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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76화 (176/420)

176화. 밀항자의 정체

내 앞에서 민망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남자를 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건 너무 뜬금없잖아?

“저… 선장님? 괜찮다면 이 밧줄부터 좀 풀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꽤 아픈데요.”

“하아…. 일등항해사, 일단 밧줄부터 풀어드리지.”

“아! 네, 선장님!”

내 말을 들은 아인델프가 부랴부랴 남자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밧줄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밀항자라는 존재가 그다지 존중받아야 할 위치는 아닌지라 선원들이 조금 우악스럽게 포박해 놓은 모양인지, 드러나는 손목과 발목에 쓸린 자국이 역력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시죠. 치료도 좀 받으셔야겠고….”

“감사합니다.”

여전히 당혹감을 다 버리지 못한 아인델프가 어색하게 물었다.

“그, 어디로 모실까요?”

“귀빈… 아니, 선장실로 모시도록 하지.”

귀빈실은 데보라 양이 쓰고 있었지…. 깜빡했다.

그런데 아인델프가 이 사람 얼굴을 알고 있었나?

“그런데 일등항해사, 자네는 이 분을 어떻게 알아?”

“아, 그 이스트렐리아 호 인계할 때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군.”

포박이 풀리자 어색하게 몸을 풀고 있던 맥레인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혹시 물을 좀….”

“네, 일단 갑시다. 일등항해사는 조리실 가서… 휴, 식사 좀 준비해달라고 해줘.”

“알겠습니다.”

맥레인.

일리오나 상단의 후계자이며, 조만간 결혼한다는 소식이 파다했던 비련의 남자 주인공.

도대체 이 남자가 왜 우리 배에 타고 있는 거야?

***

식사를 마친 맥레인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던 롱베르 씨에게 치료를 받았다.

롱베르 씨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의문이 가득했지만, 치료를 하는 동안은 묵묵히 치료에만 전념하는 모습이 내가 진짜 선의를 잘 뽑았다 싶었다.

드디어 치료가 끝나고 치료 도구를 정리하던 롱베르 씨가 툭 던지듯이 말을 꺼냈다.

“맥레인 자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

“교수님, 그게….”

“자네가 여기 있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된 건가? 가비엘라, 그 불쌍한 아이는….”

“…교수님, 저는 가비엘라와 결혼할 수 없습니다!”

“왜! 그 아이의 외모 때문인가! 그건 내가 병일 뿐이라고…!”

“그건 아니… 에잇! 병이건 저주건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치료할 수 없는데요!”

“이, 이…! 아무리 그래도 자네가 이렇게 도망을 치면! 그 아이는, 그 아이가 받을 상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나도 입맛이 썼다.

롱베르 씨도 두 사람의 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이기는 했지만, 이런 경우까지는 상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만약 그 상대 여자라도 자존심이 아주 너덜너덜해질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 않아도 가진 병 때문에 자존감이 낮을 텐데, 어쩌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르겠네.

어느 타이밍에 두 사람을 중재해야 할지 눈치를 보고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맥레인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비엘라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는 아직 그녀를 잊지 못했습니다.”

“변명이네! 변명이라고! 지금 자네의 욕심 때문에 불쌍한 그 아이가 받을 상처는! 애초에 자네가 욕심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그, 두 분 좀 진정하시죠. 이제 와서 원망하고 욕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휴우….”

잠시 테이블을 잡고 숨을 고르던 롱베르 씨는 맥레인을 한 번 노려보더니 치료 도구를 들고 돌아섰다.

“나는 가보겠네. 아마 추가적인 치료 없이도 물이 닿지만 않게 조심하면 될 걸세.”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롱베르 씨가 자리를 뜨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도 골치가 아팠다.

그냥 어중이떠중이면 몰라도 맥레인 정도 되는 인간을 아무렇게나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꼴을 보아하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친 모양이라 그냥 바다에 던져도 상관이야 없겠지만…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좀 그렇다.

“맥레인 씨, 저는 맥레인 씨가 무슨 이유로 우리 배에 탔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관여할 일도 아니구요. 하지만 맥레인 씨에 대한 차후의 처리는 좀 생각을 해봐야겠군요.”

“저 혹시, 정말 면목 없습니다만, 부탁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는 당돌한 그의 요구에 대한 답을 잠시 미루고 가만히 그의 눈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이런 식의 잠적은 상단 내에서 그의 입지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스트렐리아 호의 입찰에 무리해서 참여한 이유도 자신의 상단 내 입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이스트렐리아 호에 대한 건도 문제가 많아 보인다.

일단 소문대로라면 이스트렐리아 호의 입찰에서 멕레인이 제시했던 세금이나 서류 문제를 담당하겠다는 것도 그의 결혼을 전제로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예비 신랑이 잠적해버리면 약속도 다 무효화되는 것 아냐?

그렇게 생각이 없어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지.

“의도하신 것은 아닐지라도 덕분에 제가 이익을 봤으니, 가능하면 부탁은 들어드리도록 하죠. 어디에 내려드립니까?”

“그게….”

밀항자가 할 부탁이 뭐 얼마나 있겠나?

보나 마나 어딘가에 내려달라는 정도겠지.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닌지라 나는 가볍게 맥레인에게 물었지만, 맥레인은 오히려 내 눈을 피하며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머뭇거림이 길어지면서 나 역시 뭔가 쌔한 느낌에 표정이 굳어지던 순간, 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한 1년 정도, 배에 태워주실 수 없습니까?”

“네? 지금 뭐라고…?”

기가 막히는군.

금수저 도련님이 1년이나 배를 타겠다고?

리버티 호가 무슨 호화 유람선 정도 되는 줄 아는 건가?

“맥레인 씨,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지금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아니, 지금 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으시는 모양인데 일단 좀 쉬시고….”

거기까지 말한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사실 빈방이 없다….

리버티 호의 개인실은 총 11개다.

가장 넓고 선교에서 가까운 두 방이 선장실과 귀빈실.

보통 개인실보다 조금 더 큰 부선장실과 두 개의 특실.

일반 개인실이 6개다.

부선장실은 에른스트 갑판장이, 특실은 일등항해사 아인델프와 닥터 롱베르가 쓰고 있고, 나머지 6개는 이등항해사 발드, 삼등항해사 슬레어, 돌격대장 네이선, 포술장 우르타, 회계사 게론드, 조리장 비에론이 쓰는 중이다.

원래 맥레인을 귀빈실로 보내면 맞기는 한데, 알다시피 귀빈실에는….

이유야 어쨌건 지금 당장은 밀항자에 불과한 맥레인을 위해서 기존의 간부들을 일반 선실로 내쫓을 수도 없고, 귀빈실을 데보라 양과 함께 쓰라고 할 수도 없으니 원.

“선장님, 저는 특별한 대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아버지 명령으로 소싯적에 2년가량 배를 탄 적이 있습니다. 뭐, 일반 선원처럼 일했다고는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뱃일을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니니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그냥 일반 선원으로 배에 타시겠다는 겁니까?”

“네.”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다.

“맥레인 씨, 일반 선원이 얼마나 고되게 일하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2년 동안 귀빈실에서 편하게 여행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굳이 선원 일을 하시겠다구요? 저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군요. 이유가 뭡니까?”

“사실 급하게 나오느라 도피 자금을 여유롭게 가지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한 1년 정도 누구도 모르게 지내고 싶은데, 생각해보니 배를 타는 것이 가장 좋겠다 싶었을 뿐입니다.”

단지 1년 동안 살아남는 것이라면 굳이 뱃일이 아니더라도 다른 일이…. 없구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특별한 기술이 없는 외지인이 타향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웠다.

맥레인 같은 경우라면 상업과 관련된 일을 하면 되겠지만, 어떤 미친놈이 과거 행적도 밝히지 않는 외지인에게 돈 관련 문제를 맡기겠어?

“좋습니다, 다 그렇다고 치고, 왜 1년입니까?”

“그게… 1년이면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나지 않겠습니까? 상단이 망하거나, 가비엘라에게…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죠.”

이 개새끼가?

나는 그가 내 시선을 회피하는 것을 보며 가비엘라가 자신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속에 품고 있던 약간의 동정심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하, 이런 씨…. 아니, 다른 일이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그, 그거야 뭐, 다른 사람과 결혼하거나 그런, 변화 말입니다. 저와 결혼할 수 없는.”

“그 이후에 당신이 다시 나타나면, 당신은 멀쩡할 것 같습니까? 항구관리관이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그녀를 배신하는 것보다는 낫죠.”

“그녀라면 전 약혼녀를 말하는 겁니까?”

“…네.”

“맥레인 씨.”

“네, 리안 선장님.”

“선장이라고 이런 중차대한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결정될 때까지 맥레인 씨를 밀항자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아… 네….”

“도주 의지는 없어 보이니 포박은 하지 않겠습니다. 나오시죠.”

맥레인을 데리고 나온 나는 지나가는 선원에게 맥레인을 인계했다.

“밀항자를 안 쓰는 창고에 가둬. 손발은 묶지 말고, 식수와 식량은 포로에 준해서 제공하도록 해.”

꽤나 멀끔해진 맥레인을 보며 약간 혼란스러워하던 선원은 내 굳은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선장님.”

“그리고 지금 선교에 누가 있지?”

“이등항해사입니다.”

“그럼 밀항자 감금하고, 이등항해사를 뺀 간부 전원을, 아니다. 그냥 닥터만 내 방으로 오라고 해.”

***

잠시 후, 내 방을 찾아온 롱베르 씨는 아직 화가 덜 식었는지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돌보던 환자였다고 하지만, 저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닥터, 좀 괜찮아요? 아직 얼굴이 좀 그런데?”

“으흠, 괜찮네. 그런데 그 망할 놈은 어디 갔나? 그놈 때문에 부른 줄 알았는데.”

“다시 가뒀어요. 밀항자잖아요.”

“어? 그, 그래?”

맥레인의 신분을 모를 때라면 몰라도, 알고 나서도 감금을 할 줄은 몰랐는지 롱베르 씨가 살짝 당황스러워했다.

“아, 솔직히 우리 남는 개인실도 없고 귀빈실도 데보라 양이 쓰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냥 그럴듯한 말로 다시 돌려보냈어요. 특별대우를 해 줄 만큼 맘에 드는 놈도 아니고.”

“크흠, 그랬군. 그런데 무슨 일로 날 불렀나?”

“다른 게 아니고, 그 가비엘라라는 아가씨 상태가 어때요? 심각해요?”

내 질문에 롱베르 씨는 불편한 표정으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환자의 프라이버시라던가 하는 부분이 걸리는 모양이다.

“도대체 그걸 왜 자꾸 묻는지 모르겠군. 자네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이가 아닌가?”

“그럼 이것만 알려주세요. 그 아가씨, 1년 안에 중대한 변화가 있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습니까?”

“1년? 아니, 그건 아닐세. 관리만 잘하면 크게 위험할 일은….”

“그럼 그 아가씨가 정신적으로, 그러니까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까? 삶을 비관할 정도로.”

“리안! 자네 지금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내 말에 롱베르 씨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나름대로 돌려서 말했지만 누가 들어도 ‘그 여자 지금쯤 자살했을 것 같나요?’라고 물어본 꼴이니까.

“닥터, 무례라는 것을 제가 모르겠어요? 저 멕레인이라는 놈, 그놈이 말하는 게 웃겨서 그래요.”

“그놈이 뭐라고 했건! 더 이상 가비엘라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겠네!”

그래, 롱베르 씨는 이런 사람이었지.

알고는 있었지만, 사람으로서, 의사로서는 분명히 좋은 특징이 왜 이렇게 내 일을 자꾸 방해하는 쪽으로 작동하는지 모르겠다.

“그럼 닥터는 어떻게 생각해요? 저 맥레인이라는 놈이 1년 동안 잠적하면. 어떻게 될까요?”

“왜, 그놈이 1년 동안 잠적하겠다던가?”

“뭐, 맥락은 비슷하죠?”

“흠, 사망이 확정되지 않는 이상 놈의 상단 내 입지는 그리 나빠지지 않을 걸세. 가문에 아들이라고는 그놈뿐이고, 딸들도 다 결혼해서 다른 가문 사람이거든. 현 상단주가 오늘내일하는 것도 아니니 말일세. 하지만 항구관리관이 가만히 있을지는 모르겠군. 그쪽 가문이 힘을 쓰면….”

“가문이 좀 괜찮은가 봐요?”

내 말에 롱베르 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켄자스 항구는 항구관리관의 호퍼 가문이 지배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네. 치안관과 재정관도 호퍼 가문의 사람들이 맡고 있으니 말이야. 켄자스 항구의 영주가 허블 백작이라는 것은 몰라도 호퍼 가문은 다 알 정도지.”

와우, 생각보다 대단한 집안이셨구만, 그 항구관리관.

“그런데 항구관리관에 치안관, 재정관이 한 가문이라면… 혹시 셋이 형제입니까?”

“흠, 그건 아니네. 재정관은 항구관리관의 친형이고, 치안관은 그 아비의 형제라더군.”

“항구관리관이 치안관과는 그리 친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으음…. 잘 모르겠군. 자기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정확하게는 몰라도 대충 느낌이 온다.

항구를 관리하는 요직 중 세 개를 한 가문의 사람들이 맡고 있는데, 두 형제의 숙부 혹은 백부가 다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럽다.

굳이 상황을 가정해보면, 원래 가문의 가주 혹은 실세가 두 형제의 아비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비가 죽은 거지.

아비가 가지고 있던 자리를 형제 중 한 명이 무사히 물려받은 것인지, 아비의 형제가 탈취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형제와 치안관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불 보듯이 뻔하다.

맥레인이 기대하는 것도 항구관리관의 집안 갈등 아닐까?

어쩌면 거기에 한 발 걸치고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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