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처벌의 아이러니
점심시간이 되자 간부들이 모두 선장실로 모였다.
조금 일찍 도착한 네이선과 우르타에게 선원들 - 특히 딜런 - 의 이상행동이 없다는 보고를 받았고,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회계사 게론드가 핀과 가빈이 ‘리버티 은행’에 돈을 예치하기를 원한다는 보고를 했다.
리버티 은행의 딱 한 가지 문제라면, 입출금을 위해서 반드시 그 자리에 나, 게론드, 예금자, 세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원들에게 돈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는 신뢰와 확신을 주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서명은 위조하기 힘들고, 선원들은 내 서명이 들어갔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핀은 자기 돈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치고, 가빈도?”
“네, 그리고 핀도 지금 있는 돈이 아니고 진짜 돈을 찾으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음, 일이 한 번 터지기는 했지만 어찌 됐건 돈 있는 선원들 전부가 리버티 은행을 이용하게 되었군.”
“하하, 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될 줄 알았다니까요?”
“그만, 그만. 회계사가 말을 시작하면 우리 밥 못 먹어. 다들 식사부터 하지.”
제대로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저지당한 게론드는 조금 침울해졌지만, 다른 간부들은 가볍게 웃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음성에 모두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선장님, 오펜입니다.”
“문 열어줘, 삼등항해사.”
문에 가깝게 앉아있던 슬레어가 문을 열어주자, 안으로 들어온 오펜이 다른 간부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제야 보고했다.
“딜런이 주머니를 찾은 것 같습니다. 선장님.”
“뭐?! 내가 당장!”
“잠깐! 앉아, 돌격대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네이선을 다시 자리에 앉게 한 나는 오펜에게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그게 사실은… 죄송합니다, 선장님. 너무 티 나게 쫓아다닐 수가 없어서 일을 조금씩 하다 보니 잠깐 놓쳤습니다.”
어차피 오펜이 한순간의 틈도 없이 딜런을 감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르타와 네이선에게 따로 이야기를 했던 것도 있고.
하지만 오펜 녀석은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으려고 한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들키면 안 된다는 기본에 충실하기도 하고 말이다.
“괜찮아. 그런데 놓쳤다던 딜런이 주머니를 찾아온 것은 어떻게 알았어?”
“오늘 배식 담당이라서 배식을 마치고 식사 중인 딜런을 찾는데….”
아무리 내게 비밀 지령을 받았다고는 해도, 일단 오펜은 선원이다.
심지어 얼마 전에 정식 선원이 된, 거의 막내급의 선원이지.
그런 만큼 각종 귀찮은 당직이나 잡일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의 식사 배식 담당도 마찬가지였다.
배식 담당을 거절할 만한 명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배식을 했는데, 그사이에 감시 중이던 딜런이 사라진 것이다.
배식을 마친 오펜은 자기 몫의 식사를 가지고 선원들이 식사 중인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딜런을 찾지 못했다.
슬슬 당황스러움이 피오르는 찰나,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함미 쪽에서 나오는 딜런을 보았던 것이다.
물론 점심에 먹을 음식 따위는 전혀 들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오펜은 자연스럽게 딜런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딜런, 벌써 식사를 마치셨어요? 어디 다녀오시는 거예요?”
“어? 어? 아, 오펜이구나. 너는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오늘은 좀 조용히 먹고 싶은데 자리가 마땅치 않네요.”
“아, 그래? 저쪽으로 가봐. 지금 사람 없더라.”
“고마워요, 딜런.”
딜런은 대놓고 질문을 회피했지만 오펜은 굳이 그것을 파고들지 않았다.
괜한 의심을 불러올 만한 행동을 하기보다는 실수를 가장한 확인을 택한 것이다.
“어어어, 조, 조심!”
일부러 바닥의 구조물에 발이 걸린 것처럼 비틀거리던 오펜은 맥주잔을 교묘하게 기울여서 딜런의 상체에 튀게 했다.
조금 과해서 맥주의 절반 정도가 딜런의 상의를 적셨지만, 오히려 그 정도가 더 좋았겠지.
“으아악! 이, 이게 뭐야! 야! 너 조심하지 못해?! 다 젖었잖아?!”
딜런은 온갖 짜증을 내며 옷을 털었고, 오펜은 당황을 가장하여 음식을 바닥에 놓고 딜런의 옷을 터는 것에 동참했다.
물론 터는 것은 위장이고, 옷 안에 숨긴 것이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모두 겨울용의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어서 돈주머니 정도를 품에 넣었다고 겉으로 표시가 되지는 않았지만, 외투에 손이 닿자마자 오펜은 알 수 있었다.
‘이 새끼, 돈주머니 찾아왔구나.’
만약 딜런이 돈주머니를 품에 넣고 있지 않았다면 선미 전체를 수색해야 할 판이었지만,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린 것이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들은 나는 오펜에게 물었다.
“잘했어. 지금 딜런은 어디에 있지?”
“제가 없는 동안 카드먼과 슈렌에게 감시를 부탁했습니다.”
“좋아. 또 다른 곳에 숨기기 전에 지금 당장 움직이지. 돌격대장, 따라와.”
참고로 카드먼과 슈렌은 이번에 정식 선원이 된 녀석들로, 오펜과 수습 선원을 함께하던 녀석들이다.
“선장님, 그냥 다 같이 가죠. 저희끼리 밥을 먹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런가? 그럼 일등항해사가 갑판장님 좀 모셔.”
“선장님, 갑판장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함께 하겠다는 아인델프의 말이 틀리지 않아서 아직 거동이 편치 않은 갑판장님을 부탁하는데, 네이선이 먼저 갑판장님을 부축했다.
아인델프는 나를 보여 살짝 난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뭐. 편한 대로 해. 그것보다 어서 가지. 오펜, 앞장서.”
“네, 선장님.”
우리가 선장실에서 우르르 몰려나오자, 갑판에서 옹기종기 모여 밥을 먹던 선원들이 깜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저만치에서 눈치를 보던 젊은 아이가 달려왔다.
“오, 오펜….”
“아, 카드먼. 지금 어디에 있어?”
카드먼이라는 아이는 거의 열 명에 달하는 직장 상사(?)들의 집합에 기가 질린 듯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오펜의 바로 뒤에 선 나를 보고는 하얗게 질렸다.
“서, 선장님…!”
이런 대우는 또 신선하네그려.
아무리 선장이 배 안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다지만, 어디까지나 동료라는 범위 안쪽이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대하기 어려워하는 경우는 처음 본다.
“어이, 카드먼. 우리 시간이 없는 것 같은데?”
“네넷! 선장님!”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묘하게 재미가 있던지라 내가 장난스럽게 말을 걸자, 화들짝 놀라며 한쪽으로 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카드먼을 따라 급히 발을 놀리는데, 소란을 듣고 찾아왔는지 핀이 내 옆으로 붙으며 물었다.
“선장님, 무슨 일로…?”
“어, 핀. 자네도 따라와. 도둑놈 잡아야지.”
내가 목소리를 작게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은근슬쩍 모여들던 선원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뭐야? 도둑놈이라니?”
“돈 찾은 거 아니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니, 이게 무슨….”
유독 튀는 목소리가 있어 그쪽을 보니, 가빈을 도둑으로 몰던 친구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보였다.
이 새끼, 공범인가? 의심스럽네?
“거기, 너!”
“네?!”
“너도 같이 가지. 자네도 도둑놈 얼굴 정도는 봐야지?”
“아니, 저는….”
“따라와.”
“네….”
그렇게 난리를 쳤으니 딜런이라고 모를 리가 있나?
우리가 딜런을 발견했을 때는 딜런이 자신을 감시하던 슈렌의 멱살을 쥐고 있는 상태였다.
“어이, 도둑놈, 그 손 놓지 그래?”
“이이익! 선장님! 이건 모함입니다!”
“응,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리고 손모가지 날아가기 싫으면 일단 그 손부터 놔.”
“윽….”
나를 위시해 간부들이 무기를 꺼내 들자 딜런은 결국 슈렌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하게 움직여줘서 내가 참 고맙다. 자, 이제 증거품을 돌려주실까?”
“증거품이라니요! 제가 도대체 뭘 어쨌다는 겁니까?”
끝까지 우기는 딜런을 보던 슈렌이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더니 입가를 한번 훔치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보니 한 대 맞았는지 입가에 핏물이 살짝 비친다.
“제가 방금 확인했습니다. 품 안에 돈주머니가 있습니다. 소란을 듣고 바다에 던지려고 하던 것을 저지하던 참이었습니다.”
“어, 잘했네. 핀, 자네 여기 슈렌에게 술 한 잔 제대로 사야겠어.”
“네네! 물론이죠!”
슈렌의 눈에는 아직도 짙은 그림자가 남아있었다.
아마 친구의 죽음을 아직 떨치지 못한 것이겠지.
잔인한 말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죽음을 계속 마주하면서 점점 무뎌져 가는 것이니까.
딜런에게 시선을 옮기려던 나는 새파랗게 질린 한 남자를 슬쩍 보았다.
내가 따라오라고 한, 가빈을 도둑으로 몰던 선원이었다.
당황한 것 같기는 하지만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냥 이용당한 모양이다.
“딜런, 내가 자네의 품을 뒤질까, 아니면 그냥 주머니를 곱게 공개하겠나?”
“선장! 이건 모함이고 폭거요! 아직 젊어서 뭘 잘 모르는 모양인데….”
“개소리 집어치우고. 너 지금 1분마다 채찍질이 열대씩 늘고 있어.”
이를 악문 딜런이 눈알을 굴리는 것이 보였다.
탈출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이미 선원들은 물론이고 간부들까지 모여들어 완전히 포위한 상태라서 하늘을 날지 않는 이상 탈출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죽이지는 않을 거다. 얌전히 실토하면 말이지.”
“안… 안 죽입니까?”
“어. 안 죽일게.”
한참을 고민하던 딜런은 결국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놓고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자 반신반의하던 선원들마저 화들짝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발로 주머니를 차서 바닥에 돈이 흘러나오도록 했다.
돈이 절반쯤 흘러나오자 반짝이는 금화 세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맞네.”
“…….”
“핀, 주머니, 네 것 맞아?”
“네? 네! 선장님!”
나는 이제 새빨간 얼굴을 하고 있는 한 선원에게 다가갔다.
“자네는 이름이 뭐지?”
“트레비스입니다….”
딜런의 말에 넘어가서 가빈을 도둑으로 몰던 선원의 이름이었다.
“그래, 트레비스. 자네도 한 패인가?”
“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그래, 앞으로 지켜보지.”
“가, 감사합니다!”
다시 딜런에게 시선을 돌린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고 하네. 딜런 자네 혼자 한 것 맞아?”
“…네. 혼자서 한 것 맞습니다.”
“재주도 좋군. 어떻게?”
“사실 이렇게 급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자리를 옮겨 딜런에게 범행을 실토시켰더니 아주 기가 막혔다.
이 새끼, 처음부터 절도를 목적으로 배에 탄 거다.
원래 돈을 펑펑 쓰는 우리 배의 선원들을 타겟으로 접근을 했는데, 선원들 대부분이 큰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알아보니, 돈을 배에 두고 다닌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 배에서 선원 모집을 하는 걸 보고는 바로 지원해서 리버티 호에 탔다.
처음에는 항구에 기항하기 직전에 금고를 털거나 선원들을 털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금고는 감히 손도 못 댈 정도인데다가, 경비 당직도 기존 선원들에게만 돌아갔다.
그래서 선원들의 돈이라도 훔치려고 했더니, 심지어 그것도 대부분 금고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돈 있는 것을 티 내는 사람이 바로 핀이었던 거다.
도박판에서 거들먹거리며 자기는 돈이 10만이 남았느니 하는데 모르면 이상한 것이겠지.
하필이면 그 도박판에 켄자스 항구에서 돈을 홀랑 까먹은 녀석 두 명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핀은 두 사람을 놀리겠다고 한 말이었겠지만, 그 말 때문에 결국 범죄의 타겟이 되었다.
핀이 돈주머니를 숨긴 위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라면 그 돈을 꺼내는 것이었지.
불침번 두 명은 경험이 많은 딜런에게도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런데 어젯밤, 불침번 두 놈이 일을 벌인 것이다.
불침번, 아니, 강간미수범 둘이 선실을 나가는 순간에 운 좋게 깨어있던 딜런은 시기가 조금 이르지만 빠르게 핀의 돈을 훔쳤고, 잠시 후에 벌어진 소란을 틈타 선미 쪽에 돈주머니를 숨기는 것까지 성공했다.
“그런데 당황스러웠겠지. 네가 훔친 돈을 누군가가 찾아서 갔다 놔버렸다니 말이야.”
“네….”
“그래서 확인하러 간 거고 말이야.”
“…돌격대장님이 저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아서 참으려고 했습니다만….”
으이구, 내가 네이선에게 다시는 이런 일을 시키나 봐라.
네이선 역시 멋쩍은 듯 머리를 긁고 있었다.
“간부들이 전부 선장실에 틀어박혔으니까 확인했겠지. 아무도 없이, 혼자서.”
“네….”
물끄러미 딜런을 바라보던 나는 네이선에게 말했다.
“돌격대장, 포박해. 30분 후에 딜런과 강간미수범들의 처벌을 시작하겠다.”
“알겠습니다.”
***
잠시 후, 한결 개운해진 표정의 간부들이 선장실에 모였다.
대충 자리를 잡자, 아인델프가 대표로 물었다.
“도둑놈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할까….”
강간미수범들은 죽여야 한다.
그 죄가 사형을 받을 정도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최소한 일주일 이상은 데보라 양이 배에서 내릴 수가 없다.
그리고 이미 함정이 모두에게 알려진 이상, 강간미수범들의 미온적인 처벌은 다른 범죄를 부추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심지어 저놈들은 강간뿐만 아니라 살해할 생각이었고(강간만 하면 무조건 잡히므로) 내 명령을 어겼으니 죄질이 매우 매우 나쁘다.
…라고 해봐야 설득력이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선상의 처벌이 과도한 것은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지.
께름칙하게 느끼는 선원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대부분 그럭저럭 인정할 것이다.
그러면 남는 것이 딜런에 대한 처벌인데….
이게 좀 애매한 게,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구의 기준으로 말하면 우리는 모조리 살인범이다.
심지어 희대의 살인마라고 해야 할 정도로 사람을 죽인 괴물도 적지 않지.
그런데 도둑질 했다고 과한 처벌을 내리기도 그렇잖아.
강간범이랑은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지는 거다.
“하아, 일단 딜런은 다른 처벌과 상관없이 다음 항구까지 감금하고 항구에 도착하는 즉시 배에서 방출할 거야. 하지만 처벌을 어찌해야 할지….”
“선장님.”
“네, 갑판장님.”
“규모는 다르지만, 선내 절도 사건은 자주 있습니다.”
“그렇죠….”
“금액이 클 경우, 절도한 물건을 배상하고 채찍 20대를 때립니다.”
“흐음, 20대라…….”
“그렇게 하시죠. 어차피 추방까지 하는데 너무 과한 처벌도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간부들을 살펴보니 모두 수긍하는 분위기다.
하긴 사람을 잔뜩 뽑아서 안 그래도 분위기가 어색한데, 거기에 새로 뽑은 선원들을 죄다 반병신을 만들거나 죽여 버리면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어?
쯧, 그렇다고 사람을 안 뽑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뭐.
잠시 후에 벌어진 처벌은 소화에 그리 도움이 되는 광경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래도 인간적인 채찍을 사용한다.
매듭은 있지만, 거기에 날카로운 돌이나 조개껍데기 따위를 달아놓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찍질을 열 대쯤 당하면 피가 튀기 시작한다.
20대면 사실 등짝이 거의 걸레짝이 되는 거고, 30대를 맞으면 중상이다.
눈살을 찌푸린 채 처벌을 보고 있던 롱베르 씨가 내게 살짝 물었다.
“저대로 그냥 둘 텐가? 죽을 놈들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저기 딜런이라는 친구는….”
“…감금당해야 할 테니 간단하게 치료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신 다른 선원들 눈에 띄지 않게 부탁드립니다.”
“알겠네.”
감금을 당하면 아마 해치로만 연결된 하부 갑판 어딘가에 감금을 당할 텐데, 아무리 포장을 해도 그런 곳의 위생이 좋을 수는 없다.
그런 곳에서 피 냄새를 풍기며 누워 있으면 감염이 되거나 쥐들의 놀이터가 되기 십상이다.
솔직히 딜런이 일주일을 버틸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처벌의 시간이 끝나자 50대를 맞은 선원은 의식불명에 빠졌다.
사실 50대를 맞기 전에 기절했는데, 그냥 계속 때린 것이다.
그리고 30대를 맞은 두 녀석은 공포에 질려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딜런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고 있지만, 등짝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매달아.”
“선장님, 진짜 마스트에 매다실 생각이십니까? 하루도 못 버티고 죽을 겁니다.”
“그래도… 진행하자.”
“…네.”
네이선에게 칼을 맞고 채찍질에 만신창이가 된 녀석이 마스트에 걸렸고, 다른 두 사람은 그대로 바다에 던져졌다.
팔다리를 묶지 않았으니 30대를 맞은 녀석은 수영을 할 수는 있겠지만, 상처에 바닷물이 닿으면서 발생하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극도의 패닉 상태인 녀석이 살아남을 것 같지는 않았다.
솔직히 ‘인간 중에서 수영을 잘한다.’ 정도의 수준으로 살아남을 정도로 만만한 바다가 아니기도 하지만 말이지.
마지막으로 딜런이 손이 묶이고 발에는 쇠사슬을 단 채로 네이선이 인솔하는 선원들에게 끌려가자, 모여 있던 선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부들 역시 슬슬 흩어지는데, 갑판장님만이 조금 활기가 돌아왔는지 선원 몇 명을 붙잡고 피가 튄 바닥을 청소하라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하긴, 핏물을 제때 청소하지 못하면 나중에 악취가 상당하기는 하다.
“그런데 선장님, 일이 대충 끝났으니 그 밀항자에 대한 처우도 결정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참! 계속 깜빡하네. 지금 가보자.”
방금 처리된 굵직한 사건들에 비하면 워낙 파급력이 없는 사건이라 계속 미루다 보니 지금까지 밀항자의 얼굴도 못 봤다.
죽이건 살리건 이제 결정할 때가 된 것 같다.
아인델프의 안내에 따라 방향을 돌리면서 구석에 뻣뻣하게 굳어있는 여자가 얼핏 보였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데보라 양은 공식적으로 리버티 호의 손님이기 때문에 처벌되는 모습을 직접 보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오는 것을 막지는 않았는데, 가능하면 그녀도 보았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용감한 도전이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 그녀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결과도 온전히 본인이 받아들여야 할 몫이고 말이지.
보아하니 처벌 과정을 거의 다 본 것 같은데, 과연 그녀는 배에 계속 남아있으려고 할까?
“여기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데보라 양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밀항자가 갇혀있는 창고에 도착했다.
미리 준비한 열쇠로 잠금장치를 해제한 아인델프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이봐, 일어나. 선장님이… 어?”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가던 나는 아인델프의 기묘한 감탄사에 약간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손과 발이 구속된 상태로 바닥에 앉아있는 낯익은 남자를 발견했다.
“…이런 젠장.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오랜만입니다, 리안 선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