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그 남자, 그리고 그 여자
- 약 보름 전, 스코타 후작저택 -
알렌은 저도 모르게 연병장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곳에서는 이튼 경이 자신의 종자로 보이는 젊은, 아니, 오히려 어린 쪽에 가까운 소년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미 제법 시간이 흘렀는지, 소년은 땀과 먼지로 지저분한 것은 물론 왼쪽 다리까지 살짝 절고 있었지만, 여전히 소년다운 패기와 치기가 흘러넘쳤다.
이튼 경은 계속해서 덤벼드는 소년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막거나 쳐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소년을 괴롭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이튼도 역시 어렸을 때는 자신이 모시던 마스터에게 저렇게 배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알렌도 거의 비슷했다.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알렌의 시선을 느꼈는지 어느 순간 이튼이 빠르게 고개를 돌려 정확하게 알렌을 노려보았다.
나이를 감안하면 감이 나쁜 편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조금 좋은 편일 것이다.
알렌은 문득 이튼이 자신처럼 완숙해지는 나이가 되면 제법 뛰어난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법 뛰어난 기사.
아주 뛰어난 것도 아니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사는 더더욱 아니고, 그저 뛰어난 기사.
기사 개인의 무용이 전투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이 상당히 줄어든 지금은, 그냥 높으신 분들의 보기 드문 장식품 정도에 불과한 그런 기사 말이다.
그 정도 실력이었기에, 프레티아 왕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감히 알렌과 함부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을 이튼이었다.
그런데….
“당신이 여기에 무슨 일이오?”
“…후작 각하께서 호출하셨네.”
“흥, 그럼 볼일이나 보시오. 남이 훈련하는 모습 구경하지 말고.”
이제는 경이라는 호칭도 붙이지도 않고, 대놓고 불청객 취급이다.
사실 모시는 주군이 없으니 경이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는 것이 옳기는 했다.
기사라는 작위는 임명을 ‘받는’ 것이었다.
줄 사람이 없다면, 기사라는 작위는 성립할 수 없었다.
알렌은 가슴에 묵직한 쇳덩이를 올린 듯이 답답해지는 가슴을 살짝 쓰다듬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
후작의 접견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 한 명이 알렌을 보고 살짝 목례를 하더니 바로 문을 노크했다.
“각하, 알렌 경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집사는 안에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잠시 기다리더니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지요,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접견실 안에는 새하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후작이 창문 앞에서 찻잔을 들고 서 있었다.
당대 스코타 후작 가문의 가주이자, 쇠락하던 후작 가문을 일으켜 세운 당대 최고의 정치가.
비록 이제 나이가 있어 업무의 대부분은 본성에 있는 큰아들에게 이양하고 이 저택에 칩거하고 있지만, 여전히 스코타 후작가의 최고 권력자는 이 노인이었다.
알렌이 다가가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자, 그제서야 후작이 몸을 돌려 알렌을 보았다.
“알렌 경, 오랜만이오. 평안하시었소?”
“네. 후작 각하의 배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것참 다행이군. 알렌 경 덕분에 내 손녀가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는 것 같아 늘 감사하고 있지. 혹시라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부담 없이 내게 말씀하시오. 괜히 그 아이의 이야기가 밖으로 도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지 않소?”
“…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돌려서 말하기는 했지만, 엘리안 왕녀와 그 젊은 선장이 만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 후작저 안에서 벌어진 일이니 비밀이 유지될 것이라고는 알렌은 물론 엘리안 왕녀도 기대하지 않았기에 알렌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죽은 줄만 알았던 동생이 살아있어서 소식을 알아보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 않는가?
그저 그 자료의 내용만 밝혀지지 않으면 족한 일이었다.
거기까지 말하고 기묘한 침묵을 유지하며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후작은 깜빡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런, 이거 사람을 불러놓고 지금까지 자리도 권하지 않았군. 실례했소, 알렌 경. 나이가 드니 이렇게 사소한 일을 깜빡깜빡하게 되지 뭐요?”
“괜찮습니다, 각하.”
“이해해 주셔서 고맙소. 이쪽에 앉으시오. 긴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늙은이에게 오래 서 있는 일은 힘든 일이거든.”
“…….”
사람을 불러놓고 자리에 권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 무례임에도 사과하지 않는다.
알렌이 입을 열지 않고 잠시 멈칫하자, 후작이 묘한 눈으로 알렌을 응시했다.
“…자리를 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허허, 별말씀을.”
자리에 앉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를 하며 허허거리던 후작이 어느 순간 여상하게 물었다.
“올해 그 아이가 몇 살이지? 알렌 경, 혹시 엘리안의 나이가 어찌 되는지 아시오?”
“…이제 스무 살이 되셨습니다.”
후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후작 앞에서 굳이 엘리안을 높이는 것은, 알렌이 엘리안을 후작의 외손녀가 아니라 여전히 프레티아의 공주로 대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고, 어차피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었기에 후작은 눈썹만 꿈틀했을 뿐, 무감정하게 말을 이었다.
“어허, 아무리 밖에 나가기 힘든 아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군.”
알렌은 입 안이 바짝 타는 것을 느꼈다.
후작이 엘리안의 나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얼마 전에도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엘리안과 결혼을 시켜줄 수도 있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던 후작이었으니 말이다.
누가 봐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고, 오히러 알렌에게는 고마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엘리안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 고지식한 기사에게는 자신이 충성을 바쳤던 프레티아의 전대 국왕과 영혼을 바치기로 맹세한 왕비 메릴린의 딸을 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안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이자 숭배해야 할 목표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메릴린을 닮아가는 그녀를 보며, 그 역시 매일 갈등과 싸우는 중이었다.
왕궁을 탈출하기 전에는 누구도, 심지어 자신까지도 알 수 없게 꽁꽁 숨겨놓은 욕망이었지만,
사실 메릴린을 향한 마음은 충성이 아니라 저열한 소유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흐음, 늦었지만 좋은 혼처를 알아봐야겠어. 경도 알다시피 여자가 나이가 너무 많으면 신분에 상관없이 후처 자리밖에 없지 않소? 메리(메릴린의 애칭)의 하나뿐인 아이인데 후처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지.”
알렌은 후작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후작의 하는 말은 그저 흘리는 말조차도 이미 정치적으로 계산이 끝낸 말이었다.
특별히 알렌을 불러다 놓고 혼잣말처럼 떠들 정도면 이미 이 사안에 대한 정치적인 계산과 조율이 끝났다는 말이고, 이 사실을 알렌에게 알려줘야 할 필요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그럼 알렌 경은 어찌하실 생각이시오? 그 아이를 따라간다고 해도 상대 쪽에서 거절할지도 모르고… 그 아이가 없는데 지금처럼 이곳에서 지내기에는 불편하시지 않겠소?”
“저는….”
오는 길에 보았던 이튼의 경멸 어린 표정이 얼핏 떠올랐다.
지금도 주인(프레티아 전 국왕)을 지키지 못한 자가 자기 주인(스코타 후작)의 제의를 거절한 주제에 여자(엘리안)의 동정심 뒤에 숨어 지낸다고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엘리안도 없는 후작 저택에서 지낸다고?
후작이 괜찮다고 하고 안 하고 와는 상관없이 차라리 죽는 쪽이 더 나을 정도로 끔찍한 가정이 아닌가?
물론 엘리안이 없다면, 정확하게 말해서 그가 옆에 있는 것을 그녀가 원하지 않게 된다면 새로운 주인으로 후작을 선택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알렌은 생각했다.
하지만 후작의 표정과 말하는 태도로 볼 때 후작은 더 이상 그의 충성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연 자신은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자신이 가질 용기를 내지 못하면서 남에게 보내지도 못한다니, 이게 무슨 추태일까.
***
후작의 접견실에서 약간 멍한 기분으로 나온 알렌은 무의식중에도 엘리안의 방을 향하고 있었다.
후작의 폭탄 발언 이후 어떻게 접견실에서 나왔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지만, 이건 반드시 엘리안에게 알려야만 했다.
“아가씨, 알렌입니다.”
“잠시만요.”
차분한 엘리안의 음성이 들려오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알렌 경.”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엘리안은 평소보다 과하게 굳어있는 알렌을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답받지 못할 충성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남자.
하지만 그만큼 더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차라리 보통 남자들처럼 자신을 원한다고 하면 조금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었을까?
후작이 자신과의 결혼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고 들었다.
알렌은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지나가듯 말했지만, 그 말에 희미하게 묻어있는 끈적한 욕망이 느껴졌다.
게다가 이미 자신의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시녀들에게 은근하게 권고를 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애초에 자신의 결혼을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상대가 알렌이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조금 끔찍했다.
나이 차이가 조금 나기는 하지만,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알렌은 괜찮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와 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뭔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그녀를 통해 보는 것은 그녀가 아닌 그녀의 어머니가 아니던가?
물론 이런 말은 알렌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입 밖으로 이 말이 나오면 사실이 되어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이 넓은 저택에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우습게도, 남자로서의 호불호를 떠나서 그나마 자신의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알렌이었다.
남들이 알면 이기적인 년이라고 손가락질할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은 표정이 안 좋으시군요,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엘리안의 질문에 뭔가 나사가 빠진 듯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던 알렌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입 안에서 말을 한참을 굴리더니, 힘없이 중얼거렸다.
“후작 각하께서 아가씨의 결혼을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엘리안의 얼굴이 굳을 차례였다.
이 상황에서 결혼이라니, 설마 이 남자와?
상대가 당신이냐고 묻고 싶은 것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낸 엘리안이 부들거리는 손가락을 숨기기 위해 무릎 위에 살포시 모아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상대는 누구인가요?”
“그것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번에 발발한 4왕자님의 반란에 대한 벨로키나 왕국의 태도가 결정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둘째 오빠나 데이먼에게 저를 넘기는 쪽인가요?”
“그게….”
알렌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후작은 어디까지나 엘리안을 ‘외손녀’로서 말했을 뿐, ‘왕녀’라는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도, 언급하지도 않았다.
아마 후작은 그녀를 프레티아에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후작이 했던 말들과 알렌의 판단까지 조용히 경청한 엘리안은 차분한 눈빛으로 알렌을 보며 말했다.
“알렌 경, 내일 델라에 다녀와야겠어요. 준비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아가씨.”
그녀의 표정에서 내일 뭔가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알렌은 평소처럼 그녀의 명령을 받들었다.
***
- 대륙력 2716년 2월 14일, 리버티 호 갑판 -
장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쇼크 상태에서 벗어나자 겨우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한 뇌가 맹렬히 돌아가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롱베르 씨가 말하는 것으로 볼 때, 그가 켄자스 항구에 도착한 것은 최소 한 달 전, 제국 국경을 넘은 것은 거의 비슷하겠지.
하지만 제국 수도 엠페리움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를 감안하면 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지 최소한 두 달은 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두 달 동안 젊은 여자와 단둘이 지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런데 이 여자는 정신머리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무리 스승이라지만 남자와 단둘이 여행… 잠깐만.
나는 새삼스럽게 데보라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다시 봐도 비천한 집안의 아가씨는 아니었다.
애초에 여자를 제국 대학에서 공부시킬 정도면 보통 가문이 아니기는 하지.
그런데 이 아가씨는 어떻게 집에서 탈출했지?
왕녀님부터 시작해서 오스팔트 가문의 릴리안, 여기 데보라까지, 어째 내 주변에 나타나는 여자는 다들 집 나온(?) 여자밖에 없는 걸까.
뭔가 결론이 이상하게 나오기는 했지만, 생각을 마친 나는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이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앞으로 승조원 전체의 건강을 책임지실 닥터인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울 수는 없지, 암.
“닥터, 그러니까 제자분이 왜 여기까지… 아니 뭐, 제국을 떠나 따라올 정도면 얼마나 두 분이 깊은, 아니, 친한 관계인지는 알겠지만 해가 진 후의 항구는 젊은 아가씨가 혼자 다닐만한 곳이 아닙니다. 돌아가시는 길에 선원들을, 아니, 네이선을, 아니, 돌격대장을 붙여드리겠습니다.”
“…….”
그래, 상황 수습은 망한 것 같다.
그리고 곤란해하는 롱베르 씨의 표정을 보아하니 저쪽이 입을 열면 더 망할 것 같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 이 아이도 함께 태워줄 수 없겠는가?”
“난 찬성!”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내가 예상한 말이 롱베르 씨의 입에서 나왔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르타의 세상 천진난만한 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우르타의 입을 막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자리를 옮길 것을 권했다.
결론이고 상황이고 나발이고, 일단 이런 일은 여러 사람이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잠시 자리를 옮기시죠.”
“아, 그, 그러지.”
“감사합니다, 리안 선장님.”
선장실로 두 사람을 안내한 나는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가는 우르타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넌 어디가?”
“어? 나도….”
“시끄러. 넌 나가서 선원들 입단속 시켜. 아니 네이선에게 선원들 입단속 시키라고 해.”
“나만 미워해!”
“미운 짓을 하지 말던가!”
“칫!”
내 말에 입을 삐쭉거리던 우르타가 자리를 떠나자, 나는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손바닥만 한 선장실이 뭐가 그리 신기한지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크흠, 두 분 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아, 미안하네. 하여간 자네가 선장실의 주인이라니 정말 실감이 안 나는군.”
평범함을 가장한 말투와 눈치를 보는 저 표정까지, 일부러 그러는 거 다 티 납니다, 아저씨.
평생을 공부와 연구만 한 사람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자리에 앉은 두 사람에게 음료를 한 잔씩 놓아준 나는 위스키를 한잔 따라서 맞은 편에 앉았다.
원래는 나도 음료를 마시려고 했는데, 알코올의 기운을 빌리지 않고 이 대화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자, 일단 제 대답을 말씀드리자면, 당연히 안 됩니다.”
“이보게, 그러지 말고….”
“닥터! 지금 냄새나는 남자만 50명이나 있는 이 비좁은 배에 젊은 여자분을 태우자는 겁니까? 닥터도 배 타보셨잖아요. 알만한 분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은유적으로 이클로나의 이야기를 꺼내자 롱베르 씨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남자밖에 없는 곳에 성욕 충만한 무식쟁이들을 모아놓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놀랍지 않게도 배 위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고로 성폭행(?)도 있다.
그래서 우르타가 처음 고드실카 호를 탈 때도 난리가 났더랬다.
내가 우르타의 순결을 지키려고 몇 명과 싸웠는지 아는가?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네이선이 그 싸움을 대신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한동안 우르타가 네이선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하지만 연구에 대한 열정으로 제국을 떠나 여기까지 따라온 아이일세. 이제 와서 혼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어차피 여기에서 임페리움까지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일세.”
“아니, 그건 제 앞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잖아요!”
앗, 실수. 너무 쓰레기 같은 대사를 한 것 같다.
롱베르 씨의 표정도 더 안 좋아졌다.
“자네 말을 무슨….”
“죄송합니다, 방금 전의 발언은 취소하죠. 그리고.”
“제가 책임질게요.”
내가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순간, 데보라가 뭔가 결심한 눈빛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는 롱베르 씨는 순간 경악한 표정을 했다가 뭔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바꾸었다.
그것을 본 내 감상을 말해보자면, 제발 본인이 책임질 수 없는 일에 저렇게 열정을 불태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크흠, 데보라 양, 도대체 뭘 책임지시겠다는 겁니까? 이 배의 책임자는 저고, 데보라 양의 결심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책임은 제가 집니다.”
“리안. 본인이 이렇게까지 원하는데 그냥 태워주게. 여기에서 나와 헤어지면 어디 머물 곳도 없는 아이란 말일세.”
아니, 그러니까 그런 아이(?)를 왜 이렇게 무책임하게 데리고 다니셨어요?
나는 어느새 비어버린 잔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골치 아픈 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