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67화 (167/420)

167화. 의외의 흑막

이놈이다.

느낌이 왔다.

고작 내 뒤에 미행을 붙인 정도가 아닌 거다.

맥레인에게 독이 든 성배를 건넨 놈, 이번 일의 흑막, 그놈이 바로 내 뒤에 앉은 저놈이다.

갑자기 올라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나는 문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뒤로 돌아섰다.

“…항구관리관님.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선장. 어차피 그대는 충분한 이익을 얻지 않았소? 굳이 당신과 상관없는 일에 호기심을 가질 필요는 없을 텐데.”

분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멕레인이 장기를 팔아 치우기로 했건, 상단의 지분을 넘기기로 했건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잖아, 보통 찝찝해야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다면 굳이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실 이유가 없으니까요. 제가 이렇게 묻기를 기대하신 것 아닙니까?”

내 말에 항구관리관이 희미하게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들렸소? 본관은 그저 선장의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응,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에 리버티 호도 걸 수 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질문했다.

다는 아니더라도 한 가지 정도는 대답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멕레인에게 무엇을 받기로 하신 겁니까?”

“본관이 말이오? 아니, 난 맥레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았고, 앞으로도 받지 않을 거요. 엉뚱한 의심을 한 모양이군.”

“그렇다면 왜….”

“이만 나가주지 않겠소? 이미 시간을 많이 빼앗겨서 말이오. 할 일이 조금 많거든.”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 커졌지만, 무표정한 항구관리관의 얼굴을 보고는 깨끗하게 포기했다.

정말 딱 한 가지만 대답해 준 것이다.

나는 찍기에 실패했고 말이지.

괜히 더 매달려봐야 얻을 것은 없고 자존심만 상할 게 확실해 보였기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다.

그나저나 후작가의 호출이라면 아마도 왕녀님이시겠지?

그런데 항구관리관이 말하는 것으로 볼 때 후작 본인이 아니고서는 은행에 뭔가를 부탁하기 힘든 모양인데, 왕녀님이 그 정도 힘이 있으신가?

***

내가 돌아왔을 때 리버티 호는 흥겨운 분위기였다.

물론 항구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녀석들이 꽤 있었지만, 당직을 서던 선원들을 중심으로 이스트렐리아 호가 매각되었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그리고 파리한 안색으로 갑판 위에서 나를 맞이하는 갑판장님이 있었다.

“갑판장님!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될 텐데?!”

“비좁은 방 안에만 있었더니 너무 답답해서 말입니다. 적당히 바람만 쐬다가 들어갈 생각입니다.”

“아, 진짜! 닥터 롱베르가 적어도 열흘은 요양해야 한다고 했단 말입니다!”

“아이고, 귀가 먹은 것은 아니니 소리는 그만 지르시지요.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빨리! 들어가서 쉬세요! 상처 다 아물 때까지 직무 해제입니다. 네이선, 아니, 돌격대장이 대행을 맡을 테니 돌격대장이 질문하는 것이 있으면 대답만 해주세요.”

“거참, 그런다고 무슨 직무 해제까지…. 알겠습니다, 들어갑니다.”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리던 갑판장님은 내가 눈썹을 치켜뜨자 손을 천천히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갑판장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우르타가 얼른 부축했다.

심심하면 갑판장님이 무섭다고 징징대면서도 걱정은 되는 모양이다.

아인델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모두들 말렸습니다만, 워낙 고집이 있으셔서 말이죠. 포술장이 계속 잔소리를 해도 전혀 듣지 않으시더군요.”

“딱 봐도 하루아침에 아물 상처가 아닌데 허세하고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갑판장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갑판장이라는 자리가 그렇다.

거친 선원들을 휘어잡아야 하는 자리인 만큼, 약해 보이면 끝인 거다.

나도 갑판장을 하던 시절에는 얕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강하고 거친 모습을 연출하지 않았던가.

네이선이 적당히 갑판장 일에 익숙해지면 그만 은퇴시켜 드려야겠다.

드웰 씨랑 죽이 잘 맞는 것 같던데, 대충 그 근처에 정착하시면 되지 않을까?

뭐, 본인이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보다 별일 없었지?”

“네, 선원들이 조금 흥분한 상태이긴 합니다만, 금고를 이등항해사와 삼등항해사가 지키고 있으니 큰일은 없을 겁니다. 현문 당직도 제일 믿을만한 녀석들로 시켰구요.”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고 태양의 위치를 가늠해 본 뒤 다시 물었다.

“그런데 닥터는? 아직도 안 오셨어? 꽤 늦으시는구만.”

“네, 언제까지 오기로 하신 겁니까?”

“그냥 오늘이라고 하시긴 했는데, 정리할 게 많으신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수소문할 인원도 없으니 말입니다.”

하긴 닥터가 어디서 지내는지도 모르고, 지금 선원들을 풀기에는 우리 인원이 너무 부족하다.

“음, 회계사는?”

“방 아니면 금고 앞에 있을 겁니다.”

“그럼 지금 배에 있는 선원들 모아주고, 회계사는 내 방으로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일단 내가 선원들에게 지급하기로 한 금액은 일 인당 15만 로스 정도다.

중상자까지 포함해도 선원의 수는 17명에 불과하니까, 다 해봐야 250만 로스 정도밖에 안 된다.

그리고 일, 이등항해사와 갑판장님은 대략 2배수, 나머지 간부들에게 1.5배수를 지급하면 대략 200만, 총 450만 로스 정도가 된다.

원래 기대할만한 매각금액인 500만 로스를 받았다면 내 앞으로 떨어지는 금액은 50만 로스 가량, 적당한 수준이다.

하지만 200만 정도를 더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니 조금 더 풀어야겠지.

그래서 100만 로스 정도는 더 풀 생각이다.

유족이 있는 사망자들과 배에서 내려야 하는 중상자들, 전투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 네이선과 돌격조(?)에게 돈을 조금 더 풀고, 다음 항해에 필요한 음식도 좀 제대로 준비하고, 이왕이면 방한용품도 좀 더 갖추고….

그리고 남은 돈으로 드웰과 교섭을 벌이는 거다.

원래 드웰에게 빌려준 돈, 이전에 나포한 갤리선을 판매한 돈에 인어의 눈물을 판 돈까지, 최근에 눈코 뜰 새 없이 다사다난했던 만큼 자금은 충분히 모였다.

이번에 남은 돈까지 하면 얼추 리버티 호를 완전히 인수할 돈은 될 거다.

***

선장실에서 다시 계산을 확인하고 있으니 게론드가 찾아왔다.

무려 500만 로스가 넘는 엄청난 금화를 보고 와서인지, 게론드의 얼굴도 꽤나 상기되어 있었다.

금액이 너무 큰 만큼 상당량의 금화를 포함해서 가지고 왔지만, 한 손으로 들기에는 묵직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화폐였다.

보통 사람은 평생 가도 볼 일이 없는 양이기는 하다.

“선장님, 부르셨습니까?”

“회계사, 이리 와서 이것 좀 봐줘.”

“네, 선장님.”

내가 준 지급 금액을 한참 동안 살펴보던 게론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오신 금액과 거의 비슷하군요. 그런데 이렇게 많이 주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선원들은 이 정도까지 기대하고 있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는 하지.

무식한 선원들은 산수에도 그리 능하지 못했다.

매각 금액에서 세금 빼고, 여러 가지 행정 처리 비용과 기타 잡비 빼고, 남은 선원들의 급여에 비례해서 금액을 나누고, 간부들은 맡은 직급에 따라 몇 배의 몫을 더 받고 이런 복잡한 계산을 할 수 있는 녀석이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이 예상하는 받을 금액이라는 것은, 논리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이전의 경험에 의지한 것이다.

‘이 정도 인원이 이런 배를 나포하면 얼마나 받더라’, 혹은 ‘누가 얼마를 받았다더라’하는 그런 경험 말이다.

그러니 선장이나 회계사 같은 간부들이 작정하고 몫을 빼돌려도 잘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지금보다 100만, 심하면 200만 정도까지 몫을 더 빼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한 것보다 적은 돈을 받은 선원들이, 다음번 전투에서도 내 말을 온전히 믿고 따라줄까?

이번처럼 승조원 중 절반이 전투 불능이 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공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 내가 지구에서 환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나는 자본주의를 신봉하고 신뢰와 충성심은 돈으로 사는 것이라고 믿는다.

“회계사는 내 몫이 더 커야 한다고 생각해? 아니면 회계사도 한몫 더 챙기고 싶은 건가?”

잠시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게론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솔직히 저는 돈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도 않고, 지금 선장님이 주시는 급여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하지만 제가 들었던 다른 배의 선장들과 셈법이 좀 많이 다르신 것 같아서 말이죠.”

“내가 옳은 거잖아. 다른 놈들이 나쁜 거지.”

“하핫, 그렇기는 하죠. 그런데 그런 말 아십니까?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눈이 두 개인 사람이 괴물이라는 말.”

“…….”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쉬운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이놈은 정말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

“혹시 모르십니까? 꽤 유명한 이야기인데 말이죠, 하긴 선장님은 아직 좀 젊으시니 잘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이 이야기는 각국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지고 있지만, 원문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이야기는 일레드 왕국의….”

“으아앗! 그만, 그만해! 그런 이야기 따위 궁금하지도 않고, 이미 알고 있어!”

“아… 아십니까?”

신나게 장광설을 시작하려던 게론드는 히스테릭한 내 반응에 금방 침울해졌다.

그러더니 내가 준 종이로 다시 시선을 옮기고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장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지급할까요? 그나저나 금화라니, 다들 아주 신바람이 나겠군요.”

“휴우, 웬만하면 금화는 피하려고 했는데 양이 너무 많더라고. 나랑 네이선밖에 없는데 상자를 들고 올 수는 없잖아. 그래도 필로스 금화(약 30,000로스)가 아닌 게 어디야. 여기 은행에 있는 비센트 금화(약 12,000로스)는 내가 다 챙겨왔을걸?”

동화는 선내에서 자기들끼리도 잘 돌려쓰는 편이고, 은화도 누가 한두 개 훔쳐 간다 한들 사생결단을 낼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금화라면 말이 달라진다.

아무리 금 함량이 적고 크기도 작은 비센트 금화라도 고작 수백 로스짜리 은화와는 비교가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계속 걱정이 된다.

“아무래도 절도 사건이 끊이지 않을 것 같은데, 뭐 좋은 방법 없을까?”

그렇지 않아도 당장 리버티 호를 운용하기 위해서 최소한 20명 정도의 선원을 더 고용해야 하는 판이다.

그런데 거기에 금화를 던져 놓으면 끊임없는 절도 사건과 거기에서 파생된 폭행, 심하면 살인까지 발생할 수도 있는 심각한 사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만약 선원들끼리 서로 반목하게 된다면, 눈물을 머금고 내 몫(?)을 포기해 가면서 선원들의 신뢰와 충성심을 얻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흐음, 나누어서 지급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건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은데.”

나도 그런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선원들에게 선장은 그리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다.

내가 비록 꽤 신뢰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자신들의 돈을 온전히 믿고 맡길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글쎄, 괜히 그런 말을 해서 그동안 쌓아놓은 신뢰를 잃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다.

“선원들에게 은행을 쓰라고 권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그냥 잘 보관하라고 하는 수밖에요.”

그게 안 되니까 문제지.

배에서 일반 선원들에게 할당된 개인 물품 보관함이라고 해봐야 작은 상자 하나뿐이다.

그 상자는 몇 가지 소지품과 갈아입을 옷 정도를 넣으면 가득 찰 정도로 작고, 그만큼 보안도 부실하다.

자물쇠라고 달려있기는 한데, 칼등으로 몇 번 내리치면 부서질 정도라서, 거의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용도로 쓰인다.

게다가 애초에 상자 자체의 내구성이 작정하고 부수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저항할 정도로 믿음직하지도 못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게론드가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선장님, 선원들은 선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선장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한번 시도라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솔깃하기는 한데….

“회계사, 이거 잘못하면 내가 돈 주기 싫어서 변명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정작 돈을 안 준다고 욕을 먹을 수도 있고. 너무 위험한 것 같아.”

“뭐, 그걸 믿을만하게 설계하는 것은 선장님의 특기 아닙니까?”

어? 잠깐만.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배에 있는 인원들부터 돈을 분배할 생각이었는데 조금만 더 생각해 봐야겠네. 잘하면 좋은 방법이 나올지도 모르겠어.”

내 말에 게론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너무 늦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이미 돌격대장이 들고 온 금화 주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선내에 파다한데, 선원들의 인내심도 생각을 해주셔야지요.”

“으음, 알았어.”

***

게론드가 나간 뒤로도 한동안 고민을 하던 나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결국 갑판으로 나왔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는지 조리실이 분주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우르타가 나타나서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해?”

“쯧, 선원들 있을 때는 말조심 좀 하라니까.”

“아무도 안 보잖아. 나도 필요할 때는 잘한다고, 이제.”

“으이그, 그보다 갑판장님은 어때?”

내 말에 우르타의 얼굴에 작게 먹구름이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닥터가 오는 대로 한 번 더 봐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아. 다시 피가 나는 것 같던데….”

“아… 내가 못 살겠다, 진짜. 노인네가 고집만 남아서는.”

“그러게. 아무리 봐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계속 괜찮다고 박박 우기는 거 있지.”

“그나저나 벌써 해가 저무는데 닥터는 왜 못 오는 거야? 이제 슬슬 불안한데?”

“으응, 그러네….”

물론 당장 출항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기뻐하며 오늘 오겠다고 한 사람이 해가 지도록 코빼기도 안 비치니 슬슬 불안해진다.

오늘 항구관리관과 엮인 일도 있고, 닥터가 항구관리관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해서 더 그렇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함부로 움직일만한 상황도 아니니 원….

“어? 저기 닥터! 닥터 같은데?”

“어디?”

“저기, 저쪽에 오는 두 사람 중에 앞선 사람 말이야.”

나는 우르타가 손가락질하는 방향을 한참 바라보고 나서야 그가 말하는 두 사람을 구분해 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우르타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놈은 눈이 도대체 얼마나 좋은 거야?

적어도 500미터는 넘게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 이 거리에서 얼굴이 구분이 된다고?

심지어 지금 해가 지고 있는 판인데?

우르타의 말대로 두 사람 중 한 명은 롱베르 씨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어색한 표정, 어색한 자세로 서 있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닥터 롱베르,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걱정했잖아요. 그리고 이쪽에 숙녀분은…?”

“미안하네, 생각보다 정리할 것이 많아서 말이야. 얼마 머물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리 많은지 원.”

“그거야 그렇고 이쪽은….”

내가 재차 여성의 정체를 묻자, 롱베르 씨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적나라하게 지어 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말이야….”

“혹시 따님이십니까?”

롱베르 씨와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엄마를 닮았을 수도 있으니까….

연배는 대충 맞기는 하다.

롱베르 씨는 40대 후반 정도로 알고 있고, 아가씨는 대충 20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롱베르 씨는 더더욱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흘렸다.

“으음… 딸처럼 생각하는 아이네….”

일단 딸은 아니라는 말이군.

그렇다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롱베르 씨는 제국 사람이고, 이곳 켄자스 항구에 별다른 인연이 있을 리가 없었다.

빈약한 내 상상력으로는 딸 아니면 정부(情婦)… 정도밖에 없는데, 딸이 아니라면 설마?

아니지, 정부는 확실히 아니다.

롱베르 씨가 대단한 인격자라서 여자관계가 깨끗하리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롱베르 씨 정도면 정부가 있다고 한들 전혀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떠나는 스폰서, 아니, 정부(情夫)를 배까지 배웅하는 정부(情婦)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어느 시대나 비슷한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세상의 정부(情婦)란 남자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몸을 제공하는, 거의 비즈니스에 가까운 관계의 여자다.

사랑이라거나, 애정이라거나, 그런 애틋한 관계가 아니라고.

그런데 더 이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다시 돌아올 확률도 낮은 남자를 어떤 여자가 배웅까지 온다는 말인가?

그것도 어둑어둑한 밤중에 젊은 여자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항구까지 말이다.

심지어 롱베르 씨는 사기를 당해서 돈도 없다며!

“그럼 누군데요?”

“처음 뵙겠습니다, 데보라라고 합니다.”

물어보는 내 음성이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워지자, 롱베르 씨의 뒤에서 쭈뼛거리던 그녀는 결국 어색함을 이기기 어려웠는지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런데 딸이 아니면 무슨 관계야?

의문은 점점 깊어졌지만 나는 일단 정중하게 인사를 받았다.

“네, 반갑습니다, 데보라 양. 이 배의 선장인 리안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전 우르타라고 해요!”

옆에 있던 우르타까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자기소개를 했다.

촐싹대는 우르타를 보며 한숨을 쉬다가 혹시나 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시커먼 남정네들의 눈이 이쪽으로 모조리 쏠려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아저씨가 배를 처음 타시는 분도 아니시면서 무슨 짓을 하신 거야….

우리의 어색한 통성명이 끝나자 눈을 질끈 감은 롱베르 씨가 작게 속삭였다.

“날 따라온 제자일세.”

“…….”

“…으에엑?!”

아무래도 나, 환청이 들리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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