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데보라의 정체
거의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나와 롱베르 씨의 뜨거운 논쟁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의견 차이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애초에 타협, 양보, 조율 같은 아름다운 단어가 성립할 수 없는 주제를 가지고 말씨름을 하니 결론이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데보라가 배에 ‘탄다’와 ‘안 탄다’만 있을 뿐, ‘반쯤 탄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래서 결국 나는 손을 들고 말았다.
이미 시간도 늦은데다가 갑판장님을 비롯해 당장 ‘닥터’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니 계속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휴, 오늘은 그만하시죠, 너무 늦었네요. 데보라 양에게는 귀빈실을 내어드릴 테니 묵고 가시죠. 제 방과 가깝기도 하고, 잠금장치도 제대로 되어있는 방이니까요. 닥터는 앞으로 쓰실 개인실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내가 휴전을 제안하자 롱베르 씨는 반색을 하며 쌍수를 들고 반겼다.
그리고 약간 표정이 풀리던 데보라 양은 ‘귀빈실’이라는 말에 얼굴이 도로 어두워졌다.
은근슬쩍 이렇게 자기 자리를 만들어 나갈 생각이었나 본데, 내가 그렇게 설렁설렁 넘어갈 것 같아?
이 아가씨가 나를 너무 맹탕으로 보시는구만.
두 사람을 데리고 나온 나는 근처에 있는 귀빈실로 이동했다.
열쇠로 문을 딴 나는 문을 열어주고 데보라 양에게 열쇠를 넘겨주며 말했다.
“단 하나뿐인 열쇠입니다. 평소에는 제가 보관하기 때문에 청소가 잘 안 되어있습니다만, 그럭저럭 하룻밤은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저나 닥터가 직접 온 경우 외에는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마십시오. 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해도 여기만큼은 제가 직접 올 테니까요.”
“네, 선장님. 감사합니다.”
데보라 양이 문을 잠그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적당히 거리가 멀어지자 롱베르 씨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진심으로 데보라 양을 배에 태우고 싶으십니까?”
“나라고 반대를 안 했겠나? 하지만 본인이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데 어쩌겠나.”
그 고집을 말려야 할 스승이라는 분이 이래서야 원.
“어휴, 이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하고, 여기가 닥터가 쓰실 개인실입니다. 열쇠는 여기 있구요. 짐 푸시고, 피곤하시겠지만 환자들부터 잠깐 봐주실 수 있을까요? 옆구리 터진 노인네가 오늘 낮에 무리하다가 상처가 다시 벌어진 모양이던데.”
“거참, 내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던가?”
“원래 말을 좀 안 듣는 분이라서….”
“알았네, 보는 김에 다른 환자들도 간단하게 진료하고 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닥터 롱베르.”
“원래 내가 할 일이 아닌가.”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는 롱베르 씨에게 인사를 건넨 후 선장실로 돌아와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정말 너무 피곤한 하루였던 것 같다.
***
“이것들이 진짜….”
나는 이마에 핏대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선원에게 물었다.
“일등항해사는?”
“아마 자기 방에 있을….”
“그래, 너는 왜 여기서 얼쩡거리는 거야?”
“그게, 그러니까….”
혈압이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혈압약이 필요해!
“오늘 하루는 귀빈실 근처 접근 금지다. 당장 나가!”
“네넷!”
후다닥 사라지는 선원‘들’의 뒷모습을 확인한 나는 일등항해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벌써부터 이 난리인데 닥터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원.
“일등항해사, 안에 있나?”
내가 노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문이 열리며 아인델프가 나왔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의문을 표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선장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휴우…. 일등항해사, 오늘 하루 동안 선장실과 귀빈실 근처에 얼씬거리는 놈이 없도록 단속 좀 해봐. 난장판이야.”
“네? 아, 설마 이놈들이?!”
“아니, 아직 화낼만한 그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니고…. 하여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네, 걱정 마십시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어찌하실…?”
“이제 그걸 결정해야지. 닥터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가 한숨을 내쉬자 아인델프가 쓴웃음을 지었다.
“선원들에게는 사실 선망의 대상 아닙니까? 창녀가 아닌 젊은 여자니까요. 저는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물론 사고가 나는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만….”
“…….”
그래, 아인델프의 말대로다.
전에도 말했지만, 선원이라는 직업은 결혼 시장에서 최악의 직업 중 하나로 꼽힌다.
선원으로 오래 사는 것도 힘들지만, 오래 살아봐야 창녀가 아닌 여자의 손목 한 번 잡아보기는커녕, 제대로 말도 섞어보기 힘들다는 뜻이다.
솔직히 우리 아버지가 대단한 거지. 선원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무려 연애를 하셨으니.
물론 결혼과 동시에 동네 고기잡이배의 선원이 되기는 하셨지만 말이다.
보통 하루, 길어봐야 이틀 정도 나가는 근해 고기잡이배의 선원은 그나마 마을에서 구성원 취급 정도는 받기 때문에 상선의 선원보다는 낫다.
아인델프에게 당부의 말을 남긴 나는 롱베르 씨와 함께 귀빈실로 향했다.
“데보라 양, 일어나셨습니까?”
“데보라, 들어가도 되겠니?”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우리의 말이 들리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활기찬 데보라의 대답이 들려왔고,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데보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에 비하면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차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옷도 못 갈아입고 제대로 씻지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저런 모습이 나오는 거지?
여자란 참 신기한 동물인 것 같다.
“특별히 준비할 일이 없으시면 나가서 식사나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안 선장님.”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제대로 된 식당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간단하게 롱베르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닥터, 환자들은 어때요? 별다른 보고는 없던데요.”
“일단 갑판장은 확실히 출혈이 있었던 것 같더군. 하지만 봉합이 터진 것은 아니라 큰 문제는 아니었네. 다른 친구들도 큰 문제는 없어. 아마 배에서 내리더라도 충분한 휴식만 취한다면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을 걸세. 그런데 그 갑판장도 이번에 내리는 건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갑판장님은 아직이요. 물론 당분간 일은 못 하시겠지만, 갑판장을 대리할 네이선이 일에 능숙하지 못해서요. 개인적인 인연도 있는 편이구요.”
“그런가….”
왠지 석연치 않은 기분에 내가 발걸음을 멈추고 롱베르 씨의 팔을 잡았다.
만약 닥터가 배에 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면 강제로라도 여기에서 요양시킬 생각이었다.
요양이 끝난 다음에 여기로 데리러 오든지, 다른 배를 타고 다음 목적지로 오라고 하면 되는 일이니까.
물론 제대로 된 통신수단이 없어서 조금 꼬일 수야 있지만, 그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다.
“닥터, 솔직하게 말해줘요. 갑판장님이 안 좋아요?”
“어? 음…. 사실 옆구리의 상처는 잘 관리만 하면 큰 문제는 아닐세. 하지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약간 애매한 표정의 롱베르 씨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혹시 그 사람, 평소에는 아픈 곳이 없었나?”
“뭐, 노인네라서…?”
갑작스러운 질문에 적당히 하면서 문득 머리에 스치는 장면들이 있었다.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감추려는 모습, 늘 찌푸리고 있는 인상, 또 뭐가 있지?
“손 떨림, 두통, 시력 약화, 맞나?”
“어, 음, 왼손은 좀 그렇죠?”
나는 왠지 불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자세한 검사가 필요할 것 같군.”
“무슨 검사요?”
“…손 떨림 같은 것은 빨리 치료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아프지 않다고 해서 생활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그렇기는 하죠.”
“그래서 하는 말일세. 손 떨림은 이유가 여러 가지라서 검사가 필요하거든.”
“그래요?”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일단 그렇게 넘어가기로 했다.
검사라는 것이 원래 장비도 필요하고, 그래서 원한다고 당장 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잠시 후 식당에 도착한 우리는 간단한 식사를 시켜놓고 다시 논쟁을 시작했다.
아니지, 이건 논쟁도 뭣도 아니다.
그냥 두 사람이 배를 타게 해달라고 우기는 것을 내가 거절하고 있을 뿐.
“지금 자네의 말은 데보라가 혼자서 다시 집에 가야 한다는 말과 똑같네.”
아, 도대체 몇 번째 듣는 말이냐, 이게.
그런데 사실 대답하기 굉장히 난감한 질문이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여기서부터 데보라를 혼자 집에 돌아가라고 하면 사고 없이 도착할 확률은 한 자릿수가 아닐까 싶거든.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진지한 말투로 데보라 에게 질문을 던졌다.
“데보라 양, 제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닥터를 만난 곳은 제국 대학이겠죠?”
“으음, 그렇죠?”
“제국 대학이라면 데보라 양의 노력이 가장 중요했겠지만, 가문의 지원 역시 있었을 겁니다. 어떤 가문 출신이십니까?”
“갑자기 그건 왜…?”
데보라가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고, 뒤이어 롱베르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그게 왜 궁금한 건가?”
뭐야, 이 사람들 뭔가 좀 이상한데?
“닥터, 항구관리관이랑 안면이 있다면서요? 제국에서 힘 좀 있는 가문이라면 사람을 보내서 알리고 데보라 양을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 소식이 전해지고, 데리고 갈 사람이 올 때까지는 항구관리관에게 부탁을 좀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솔직히 항구관리관은 너무 싫다.
언제 시간이 된다면 롱베르 씨에게 묻고 싶은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
그래도 항구관리관이라면 일단 데보라를 해쳐야 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보호하는 것이 좋다면(데보라의 가문이 좋다는 가정하에) 굳이 데보라에게 나쁜 짓을 할 사람은 아닐 거다.
하지만 내 말이 끝나자 롱베르 씨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건 그, 그리 좋은 생각이 아, 아닌 것 같네만.”
“닥터? 반응이 왜 그래요?”
“그, 그러니까 항구관리관, 항구관리관 말일세.”
“네?”
“자네와 뭔가 일이 있었다고, 아니! 그보다 그렇게 친근한 사이는 아닐세.”
뭐야, 도대체?
딱 봐도 뭔가 있는데?
나는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의심을 담아 롱베르 씨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데, 차분한 데보라의 음성이 들려왔다.
“선장님, 저희 가문… 아니, 가문이라고 할 것도 없는 저희 부모님은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국내도 아니도 타국까지 사람을 보내실 수 없어요.”
어? 그건 좀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아들도 아니고 딸을 제국 대학에 보낼 수 있는 가문이 그 정도 힘도 없다고?
“그런… 그 사이에 가문에 안 좋은 일이….”
“아니요, 전 제국 대학 학생이 아니거든요.”
갑자기?!
분명히 제자라며!
제국 대학에서 만났다고 했잖아?!
“닥터! 이게 지금 무슨 말입니까?! 거짓말하셨어요?”
이러면 좀 많이 곤란하다.
물론 내가 롱베르 씨를 굉장히 좋게 본 것은 맞지만,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배에 태우겠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네!”
“그럼 지금 이 상황을 해명해 보시죠!”
“대학에 학생과 교수만 있는 것은 아니죠, 선장님.”
“네?!”
어, 그렇기는 한데… 보통 교수가 가르치고 학생이 배우잖아?
그때 롱베르 씨의 힘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데보라는 대학의 정식 학생이 아니야. 대학에 납품하는 빵을 배달하던 아이일세.”
“네에?!”
“그래도 내 어떤 제자보다 생물학에 대한 관심과 성취가 뛰어난 아이일세. 그리고 의술과 약초학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고 말이야.”
“…….”
“솔직히 그 어떤 제자보다 데보라야말로 진짜 내 제자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정식 등록된 학생들보다 빵 배달하는 아가씨를 더 열심히 가르쳤다는 말인가?
애초에 빵 배달하는 아가씨를 왜 가르치는데?
하여튼 회심의 한 방이라고 생각한 내 반론이 소용없게 되었다는 뜻이군.
“그렇다면….”
“리안 선장. 내가 오죽하면 자네에게 이렇게까지 부탁하겠는가? 조금만 데보라와 내 사정을 고려해 줄 수 없겠나?”
롱베르 씨가 내 말을 자르고 처연한 표정으로 다시 부탁했지만, 이미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은데요, 다 데보라 양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배에 여자를 태우면 침몰한다는 미신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구요. 아무리 제가 선장이라도 모든 사건 사고를 막을 수는 없어요. 데보라 양이 혹시라도 네이선 수준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비록 옷을 꽁꽁 싸매고 있어도 데보라가 운동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는 것 정도는 보인다.
네이선은 무슨, 마음만 먹으면 오펜도 데보라를 덮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선장님, 여자가 배에 아주 못 타는 것은 아니지 않아요?”
물론 그렇지, 왕녀님도 타셨었는데 뭘.
그런데 그건 너무 특별한 경우잖아, 당신과 경우가 다르다고.
“데보라 양,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건 정말 특별한 경우입니다.”
“저도 특별해요.”
“아니, 그게 그렇게 막무가내로….”
“여객선 같은 배는 여자들도 탈 수 있다고 들었어요.”
아, 그쪽을 이야기하는 거였어?
얼마 되지는 않지만, 전용 여객선으로 운항하는 배들이 있기는 하다.
이런 배들은 여자 승객을 받는 것도 거리끼지 않고(그렇다고 여자 손님이 많은 것은 아니다) 어떤 선박들은 여자 손님을 위한 여자 승조원을 고용한다고도 들었다.
그런데 그건 선원이라기보다는 그냥 서비스직인 거잖아.
…….
아, 선의도 의료 서비스이긴 한데? 대상이 손님이 아니라 직원일 뿐이지.
“결국 닥터 혼자서는 절대 배에 못 탄다는 겁니까?”
“미안하네. 난 어떻게 될 줄 알면서 데보라를 혼자 두고 떠날 수 없어.”
아저씨, 말투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뭔가 너무 이상해, 진짜 이상하다고.
자꾸 발칙한 상상을 하게 만들지 말아줘요, 제발.
하지만 우리는 선의가 필요하다.
팔이 아플 때 머리를 째는 이상한 유사 의학 전문가들 말고, 진짜 의사가 필요해.
그리고 갑판장님에 대한 찜찜한 말까지 들어서인지, 롱베르 씨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어차피 귀빈실이 비었으니 귀빈실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낮에야 닥터와 함께 하실 테고, 네이선에게도 신경 쓰라고 할게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개인행동은 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방 안에서 문을 잠근 후라면 상관없지만 말이죠.”
“그렇다면…!”
“일단 다음 항해까지만 입니다.”
기뻐하던 두 사람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하지만 나도 내심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선상생활이라는 것이 절대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생활을 평범하게 살아온 젊은 여자가 버텨낼 수 있을까?
롱베르 씨를 따라 여기까지 와서 버틴 것을 보면 의지력이 대단한 것 같기는 한데, 과연 선상생활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일까?
특히 생리적인 문제나 위생 문제, 폐쇄된 좁은 공간 안에서 수십 명의 남자들 사이에 여자 혼자 끼어있다는 압박감은 견디기가 정말 힘들 거다.
“다음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사소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하거나 데보라 양이 원치 않으신다면….”
“안 되네! 절대 데보라를 혼자 보낼 수 없어!”
“교수님….”
“제가 언제 혼자 보낸다고 했습니까?”
“그럼?”
한숨을 내쉰 나는 결국 롱베르 씨가 원하는 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닥터가 원한다면 같이 내리세요. 고향까지 돌아가실 여비는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고맙… 또 뭐가 있는가?”
“만약에라도 닥터가 내리지 않으시겠다면 제가 최대한 안전하게 제국으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상단이나 용병단을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용병이라고?!”
롱베르 씨가 대번에 인상을 구겼지만, 나는 얼른 변명했다.
“귀족 영애나 상단의 여자들이 개인적으로 움직일 때 경호를 전문으로 하는 믿을만한 용병단도 있다고 합니다. 그쪽으로 한번 알아보도록 하죠.”
“그런가…?”
물론 나도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고, 과거의 기록이나 평판이 데보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강도랑 종이 한 장 차이인 일반 용병 놈들보다야 낫겠지.
“이유와 조건이 무엇이든 일단 저를 받아주시겠다는 뜻이죠?”
“네, 데보라 양. 하지만 아까 말씀드린 주의사항은 반드시 지켜주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있다면 바로 말씀해주셔야 최악의 사고를 막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리고 싶으실 때는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좋아요! 잘 부탁드려요, 리안 선장님. 그리고 귀빈실 말인데요….”
“어차피 귀빈실을 써야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탈법한 배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데보라 양이 조금 쓰신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그래도 고마워요.”
자리에 일어서려던 나는 미처 말하지 못한 한 마디를 추가했다.
“아 참, 선원들에게는 데보라 양을 귀족가의 영애로 소개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우리 배를 탄 ‘승객’이라고 말해 놓을 겁니다. 그러니 이왕이면 선내에서 일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피해주십시오. 아마 귀족과 손님이라는 것이 사고가 날 확률을 조금은 줄여 줄 겁니다.”
정말 별것 아닌 조치이지만, 당장 생각나는 것이 이 정도밖에 없다.
상대가 손님으로 탑승한 귀족 가문 아가씨라면 아무리 무식한 선원들이라도 최소한의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을까?
아무리 여자가 좋아도 자기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것보다 다음 항해는 술 배식을 줄여야 하나?
난 희희낙락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몰래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