나머지를 지급할 거라고 흘려줘. 솔직히 우리가 너무 잘 지급하는 거지 다른 배들은 다 그렇잖아? 떼먹거나 안 주는 곳도 많고.”
“그렇기는 한데, 아마 선원들이 꽤 실망할걸?”
“걱정 마,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실망하기 전에 더 큰 보상이 돌아갈 테니까.”
네이선의 말대로 처음에는 선원들도 내가 변했다면서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원래 그들이 받아야 할 금액보다 1~2만 로스쯤 더 줘도 꽤 남는 장사가 될 거다.
선원들은 입이 너무 가벼워서 일이 끝나더라도 내막을 다 알려줄 수는 없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을 지급할 수만 있다면, 그런 실망은 더 큰 신뢰로 돌아올 수 있다.
‘우리 선장도 별수 없군.’에서 ‘역시 우리 선장은 다를 줄 알았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훗날, 내가 조금 불합리한 결정을 내리더라도 ‘선장이 저러는 것은 이유가 있겠지.’라는 생각의 토대가 되어주겠지.
“자, 빨리 움직이자. 우르타는 먼저 조선소로 가. 내가 주의하라고 한 게 뭐지?”
“접근하는 놈들에게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낼 것!”
“좋아, 네이선은 지금 이스트렐리아 호 항해 가능하게 정리하고, 운용 인원 선발해. 일 끝나면 나한테 보고하고. 선원들에게 보상 이야기 어색하지 않게 잘 흘리는 거 잊지 말고.”
“걱정 마!”
***
잠시 후, 준비가 완료되었는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 지금 나갈게.”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는 네이선이 아니라 낯익은 선원이 나를 보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음, 그러니까 왓슨이었나?”
“왓킨입니다, 선장님.”
“어, 그래! 왓킨이었지? 돌격대장이 시킨 거야?”
“네? 아니, 아닙니다. 손님 오셔서요.”
“손님?”
“네, 지금 갑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군데?”
이 시간에 올 손님이 있나?
올 사람이라면 롱베르 씨 정도일 텐데, 롱베르 씨라면 의사 선생이나 닥터라고 불렀겠지.
얼굴도 아는 사람을 그냥 ‘손님’이라고 지칭할 이유가 없다.
“항구관리관이 보냈다고 합니다.”
“항구관리관? 뭐지? 일단 가보자.”
갑판으로 나가자 말끔한 복장의 남자가 나를 보고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리안 선장님이십니까?”
“네, 누구신지….”
“아, 저는 항구관리관님을 모시는 프렐이라고 합니다. 항구관리관님께서 한 번 방문해주시라는 말을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항구관리관님이요?”
“네.”
갑자기 항구관리관이 왜 나를 보자고 하는 거지?
보통 항구관리관이 부르면 좋은 일은 아닌데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게, 안 좋은 일이면 경비병들을 데리고 직접 오거나 하지 않았을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저는 상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보시다시피 전갈을 전하는 사람일 뿐이라서요.”
“그러시군요. 혹시 급한 일입니까?”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으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양해를 구했다.
“제가 지금은 급히 할 일이 있는데, 점심쯤에 방문한다고 전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조심히 가세요.”
그렇게 의문의 남자는 미련 없이 배를 떠났고, 어느새 내 뒤로 다가와 상황을 구경하던 네이선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선장님?”
“몰라, 항구관리관이 나를 보자고 한다는데?”
“응?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요? 우리가 해적이 아니라는 것은 닥터가 충분히 설명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롱베르 씨가 신세를 지고 있다고 했지? 혹시 그 문제인가?”
“출항 준비는 끝났는데 어떻게 할까요?”
“급한 일은 아니라고 했으니 일단 우리 일부터 하지. 가자.”
***
이스트렐리아 호를 움직여 조선소의 도크에 정박을 마치고 하선하자, 기다리고 있던 우르타가 다가와 내게 보고했다.
약간 큰 목소리였고, 주변에 어색하게 서성거리는 남자들에게 충분히 들릴만한 음량이었다.
“선장님, 아무래도 완전히 수리하기에는 힘들 것 같습니다. 자재 가격이 너무 비쌉니다.”
이미 대충 예상하고 있던 말이지만, 나는 깜짝 놀라는 척하며 되물었다.
“뭐? 얼마나 비싸길래?”
“거의 다른 항구의 세 배쯤 되는 것 같습니다. 당장 항해가 불가능할 수준은 아니니까 그냥 다른 항구에서 수리하는 것이 어떨까요?”
“하지만 너무 보기 흉하잖아. 일단 마스터랑 내가 이야기해 봐야겠어. 마스터는 어디 있지?”
“그럼 이쪽….”
우르타가 나를 안내하려고 하는데, 빠른 걸음으로 접근한 남자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혹시 리안 선장님 되십니까?”
“네, 제가 리안입니다만, 누구십니까?”
“저는 일리오나 상단의 맥레인입니다. 지금 몰고 오신 선박을 매각하실 거죠? 저희가 구매하고 싶습니다.”
물었다.
지금부터 밀당이 중요한 거다.
나는 약간 놀라는 척,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도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선박을 매각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네? 그럴 리가, 매각하시려는 것이 아니라구요?”
“물론이죠. 운용할 여유가 충분한데 굳이 제가 왜 멀쩡한 배를 팔아치우겠습니까?”
“아니, 그게 무슨… 분명히 선원들은….”
어제 나간 선원들이 술자리에서 이 배를 매각하면 한몫 잡을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친 것이 분명하다.
보통은 그게 정석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원래 팔기로 한 물건보다는 팔 생각이 없던 물건의 값이 더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심지어 그 물건을 원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지.
그때 한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며 일단의 무리가 엄청난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경쟁자 등장이다.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천연덕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웬 소란이지?”
나는 그 순간 맥레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
흐흐흐, 달려오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어젯밤에 보았던 베나드 상단의 콜레모스라는 남자였다.
자, 이제 진짜 피 튀는 입찰을 시작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