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71화 (171/420)

171화. 진홍의 칼날

이게 얼마 만에 맞이하는 평화인가.

나는 닭고기로 만든 것 같은 스튜를 한 스푼 가득 떠서 입에 넣은 후,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다.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는 우르타와 네이선, 그리고 롱베르 씨와 데보라 양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데보라 양,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사실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어요.”

차분하지만 똑 부러지는 데보라의 대답에 순간적으로 모두의 행동이 움찔하며 멈추었다.

그럼 그렇지, 아직 출항은 안 했다지만 벌써 선상 생활이 닷새가 넘었다.

사람은 원래 땅을 밟고 살게 되어있는 만큼, 배 위의 생활이 편안하고 안락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아직 한 가지밖에 없다니 신기하군요. 어떤 부분인가요?”

“으흠, 데보라. 리안 선장이 얼마나 애쓰는지 너도 알고 있….”

“교수님, 죄송해요.”

롱베르 씨가 불편한 표정으로 데보라 양을 제지하고 나섰지만, 데보라 양은 스승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할 말을 쏟아내었다.

“리안 선장님이요.”

“…네?”

“응?

느닷없이 내 이름이 나오자, 나는 물론 롱베르 씨도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고, 눈치를 보며 깨작거리던 우르타와 네이선도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비난과 의심의 눈빛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아니,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요 며칠간 선장님을 지켜보았어요. 그리고 말로만 듣던 ‘선장’의 위치를 확실히 알게 되었죠. 그런데 제게는 여전히 굉장히 어렵게 대하시더군요. 오히려 교수님보다 더 말이죠.”

그거야 당연하지 이 아가씨야.

선원들 앞에서 당신이 귀족 영애인 것처럼 말해 놓았는데 내가 막 대하면 누가 그 말을 믿겠어?

“당연히….”

“네, 물론 선원들에게 제가 귀족인 것처럼 말씀하셨으니 어느 정도 조심하시는 것은 이해해요. 하지만 지금처럼 편한 자리에서까지 그러실 필요는 없잖아요?”

“데보라 양, 사석에서라도 편하게 대하다 보면 경계심이 흐트러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여기 포술장님과 돌격대장님과는 편하게 지내시잖아요? 사석에서만 말이죠.”

“그건 경우가 다릅니다, 두 사람과 제가 어떤 관계인지는 선원들도 대충 알고 있으니까요.”

막말로 사석에서 편하게 말하다가 그 사실이 선원들에게 새 나가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 거다.

이 아가씨도 똑똑한 척은 다 하지만 사회 경험 없는 책상물림 느낌이 물씬 난다고 해야 하나?

내 눈을 보며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데보라 양이 내 말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말을 마무리 지었다.

“뭐, 굳이 불편한 점이라면 그 정도예요. 과한 대접을 받는 느낌? 다르게 말하면 선장님의 인간관계 안에 저를 배제하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 그게 불편할 뿐이에요.”

배 안에서 선장과 승조원들의 관계는 무조건 ‘리더-부하’ 관계이다.

내가 존중을 해 주는 갑판장님과 롱베르 씨조차도 그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니 말이다.

실제로 갑판장님께는 이미 강제적인 명령을 내린 적이 몇 번이나 있었고, 롱베르 씨도 배에 타는 순간 첫 번째로 내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간관계에 여자가 들어온다는 것은, 음, 솔직하게 말해서 나도 영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요, 저도 어떻게 해달라는 것은 아니었어요. 불편한 점을 말해달라고 하셔서 말씀드린 것뿐이죠.”

갑자기 분위기가 영 이상해졌다.

나는 괜히 꺼내서 본전도 못 찾은 주제를 끝내기로 했다.

“아직까지 아무 일도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괜찮은 것이라고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이야 배가 정박한 상태고 술과 음식, 도박과 여자를 원하는 대로 즐길 수 있으니 괜찮을지 몰라도, 출항하고 나면 지금 같지는 않을 겁니다.”

실제로 우리 배의 선원들은 정말 ‘마음껏’ 원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평소에 놀던 판이 워낙 싸구려 판이었던지라 큰마음 먹고 돈을 쓴다고 해도 그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도박을 하다가 올인을 외치지 않는 이상 하루에 쓰는 돈이 최대로 잡아도 1만 로스 남짓이니, 며칠을 놀아도 돈이 남을 수밖에.

두 번째는 바로 ‘리버티 은행’ 효과였다.

사실 선원들은 목돈이 생겨도 며칠 즐기다 보면 본인이 쓰는 돈보다 여기저기로 새는 돈이 많기 마련이었다.

술에 취해 여기저기에 뜯기는 것도 있고, 술집에 선입금을 해놓고 제대로 계산을 못 해서 떼이는 것도 있고, 창녀와 뒹굴다가 홀랑 벗겨지기도 하고, 대충 이런 식이다.

하지만 ‘리버티 은행’에 돈을 두고 일부만 들고 항구를 나가니 아무리 술에 만취하더라도 털리는 돈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리버티 은행’을 믿지 못한 선원 중 세 명이 닷새가 지나기도 전에 빈털터리가 되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덕분에 ‘리버티 은행’의 이용률이 증가했다.

원할 때마다 나와 회계사가 군말 없이 돈을 추가로 내주자 약간의 신뢰가 생긴 것이다.

아, 소소한 이벤트로 선원 몇 명이 제법 머리를 쓴답시고 우르타와 네이선에게 진짜 ‘은행’에 대해 듣고 따라갔다가, 계좌 개설 비용에 기겁하고 도망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

식사를 끝내고 간단하게 술을 마시는 중에 옆 테이블에서 귀를 쫑긋거리게 만드는 말이 들려왔다.

“그래서 상대가 일리오나 상단주의 아들이라고?”

“그렇다니까. 그 친구, 약혼녀가 갑자기 죽어서 지금까지 미혼이잖아.”

“그랬어? 나는 결혼하고 죽은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하겠어? 상대가 그 ‘저주받은 처녀’인데 말이야.”

내가 슬쩍 옆 테이블을 보니, 상인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음식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 항구나 항구 근처에 점포를 가진 상인인 듯했다.

“거참,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일리오나 상단에 아들이 그 친구 한 명이잖아?”

“그러니까 말이 나오는 거지. 아무리 호퍼 가문의 위세가 대단하다지만, 사실상 후계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잖나?”

“혹시 그, 이번에 들어온 그 배 때문인가? 베나드 상단과 한판 붙었는데 기적적으로 일리오나 상단이 배를 인수했다던데.”

“그거야 우리는 모르는 일이지.”

내가 정신없이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있었는데 롱베르 씨가 내 팔을 툭 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정신 차리게, 그렇게 대놓고 남의 말을 듣는 것은 실례잖나.”

“…아, 닥터.”

“뭐가 궁금한지는 알겠네만, 지금은 자리가 좋지 않은 것 같군.”

“그렇네요.”

다행스럽게도 내가 억지로 상인들의 대화에 관심을 끊을 것도 없이, 그들의 대화 주제는 이미 옆집 미망인의 미모에 대한 것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런데 리안, 선원은 몇 명이나 모집할 거야?”

“최소한 14명은 복귀할 테니까 일단 15명 정도? 한 항구에서 너무 많이 모집하면 괜히 분란이 생길 수 있으니까 최소로 잡자고.”

“그래도 30명이 안 되면 조금 힘들 텐데.”

“어디까지나 최소잖아. 아마 중상자 두 명 빼고 19명 모두 복귀하지 않을까?”

네이선과 내가 나누는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우르타가 손을 번쩍 들더니 끼어들었다.

“응? 그런데 왜 14명이야? 최소는 0명이잖아? 아니다, 오펜이랑 카드먼이랑 슈렌이랑 어, 또… 하여간 돌아올 것 같은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왜 14명이지?”

“돈 안 받아 간 선원이 14명이야.”

“돈?”

“응, 아직 받을 돈이 리버티 호 금고에 남아있는데 복귀를 안 하겠어? 복귀를 안 하는 게 아니고 못 하는 쪽이면 몰라도.”

복귀하지 못하는 쪽은 당연히 사망한 경우다.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서 항구 밖으로 튀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는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선원들은 보통 도주도 배로 한다.

“오오….”

“역시 리안은 대단해!”

“그걸 노렸구나!”

우르타와 네이선이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감탄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니까 꼭 월급 제때 안 줘서 회사 그만두지도 못하게 하는 악덕 사장 같잖아?

두 사람의 창피한 감탄을 무시하며 나는 네이선에게 물었다.

“그래, 모집은 잘 돼가? 갑판장님이 없어서 힘들 텐데.”

참고로 에른스트 갑판장은 큰소리 떵떵 친 것과 다르게 오늘까지도 골골거리고 계신다.

이제 움직여도 된다는 판정을 받은 첫날은 당당하게 갑판으로 나와서 돌아다니시더니, 둘째 날부터 두문불출이시다.

제대로 걷기 힘든 것은 둘째치고, 통증 때문에 선원들에게 소리도 못 지르니 나와 봐야 이빨 빠진 호랑이 인증하는 꼴이었거든.

물론 그 호랑이의 이빨이 곧 다시 날 거라고 믿기 때문인지, 진심으로 상처 입은 늙은 호랑이를 무시하는 정신 나간 선원은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원래라면 힘들었겠지? 리안도 알잖아, 아직 어린 내가 갑판장이고, 선장도 나 못지않게 어리다고 하면 좋아하는 선원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선원 모집은 늘 갑판장님이 맡았었지.

그렇게 갑판장님이 나서서 선원을 모아도 나를 보고 도망가는 놈들도 잔뜩 있었고 말이야.

“응, 그래서 한 살 더 먹으니까 좀 나아진 것 같아?”

“어? 한 살? 하하하,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까 이유가 뭔데?”

“다른 것보다 우리 선원들이 흥청망청 돈을 쓰는 게 첫 번째 이유겠지? 이유야 어쨌건 뿌려지는 돈은 진짜고, 그 돈은 선장인 네가 준 거니까 말이야.”

“다른 이유도 있어?”

“이건 좀 창피한데….”

갑자기 네이선이 식당 천장을 노려보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 뭐야?

그때 맥주잔을 탁 내려놓으며 거하게 트림을 한 우르타가 대신 대답했다.

“리버티 호의 수호자, 죽음을 몰고 다니는 자, 진홍의 칼날, 네이선입니다!”

“닥쳐엇!”

얼굴이 새빨개진 네이선이 우르타를 노려보았고, 우르타는 재밌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었다.

그런데 진짜 너무 웃기잖아, 진홍의 칼날이래, 크크크큭.

“으흐흠, 그러니까 우리 돌격대장님의 유명세 때문이다?”

“유명세라기보다는, 그 선원들이 워낙 허풍을 떨어 대서 말이야.”

“하긴 네이선 너, 실력 엄청 늘기는 했더라. 이제 나는 상대도 안 되겠던데?”

“저기, 리안. 미안한데 리안은 이미 진즉부터….”

아? 설마 지금까지 나랑 대련할 때 봐주고 있었던 거야?

아니! 적당히 봐주고 있는 줄은 알았는데, 그렇게 심했다고?

“그런데 크흠, 왜 진홍이야? 네이선이 딱히 진홍, 뭐 그런 건 없잖아. 피 때문에 그렇다면 ‘검붉은’이나 ‘새빨간’ 이런 게 붙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네이선 머리카락 색 때문이래.”

우르타의 대답에 나는 네이선의 머리카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새끼 언제 염색이라도 했나?

아닌데? 그냥 갈색인데? 심지어 딱히 붉은색으로 보일 정도로 밝은 색도 아니다.

“이게 왜 진홍이야?”

“그건 나도 모르지, 으히히힛.”

***

켄자스 항구에서 열흘을 머문 우리는 드디어 출항을 위해 돛을 올렸다.

선원들은 활기에 가득 찼고, 출항 절차도 별문제 없이 끝났다.

바흐카덴 항구에 다시 기항하는 것은 영 꺼림칙한 관계로 론 항구까지 바로 달리기로 했기 때문에 식량과 식수를 조금 많이 실었지만, 켄자스 항구의 특산품인 향유, 대리석, 설탕, 소금은 어느 항구에 가더라도 제값을 받을 수 있는 효자 상품들이었다.

양이 조금 줄었다고 해도 손익분기점을 걱정할 품목들은 아니라는 말이지.

“선장님, 여기 당직표입니다.”

“어, 수고했어. 일등항해사. 선원들 분위기는 어때?”

“일단은 매우 좋습니다. 새로 뽑은 녀석들도 돌격대장이 잘 가려서 뽑았는지 나쁘지 않구요.”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문제라기에는 조금 그렇고….”

“뭔데?”

잠시 고민하던 아인델프가 내 재촉에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저도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이번에 돌격대장이 뽑은 신입 선원들은 어, 조금 많이 어립니다. 평균적으로요.”

“그런가?”

어쩐지 젊은 놈들이 눈에 많이 띄더라니.

“그래도 서류상으로는 다 경력자던데.”

“네, 일하는 것을 보면 아주 신입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걱정하는 게 뭔데?”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한 아인델프지만, 여전히 우유부단한 성격이 가끔 보일 때가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어려워하고 말이지.

이번에는 진짜 한참을 고민하던 아인델프는 결국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무모한 패기로 일을 내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특히 데보라 양이 계시기도 하고 말이죠.”

하긴, 젊은 놈들이고 네이선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는데다가, 우리 배에 적응하거나 나에 대한 존경심을 가진 녀석들도 아니다.

아인델프의 우려는 충분히 합당했다.

“흐음, 고민할 필요가 있겠어. 요즘 의무실에 데보라 양이 자주 나가시나?”

“선의님이 선원들 전체에 대한 건강검진을 하겠다고 하셔서 데보라 양도 일을 돕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웬만하면 닥터 일을 돕는 것을 피하라니까 그 아가씨 참 말 안 듣는구만.

스승님이 일하고 계시는데 방안에서 빈둥빈둥 노는 것도 할 짓이 못 되는 것은 알지만,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자가 살짝 웃어만 줘도 착각에 빠지는 것이 남자라는 동물이다 보니, 가능하면 선원들과의 접촉을 피하게 하고 싶었건만.

“닥터 좀 불러줘. 이야기를 해봐야겠네.”

“네, 선장님.”

잠시 후, 롱베르 씨가 방으로 찾아왔다.

“선장, 찾았다고 들었네만?”

“오셨어요, 닥터? 이쪽으로 앉으세요. 지금 바쁘신 건 아니죠?”

“오늘 일은 대충 끝났네. 무슨 일인가?”

롱베르 씨와 테이블에 마주 앉은 나는 아인델프와 나눈 대화를 반복했다.

“…그래서 뭔가 대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흐음, 자네의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겠네. 앞으로는 데보라에게 가능하면 선원들 눈에 띄지 말라고 하도록 하지.”

“휴우, 그러니까 애초에….”

“크흠!”

내가 슬쩍 롱베르 씨를 흘겨보자 그는 괜히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작은 목소리로 변명 아닌 변명을 던졌다.

“젊음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닐세. 젊음의 치기와 패기도 그렇지. 그리고 그 아이도 이제 겨우 23살의 젊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주게.”

“닥터, 저도 이제 겨우 25살이거든요?”

“아, 그, 그랬나? 그런데 하는 짓은 영….”

“닥터!”

“아이고, 알았네, 알았어. 그보다 자네가 아까 말한 안전장치는 뭔가?”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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