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덫
“왜?”
내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자,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탕탕 치더니 대답했다.
“딱 봐도 저 자식이 훔쳐서 자기 주머니에 넣은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돈이 많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네?”
“가빈이라는 저 친구가 돈을 쓰는 것을 본 사람이 없다며? 그럼 돈을 모았을 수도 있지.”
“세상에, 그런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말이 안 된다구요. 선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아냐, 있어. 네가 고작 몇십 년 동안 살면서 한 번도 못 봤다고 세상에 없는 건 아니지. 실제로 지금 보고 있잖아 그런 사람.”
내가 계속 평온하게 대응하자, 그는 더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 자식은 분명히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 놈이 세상에 있을 리가…!”
가빈을 노려보며 계속 소리치는 그의 말을 끊은 나는 내뱉듯이 그의 말을 부정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가빈을 말하는 게 아닌데? 나 말이야 나. 나도 돈 모았어.”
그는 내 말에 기가 팍 죽어서 기억 들어가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변명했다.
“선장님은 당연히 선장님이니까….”
“아는 사람을 알겠지만, 나 선장 된 지 고작 몇 달이야. 그전에는 너희처럼 선원이었어. 그리고 난 선원으로 살면서 20만 로스를 모았지.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잖아?”
“그, 그런….”
사실이기는 하지만 나라고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으니, 저놈은 속으로 내 욕을 퍼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가빈의 편을 들어준다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선장님도 거짓말쟁이~’라고 했다가는 뭐….
다른 선원들도 약간의 불신이 담긴 눈빛을 보냈지만, 누구도 그를 위해 대신 나서지는 않았다.
“다들 저기 가빈을 의심하는 모양인데, 그러지는 말자고. 막말로 가빈이 돈을 훔치는 것을 본 것도 아니고, 가빈이 받은 돈을 쓰는 것을 본 사람도 없잖아.”
내 말이 틀린 말은 아닌지라 선원 중에 절반 정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들 이성이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아마 자기 돈이 아니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
단적인 예로 돈을 잃어버린 핀은 지금도 안절부절못하며 가빈을 힐끔힐끔 노려보고 있었다.
가빈을 도둑으로 몰아가고 싶은데 내가 그걸 막고 있으니 답답한 모양이다.
핀의 입장에서야 누가 도둑놈이냐보다는 자기 돈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가빈은 확실하게 자기 돈을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일등항해사, 선원들 모여 있는 쪽부터 확인해봐. 난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
“아, 네.”
나는 일등항해사에게 랜턴을 넘겨주고 우르타에게 눈짓을 한 뒤 선실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갑판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배를 제법 오래 탔음에도 이렇게 완벽한 정적은 처음인 것 같다.
물론 파도 소리 정도는 들리지만, 인공적인 소리를 내는 존재가 나와 우르타밖에 없는 기묘한 느낌.
“뭐야? 누가 이상했어?”
“응, 그 사람. 왼쪽 볼에 칼자국 난 사람.”
“에?”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가빈을 도둑으로 몰던 선원은 얼굴이 좀 삭막하기는 했어도 흉터는 없었다.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야?
내가 혼란에 빠지거나 말거나 우르타는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딱 봐도 그놈이 확실해! 눈알을 살살 굴리는 것도 그렇고, 초조하게 흔들리는 손, 입술이 말라서 자꾸 입술을 핥는 것도 그렇고. 리안도 의심스럽지?”
“어, 으음….”
거참, 신기한 일이란 말이지.
우르타는 평소에 맹하기 그지없는데 이상하게 관찰력이 좋다.
그리고 감도 좋지.
하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이건 심증이기 때문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우르타가 말한 남자를 추궁해봐야, 가빈을 추궁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이 없다.
“무슨 말인지는 알았어. 그런데 중요한 건 돈주머니야. 그게 없으면 도둑에게 도둑이라고 말할 수 없어.”
“그런 거야?”
“응, 증거가 없으면 선원들이 인정할 리가 없잖아.”
“그렇기는 하지.”
“일단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마. 알았지?”
우르타와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선실로 들어가자, 아인델프가 내게 다가와서 보고했다.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생했어. 그럼 일등항해사는 여기서 선원들과 있어. 나는 다른 곳을 확인할 테니. 포술장, 같이 가지.”
“네, 선장님.”
선원들이 모인 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선실을 우르타와 함께 구석구석 찾았지만, 핀의 돈주머니는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이렇게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지도 않았지만 아쉬움의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선원들에게 돌아간 나는 랜턴으로 선원들을 쭉 둘러보는 척하며 우르타가 말한 남자를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다들 험악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왼쪽 볼에 칼자국이 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가빈을 지목하던 남자의 뒤쪽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가깝게 붙어 있었다.
“흠, 일단 선실 안에는 없는 것 같네. 각자 자기 소지품 관리 잘하도록 하고, 가빈, 자네는 임시로라도 자네 돈을 금고에 넣어 두는 것이 어때? 상황이 끝나는 대로 주머니째로 돌려줄 테니.”
“감사합니다, 선장님.”
“그래, 해산하면 따라오도록 하고, 지금부터는 단독행동 금지야. 혼자서 선내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발각되면 범인으로 간주할 테니 각별히 조심하도록 해. 선내 수색은 아침에 진행하도록 하지. 고참 선원들은 쓸데없는 행동을 하는 놈이 없는지 주의를 기울여 줘. 이만 해산.”
찝찝한 표정으로 선원들이 흩어지는 가운데, 나는 오펜을 발견하고는 문득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참, 오펜도 잠시 따라와.”
***
간부들과 선장실로 자리를 옮긴 나는 가빈의 돈을 받아서 금액을 확인하고 금고에 넣어 주었다.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 가빈이 감수해야 할 고생이 눈에 보이는 듯했지만, 이 부분은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분간 힘들겠지만 참아 봐. 범인 곧 잡아줄 테니.”
“감사합니다, 선장님. 그런데….”
“어? 할 말이라도 있어?”
“왜 그렇게 절 믿어주시는 겁니까? 감사하기는 한데 이해가….”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눈을 가만히 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의심할 부분이 없으니까. 왜 돈을 모으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네.”
“선장님….”
선장실을 나가는 가빈을 보다가 손짓으로 우르타를 불렀다.
“포술장, 저 친구는 어떤 것 같아?”
“약간 불안해 보이기는 하는데, 범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 나도 그래. 그럼 우리는 범인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생각이 있어서 오펜을 데리고 오신 것 아닙니까?”
쓸데없이 예리한 자식.
복잡한 계획은 아니지만, 상대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일반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먹힐만한 방법이다.
자리에 앉은 나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간부들을 한 번 둘러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사고를 몰고 다니는 선장을 만나서 고생이 많다.
“어차피 이 밤중에 뭘 할 수는 없잖아. 다들 들어가서 눈이라도 좀 붙이지. 돌격대장은 가는 길에 갑판장님 안 주무시면 상황 좀 전달해 드리고.”
내 말에 아인델프가 주저하며 대답했다.
“선원들의 사기가 엉망이 될 겁니다. 빨리 해결하지 못한다면….”
“나도 잘 알고 있어. 일단 다들 평소처럼 지내고 이상 행동을 하는 선원이 없는지 잘 지켜봐 줘. 다들 이만 나가봐.”
“알겠습니다.”
별수 없다는 듯 간부들이 자리를 떠나자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남아있는 오펜에게 자리를 권했다.
“오펜, 자꾸 힘든 일 시켜서 미안한데, 이번에도 일 하나만 해줘.”
“네, 말씀하세요. 선장님!”
“혹시 이번에 새로 들어온 선원 중에 왼쪽 볼에 칼자국 난 사람 아니?”
“얼굴에 칼자국이면… 네, 알아요. 딜런이라고 해요.”
“그래, 그 사람 어떠니?”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평소에 행동이라던가, 그런 것 말이야.”
“글쎄요? 일은 평범해요. 자기 몫 정도는 하죠.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 그러니까요. 성격도 말씀드릴까요?”
하, 요 녀석, 보면 볼수록 괜찮다.
솔직히 이 녀석 구하느라고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절로 이불킥이 나오기는 하는데, 두 사람, 아니, 세 사람, 네 사람 몫을 하지 않는가?
“그래, 성격은 어때?”
“노는 걸 좋아해요. 기존 선원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구요. 그런데 그, 도박을 조금 좋아해요.”
“도박? 얼마나?”
“음, 쉬는 시간에는 거의 도박을 해요. 물론 걸린 돈은 얼마 안 되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죠?”
“물론이지.”
동전 가지고 카드 게임 같은 도박을 하는 것 정도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놀기 좋아하고 도박 좋아하는 사람이 큰돈 앞에서 유혹을 떨치기는 쉽지 않지.
“내일 내가 돈을 찾았다고 발표할 거야.”
“네? 돈 찾으셨어요?!”
“그렇게 발표할 거라고.”
“그걸 왜….”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너는 발표 후에 그 딜런이라는 놈을 주의 깊게 살펴. 특히 밤에 혼자 화장실을 간다거나 할 때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이번 일의 성패는 너에게 달렸어, 알지?”
***
정신없는 밤이 가고, 아침이 밝았다.
밤새 내려놓았던 닻을 끌어 올리고 다시 항해를 시작했지만, 선원들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서로 힐끔거리는 시선에서 희미한 의심과 적대감이 느껴졌고, 기존 선원과 새 선원들 사이에는 더욱 심했다.
물론 가빈은 말할 것도 없지.
웬만하면 점심때쯤 말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누가 가서 핀 좀 불러와.”
“핀이요?”
“어, 어제 돈 잃어버린 선원 있잖아.”
“네, 선장님.”
잠시 후 핀이 선교에 도착하자, 나는 핀을 데리고 금고로 향했다.
이미 말을 해 둔 뒤라 게론드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자, 핀. 네가 잃어버린 주머니가 어떤 거야?”
내가 손을 펼친 곳에는 각종 돈주머니가 쌓여있었다.
여기저기 뇌물 찔러주거나 할 때 소모되는 돈주머니가 많아서 많이 구비해 두는 편이다.
내 말에 영문을 모르고 주머니 더미를 뒤적거리던 핀은 끝까지 뒤진 뒤에 내게 말했다.
“제, 제 주머니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제일 비슷한 것을 골라.”
“비슷한 것이요? 그건 왜…?”
“당연히 네 돈을 찾아주려고 그러는 거지. 빨리 찾아봐.”
다시 주머니 더미를 뒤적거리던 핀이 결국 한 개를 골랐다.
“색이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만, 이게 그나마 제일 비슷합니다.”
“좋아. 이제 돈을 넣자.”
“네?”
“네 주머니에 있었던 돈, 그대로 넣자고.”
“선장님, 이게 무슨….”
쯧, 연기를 하려면 어차피 이 녀석도 알아야 하려나?
“핀, 나는 누군가가 내 방문 앞에 돈 주머니를 놔두고 갔으며, 그 돈주머니가 바로 네 돈주머니라고 말할 거야. 그리고 네게 돌려주겠지.”
“그,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지. 그런 일이 있었으면 그냥 네게 네 주머니를 줬겠지.”
“네?”
“잘 들어봐. 범인은 모종의 장소에 훔친 주머니를 숨겼어. 선원들은 다 몸수색을 했고 선실도 수색했으니 아마 선실 밖에 숨겼겠지?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 돈주머니를 내게 돌려줬다고 하면 말이야. 범인은 무슨 생각을 할까?”
“누가 돈주머니를 찾았다고 생각할까요?”
“맞아. 그럼 어떻게 할 것 같아?”
“에, 그건….”
“확인하러 가겠지. 자기가 돈주머니를 숨겨놓은 장소로 말이야. 주머니가 있다면 다행, 없으면 없는 대로 자신의 죄를 입증할 방법이 없으니 무조건 확인할 거야.”
“아!”
그제야 내 계획을 이해한 핀이 감탄사를 터뜨렸고, 나는 핀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대충 액수 비슷하게 해서 가짜 주머니나 만들어. 자네가 온 이유는 주머니가 맞는지, 금액이 맞는지 확인하러 온 거야. 알았지?”
“네, 선장님!”
***
핀이 나가고 잠시 후, 갑판으로 나간 나는 선원들을 소집했다.
“다들 모였지? 어제 안 좋은 일로 고생한 건 알아. 그런데 신이 완전히 우리를 버리지 않았나 봐. 내 방문 앞에 이런 게 놓여 있더군?”
나는 선원들이 모두 볼 수 있게 핀의 가짜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웅성거리는 선원들을 진정시킨 후 말을 이었다.
“핀을 불러서 확인해 본 결과, 본인의 주머니가 맞는 것 같다. 주머니를 갖다 놓은 사람이 제3의 인물인지, 범인인지는 몰라.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제 범인을 잡을 방법은 없는 것 같군. 그리고 가빈이 가지고 있는 돈은 어제 금고에 들어갔으니 가빈을 의심하는 것은 그만했으면 좋겠어.”
내 말이 끝나자 왓킨이 손을 들더니 물었다.
“선장님, 그러면 단독행동 금지는 철회하시는 겁니까?”
“아, 물론이지. 이미 돈이 돌아왔으니 범인을 잡을 방법이 없잖아. 그리고 난 돈을 돌려놓은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범인이 아니라면 굳이 몰래 둘 필요가 없잖아? 그러니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자기 물건 관리에 신경 좀 쓰자고.”
큰돈은 ‘리버티 은행’을 이용하라는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괜히 내가 이런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면 강요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안도하는 선원들 사이에서 굳은 눈빛을 보내는 오펜에게 슬쩍 웃어 준 나는 선원들을 해산시켰다.
마음이 급하겠지만 아마 당장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밤에 움직이겠지.
오펜으로는 좀 부족하니까 우르타랑 네이선을 붙여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선장실로 돌아가는데 급한 발걸음이 따라붙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아인델프가 내 뒤에 서더니 물었다.
“선장님, 그런데 그 밀항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 밀항자.”
제기랄, 그러고 보니 일이 하나가 아니었지.
그래도 밀항자는 뭐, 나쁘지 않다.
배에 돈을 내고 공식적(?)으로 밀항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밀항은 아무도 모르게 하는 거다.
배가 좁기는 엄청나게 좁은데, 의외로 숨을 곳이 많다.
특히나 우리 배처럼 새로 들어온 선원이 많다면, 사실 낯선 사람이 한 명쯤 더 있다고 해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반항도 안 했다면 적당히 대가를 받고 다음 항구에서 내려주거나, 바다에 던지면 그만이다.
설마 왕녀님처럼 거물은 아니겠지 뭐.
“지금 어떻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먹을 것을 조금 주었다고 합니다. 선원들 말로는 얌전히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응? 일등항해사도 못 봤어?”
“아, 그게 절도사건 때문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정신없고, 점심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해보지.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